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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01]/ 신돈이 무식한 천인이리고 한다면 ...... |
[문제02]/ 신돈 비하공작이 ..... 북한에서 연구한 바로는 신돈이 집권하기전 현화사의 주지였다고 하는데 현화사는 개경 근교에 있는 고려 유가종의 본산으로 세도가 인주 이씨의지원을 받는 대찰이었다. 이것은 신돈이 무식했다는 것을 뒤집는 자료이다. 또한 당시는 일천즉천의 신분법이 적용되는 시점이므로 신돈이 천인이라는 것도 납득키 어렵다. 조선 세종의 말처럼 공민왕 이후의 사료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라는 말을 세겨들을 만하다. 조선개국 초, 개혁의 정당성을 입증키 위한 역사조작이 국가적 사업으로 시작되었고 그 핵심이 우창비왕설이고 그 논리의 실타래는 신돈에서부터 풀어야 했다. 그래서 신돈 비하공작이 이루어 진것이다. 08.05.28 17:39 |
[문제03]/ 신돈에 대한 악평과 .... 고려사를 보면 공민왕대의 사료들이 턱없이 모자란다. 그것은 신돈 관련되는 사료들을 없애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신돈에 관한 사료는 호평이든 악평이든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악평인 것만이 있는데, 물론 좋은 것도 하나 있다 신돈이 전민변정을 실시하자 개경의 양천들이 기뻐날뛰어 흙먼지가 하늘을 덮었다.라는 귀절이 있는데 민중의 힘이 인정받은 지금에야 호평이지 사대부들이 행세하는 조선시대에는 호평이 아닐 수있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것이 다 악평이다. 신돈에 대한 악평과 그로 인한 신씨인 모니노 우왕의 등극으로 이미 역성이 이루어 졌다는 것을 강조 08.05.28 17:13 |
[문제04]/ 신돈의 신분을 천인으로 만든 자도 정도전이고 ..... 하기 위함이고 신돈의 정치가 폐정이었으므로 그 후의 정치 모두 폐정이고 이성계는 이렇게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는 차원에서 집권한다는 논리로 자신의 개국을 정당화 시켰다고 본다. 이것을 기획하고 감독한 사람은 정도전이다. 신돈의 신분을 천인으로 만든 자도 정도전이고 정도전 자신의 신분에서 영감을 얻어 신돈의 신분을 조작한 것이 아닐까? 어쨋던 신돈에 대한 폄하 내지 비하는 조선시대 내내 이루어진 것 같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에서 그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공작은 그 당시 문인들의 문집에 까지 손이 미친 것 같다. 그 당시 문인들이 그게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생들이었으니 자발적으로 문집에서 신돈관련 글들 08.05.28 17:22 |
[문제05]/ 신돈에 대한 악의적인 .... 은 모두 없앴을 것이다. 그것을 수록하고 있는 자는 사문난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신돈에 대한 악의적인 것만 두가지 이달충과 이존오의 문집에서 발견되고 어떤 문집에서도 신돈 관련 글은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신돈 집권기에 신돈 밑에서 대사성등 현역으로 일한 이색의 문집에서도 일절 찾아 볼 수 없다. 이색은 젊어서 불교에 심취하여 유불동도론을 주장한 사람인데 그의 문집을 보면 사소한 지방관의 전송에도 시를 남기는 사람이 대 선사이며 왕권을 대행하는 신돈에 대한 글 한마디 없다는 것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일설에는 권력과 끈을 닿은 승려와는 일체 교류를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08.05.30 18:56 |
[문제06]/ 사료와 자료들을 멸실 ..... 실제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원융부의 수장으로 승권을 장악한 태고 보우와의 교류 흔적도 찾을 수 없기는 하다.) 어쨋든 신돈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일천하여 정확한 그림은 그려낼 수가 없지만 만약 이후 신돈에 대한 묘사가 윤색된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사료와 자료들을 멸실시켜버린 조선개국자들이 져야 하지 않을까 08.09.20 21:09 |
신돈의 출생년을 1320년대 초(충숙10년 정도)로 보고 신예의 생년을 1300대초(충렬20년대 후반)로 보면 약간의 무리는 있다 하더라도 신돈을 신예의 子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돈을 신예의 父인 원경의 子로하여 신예,신부,신귀,신순등과 동열에 올리는 어떠한 사료적인 근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08.10.26 0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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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을 신예(父_신원경을 신예로 잘못표기된것 같음)의 장자로 본다면 많은 부분에서 이해가 될 수있다. 신예는 당시 원에서 위세를 부리던 자정원사 고용보의 처남으로 충목왕때는 신왕으로 불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권문이었다. 그의 동생 신귀 또한 당시의 권문인 강윤성의 딸과 결혼하여 세도가 당당했다. 강윤성은 강윤창의 동생이고 강윤창은 충혜왕의 총신으로 뒤에는 충혜왕비인 덕령공주의 남자로 그 권세가 대단했고 충목왕이 덕령공주의 소생으로 나이가 어린 관계로 덕령공주가 섭정을 했으니 신예의 위세를 가히 알 수 있다하겠다. 고려사에 나와 있는데로 신돈이 무식한 천인이리고 한다면 영민하고 예민한 공민왕이 사부로 모신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워 진다. 08.05.28 1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