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46-48, 누가 크냐, 25.1.26, 박홍섭 목사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밑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 앞에서 무기력했고 서기관들과 변론만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표적과 가르침을 보고 들었음에도 여전히 틈만 있으면 주님을 배척하고 반대하는 서기관과 무리들, 제자들의 무능력을 보고 주님에 대한 믿음조차 흔들렸던 아이의 아버지, 영적 능력과 권세가 자신들에게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옴을 망각한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더 너희와 있어야 하며 얼마나 더 참아야 하냐”라고 책망하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아이를 불쌍히 보시고 고쳐주십니다. 조금 후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은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이며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그 대답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지난주 설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자들의 영적 무능력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원인이 나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지금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싸우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았음에도 “누가 크냐”하고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스승인 주님은 악하고 패역한 세대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자기들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무슨 영적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귀신들린 아이 앞에서 쩔쩔맸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렇게 자리싸움을 했을까요?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나라의 권력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과 영역에는 서열과 등급이 매겨져 있습니다. 보이는 서열도 있고 보이지 않는 등급도 있습니다. 학교, 직장, 교통, 숙박, 음식, 일상의 모든 영역에 등급이 있고 돈과 지위에 따른 차별이 존재합니다. 그 등급과 서열은 우리를 자극합니다. 누구라도 이런 등급의 차별을 경험하면 나도 어떻게 하든지 내 인생의 지위와 등급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다투고 싸웁니까?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더 높은 등급의 인생을 누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나라는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가? 어떻게 그 자리와 등급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사는가?” 이 헤게모니와 주도권의 쟁탈전이 본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 자체가 영원하지 않음을 모릅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일등석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 배가 침몰한다면 일등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코노믹 클래스에서 비즈니스 클래스로 승격하여 남들보다 더 넓은 공간 차지하고 더 편안하게 갈 수 있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정작 그 비행기가 잠시 후 추락할 비행기라면 더 넓고 편안한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신앙은 인생의 배를 갈아타는 것입니다. 끝없이 자리싸움하면서 다투는 세상 나라의 침몰할 배에서 침몰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배, 예수 그리스도의 배로 갈아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배를 갈아타면 당연히 인생의 목적과 방향도 달라집니다. 더 높은 등급으로의 승격을 위하여 일생을 걸고 살았던 사람이 주님의 뜻을 따르고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인생의 배를 갈아타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 열등감을 가지거나 우월감을 가지면서 누가 더 높은가를 따지지 않는 믿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크냐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십니다. 47-48입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주님은 누가 크냐며 자리싸움과 서열 다툼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어린아이 영접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한 것이며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상 나라가 누가 더 높은가를 놓고 싸운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더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는지가 주된 관심이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지극히 낮고 작은 자를 대변합니다. 당시의 어린아이는 오늘의 어린아이와 다릅니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집안의 왕이지만, 당시 유대의 어린아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사람 축에 끼이지 못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말은 섬겨도 아무런 보상이나 유익이 없는 낮고 비천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을 영접하고 받아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그 사람의 수준으로 낮춰야 합니다.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고 나를 죽여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이 바로 일상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작고 비천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섬김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셔서 어린아이 같은 우리를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영접해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영접하는 섬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비천한 우리를 영접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침몰할 배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면서도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영접해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저와 여러분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아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과 존귀함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섬김의 삶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이니 우리도 작고 연약한 인생을 영접하는 섬김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제자라면, 너희가 나의 낮아짐과 섬김으로 생명을 얻고 존귀함을 회복한 자라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연약한 사람을 영접하는 섬김의 삶보다 끊임없이 높임과 섬김을 받기 원하는 타락한 자기 집착의 욕망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 가르침을 받고있는 제자들이 나중에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또 누가 크냐 하면서 똑같이 다툽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타락한 본성은 늘 이렇게 우리를 부추겨서 섬김의 삶이 아니라 자리다툼의 욕망으로 인생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빌 2:5-8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인생의 배를 갈아탄 성도라면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높으냐?”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그의 섬김과 낮아짐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높음은 침몰할 배의 일등석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며, 추락할 비행기의 특등석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높은 자와 큰 자는 찰나와 같은 이 땅의 권세와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그분의 인정과 칭찬과 영광을 소망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가 가장 큰 자이며 가장 높은 자며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누가 더 크냐?”의 관점으로 살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더 큰 자리와 더 높은 자리에 가면 싸움이 끝이 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서 올라올 때보다 더 정신을 차려서 올라오려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끝없이 경쟁하는 처절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섬김의 관점에서 살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와 싸우고 이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는 싸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싸움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고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불가능한 싸움입니다. 제자들이 왜 누가 크냐 하고 싸웠습니까? 십자가의 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직 십자가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아서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은혜가 부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 은혜가 머리와 가슴과 지성과 감정과 의지에 부어져서 우리의 마음에 솟구치고 있는 부패한 본성과 욕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가 있어야 다른 사람들의 핍절한 영혼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섬김의 삶을 살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싸울 수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으면서 누가 더 크냐고 싸우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어떻게 하면 더 섬길 수 있는가의 싸움을 시작하여 생명의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구정 명절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