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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밀실에 들어가서 피하라(2216.2023.11.5)
사26:20-21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나타나는 결과는 ‘심판’과‘구원’으로 나뉩니다. 악인의 삶은 준엄한 심판으로 나타나고, 의인의 삶은 복된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밀실에 잠깐 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20절). 마치 노아가 홍수 심판을, 롯이 불의 심판을, 이스라엘이 출애굽 직전에 장자의 죽음을 면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들에게 심판의 때에 피할 수 있는 길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땅의 악한 거민은 심판하시지만, 그분의 백성은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를 도우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좌절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26:20절‘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하나님은 여기서 그를 믿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을 사랑스런 의미를 담아 ‘내 백성아’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어서 일어나 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가라는 곳은 ‘밀실’입니다. 밀실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헤데르’는 매우 사적인 공간입니다. 이 밀실‘בחדריך 헤데르’는‘안방, 골방, 거실, 남향’ 헬:ταμίειά-골방, 비밀실)은 도피처를 말하는가?입니다.
1.다음은 성경에 기록된 방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방을‘헤데르’라고 합니다.
집안의 안방(창43:30), 밀실(사26:20), 궁의 침실(아1:4), 서늘한 다락방(삿3:20). (알리야) 이층에 있는 방(삼하18:33; 왕하4:10)을 이야기 합니다. 성전에 속한 방을‘리슈카’ 성소의 방. 제사장이 번제물을 먹는 방(삼상9:22). ‘첼라’ 솔로몬 성전의 골방(왕상 6:5). ‘야추아’솔로몬 성전의 골방 윗층(왕상6:5). ‘니슈카’성전에 딸린 숙소(느 2:10). ‘타’성전 안쪽 문이나 바깥쪽 문에 붙어 있는 문지기 방(겔40:7)을 말합니다.
궁전에 속한 방을‘울람 하암무딤’솔로몬 궁전 기둥 앞의 주랑(왕상 7:6). ‘울람학킷세’솔로몬의 보좌 옆에 있는 낭실. 혹은 재판하는 방(왕상 7:7).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졌습니다. 외국 궁전과 관련된 표현된‘베트 하멜렉’왕의 방을 말하는데, 특히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에 있는 아하수에로 왕의 접견실을 말한다(에 2:8-9). ‘베트 미쉬테야’대연회실(단 5:10). 헬라어‘휘페로온’큰 다락방(행 20:8). 이층 방(행 9:37).‘타메이온’ 골방(마 24:26).‘프라이토리온’총독 관저(막 15:16).‘아울레’지붕이 없고 사면이 막힌 공간. 혹은 뜰(마 26:58, 69)을 말합니다.
집안의 안방은 창43장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자기 형들이 그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자기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와서 자기 앞에 엎드리자 그 동안 동생을 보고 싶던 사랑의 감정이 북받쳐서 도저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없어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서 거기서 한참 울다가 다시 얼굴을 씻고 나와 형들과 말을 이어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서 요셉이 울곳을 찾아 급하게 달려 들어간 곳이 안방이라고 번역했는데, 그 단어가 오늘 본문의 밀실이라고 번역한 ‘헤데르’입니다.
아가서1:4절에 궁의 침실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가 3:4에 보면, 술람미 여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임을 다시 찾자 그를 꼭 붙잡고 자기 친정 집에 도착하여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잉태한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다시는 사랑하는 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깊고 안전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밀실은 매우 사적이고 매우 조용하고 깊은 곳입니다. 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고 조용하고 깊고 은밀한 장소입니다. 이 밀실로 들어갈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문을 닫으라’고 요청합니다. 문을 닫으라는 것은 세상적인 관심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제를 끊으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를 믿고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그 밀실에서 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밀실 밖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지금 무서운 분노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밀실 밖에는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를 부어서 두려움을 말미암아 도망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에서 간신히 올라오는 자는 다시금 올무에 걸리는 지독한 진노가 휩쓸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24:17절 이하에서 일찍이 우리가 보았듯이, 이 때 세상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는 마치 노아 시대의 대홍수의 격변처럼 땅이 깨지고 땅이 갈라지고 땅이 비틀거리며 흔들리며 땅이 주저앉아 버리는 무서운 파괴와 혼돈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에 온 세상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땅의 샘의 근원이 터져서 온통 세상이 갈라지고 흔들리고 죽음의 물결이 온 땅을 이리 저리 휘젓고 흐를 그 때에 그 환난의 성난 물결 위에 두둥실 떠올라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평안의 장소가 한군데 있었지 않습니까? 