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설)
치열한 삶이 빚은 자양을 먹고 자라는 박갑순의 수필
김형진(수필과 평론 쓰는 사람)
경험經驗과 체험體驗을 혼용하는 경우를 더러 대하지만 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는 말이다. 둘 다 어떤 일을 겪었다는 점에서는 상통하나 겪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많은 격차가 있으니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1연과 2연이다.
이를 독자에 따라 달리 감상할 수도 있겠으나 경험과 체험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대상(겪은 일)을 그냥 보고 지나치느냐, 대상의 내면에 자아를 투입하느냐에 따라 ‘몸짓’이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도 이를 피상적으로 대하거나 표면적인 이해利害를 따지는 데 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상황의 내면에 자아를 투입하여 진실에 접근하려는 사람도 있다. 달리 말하면 경험은 육안肉眼으로 대상의 겉모습(몸짓)을 보는 데 그치는 것이라면 체험은 심안心眼으로 대상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진정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꽃)을 찾아내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문학은 체험의 기록이다.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물 흐르듯 다듬어 놓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겉치장에 그친다면 그것을 좋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다. 문체를 문학작품의 주요인으로 평가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수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박갑순의 수필에는 문장이 수려하다거나 소재나 주제가 색다르다거나 한 게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 오거나 콧날이 찡해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작가가 각박한 현실을 치열하게 극복해 가는 모습을 유별난 장식 없이 진솔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그 여자가 가는 길>과 <또 한 번의 계기>에는 표면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을 치열하게 극복해 가면서 표면적 부정을 내면적 긍정으로 바꾸려는 치열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친구들이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치마를 입고 중학교로 향할 때 난 남의 집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들로 젖을 먹이러 다녀야 했다. 여름엔 모내기 작업단에 소속되어 어른 반몫의 품삯을 받고 모내기를 했다. 그때도 틈만 나면 누런 ‘백노지’로 묶은 연습장에 뭔지 모를 수많은 넋두리들을 풀어놓곤 했다. 나 자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적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목 놓아 우는 대신에 난 내 안에 수줍게 뿌리내려 싹을 틔우고 있는 문학을 들여다봤다. 그와 만나서 내 속내를 털어놓는 시간은 나름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 세계엔 시골집 뒤란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이슬 머금은 봉숭아와 채송화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 속에서라면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하는 가난의 고통쯤 오독오독 씹어 소화시킬 수 있는 힘이 생겼다. - <그 여자가 가는 길> 중에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뿐 아이들 때문에 쉽게 뛰어들지 못하던 직장생활을 남편의 강권에 내몰려 하게 되었고, 당시에는 아픈 상처를 받았다 생각했던 선배의 홀대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두 사람이 주부인 나를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했거나,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흔히 배고픈 계기가 밥을 먹게 하고, 외로움이 친구를 찾게 하고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를 더욱 치열히 살게 하다지 않는가. 내게 문학은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키워온 꿈이었다. 살아오면서 많은 난관에 부딪치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질 때도 늘 함께 있어 마음 든든한 친구였다. - <또 한 번의 계기>중에서
<그 여자가 가는 길>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문학의 싹을 틔우는 어린 화자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나아가 문학을 통해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또 한 번의 계기>에도 계속되는 부정적인 상황을 문학에 대한 꿈을 놓지 않는 화자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 있다. 원만하지 못한 결혼생활로 인해 사회에 나와 외판원을 하게 된 그가 믿고 찾아간 선배가 상처를 입혀 첫 직업은 접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주저앉진 않는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할까. 소읍의 원로시인이 원장으로 있는 문화원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막연하게 꿈꾸어 온 문학에 한 걸음 다가서는 계기가 된 것이다.
원장님의 그늘에서 문학의 토양을 다질 수 있었고,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문인으로서의 소양과 양식을 쌓을 수 있었다. 매창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매창이 켜는 거문고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가만히 분묘의 잡초에 귀를 대어보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화우 흩날리는 이 봄날, 그곳에선 평안히 매창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계시는지.
배꽃은 여전히 피어서 흩날리는데……. - <이화우 흩날리는 곳> 중에서
몇 년 동안 문화원에서 일하면서 원장님을 통해 문학의 바탕을 다질 수 있었고 문인의 자세와 소양을 기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삶에 대한 바탕과 자세를 다져준 분은 어머니다. 삶을 도외시한 문학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이 두 분은 화자의 삶과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임에 틀림없다.
