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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2273.2024.10.27)
시139:1-6 13-18
할렐루야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날씨는 그야말로 천고마비의 계절입니다. 하늘은 높고 아침저녁에 불어오는 삭풍에 한여름 키워온 푸른 잎사귀들은 어느새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을 하여, 노랗다 못해 황금빛으로 물들인 가을 들녘은, 콤바인 소리와 함께 점차 알곡으로 탈곡이 되어 창고로 쌓여질 것입니다. 주차장 화단에 있는 감나무에서도 모진 비 바람을 견디어낸 감들이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오후에 제가 잘 익은 홍시 감을 하나 먼저 따서 먹었는데 아주 달고 맛 있습니다. 홍시 감을 따면서 작년에 천국에 가 계신 박권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매년 홍시감을 따드리면 잘 잡수셨는데 올해는 제가 한 개만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홍시가 한 개 있는데 예배후에 장선화권사님 연세가 제일많으니(95세) 목사님이 하나 따 드릴테니 잘 잡수시고 힘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이 홍시가 되는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마음껏 따 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와 같은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언제까지나 낭만적인 분위기에 쌓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준비하여 우리가 하늘 곡간에 들어갈 수 있는 알곡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모르면서 산다면 자기 인생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잘 알 수 있을까요? 요즘 자기를 아는 방법으로 유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MBTI’라는 것입니다. ‘MBTI’라는 심리검사를 통해서 자기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직원을 뽑는 면접에서도 기본적으로 이것을 질문한다고 하고 면접받으러 온 사람들이 전부 다 MBTI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와서 즉각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점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점을 보면서 들은 말이 자기의 전부인 것처럼 믿으면 그 사람은 분명 불행하게 됩니다. 심리검사에서 나온 자기, 점을 보아서 아는 자기가 자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 안에는 수많은 유형의 자기가 존재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반응하는 자기가 다르고, 감정에 따라서 반응하는 자기도 다르고, 가치에 따라 반응하는 자기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솔직히 삶을 살다가 자기가 자기에게 놀랄 때가 있고, 자기가 자기에게 어색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살다가 이런 생각이나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그랬지’ 자기가 해 놓고 ‘내가 왜 그랬지’라고 하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모를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믿음과 신앙으로 고백한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매구절마다 ‘나를 살피신다, 아신다, 감찰하신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이고, 이것이 다윗인생을 지탱하고 힘을 주었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고백이고, 신앙이어야 합니다. 인생을 너무나 멋지게 살았던 인생 선배이신 다윗은 인생에 대해서 무어라 고백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를 믿는 백성들의 무엇을 살피실까요?
1.하나님은 나의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139편 전체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세세한 것까지 모르시는 것이 없이 다 아신다고 구구절절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39:1절‘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인간을 세세히 아신다고 고백을 합니다. 다윗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토록 파란만장한 인생살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잘 아신다는 이 고백속에는 고단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담겨져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인생을 멋지게 살 수 있는 복잡한 비법을 터득한 사람이 인생을 더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멋지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인생을 가장 잘 아시는 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세상의 온갖 수단과 방법을 터득하여 살았던 사람들이 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가요? 오히려 더 멋지게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인생이 더 불행하게 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나의 인생을 설계하시고, 나의 인생을 책임져주실 수 있는 분과 동행하는 비결보다 더 좋은 인생살이 비결은 결코 없더라는 것입니다.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꼭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무거운 짐 다 맡기고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타칸’으로, ‘무게를 달다’, ‘공평하게 평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 겉으로 드러낸 행동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즉 일의 동기에 대해서도 판단하신다는 뜻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속마음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판단은 옳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바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믿음과 신앙으로 고백한 다윗의 시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매구절마다 ‘나를 살피신다, 아신다, 감찰하신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이고, 이것이 다윗인생을 지탱하고 힘을 주었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고백이고,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2절‘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감찰한다’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은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멀리서도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다 꿰뚫어 보시고 밝히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매우 긍정적인 말씀도 되지만 동시에 매우 불편한 말씀도 될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다윗조차 좋은 생각만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런 다윗이 오늘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라고 고백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이 나의 생각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것은 좀 다른 의미로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는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보면 너무나 마음이 답답할 때도 있고,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누군가 나의 마음을 이해해 준다면 너무나 고맙고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내 생각이 어떤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피차 오해하기도 하고 섭섭해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우리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생각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밝히 아신다고 말합니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생각을 살피신다는 말은 나의 속을 아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겉을 봅니다. 아니 겉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속까지도 보시고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마음, 생각, 나의 속을 꿰뚫고 계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심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외롭습니까? 마음에 억울함이나 답답함이 쌓여 있습니까? 마음에 우울함이 있습니까? 나의 마음을 다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다윗처럼 맡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우리보다 더 외로운 인생, 억울한 인생, 답답한 인생, 우울한 인생, 공포의 인생 속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다 이겨내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나를 가장 잘 아시고 이해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외로움도 이기고, 억울함과 답답함도 내려놓고, 우울한 마음도 떨쳐버리면서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생각과 속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인간의 모든 것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생각한대로 다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격을 낳고 인격이 삶을 낳는다’ 참 귀한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생각한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고, 행동이 계속 반복되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습관이 인격을 만듭니다. 