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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성지 역사 박물관
구 산정동 성당 부근의 이 건물터는 옛 성 골롬반 병원 부지였는데 1937년 광주지목구가 설립되면서 여기에 교구청이 건축되어 광주 ‧ 전남 ‧ 제주 지역 선교를 위한 거점으로 사용됐었다. 1956년 교구청이 광주로 이전한 후에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 목포 분원, 성 골롬반 병원, 성신간호전문대학 등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목포성지 역사박물관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중앙부의 반원 아치와 필라스터(벽기둥, 벽채에 부착한 기둥모양을 한 것)로 장식된 현관 포치(건물의 현관 또는 출입구의 바깥쪽에 튀어나와 지붕으로 덮인 부분)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처마선 아래와 층간 사이에는 수평 돌림띠로 장식하고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하였으며 내부의 목조계단과 천장 등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로 인해 2012년 10월 17일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광주대교구는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2016년 가톨릭목포 성지 조성 1단계 사업의 일환으로 구 교구청 건물에 대한 원형복원 및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옛 모습을 되살렸다. 그리하여 2017년 8월 28일 축복식을 거행하고 재단장하여 역사박물관으로 바꾸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1235㎡ 규모의 역사박물관은 1층에 시청각실과 함께 광주대교구 역사 유물 전시장을 마련하고, 2층에 한국 레지오마리애 역사 유물 전시장을 두었다. 그리고 3층에는 교구 설립 초기 사제관을 재현한 공간과 평소 기획전시실로 활용할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지하층은 기도와 묵상의 공간이다
▲1층 - 광주대교구 역사 유물 전시
▲2층 - 레지오 마리애 관련 유물 전시
성모님의 슬픔과 기쁨
▶성모칠고(聖母七苦) - 시메온의 예언, 이집트 피난,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의 만남,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 성시(聖屍)를 안으심, 장사 지냄
▶성모칠락(聖母七樂) -성모영보(聖母領報), 엘리사벳 방문, 예수님의 탄생, 동방박사의 경배, 성전에서 다시 예수님 찾음, 예수님 부활, 성모승천
광주대교구 5대 교구장이었던 헤롤드 현 대주교는 1953년 레지오마리애를 처음 도입했다. 흉상 왼쪽은 1963년 첫 아치에스 행사 때에 사용한 대형 백실리움이며 오른쪽은 한국 세나투스 레지오마리애 단기이다.
왼쪽으로부터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 프랑스 뤼뒤박 성모님,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님,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님, 벨기에 바뇌의 성모님
▲지하층 - 기도와 묵상의 장소
역사박물관에는 해설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특히 겟세마니 방을 찍은 사진 하나를 보여주며 아주 특별한 설명을 해 준다. 곧 사진의 크기를 조절할 때 나타나는 한 형상을 제시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이라는 등 깊은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해설을 들을 당시는 성자 예수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돌아와서 해설사가 보내준 사진을 다시 봤더니 그런 모습을 특정할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자연물 바위를 하나 두고도 보기에 따라서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기도 하고,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도하는 모습, 우는 모습 등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역사박물관을 마지막으로 목포성지 순례를 끝냈다. 시간은 역사박물관 관람 시간이 미사시간과 겹친 이유로 예정 시간을 초과하여 이미 오후 1시가 넘었다. 점심을 먹고 2시에 귀로에 올라도 7시는 되어야 경주에 도착한다. 해상캐이블카를 타려면 적어도 3시간은 더 늦어지니 기다리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경주 도착 시간이 밤 10시가 넘는다. 언제 또 오겠느냐며 계획대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해상케이블카는 포기했다. 너무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리한 진행을 하지 않는 것이 이번 성지순례의 기본 수칙의 하나이기도 하다.
점심 식사는 목포명가식당. 홍어를 전문 메뉴로 하는 식당이다. 1인당 2만원이 넘는 케이블 카 요금을 절약했으니 점심은 값에 구애받지 말기로 하자고 했지만 한 접시에 8,9만 원이나 하는 홍어를 쉽게 주문하지 못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일부 회원은 홍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로 반 접시만 시키고 칼치 정식을 주 메뉴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귀로에 올랐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쉬어가며 오다보니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밤 9시가 넘었다.
이번 순례를 마무리하기 전에 낮에 틈을 내어 삼학도 공원에 들렀던 내용 첨가한다.
삼학도(三鶴島)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이난영)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 사람들의 꿈이었고 미래였다. 망망대해로 남편을 떠나보낸 아낙들의 외로움이 녹아있고, 고깃배를 기다리는 상인들의 희망이 달려있으며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건너는 망자들의 한이 녹아있는 곳이다. 이처럼 삼학도는 목포사람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산 시민의 서러움이 엉켜있는 곳이다.
삼학도라는 이름에 담긴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한 젊은이가 무예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처녀가 나타나서 젊은이에게 관심을 두었다. 이에 그는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처녀에게 수련에 집중해야 하니 다른 곳에 가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처녀는 그 말을 듣고 다른 곳에 가서 기다렸지만 젊은이는 끝내 오지 않았고 처녀는 식음을 전폐하다 죽게 된다. 처녀는 세 마리의 학으로 환생하여 유달산 주위를 떠돌았는데 처녀가 죽은 사실을 모르는 젊은이는 수련 중이던 화살로 세 마리의 학을 쏘아 명중했고 학은 모두 유달산 앞바다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세 마리의 학이 떨어진 자리에서 세 개의 봉우리가 올라왔고 그게 현재 삼학도의 어원이자 전설이라고 한다.