어머니 병세가 악화되기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막냇동생을 잃었다. 동생은 내가 여상을 졸업하던 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난 동생의 학비를 감당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취업을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때 받은 최소한의 보상금을 차마 쓰지 못하고 간직해 두었었다.
수술이 잘되어서 차츰 건강을 회복하신 어머니는 알고 계셨다. 막내아들 목숨 값으로 제2의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지금은 시골에서 혼자 사시니 때론 식사도 거를 수 있고, 때론 몸 관리에 소홀할 수도 있을 테지만, 막내아들과 맞바꾼 생명이니 소홀히 살 수 없으셨던 것 같다. 수술할 때 병원에서 잘하면 5년, 좀 더 잘 관리하면 7년을 살 수 있다 했는데, 10년 넘게 잘 견디고 계신다. 말씀은 하지 않지만, 동생의 목숨 값을 하기 위해 더욱 건강관리에 힘쓰시리라. 막냇동생은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났지만, 그 나름의 값을 한 것이다. - <값> 중에서
아직은 철부지여도 좋을 딸년이 대학 학비를 염려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학비 걱정일랑 말고 네 꿈을 펼치라고, 너는 아직 그런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빛나는 미래를 설계하는 일에만 신경 쓰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는, 소풍날 딸년을 빈손으로 보내고 말없이 뒷모습을 바라만 보시던 어머니가 된다. “꽁보리밥 창피해서 싫단 말이야.” 어머니 가슴에 비수로 꽂혔을 그 말을 다시 거둬들일 수가 없다. 어머니의 슬픈 얼굴을 보면서도 끝내 맨몸으로 소풍 길에 올랐던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딸은, 엄마 맘 아플까 봐 학업 중단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속 깊은 딸을 보면서 철없던 딸이었던 나는 이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늘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기를 기도했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자식 위해 평생 구슬땀을 흘리셨던 어머니. 늘 죄인의 마음으로 단 한 번도 큰소리 내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뱉지 못한 가슴속 말들을 이제야 귀를 세워 듣는다. 그 어머니의 맘으로 말없이 딸을 바라본다. - <하얗게 웃는 법>중에서
가난은 생활에 불편을 준다. 때에 따라서는 뜻하지 않은 슬픔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여상을 졸업하고 갓 취직하여 받은 급료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막내가 자기의 생활터전을 찾기 위해 성경하여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로 인해 받은 보상금을 차마 쓰지 못하고 간직해두는 화자에게 보상금은 그냥 돈이 아니다. 물려받을 유산이 많은 부자들의 타산이 아니다. 가난이 가져다준 비극이 꼭 불행으로 마감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부자의 타산으로는 값을 측정할 수 없는 풍요를 선사한다. 문제는 상황을 수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달리 융통할 길이 없어 막냇동생 목숨 값을 쓴다. 전답을 사거나 집을 짓거나 자동차를 사려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막내의 목숨 값을 어머니가 제2의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쓴 것이다. 퇴원할 때 병원에서는 길어야 7년을 더 살 것이라 예언했지만 어머니는 10년이 넘도록 살아 계신다. 막내아들의 목숨 값으로 연장된 생명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건강관리를 잘 하고 계실 것이라 헤아리는 화자의 심중에는 가난의 불편과 슬픔을 극복한 넉넉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값>에서 읽을 수 있다.
학비를 걱정하여 스스로 대학을 중퇴한 딸. 그런 상황에서도 학비 걱정일랑 말고 학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화자가 떠올린 것은 어머니다. 초등학교 적 꽁보리밥 도시락이 싫어 빈손으로 집을 나서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늘 죄인의 마음으로 큰소리 한 번 뱉지 않았던 그 어머니의 가슴속 말에 이제야 귀를 기울이는 화자의 심경을 <하얗게 웃는 법>에서 읽을 수 있다.