그 밀실과 같은 장소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노아가 만든 방주 안 아닙니까? 노아의 방주 안에는 세상 물결이 전혀 들어올 수 없이 평온함이 가득하였고 그 안에는 노아가 예비한 풍족한 식량이 있어 노아의 여덟 가족과 온갖 종류의 새와 기는 것들과 짐승들이 때를 따라 양식을 먹으며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 방주 하나님께서 친히 문을 닫아서 모든 풍랑 중에 안전하게 평온히 거한 일년 열흘간의 방주 생활을 마치고 다시 열린 문으로 세상에 발걸음을 내딛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방주의 밀실은 모든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기에 넉넉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온 세상을 휩쓸어도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자가 피하여 문을 닫고 숨으면 안전한 곳이 바로 이 밀실입니다. 이 밀실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세상으로부터 피하여 숨는 은밀한 곳입니다. 이 밀실이 상징하는 바는 지존자의 은밀한 날개 밑이요 곧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악한 세상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기도의 밀실이요 예수님의 피 아래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는 영적인 교제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밀실, 기도의 밀실, 하나님의 날개와 어린양의 피가 지켜주는 밀실로 피신한 자는 그 시대의 재앙을 피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끝없이 계속 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시만 피하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끝날 것 같지 않고 계속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감당할 수 없이 계속적인 분노를 쏟지 아니하심을 믿고 기꺼이 인내합시다. 포기하지 말고 밀실에 거하면서 믿음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립시다. 우리가 밀실을 끝까지 유지하면 그 은혜로 인하여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2.밀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은 전천후가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교회 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에서의 믿음이 동일해야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차원으로 말씀드리면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믿음이나, 공개되지 않는 장소에서의 믿음이 동일해야 하겠지요. 이른바 믿음의 안마당이나, 뒷마당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즉, 보여지는 공간에서의 믿음이나, 보이지 않는 밀실에서의 믿음이 동일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때문에 무조건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믿음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밀실에서의 믿음이 가장 정직한 믿음일 것입니다. 밀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밀실은 은밀한 장소요, 기도의 골방입니다(마6:6).
밀실이란 말씀은 ‘피란처 혹은 은신처’를 의미합니다. 적에게 공개된 곳은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타조는 위급하면 도망치다가 머리만 모래에 처박고 몸뚱이는 모조리 드러내 놓은 채 숨거나 치부한다고 합니다. 피난처나 은신처는 우선 은밀한 곳이어야 하고 안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로서는 ‘피난’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밀실은 가장 안전한 곳을 말하며, 숨어 있으면 충분한 휴식과 피난을 할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밀실이란 ‘기도를 의미’합니다. 마6:6절‘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방은 바로 밀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에게는 기도의 밀실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처럼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영력이 퇴보하고 사랑이 퇴보하고 은혜가 퇴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 영혼이 메말라 시들어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가정에 찬송 소리가 그치고 싸우는 고함이 터져 나옵니까? 그것은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밀실이란 ‘단절을 의미’합니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라고 했습니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외부와의 단절과 차단을 의미합니다. 방송국 스튜디오는 벽도 천정도 방음 장치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유리창도 완전 방음의 장치가 되어있습니다. 출입문 역시 방음이 철저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일단문을 잠그면 안과 밖은 완전히 차단되고 맙니다.
본문이 말하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으라’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세상으로 향한 입과 귀와 눈을 감고 그 대신 밀실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고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떠들면 하나님은 잠잠합니다. 그러나 내가 잠잠하면 하나님은 그때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세상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면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내가 들어가는 밀실의 문을 닫고 하나님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의 밀실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문을 닫읍시다. 이 소리 저 소리 들리지 않게 문을 닫고 하나님께로만 향한 창문을 엽시다.
