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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행위구원론에 대해 가르치는가?
행위구원론이란 신자의 행위가 구원,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원한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신자의 행위에 의해 영원한 구원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잘못된 것인가? 다르게 말하자면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이 명백하게 그것을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거는 성경의 어떤 구절들이다. 대표적인 두 구절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이 구절들에서 아주 분명하게 행위와 구원이 무관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신자의 행위와 영원한 구원을 연결시키는 것이 잘못이라는 관점에서 행위구원론이라는 말이 나왔다. 부정적인 의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믿음으로.
그렇다면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입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성경의 진술과 무관한가? 전혀 아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이 구절들은 성경의 내용이 아닌가? 맞다. 여기에서는 순종을 구원,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원한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다. 행위는 순종과 불순종으로 구분할 수 있기에 순종은 행위에 포함된다. 불순종과는 다르지만 행위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무엇인가? 앞의 구절들과 뒤의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지만 앞의 구절들은 성경의 가르침이고 뒤의 구절들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과연 옳은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앞의 구절들과 뒤의 구절들이 모두 성경의 가르침이다. 앞의 구절들을 앞세워 뒤의 구절들을 거부하는 것이나 뒤의 구절들을 앞세워 앞의 구절들을 거부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둘 다 성경의 가르침이며 옳다.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에 관하여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가?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당연히 그렇게 여겨진다.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이것이 구원론과 관련한 오늘날의 교회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표면적으로만 성경을 읽는 것 말이다.
행위와 무관하다고 이야기되는 구원과 순종과 연결된 구원이 같은 의미인가?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모순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경이기에 신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라도 모순은 모순일 뿐이다.
그렇지만 행위와 무관하다고 이야기되는 구원과 순종과 연관되는 구원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순종과 연관되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신자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서의 구원이다.
행위와 무관하다고 이야기되는 구원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비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곧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역사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는 없다. 오직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만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인 사람이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원에 있어서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가 없다.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관계 회복이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 곧 믿음으로 결정된다. 신자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 있다. 또한 그 삶이 끝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그렇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삶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지냈는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였는가, 아니면 잘못된 관계였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의지는 다르게 말하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다. 곧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이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위에 언급한 두 번째 구절들은 순종이라는 면을 언급한 것이다.
위에 언급된 두 종류의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권위에 있어서 어떤 차이도 없다. 그렇기에 어떤 한 쪽을 임의로 취하고서는 다른 쪽을 거부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그 권위를 무시 내지 멸시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무시 내지 멸시하는 것이다. 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작은 일일 수 있는가? 심각한 범죄이다. 당사자들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구원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모순이 없다. 난해하지도 않다. 명백하고 쉽다. 표면적인 읽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말이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는 것인 구원은 믿음으로 결정된다. 오직 믿음으로만 결정된다. 그리고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결정된다. 곧 믿음으로 결정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순종으로 결정된다.
부정적인 의미의 행위구원론이라는 표현에는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이라는 표현은 영원한 구원을 담고 있으며 행위에는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 영원한 구원을 순종으로 얻는다는 것까지도 거부하거나 최소한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와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시는 바와는 다른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의 위험성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구약의 거짓선지자들이 대표적이다.
성경은 모든 구절이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 모순이 없다.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표면적인 성경 읽기에서 벗어나 바르게 읽기만 하면 그 사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이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면적인 성경 읽기의 결과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세우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렇게 바르게 성경 읽기가 온전해지면 영광스러운 교회로 회복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이 하루 속히 열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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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구원론, 둘인가 하나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마 8:22). 이 말씀에 의하면 죽음은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인 죽음과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죽음입니다. 후자의 죽음은 불 못에 들어가는 영원한 멸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연관된 여러 단어들을 구분하여 생각하여야 합니다.
구원은 각각의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영생도 마찬가지로 구분됩니다. 사람 편에서의 바른 반응인 믿음도 각각에 따라 그 의미에 차이가 생기며 그 모두를 가능하게 하시는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A B
죽음 :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 생명의 끝남과 그 이후의 영원한 멸망
구원 :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 /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영생 : 회복된 관계에서의 교제 / 영원한 천국에서의 교제
믿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 /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
곧 영접하는 것 곧 의지하는 것
의 :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서
의롭다 하심을 얻음 의롭다 하심을 얻음
은혜 :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성령 하나님의 역사
A의 구원과 관련된 성경 구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5:5~6).