박갑순은 도시에 있는 잡지사에 취직하면서 그동안 가슴속에서 키워온 문학에 대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다. 소읍에 있을 때 시를 쓰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수필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문학잡지를 발간하는 잡지사 가족으로 일하게 되면서 다시 문학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하계수필대학 세미나’가 내 인생에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아직 수필의 정체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하계수필대학 세미나’를 계기로 내 가슴에 내 삶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는 수필에 대한 열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수필로 등단하여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펼치게 되었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많아 부끄럽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일이 내게 주어진 과제이다.-<또 한 번의 계기> 말미
수필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수필가로 등단한 화자지만 그의 수필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열해 앞으로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한다. 그래서 궁핍을 무릅쓰고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고 유명작가의 수필을 읽고 때에 따라서는 수필을 가르치는 곳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대하는 모든 것의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는 안목이 생성에 힘쓴다. 이는 주체적 인식을 형성함으로써 외형적인 치열성을 내면에 가라앉혀 자아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 주체적 인식이 알차게 형성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문학인이 될 수 있다. 이 주체적 인식이 빠진 글은 제아무리 매끄럽고 화려한 문체를 과시했다 해도 그것은 잡문에 불과하다. 특히 수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마사지를 마치고 오백여 미터 거리의 집에 갈 때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누군가 아는 사람에게 보일까 싶어 깊이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새삼스럽게 보이지 않지만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내면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겉모습이야 이렇게 피부는 마사지를 받으면 되고, 낮은 코는 성형외과에 가면 되고, 뚱뚱한 몸매는 헬스장에 다니면 될 테지만 빈약한데다가 단순하기까지 한 정신세계는 어떻게 가꾸고 다듬어야 할 것인지 막막했다.
이제 1회 남은 마사지 숍 방문은 내면을 좀 더 가꾸고 다듬은 다음에 해야겠다. - <마사지> 중에서
겉모습보다 내면의 세계를 성찰하며 자아를 다지려는 데 치중하는 이러한 치열성은 수필문학에서 요구하는 필수적인 일면이다. 박갑순의 수필 중에는 <뚜벅이 인생>, <염색> 등 다수가 있다. 이 치열성은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일들에서도 작용한다.
출근길 노란 버스를 만났다. 여자 운전자가 저만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차를 멈춘다. 어서 건너가라고 손짓하며 해맑게 웃는 모습이 한 송이 꽃 같다. 아이가 총총 걸어서 노란 버스를 탄다. 아이를 태우고 암탉처럼 뒤뚱거리며 지나가는 차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어느새 입가에 꽃향기 퍼지듯 노란 웃음꽃이 피어난다. 선한 웃음의 강한 파급력이리라.
(중략)
많은 꽃들 중 웃음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소심한 성격 탓에, 적은 액수라는 생각에 선뜻 나누지 못하는 나지만 내겐 웃음꽃이 있다. 매순간 누구에게라도 환한 웃음을 나누리라. 무례하게 운전하는 사람을 만나도, 무단 횡단하는 사람 때문에 급정거를 해야 할 때도, 그 운전자처럼 먼저 웃어 주리라. 초록 나무들로 가득한 저 산처럼 온 세상이 웃음꽃 만발했으면 좋겠다. -<웃음꽃> 중에서
낯 찡그릴 일이 허다한 일상에서 어린이 통학용 노란 버스의 여자 운전자가 보여준 배려와 해맑은 웃음은 무더위 속에서 맛보는 청량제였을 것이다. 그를 대하면서 화자는 자신을 돌아봄과 동시에 해맑은 웃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웃음꽃이 만발한 세상으로 변하기를 바란다. 강한 자의 갑甲질에 웃음을 잃은 을乙들이 많은 세태를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새로 들인 차를 주차장에 며칠을 두고도 차마 6681에게 이별을 고하지 못했다. 그동안 버스 통근을 했으나 며칠은 6681과 마지막 정을 나누기 위해 자가용 통근을 했다. 폐차장에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단골 카센터에 맡기기로 했다.
그와 헤어져야 하는 날 벚꽃이 만개한 나무 밑에 주차했다. 점심시간 틈을 내어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심호흡을 하면서 6681의 체취를 음미했다. 고마웠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제 영원히 사라져갈 나의 6681이여! 너와의 행복했던 추억 잊지 않으마. -<안녕 6681>에서
‘6681’은 폐차할 수밖에 없는, 화자가 몰던 차의 번호다. 외형적으로 강한 자는 약자를 경시하지만 내면적으로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고장이 잦아 괴로움을 많이 준 애물단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차를 폐차장에 보내야 하는 화자의 마음은 마치 가깝게 지내던 친구나 피를 나눈 동생과 이별하는 듯한 애틋함으로 차 있다. 감정이입을 시킨 표현이 애틋함을 더한다. 이제 못쓰게 된 폐차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쏟는 화자의 모습은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에게 전하는 강한 경고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족들에게도 평범한 남편으로 아빠로, 큰 불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1등 신랑, 1등 아빠는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말씨로나 풍기는 이미지로나 그분의 말에서 진실이 느껴졌다. 누구에게 몹쓸 짓 하고 살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제 지천명을 넘고 보니 단 한 번도 정상에 서보지 못했다는 것이 회한으로 남는다 했다.