밀실이란‘기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20절‘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라는 것과 고통과 시련이 지나갈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성낼 만한 이이 있었다면 빨리 밀실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그 분노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절망이나 고통이 닥쳤다면 빨리 골방에 들어가 원망이나 불평의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의 처치를 기다려야 합니다. 골방은 기다리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밀실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밀실은 자기만 들어갈 수 있는 아지트요, 공간입니다. 자기 허락을 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요. 본문도 ‘네 밀실’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네 밀실’에 어중이떠중이가 다 들어오면 안됩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도록 오픈하면 밀실이 아니지요. 오픈된 공간은 밀실일 수 없는 거예요. 그야말로 밀실은 나만의 공간이요, 내 허락을 받은 자만 들어올 수 있는 비밀의 공간이에요. 물론 자기만의 물리적인 공간도 밀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밀실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출입하는 곳이에요. 우리는 이곳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밀실을 말하자면 지성소를 말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임을 감안할 때 내 심령의 좌소를 밀실이라고 말하겠지요. 더욱 쉽게 말하면 내 마음을 의미합니다. 오직 그곳은 나와 하나님만 만나는 곳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것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고, 들어와서는 안 될 곳입니다. 아무나 들어와서는 결코 안 될 곳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 심령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도록 잠금장치를 해제해 버렸습니다. 비밀번호를 해제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수시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한마디로 잠금장치가 없어요. 나만의 밀실이 오픈되다 보니 더 이상 하나님을 모시는 처소가 안됩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것과는 상종을 안하시고, 더러운 곳에서는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밀실이 모든 것에 개방이 되어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닌 거예요. 성도에게 나만의 밀실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밀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밀실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밀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독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영적인 밀실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해 버렸기 때문이에요. 밀실의 기능이 사라진 거지요. 사단은 가장 먼저 성도의 밀실을 공격합니다. 밀실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밀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결코 우리는 나만의 밀실을 아무에게나 오픈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사단에게 노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성도의 밀실을 노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입니다. 솔직히 언제 끝날지 모를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사단에게 나만의 밀실을 너무 쉽게 공개해 버린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우리의 치부가 다 들어나 버렸습니다. 우리의 민낯이 다 공개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교회도 밀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밀실이 사단에게 공개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흑암의 세력이 교회의 밀실을 야금야금 들어와서 장악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왕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교적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지요. 사39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축하 사신을 보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한마디로 궁중의 소유와 전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사39:2).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그 사람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이고, 무슨 말을 하였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 때 까지도 히스기야는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이사야 선지자에게 왕의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고, 자기 보물 중에서 안 보여준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사39:4). 이것이 히스기야의 결정적 실수입니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고 세상의 보물을 자랑하는 데만 급급한 것이지요. 히스기야의 죄는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히스기야를 징계하십니다.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날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된다’는 것입니다(사39:6). 그리고 그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히스기야는 한순간의 교만함으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단의 세력에게 모두 다 오픈한 것입니다. 공개해서는 안 될 것을 공개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밀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적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영적인 비밀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마귀에게 공개하는 것은 영적 스파이입니다. 그것은 밀실을 공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귀의 세력과 내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절대 나만의 밀실을 오픈하면 안됩니다. 밀실의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 밀실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내 밀실의 키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도 ‘네 밀실’로 들어가라고 주문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만의 밀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밀실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밀실 아닌 밀실이 너무 많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자기만의 밀실에 세상의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다 감추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돈이 있습니다. 명예와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 밀실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영적인 밀실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의 밀실은 세상 사람들의 밀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성도의 밀실은 영적인 밀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영적인 밀실이 아닙니다. 나만의 밀실이 파괴되었다면 지금 당장 나의 밀실을 복원해야합니다. 그리하여 나만의 밀실로 들어가십시다. 밀실보다 좋은 곳은 없습니다. 밀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최고의 장소입니다. 밀실은 하나님과 내가 친밀히 교제하는 곳입니다.
3.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개인 영적 밀실을 갖고 있습니까?
성도여러분 각자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지금 나만의 밀실이 있는지요? 그 밀실은 어떤 상태인지요? 여러분은 그 밀실을 얼마나 자주 이용하는지요? 어떤 자의 밀실은 거미줄만 쳐 있는지 모릅니다. 쓰레기만 가득할는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의 밀실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우리로 하여금 그 밀실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잠간만 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역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잠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보다 사역을 더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주님이 맡겨주신 성도를 더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혹은 주님보다 주님의 교회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대부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함정입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이나 믿는 자들이 주님보다 주님에 관련된 것을 더욱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사역일 수 있고, 사람일수 있으며, 주의 몸 된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하면 속을 수 있는 함정입니다. 주님보다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예배일지라도 말입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역보다 예수님이 우선입니다. 사람보다 예수님이 우선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님보다 사역을 더 중시했고, 사람을 더 중시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잠시 밀실로 들어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잠간 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지 모릅니다.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마치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밀실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잠간만 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오직 밀실에서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과 교제의 깊은 시간을 가지라는 말이지요. 주님은 사역이나 사람보다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간절히 원하십니다. 사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 없어도 지역전도는 이루어집니다. 우리 교회가 없어도 세계선교는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영적인 훈련의 시기를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만의 밀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밀실은 여러분의 은밀한 말을 지켜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는 음성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물론 본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대환난 날에 성도가 취해야 할 자세를 말합니다. 그 날에 성도된 자들은 세상과의 분주한 모든 거래를 중단하고, 하나님과 은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그와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갔던 것처럼, 애굽 땅에 임한 하나님의 재앙 가운데 자기 백성들을 집으로 들이켜 문을 닫은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그렇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모음같이 말입니다. 병아리는 어미닭의 품속이 밀실입니다. 밀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야 합니다. 문을 닫는다는 말은 세상이 즐겨하던 모든 것을 차단하라는 말이지요. 그동안 나의 밀실에 드나들던 모든 것을 차단하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밀실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고, 출입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분주했고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밀실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잠간 숨어 있으라고 말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일지 모릅니다.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를 향하신 선한 목적이 있을 것이니까요. 때문에 지금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밀실로 잠간 들어가십시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불평하지 말고 밀실로 들어가십시오. 더러운 세속의 문을 닫고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십시다. 그리고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맞추십시다. 내 영혼을 정화시키는 시간으로 삼으십시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 기간에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밀실을 찾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아니 밀실을 관리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자는 자기의 밀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피곤하다는 핑계로 나만의 밀실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두 가지 핑계는 ‘바쁘다’와 ‘피곤하다’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당신의 바쁜 것이 내려놓아지고, 여러분의 피곤함이 내려놓아짐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더 바쁜 자 되시고, 하나님과 더 친근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든지 내 영혼을 유익케 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만의 밀실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더 적극적인 사랑을 나누며 교제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어려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간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본문도 잠간만 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어떤 영광과도 비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4.우리가 밀실에 들어가도 하나님은 쉬지않고 일하십니다.