B의 구원과 관련된 성경 구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이러한 구분만 파악되면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파악하기는 쉽습니다. 성경 구절들도 자기 위치에 배치하면 됩니다. A는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B는 견인에 관한 것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
A에서 구원은 성경에서 언제나 과거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가 아닌 상태를 전제하고 있는 경우에는 미래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신자의 상태를 전제로 한 문맥에서 이야기되는 구원은 관계 회복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당사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기에 가능합니다.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역사이기에 불가항력적입니다. 택함을 받은 당사자가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기 전 어느 시점에서든지 반드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영생은 회복된 관계 안에서의 교제를 뜻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 그분 앞에서 죄인인 자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신 대속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생명책입니다(시 69:28, 빌 4:3).
여기에서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란 없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불신 상태에서의 복음 수용을 행위로 보진 않습니다.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가 있었다면 자기 의, 자기 자랑이 가능하지만 전혀 없습니다. 자랑하지 못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에베소서 2장 8~9절,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불러내시기 위하여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 바로 왕의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택한 백성을 부르시기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애굽에서 벗어나는 구원에 있어서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도 넓게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영생이 회복된 관계에서의 교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주신 독생자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해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의 견인
B에서 구원은 미래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 땅의 신자에게는 미래의 일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전 인격과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이 주인이고 신자는 종이기에 주인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뒤따릅니다. 곧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양심이 아닌 선한 양심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의 내용은 다양합니다.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 설교나 가르침을 받아 깨우치는 것, 성도의 교제를 통한 깨달음, 자신에게 발생한 즐겁거나 어려운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메시지 등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느냐, 아니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추구하느냐를 당사자가 결정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가 은혜이며 신자가 그 역사를 따르는 것은 순종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말하고 행하는 것도 순종입니다.
순종은 행위에 해당되는데, 은혜 곧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열매입니다. 의지함인 믿음, 다르게 말하면 순종은 현재적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합니다. 의롭다 하심은 영접함인 믿음으로 불변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평가하시며 순종하면 의롭다고 평가하십니다. 신자는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구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순종으로 가능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9)는 말씀과 같습니다. 곧 영원한 구원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믿음 곧 예수님을 의지함이 조건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분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순종이 조건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견인과 관련되어 성경 전체의 진술을 대표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이 말씀은 앞 구절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동사가 모두 현재형입니다. 현재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현재적으로 그분과 교제하며 현재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동시에 순종입니다. 견인에서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바울 사도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역사가 서로 거스른다고 하였습니다. 신자인 당사자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며 삽니다. 성령의 역사를 선택하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이며 그 결과는 영생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선택하면 육체를 위한 삶이며 그 결과는 썩어진 것입니다(갈 6:8~9). 영생과 대조되는 것이기에 영원한 멸망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집니다(출 32:32-33, 시 69:28, 계 3:5).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인 영생은 성령을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견인은 조건적입니다.