힘겹게 수왕사에 올라 약수 한 모금 마시고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딸과 함께 처음으로 오른 곳이다. 간간이 모악산에 갔지만, 늘 대원사에서 돌아내려오곤 했다. 내게 오늘 산행은 정상에 오른 거나 다름없다.
“어이. 난 오늘 기어이 정상에 오르고 말 것이네.” 같이 산에 오르다 하산한 일행에게 그는 다짐했다.
하산을 서두르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그는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정상>에서
정상頂上은 어떤 분야의 맨 꼭대기, 곧 우두머리를 뜻한다. 정계政界에서 정상은 대통령일 것이며 재계財界에서 정상은 대기업의 회장일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정상은 그런 외면적인 것이 아니다.
산행 초보인 모녀가 모악산 등산 중에 허약해 보이는 남자를 만나 동행하게 된다. 그 남자는 지금까지 그저 평범한 남편이요, 아빠였을 뿐 한 번도 1등 남편, 1등 아빠가 아니었다는 회한을 토로한다. 화자의 모녀로서는 처음 오른 수왕사에서 여기가 정상이라 생각하며 하산하기로 한다. 남자는 먼저 하산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꼭 정상에 올라보겠노라’ 다짐한다. 화자나 그 남자에게 정상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다. 늘 조금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자기 삶의 내면적인 공간을 채우는 일이다.
<정상>은 화자 내면의 갈망을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어 부정적인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려는 의지를 형상화한 수필이다.
다리가 서서히 팍팍해옵니다. 걸을 만큼 걸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서 벤치에서 놉니다. 달도 따라 내려왔네요. 운동하던 사람들은 이미 들어 가버렸습니다. 물론 그들이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지요. 그러니 한두 바퀴는 평소보다 더 걸었지요. 별 사이를 비집고 엉덩이를 살짝 걸쳐봅니다.
온종일 걸어온 내 생활이 쭈욱 영상처럼 펼쳐집니다. 종종걸음 쳤던 조바심들이 이제야 평화로워집니다. 고단한 다리 쉬게 해주는 벤치처럼 내 복잡한 맘 부릴 벤치 하나 찾기 위해 오늘도 종일 서성거렸는지 모릅니다. 한참을 별과 달 생각하며 앉았습니다. 가만히 일어나 바라봅니다.
그는 밤새 혼자 하늘을 지키겠지요. 누구라도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안락의자가 되기 위해 기원하고 있을 겁니다. 비록 딱딱한 나무 조각 몇 개 이어 만들어진 몸이지만, 고단한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마음은 솜털구름이겠지요.
내일도 또 내일도 이렇게 품 넓은 벤치 주변을 걷다 보면 나의 속도 조금은 넓어지겠지요. 어서 오늘과 작별하고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렵니다. -<그에게 묻다>
그는 공원 산책로에 설치된 벤치다. ‘그’는 주로 ‘그 일’ ‘그 벤치‘에서처럼 사물을 가리키는 근칭지시관형사로 쓰이거나, 화자와 청자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대명사로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에게 묻다>에서 ‘그’가 가리키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을 초월한다. 산책객들이 모두 돌아가 한적한 공원에 놓인 벤치는 하늘의 별과 달은 물론이고 누구라도 앉아 편히 쉴 수 있는 솜털 같은 곳이다. 화자가 노쇠한 어머니와 대학을 포기한 딸에 대한 걱정과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부려놓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미리 내려와 앉은 별들 사이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본다.
별들 사이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는 화자의 의도는 조심스럽게 자연에 접근하여 일상에 지친 몸을 쉼과 동시에 삶이 주는 고단함에 찌든 마음을 순화시켜 활기찬 내일을 맞으려는 데 있다.