바로 그 인격이 그 사람의 삶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처음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리처럼 계속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의 처음과 끝만 한번 연결해 보십시오. ‘생각이 삶을 만든다’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결국 어떤 삶을 사느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땅한 것이 아니면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속은 은혜로운 생각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는 것을 지금 마치 내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각은 넓게 보는 것이고, 멀리 보는 것이며, 깊이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근시안적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멀리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멀리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생각은 10년, 20년을 앞서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장래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생각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생각을 살피십니다. 그래서 이제 지혜롭게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고, 은혜로운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은 나의 말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은 내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맞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미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앞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친절한 말은 많은 비용이 들지 않지만 많은 것을 성취한다. 친절한 말은 다른 사람을 감화하여 사람의 영혼 속에 아름다운 이미지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남들이 나에게 친절한 말 해주기를 원합니다. 친절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기도 높아집니다. 반대로 불친절한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친절한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나의 말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말이 씨가 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4절‘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만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의 말도 살피고,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소통의 존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에게만 언어를 주셨고, 사람은 말로 소통하며 자기의사를 표시하면서 힘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 대화하고 소통합니다. 사랑이 소통이고, 교제가 소통이고, 심지어 설교도 소통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이 바로 말인데, 어떤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갓난아이의 말이 그렇다고 봅니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옹알이를 합니다. 그러면서 뭔가 자기의사를 표현하기 작합니다. 그런 아이의 말은 사실 제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그런데도 신통하게 그 말을 엄마가 알아듣습니다. 아이가 무슨 옹알이를 해도 그 말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말로만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다윗이 나의 생각을 아신다고 말하면서 여기 ‘통촉’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통촉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형편을 헤아리고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말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위에서 낮은 우리의 소리를 선명히 알아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엄마와 같이 옹알이하는 우리의 말까지도 다 알아들으십니다. 그래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께 우리가 말하며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옹알이를 들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다윗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통해 힘과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에 칠흑 같은 어두움의 때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잘 몰랐습니다. 하루도 눈물 없이는 지내기가 힘들었던 세월입니다. 원통하고 분하기도 했고, 답답하고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들과 어려운 때에 다윗은 나를 살피시고, 나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이 존전 앞으로 달려가 때론 부르짖으며, 때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말,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일으키셨고, 힘을 주셨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말을 아시고, 기도를 들으십니다.
출애굽시대에 광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열두지파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을 탐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가 달랐습니다. 특히 열지파의 대표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백성들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으로 보고하며 백성들을 설득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고, 지도자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의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도저히 들어가지도 못할 가나안으로 어떻게 들어가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의 말이 하늘에 사무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14:28절‘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지만 또한 두렵고 떨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들은 대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다고 말하는 자는 가고, 못 간다고 말하는 자는 못 간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한다고 말하는 자는 하고,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의 입에서 축복을 말하면 축복을 주고, 만약 저주를 말하면 저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대로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골4:6절‘너희 말을 항상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여기서 ‘은혜 가운데서’ 라는 말은 ‘선물 가운데서’, ‘감사 가운데서’ 또는 ‘기쁨 가운데서’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하심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하든지 항상 은혜가 가득한 가운데서, 선물과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가운데서 마치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나의 말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함께 하셔서 소통의 평화와 대화의 행복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살피십니다. 이런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말, 좋은 말,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말한 대로 하나님이 시행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날마다 기도하고, 좋은 말, 바르게 말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은 나의 행위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은 그의 모든 길과 그가 눕는 것까지도 살펴 보시고 그의 모든 행위를 자세히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라는 것은 내가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나의 일거일동을 환히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밝히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을 할 때나 아니면 쉬는 것까지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괴테는 ‘행위란 자기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했습니다. 행위를 보면 그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 믿음이나 사랑 등을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부분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행위와 행실을 우리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3절‘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기 하나님이 나의 행위를 아신다고 말합니다.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말합니다. 여기 ‘익히’라는 말은 ‘확실히, 또렷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가 확실히 드러나고, 또렷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도 아시고, 말도 아시지만 행위를 아십니다. 생각, 말, 행위 이것은 곧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은 전부 드러나고,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통찰하고, 살피고,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의 이 고백은 2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그가 범죄의 행위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이런 죄를 범할 당시 그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누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또렷이 보고 계셨습니다. 나단선지자의 책망의 소리가 들려올 때 그가 겸손히 엎드린 것도 하나님이 아시고, 그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것을 깊이 깨달은 뒤에 여기 나의 행위를 아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참되게 살기를 다짐합니다.