잘못된 배치와 문맥의 문제
교회 역사에서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의 근거 구절들을 잘못 배치하여 혼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문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서 잘못된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전자에 관한 구절을 후자에 배치한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다는 말씀을 견인에 관한 구절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이 되고 그것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있었다면 그 작정을 따라 영생을 반드시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절을 잘못 배치한 결과일 뿐입니다. 바로 왕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를 견인에 가져와서 신자에게 그러한 역사를 통하여 반드시 회개하도록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칼빈주의에서는 견인이 무조건적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후자에 관한 구절을 전자에 배치한 잘못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소욕이 서로 거스른다는 말씀을 부르심에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부르시는 성령의 역사를 당사자가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알미니안주의에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 가항력적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배치가 잘못되지 않은 경우의 구절들은 앞뒤 구절의 내용들을 온전히 고려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을 무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 구절은 27절과 함께 읽어야 하며 그렇게 읽으면 조건적 견인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과 5장 5절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 문맥과 단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면 무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이 아니라 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이 됩니다. 이는 모든 무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들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은 구원의 의미는?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거듭난 신자라면 삶에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근거로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문자 자체는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문맥은 고린도교회의 분파에 대한 교훈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그리스도파,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그 분파는 그것을 말하는 말씀 사역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역자들의 역할을 설명하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 3:7).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터 위에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적입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불로 평가하십니다. 분파는 그리스도의 한 몸 됨을 해치는 것이기에 그 공적은 불타게 됩니다. 그것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상태에서 말씀 사역자들이 멸망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분파를 이끄는 말씀 사역자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말씀한 이유는 그들이 분파의 잘못을 인식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뜻과 달리 지속되면서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분파를 넘어서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같이 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며 나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어지는 내용이 그 답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7상)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 가능한데, 이 문맥에서는 분파를 넘어선 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값으로 주고 세우신 한 몸을 사람이 임의로 찢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경우까지 나아가면 그 사람은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지 않고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은 17절까지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15절의 상태에서는 불 가운데서 받는 것과 같이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더 나아가면 17절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15절은 신자라면 반드시 불 가운데서 얻는 것과 같이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멸망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이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그 상태에서 돌이키지 않고 더 나빠지면 멸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을 한 자에 대한 기술입니다. 문맥에 의하면 그를 출교하라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져서 결국 온 덩어리를 누룩으로 오염시키게 되기에 내어 쫓으라(고전 5:13)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에서는 그가 광야에서 생활하게 되고 그 곤고함을 깨닫고서는 결국 돌이키게 되어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진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한 존재의 몸은 멸하지만 그의 영은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거듭난 자임은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 곧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고전 1:2)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신과 영은 한 인격의 각기 다른 부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몸을 뜻하는 단어는 소마입니다. 본문은 사륵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륵스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분의 뜻을 어긴 존재를 가리킵니다. 한 존재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고린도교회의 음행한 이는 그 행위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뜻을 어긴 자입니다. 그 전 존재를 하나님께서 멸하시는 것입니다. 멸한다는 것이 영원한 사망임은 명백합니다.
영은 고린도교회를 가리킵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말씀(고전 6:17)을 통해 확인됩니다. 즉 본문은 음행한 자를 출교시킴으로 고린도교회가 거룩을 유지하고 그것이 음행한 자는 멸하고 고린도교회는 주 예수의 날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음행한 자의 몸은 멸하고 그의 영은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출교의 성경적 의의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신자를 그 몸의 지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신자의 총합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교회는 로봇에 해당됩니다. 잘못입니다. 교회에 신자가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몸이 있고 지체가 있습니다. 출교는 몸에서 지체를 끊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신자가 팔이라고 생각하면 출교는 몸에서 팔을 끊어 내는 것입니다. 몸에서 끊어진 팔은 죽음입니다.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몸 사이에 이루어지는 생명의 교제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기록 시점의 관점에서 보면 그 팔은 결코 몸에 다시 붙일 수가 없습니다. “육신은 멸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한 돌이킴과 그것을 통하여 그가 (영원한) 구원을 얻음은 본문의 가르침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은 거듭난 자의 결정적인 범죄로 인해 그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술입니다. 그의 범죄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입니다. 거듭남의 믿음 곧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함인 믿음이 있었지만 그분을 의지함인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 곧 믿음을 저버림인 그 범죄는 돌이킬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거듭난 자라면 그 범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이키게 하신다는 칼빈주의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범죄로 인해 신자의 상태는 변할 수 있지만 자녀라는 신분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종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 거듭난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견인하신다는 주장도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에 대해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워 성경의 진술을 거부하지 말고 성경의 진술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여야 합니다.