바람 앞에 속수무책 흔들리는 꽃들이 맥없이 세상에서 일탈 경로에 놓여버린 환자들 같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내 모습 같다. 난 내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봄엔 맑은 꽃을 피우고 겨울엔 꽃 피울 준비하며 지내왔건만 병마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들이 암 선고 받던 날의 나처럼 처량하다. 모든 약한 것들이 내 몸인 양만 싶다.
목련의 꽃망울에 유독 맘이 닿는다. 한 아파트에서 10여 년을 살 때, 화단에 많이 서 있는 목련을 벗하며 지낸 이유인지 까닭 없이 목련이 좋았다. 특히 하얀 목련을 좋아한다. 그러나 맥없이 떨어질 때, 떨어져서 바닥에 버려졌을 때의 모습은 왠지 마음을 아리게 했다. 지금 맺은 목련 망울은 어떤 빛깔의 꽃을 피워낼지는 모르겠다. 저 여린 망울이 되기까지 얼마나 긴 아픔의 강을 건너왔을까. 내가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오늘처럼 다시 세상을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건너 여기 있듯이. 이제 바람아 멈추어라. 여린 꽃망울 꽃 못 터트리겠다. 네가 멈추어야 내 삶에 휘몰아친 바람도 멎을 것이다. 활기찬 목련꽃이 자태를 드러내는 날 나 또한 툴툴 털고 삶의 이랑을 힘차게 달릴 수 있으리라.
-<꽃망울 떨어질라> 중에서
뜻하지 않은 암 선고로 수술을 받은 화자가 길고 어두운 생사의 터널을 지나 지금은 회복 중이다. 재활을 위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은 수목원에 들어서 세찬 꽃샘바람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수목들을 본다. 그중에서도 친근감이 가는 목련의 꽃망울에 마음이 쓰인다. 아직 꽃도 피우지 못했는데 차가운 바람에 떨어질까 걱정인 것이다. 그러나 꽃샘바람은 꽃을 피우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 이제 조금만 지나면 목련은 꽃망울 터뜨려 그 화사한 자태를 뽐낼 것이 분명하다. 화자는 꽃샘바람에 시달리는 목련 꽃망울을 병마와 싸우는 자기로, 꽃망울을 터뜨려 활짝 필 목련꽃을 병이 완치될 자기로 대입시키고 있다. 겉으로는 병이 완쾌되어 활기찬 생활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부정적 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하여 긍정적 상황으로 변화시키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모든 문학은 인생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남기는 모든 기록이 다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학은 인생의 재구성이라고도 한다. 살아가면서 겪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작가의 재량에 의하여 다시 짜놓은 것이라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다시 짜놓는 데는 철학적 사유와 예술성이 요구된다. 이 철학적 사유와 예술성이 결여된 글은 문학일 수 없다.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다. 도화지와 연필과 물감만 있으면 유치원생이든 노인대학생이든, 무슨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그릴 수 있다. 그렇다고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다 미술가는 아니다. 미술가이기 위해서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기교를 결합하여 자기만의 세계를 표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구도, 데생, 채색을 통해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출할 수 있게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 없이 대상의 외향만 그럴 듯하게 그려 놓는 이는 미술가가 될 수 없다.
글도 누구나 쓸 수 있다. 특히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가 겪은 일, 잘 아는 사람, 메스미디어를 통해 얻은 것, 책에서 읽은 것들의 외형을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써놓으면 수필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체험을 재구성하여 그 안에 자기만의 생각이나 느낌을 담아 묘사, 서사, 유추 등의 방법에 의하여 문학적으로 표현해 놓았을 때 비로소 수필이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문체(글)은 마음의 얼굴이다.’는 그대로 수필에 적용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박갑순에게 부여된 상황은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필집에는 이 부정적인 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하여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얻은 체험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얻은 체험은 앞으로 박갑순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자양이 될 것이다.
거제도 해금강에는 바위 절벽에 의연히 서 있는 소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천년송千年松’이라고 하고 해금강을 지키는 ‘수호송守護松’이라고도 한다. 이는 그 생명이 단기적인 것이 아니며 그 가치가 경제성으로 가름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좋은 환경에서 쑥쑥 자라 궁궐의 기둥으로 쓰였다는 ‘금강송金剛松’에 비할 바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