어느 중년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는데, 그만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일도 일이지만 당장 출퇴근 하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그때 남편이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의 출퇴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직장이 서로 너무 머니 혼자서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 섭섭했고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지팡이를 의지하여 많이 넘어지기도 하면서, 버스를 타고 혼자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2년이 지난 어느 날, 버스운전기사가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부인은 복도 많으십니다.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며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이 말을 들은 아내의 마음은 눈 녹듯이 녹아내리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고난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모든 길과 눕는 것을 살펴보십니다.
신5:32-33절‘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불안과 두려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은 생명과 번영과 장수의 복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나보다도 나의 행위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행위를 지켜주셔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써 생명과 번영과 장수의 복을 받게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39편 마지막에는 그의 결단과 헌신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입니다. 신앙인도 잘못할 수 있고,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완전하지 못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연약한 행위를 인정하고 다윗처럼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고 다짐해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를 의지하며 악을 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행위라는 말의 다른 측면은 그의 시련과 아픔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정말 다윗처럼 신실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 대해 신실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신실했습니다. 그는 나라가 어려울 때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비겁하고 도망가거나 움츠려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울왕이 번민하고, 고민하며 심한 우울증으로 육체의 고통을 받을 때 가까이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그는 광기가 발동하여 독을 품고, 온 병력을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너무도 아쉬웠고, 속상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선한 행위를 한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통과 시련이었습니다. 그때가 참 힘들었던 생애였습니다. 많이 울었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자기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때 다윗이 발견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의 행위를 아시고, 나의 사정과 형편을 익히 아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중심을 아신다는 믿음이 고통과 시련의 때를 이기고 감당할 수 있는 위로요 힘이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진정 살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갈처럼 그의 인생에 ‘브엘라해로이’를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드십니까? 속상하고 답답하십니까? 아무도 나의 사정을 몰라주는 것 같아 외롭고 고독하십니까? 그럴 때마다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형편과 행위를 아시고, 눈물과 고통을 아시고, 나의 억울함과 곤란함을 기억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맡기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엘리사 호프만(Elisha Hoffman)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레바논의 작은 교회에서 평생 헌신적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설교 준비나 찬송시를 짓기 위해 서재에 있는 시간 외에는 성도의 가정을 돌아보며 상담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1894년 이른 봄 어느 날, 그는 가난한 성도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때 그 집 부인이 무슨 일엔가 비통해 하면서 들어오는 목사를 보자 통곡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의 가정에 시련이 닥친 것입니다. 선하게 살던 가정에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그는 간절히 기도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힘들고 어려운 성도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무거운 짐, 우리의 곤고한 상황, 나의 억울하고 힘든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아시고, 살피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돌아보신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집에 들어와 바로 시를 적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래가 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입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예수’ 여러분 염려하지 말고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아시며, 그에 따르는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기보다는 나의 모든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를 맡겨야 합니다. 기도는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나를 섬기는 천사가 기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히1:14절‘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라고 하시며, 계8:3-4절‘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하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의 기도는 천사들에 의하여 하나님 앞으로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작은 죄악도 역시 천사에 의하여 하나님께 보고 드려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마18:10절‘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후2:15절‘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주님이 나타내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십니까? 앞길이 정말 막막하여 살맛이 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한다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까지 살피시며, 여러분의 환경과 처지를 아시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다만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하시며,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로 다가오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자신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시며, 나의 모든 생각과 말을 아시며, 나의 행동을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이며, ‘염려하지 말고 맡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진정으로 주님께 다가가며, 자신을 맡기는 자들에게 능력과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복을 받고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브엘라해로이’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을 아시고, 나의 말을 감찰하시고, 나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이제 나의 악한 행위를 내려놓고 선한 길을 가야 합니다. 또한 나의 약한 모습도 내려놓고 주님의 돌보심속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께 늘 지혜로운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가장 선한 말, 기도와 찬송으로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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