믿음과 구원의 상관관계
성경에서 믿음은 인식의 차원만이 아닙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주님이시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않았다고 평하면 될까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만 성경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았다고 평하십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정탐꾼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고 모세를 돌로 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A의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들의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정복에 대한 말씀을 신뢰하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B의 믿음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A의 믿음으로 관계 회복의 구원을 얻고(엡 2:8~9) B의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습니다(벧전 1:5).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옳습니다. 다만 어떤 의미를 담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와는 달리 후자의 경우에도 행함 곧 순종을 배제한 것이라면 틀린 말이 됩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과 행함 곧 순종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에 구원은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빌 2:12). 거룩한 행실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히 12: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성화 장에 진술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요한 사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언급했습니다(요일 5:16). 모든 죄의 값이 사망이기에 모든 죄는 사망에 이릅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란 돌이킴으로 회복의 기회가 있는 죄입니다. 돌이킴은 먼저 하나님께 진심으로 그 죄를 자백하고 다음으로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십니다(요일 1: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용서된 죄가 현재 시점에서 효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러한 기회가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멸망하게 되는 죄입니다. 그 경우에는 그 범죄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교(히 6: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거부하는 죄 곧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요일 4:3), 아버지의 아내를 육체적으로 취하는 것과 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고전 5:5)가 그에 해당됩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라고 하더라도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역시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그 경우입니다(마 25:1-13). 그들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불을 밝힌 등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여분의 기름이 없었습니다. 기름이 성령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함께 성령의 조명 아래 있었는데, 성령을 위하여 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같은 경우입니다(마 25:24-30). 달란트는 하나님 나라의 일 곧 사명입니다. 사명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다는 것은 사명을 저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저버린 삶의 결국은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들며 갇히고 나그네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삶에서 영접하지 않는 것도 동일한 경우입니다(마 25:41-46). 인자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거듭난 신자들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멸하십니다(고전 3:17). ‘누구든지’에 신자가 포함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윤리적인 범죄 가운데 그 삶을 지속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고전 6:9~11).
모든 죄는 그 값이 사망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신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 편에서 반드시 돌이키게 하시는 역사란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죄를 자백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소욕에서 당사자가 선택하는 원리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따르도록 하시는 역사 곧 반드시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택한 자를 부르시는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시지만 그 이후의 삶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가 전부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 역사는 육체의 소욕으로 거스를 수 있습니다.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도 육체의 소욕을 따르므로 거스를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있는 죄의 자백과 돌이킴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한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택한 자는 믿음을 저버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는 주장도 옳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자는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선택한 것이고, 후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선택한 것입니다. 양면이 있는데 그중에 한 면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잘못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육상 경주와 같은 상관관계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에서의 구원에 있어서 상관관계는 육상 경주와 같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출발선상에 서게 된 것입니다. 후자는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출발선상에는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전자의 구원에 후자의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미’입니다.
그렇지만 결승 테이프를 끊는 것은 경주를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른 길로 가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때에 가능합니다. ‘아직’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으면 결승 테이프를 끊는 영광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의 신자에게 영원한 구원은 ‘이미’와 ‘아직’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계와 똑같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한 편 강도와 같은 경우는 예외입니다. 영접함인 믿음과 동시에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 내포되어 있는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일반 경주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서 곧 등수가 아니라 통과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다른 레인의 선수가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라는 점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결승선을 통과하도록 하는 동역자입니다. 심판이 그 경주의 과정에 함께 하며 돕는다는 사실입니다.
파울을 범하는지만을 살피는 일반 경주의 심판과는 달리 하나님은 경주자와 함께 뛰며 완주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빌 2:13).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따르면 월계관을 씁니다. 반면에 자기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스르면 월계관과 무관하게 됩니다.
상급의 의의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고 행위로 상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상급은 영원한 구원에 덧붙여지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영원한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경주를 완주한 것에 대해 월계관을 수여하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른 삶 곧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삶을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셔서 신자의 의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월계관은 영원한 구원에 더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경의 면류관이 월계관에 해당됩니다. 면류관의 종류들은 그 강조점의 차이로 인한 것입니다.
행위구원론?
칼빈주의에서는 구원과 행위를 연관시킬 때에 정죄하는 방편으로 행위구원론이라는 말을 합니다.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구들을 무작위로 견인에도 적용시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는 옳지만 견인에서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견인과 관련하여 순종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성구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앞에서 언급한 구절만 해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않고 단편적으로 읽으면 언제나 문제를 일으킵니다. 내가 읽고 싶은 부분만 읽거나 내가 읽고 싶은 방식만으로 읽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구원과 순종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순종이 믿음과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행위구원론이라는 정죄를 서슴지 않는 것은 무지일 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화 장의 내용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체 모순이기도 합니다. 웨신의 성화 장에는 거룩한 행실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진술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의 선행구원론과 종교개혁의 구원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입니다.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은 선행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영원한)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 모두를 합하면 선행구원론이 됩니다. 선행구원론은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한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교부들이 거리낌 없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여 교회의 전통으로 삼았던 이유입니다.