지금 밀실로 들어갈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밀실로 들어가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결코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참으사 하나님처소에서 나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거민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분노를 쏟으실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 억울한 모든 것들을 신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감추지 아니하신다는 말이지요. 그들이 행한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원수 갚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닙니다. 악인들의 행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것의 시비를 가리려고 따지고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올무에 빠질 수 있지요. 분명히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의도도 같은 맥락입니다. 밀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잠간 숨으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잘못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우리 스스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열심을 앞서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세웁니다.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빠르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더 고상한 방법을 고안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사55:8-9절‘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지금 우리 시대의 현상을 바라보며 더 이상 싸우지 말고, 각자의 밀실로 들어갈 때가 아닌지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가 들어갈 진정한 밀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은신처요, 피난처이십니다. 시119:114절‘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진정한 밀실은 주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밀실의 주인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 진정한 밀실신앙입니다. 지금 우리가 밀실로 들어갈 때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잠간만이라도 나만의 밀실로 들어가서 개인적인 환난과 시련으로 인하여 시련의 터널의 끝이 전혀 안 보일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우리는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밀실에 숨어 문을 닫고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십시오. 밀실의 은혜가 우리 심령을 붙들어주실 것이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여서 그 때를 감하여 주시게 하실 것입니다. 끝내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가족처럼, 유월절의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에 이스라엘의 해방이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건져주실 것입니다. 기이한 인도하심이 있어 생활 속에 환난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은신처는 예수 안에 머물러야 평안이 있고 안정이 있습니다. 내가 영원한 은신처이신 예수 안에 살 때 오는 몇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내가 나를 지키고 방어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몸부림쳐도 실패하게 되고 보약 먹고 요가하고 보신해도 병들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은신처이신 주님은 나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마음이 편합니다’ 제아무리 철벽으로 둘러싼 성안에 있어도, 수십만 대군이 지켜도 불안은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평안한 마음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내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에게는 평안히 쉬는 곳이었습니다. 단12:3절‘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기도의 장소입니다. 마6:6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곡식이 있는 곳입니다. 느10:39절‘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본문 21절‘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좌악을 벌하실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날은 땅의 베일이 벗겨지는 날입니다. 이날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씻으신 날이며, 이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날입니다. 이날은 죄를 폭로하신 날입니다. 곧 예수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는 이유가 만 천하에 나타나는 날입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처소에서 나오시는 날입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처소와 제사장의 기도처를 찢어버리신 날입니다. 이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이날은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 제사장과 제사장을 폐하고 믿는 자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수여하신 날입니다.이날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입니다. 이날은 믿는 자들에게 새 언약을 선포하신 날입니다. 내가 밀실로 들어가고 은신처로 피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나오시고 일어나셔서 종횡무진 활동하시고, 벌할 것은 벌하시고 멸할 것은 멸하시고 물리칠 것은 물리치시고 없앨 것은 없애 주십니다. 즉 하나님이 처리하시고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렇게 좋은 길이 있고 방법이 있는데 왜 내가 서둘고 몸부림쳐야 합니까? 밀실로 들어가 기도의 무릎을 꿇기만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는데 왜 밀실로 들어가지 않고 그곳에 곰팡이가 슬게 합니까? 밀실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거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의 포문을 열어 응답받고 삶에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