1960년대 후반까지 삼학도는 이름 그대로 섬이었으나 당시 목포 앞바다 간척 사업으로 인해 육지가 되어버렸다. 2004년부터 삼학도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인공 물길을 내고 가장 큰 섬인 대삼학도에 파주에 있던 이난영의 묘를 옮겨 수목장으로 만들어 난영공원을 조성했다. 2013년에는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을 만들어 목포가 베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사람을 학(鶴)의 품으로 소환한 것이다.
1시간 정도의 시간적 여유밖에 없어 공원 전체를 볼 수가 없거니 했는데 마침 걷기 나온 나이 지긋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자진하여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공원 전체를 돌아볼 수가 있었다.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김대중 기념관은 명칭 그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13년에 개관됐다. 그리고 김대중 묘비는 2009년 김대중 대통령이 죽은 후 국립 현충원에 있었던 것인데, 1919년 이희호 여사가 즉자 대통령과 합장하여 이 기념관으로 옮겼다. 실제 국립현충원엔 실제의 묘가 그대로 있기에 일종의 가묘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난영공원
2006년에 조성했는데 대삼학도 산기슭에 위치한다. 가수 이난영의 노래비, 수목장 무덤 등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멀리는 유달산이 건너다 보인다.
마무리
이번 순례를 통해, 어떤 성지도 독특한 의미를 띠고 있고 따라서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디가나 똑 같은 성당이라 하더라도 성당 내의 제대, 후벽의 고상, 감실, 성수대, 스테인 글라스 창문, 천장 등이 각기 다 다른 것이다. 그리고 성당 내, 외의 예수성심상이나 성모상,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 또한 다 다르다. 그러기에 어느 성지를 순례해도 후회가 없다.
곡성옥터 성지라 했을 때 처음에는 ‘경주 관아와 감옥터’ 정도로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나주와 목포 성지로 가는 길에 쉬어가는 곳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사소한 불미스런 사건이 발단이 되어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筆) 격으로 전국으로 확산이 되어 정해박해가 일어났으니 결코 대수롭지 않은 곳이 아니었다. 옹기가마 형태의 아담한 성전, 그리고 제대 후벽 예수님 상을 대신한 어린 양, 쇠사슬 차고 있는 예수님, 성인 행적을 나태 낸 스테인 글라스 등도 특이했다.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은 전남에서 유일하게 박해시대 순교자를 낸 성지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비록 순교자 묘원은 초라했지만 이로 인해 나주 성지가 조성된 근거를 제공하였다.
또한 나주 성당은 하롤드 현(Henry Harold W. 玄)이라는 걸출한 선교사이며 휼륭한 지도자를 맞아들여 지역 교세를 넓혔다. 이 분에 의해 받아들여진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본원은 수녀에 의한 전교사목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아쉽게도 예약을 하지 못해 하롤드 현 대주교관을 보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대신 역사관으로 꾸며진 수녀원 전시관을 보면서 청빈하고 검소하고 낮은 모습의 수녀들의 정갈한 생활상을 볼 수 있어 너무 감동적이었다.
꾸임이 없어 더 좋았던 소박한 성전, 그리고 고대 돌방무덤을 연상하는 순교자기념 경당 또한 특이한 체험을 하게 하였으며 잔디마당의 한쪽, 구멍 숭숭한 거친 석재로 만들어진 순교자의 기도상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고통스런 모습이 순교성인의 본 모습이 아닌가하여 가슴이 아팠다.
가톨릭 목포성지는 모든 면에서 대단했다. 우선 켜켜이 축적된 역사가 성지의 신앙적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예선에는 나주가 행정적, 문화적으로 광주 대신 전남 지역을 대표했듯 목포도 교구청이 광주로 옮겨가기 전에는 전남 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추였다.
오랜 준비 끝에 성지조성이 완료되어 가보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완공되기 전에 이미 준대성전으로 지정된 순교자 기념 대성당은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두 개의 첨탑이 돛대처럼 솟아 있어 지상에서 쳐다보면 마치 교우들을 싣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박과 같은 모습이었다. 불교의 반야용선에 비유될까? 건물의 위용만이 아니었다. 성전 내부에는 십자가 보목과 데레사 성녀와 성녀 부모의 유해를 보물처럼 모시고 있다. 여기다 역사관에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유해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유해를 포함한다면 가톨릭 목포성지의 품격과 위상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레지오마리애가 시작된 목포성지는 성모님 공경의 본산이었다. 한때 3만 쁘레시디움, 30만 명에 육박했던 레지오마리애 행동단원 수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역대 교회활동을 선도했던 것이 레지오 마리애라고 한다면 목포성지가 레지오 마리애로 인해 위상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구 교구청이었으며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활동 거점인 목포성지 역사박물관은 등록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지역 가톨릭 역사와 레지오마리에 활동의 역사적 유물을 볼 수 있는 유물 전시관으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끝으로 염려도 되었지만 먼 순례기를 안전하게 하도록 도와주신 성모님과 늘 격려와 기도를 해주신 미카엘 본당 신부님, 기리고 함께 한 형제님들께도 감사드리며 이 순례기가 관심 있는 모든 신자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