선행구원론은 견인에 있어서 믿음구원론과 동의어입니다. 교부들은 사도 바울보다 예수님께 더 높은 권위를 두었기에 선행구원론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런데 고행을 통한 구원인 양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당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악행의 빌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잘못은 선행구원론이 아니라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때에 선행구원론까지 폐기처분하였습니다. 더러워진 목욕물만 버려야 하는데 아기까지 버린 것과 같습니다. 로마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태도는 지양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 중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잘 분별하여 그른 것을 배척하여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가능합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원이나 이 땅의 삶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이나 모두 은혜입니다. 영원한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동전의 양면인 순종이 강조되지만 그것 또한 은혜입니다.
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은혜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가르침과 배치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입니다. 행위는 순종과 불순종으로 구분됩니다. 순종인 행위가 있으면서 불순종인 행위가 있습니다. 전자는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선행되어 맺은 열매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으로 구원은 은혜로 구원에 해당됩니다.
어느 정도의 순종이어야 구원인가?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과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은 동의어라고 하니 뒤따르는 질문입니다. 답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고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에 한해서 무엇이든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정 궁금하면 하나님께 물어 답을 들으시면 됩니다.
그러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서 어떤 선이 제시될 경우 그 선을 넘어서면 자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바울 사도가 경계한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그 선이 항상 내 앞에 있으면 그 선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기준이 제시되지 않음은 지속적으로 더 성숙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그 인격이 풍성해지고 삶이 부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더 온전히 맺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더 힘 있게 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행위와 믿음, 무엇이 다르고 같은가?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견인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를 정립하는 데에 한 단어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기에 각각 구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경의 진술에 어떤 모호함이나 모순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행위를 거부하며 믿음만을 강조하는 로마서와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도 함께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행위와 행함은 같은 헬라어입니다.
로마서의 행위란 율법 준수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이 아니라 주님으로 받아들임입니다. 새 언약의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한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법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성령의 법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곧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르게는 성령의 법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믿음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서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닙니다. 행함 곧 순종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현재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입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라는 관점에서는 영접함인 믿음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모순에서 벗어나기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믿음은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후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행위와 야고보서의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율법 준수 곧 불순종입니다. 후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준수 곧 순종입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곧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은 내용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읽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든지 모순이 발생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고 행함은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이라고 읽으면 무조건 모순이 생깁니다. 로마서는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고,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곧 로마서는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데 반해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믿음에 뒤따르는 바른 행실로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됩니다. 모순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교훈
구약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가 나옵니다. 아마도 선지학교에서 구약 성경에 대한 선조들의 이해를 배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마음대로 살라고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대의 랍비나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참 선지자는 그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참 선지자의 편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거짓 선지자의 편에 섰습니다. 참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무조건적 견인을 주장하는 오늘날의 목사들과 내용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들 사이에서 조건적 견인을 말하면 그 생각을 말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글로 옮기지도 못하게 합니다. 쫓아냅니다. 매장입니다. 참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미워하시며 멸하셨음을 생각할 때에 어찌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삶과의 상관관계
신자(교회)는 거룩하여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의를 즐거워하며 불의를 미워하는 것, 무궁하신 인자하심 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구원론은 신자(교회)가 거룩하여지는 데 중요한 토대입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과 부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 적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영원한 구원이 의지함인 믿음 곧 순종을 조건으로 결정된다는 것과 영접함인 믿음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구원론은 현재의 삶에서 신자답게 사는 것 또는 교회다워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원론이 성경적으로 정립되면 온전한 신자(교회)가 되는 데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예를 들어 성경적인 구원론이 정립되면 교회의 선거에서 돈 봉투를 돌리는 악행이 발생할 여지는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되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 선거는 아간의 범죄와도 같은 짓이며 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의식이 강하면 그러한 악행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데 어찌 그러한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원리와 동떨어진 인간적인 생각으로 전횡을 일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파괴하는 행위도 그렇습니다. 어떤 내용으로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교단을 별도로 세우는 일도 그것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장로교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 많은 교파들은 그런 면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에 의하면 그 결국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일 수 있기에 강력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 하며 항상 깨어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초대교회도 성경적인 구원론의 토대 위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원론이 성경적으로 정립되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이 성령의 역사에 해당되는데 육체의 소욕으로 거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여러 범죄들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성경적인 구원론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우리의 생각으로 변경시키면 그만큼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 신자다운 인격과 삶에서 멀어집니다. 오늘날의 교회 현실이 그 반증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지혜를 따른다면 하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닫힌 성경 열기
상세한 내용은 <닫힌 성경 열기 – 구원론을 중심으로>(박창진, 등과빛 출판사, 바로 구입하러 가기 http://mall.godpeople.com/?G=1325220750-4 )에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선생 곧 말씀 사역자의 말 곧 설교와 공적인 가르침과 관련하여 실수 곧 잘못된 전파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는데, 그 근거가 설교와 공적인 가르침이 옳으냐 그르냐입니다. 이제까지의 구원론을 생각하면 거의 모든 말씀 사역자가 어떤 부분에서는 잘못된 내용을 설교하고 가르쳤다고 보아야 합니다.
심판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멸망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받게 되는 책망일 수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읽고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 남는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하늘유통(031-947-7777)을 통하여 구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전통으로’의 문제
문제는 잘못된 설교와 가르침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별로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따르는 전통 속에서 그 전통을 따르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치열한 고민과 연구가 없이 그냥 해오던 대로 하면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오직 성경으로’라고 하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오직 전통으로’입니다. 전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바른 성경 연구를 통하여 재점검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랍비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동일시하면서 진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단인 신천지도 한 주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가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정통이라면서 그 정도의 의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 중심이라면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에게 잘못 가르쳐왔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만, 기꺼이 그렇게 말하고 바로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나 중심이면 그냥 무시하고 이전과 똑같이 반복할 것입니다. 전통에서 잘못된 부분- 모든 전통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님-을 바로잡기보다는 답습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진정한 개혁주의가 요구됩니다.
-박창진 목사(고려신학대학원 졸업, ‘닫힌 성경 열기’ 저자, 카페 ‘개혁과 진보’ 운영자)

첫댓글 신앙생활의 출발점에 서는 관계 회복의 구원은 믿음으로, 그 이후 영원한 구원은 순종으로 받는다고 주장하며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은혜의 결과라고 강조하는 글입니다. 한 가지 주제를 점층적으로 심화시켜 두 단계의 글로 담은 것이어서 간략한 첫번째 요약 글만 읽으셔도 핵심진리는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에 나오는 믿음과 행위의 의미 차이 등 평소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서 논란이 되어오던 주요 구절들을 조명하는데, 특정 교리적 전제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 자체를 토대로 믿음과 행함, 구원의 연관성에 대해 균형있게 계속 탐구해나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나름 의미있는 참고자료가 됩니다.
박창진 목사님의 글이군요. 오래전 그 사람이 저에게 책을 한권 주더군요. Stephan님은 박창진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전에 기독교언론에 글 쓰신 걸 몇 번 본 것 외에는 박 목사님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저는 글 쓰신 분에게 관심이 있기보다 이 분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개신교계에서 믿음과 행함, 칭의론과 구원론을 놓고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어떻게 나름 의미있게 해석했는가에 관심이 있어 함께 나눴습니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 혹여라도 이분 자체에 대한 인신공격 같은 게 없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본질을 호도할 수 있으니까요. 성경을 기준삼은 이 문제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텐데 그 한 과정으로 의미있게 생각합니다.^^
@Stephan
당연히 인신공격을 하면 안됩니다. 박창진(목사)님을 아시는지 물어본것뿐입니다. 오해없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장로교인들의 일반적인 주장보다 박목사님의 개혁의지와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박창진 목사님의 '성경해석 잘해야 부흥이 보인다'라는 책을 한번정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 믿음과 행함은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ㅋ
도움이 되는 귀한 글 감사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마치 초의 빛과 열 같아서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날개없는 새와 같아서
비록 그 새가 땅위를 뛰어다닐 수 있을지 모르나,
하늘을 향해 나를 수는 없습니다.
(어느 거듭난 그리스도인 형제님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