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42. 만세라·샤바즈가리의 아쇼카 磨崖법칙
‘다르마 통치’ 바위 표면에 새겨 명문화 아쇼카왕의 마애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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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샤바즈가리에 있는 아쇼카 마애법칙> |
인도대륙의 중요 불교 유적지에는 항상 ‘아쇼카 석주(石柱)’가 서있다. 싯다르타가 태어난 룸비니, 네팔 니갈리사가르와·코티하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된 붓다가야, 코삼비, 산치대탑 등 곳곳에 원통형의 석주가 있다. 석주가 있었기에 불교유적은 보호됐고, 룸비니는 위치를 확인받을 수 있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불교를 널리 전파시키는 왕이 마우리야왕조의 ‘아쇼카왕’이라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파키스탄에서도 아쇼카왕(재위 기원전 268~232년)의 흔적을 만났다. 탁실라 부근의 ‘만세라’와 폐샤와르 근방의 ‘샤바즈가리’에 있는 ‘아쇼카 마애법칙(磨崖法勅)’이 그것. 탁실라·폐샤와르 등 간다라 지역이 한 때 마우리야왕조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체 아쇼카왕(한역 阿育王)이 어떤 사람이기에 불교와 이렇게 깊은 인연을 가지게 됐을까. 아쇼카왕을 이야기하려면 인도고대사에서 시작해야 된다. ‘부처님 시대’에 있었던 유명한 나라의 왕이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한 빔비사라왕의 마가다국은 후일 ‘시슈나가왕조’와 ‘난다왕조’로 분열되며, 기원전 321년경 마우리야족 출신인 ‘찬드라굽타’(아쇼카왕 할아버지)가 등장, 난다왕조로부터 왕위를 강제로 이어받고 마우리야왕조(수도 파탈리푸트라. 현재 파트나)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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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즈가리 원경> |
〈불타의 세계〉·〈인도불교〉 등에 의하면 당시 펀잡지방이나 북서 인도의 캐시미르 및 간다라 지방에는 수많은 군소 군주국과 공화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들에겐 난다왕조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고, 그들은 오히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아케메네스왕조는 마케토니아에서 군사를 일으킨 알렉산더 원정군에 의해 기원전 330년경 멸망당하고, 승리에 도취한 알렉산더군은 인더스강을 넘어 인도대륙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군사를 되돌려 귀국하던 중 알렉산더는 병사하고 말았다. 이 때가 기원전 323년 이었다.
2300년전 비문…너무 닳아 글씨 잘 안보여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영토는 휘하 장군들에게 분할됐는데, 펀잡지방은 알렉산더가 임명한 태수 필립포스왕의 손에 들어갔다. 필립포스왕은 한 용병에게 시해당하고, 뒤 이은 에우데모스는 기원전 317년 서방으로 가버렸다. 펀잡지방에서 그리스인의 지배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지방에 계속 거주하며 인도 문화에 동화돼 갔다. 그 즈음 알렉산더의 장수였던 세레우코스가 바빌론을 수복하고, 왕조를 세웠다. 그리곤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인도 대륙 정복에 돌입, 인더스강을 건넜다. 그러나 이들 앞엔 찬드라굽타의 막강한 군대가 버티고 있었다. 양 세력은 협상을 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 남부에 이르는 4주는 마우리야왕조가 지배하고, 세레우코스왕조는 500두의 코끼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협상이 마무리됐다. 그리스 세력은 결국 인도 대륙에 들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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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야왕조 판도> |
그리스 세력을 막은 찬드라굽타왕을 이은 사람이 빈두사라왕(재위 기원전 297~268년)인데, 그는 내란을 평정하고 마우리야 제국의 영토를 더욱 넓혔다. 빈두사라왕 사후 왕위가 오른 이가 마우리야왕조 3대왕 ‘아쇼카’다. 등극한 아쇼카왕은 그 때까지도 정복되지 않은 지방들을 공략했다. 지금의 오릿사 지방에 해당되는 칼링가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독립왕국이었는데, 칼링가와의 전쟁은 처절할 정도였다.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막강한 부를 축적한 칼링가를 두고는 마우리야왕조가 인도 대륙을 통일할 수 없었고, 칼링가왕국은 그들대로 마우리야에 편입되기를 거부했다. 아쇼카왕 즉위 8년째 되던 해 전투가 벌어졌고, 승리의 여신은 마우리야왕조의 손을 들어줬다. 전쟁 결과 동쪽으로 벵갈·오릿사 지방, 남쪽으로 마이소르 북부, 서쪽으로 아라비아 해안에 임한 소팔라와 카티아와르 반도, 북으로 폐샤와르 부근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 마우리야 왕조 영토로 확정됐다.
칼링가 전쟁의 비참함과 죄악을 경험한 아쇼카왕은 ‘무력에 의한 통치’에 회의를 품고, ‘힘의 통치’에서 ‘다르마(法)에 의한 통치’로 전환한다. “15만 명이 포로가 됐고 그곳에서 살해됐으며, 몇 배가 되는 사람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이제 칼링가는 정복됐으나, 이후 ‘하늘의 사랑을 받은 왕’(아쇼카왕)은 다르마를 공경하고 가르치고 있다. 칼링가를 정복했을 때 느낀 ‘하늘로부터 사랑받는 자’의 뉘우침에서 나온 것이다”고 아쇼카왕이 남긴 한 마애법칙엔 나온다. 대륙을 통일한 아쇼카왕은 제국의 교통로 곳곳에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명문화한 ‘원통형의 석주’(石柱)와 큰 바위 표면을 갈고 그곳에 법칙문(法勅文)을 새긴 ‘마애법칙’(磨崖法勅)을 세웠다. 파키스탄 북쪽에 있는 만세라·샤바즈가리, 아라비아 해에 임한 카티아와르 반도의 기르나르,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벵갈만에 면해 있는 오릿사 주의 다우리와 자우가다, 남인도의 에라구디 등에 ‘전문 14장’으로 된 비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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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코삼비의 아쇼카 석주> |
마애법칙문에 의하면 아쇼카왕 자신이 불교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2년여에 걸쳐 우바새(남자 재가신도)였지만, 처음 1년 반 동안은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1년 동안 나는 상가에 가서 열심히 노력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 ‘마애법칙의 내용’이 일정 정도 불교에서 영향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 마애법칙의 모든 것이 ‘불교 자체’는 아니었다. 마우리야 제국 안에는 많은 민족들이 있었고, 다른 종교도 있었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의 통일체로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완비된 관료군에 의한 중앙집권적 조직만으로는 부족했고, 높은 정치적 이념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제시된 것이 ‘다르마 이념’이며, 그것은 종파·주의·주장을 초월한, 국왕도 따라야 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야 했다.
인간·동물 살생금지 등 불교영향
그럼에도 아쇼카왕 법칙에 새겨진 내용은 불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인간·동물의 불살생·불상해 △부모·어른에 대한 존경과 순종 △바라문·사문에 대한 경의·보시 △만인이 스스로 힘써야 할 자제·유화·보은·신앙·다르마에 대한 경의 등이 주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불교가 전 인도 대륙에 비약적으로 퍼질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는 ‘마우리야왕조 성립’과 ‘아쇼카왕의 등극’이다. “중앙집권적인 통일 대제국의 존재가 불교 전파를 용이하게 했고, 서북인도를 매개로 한 서아시아 문화와의 교류 역시 불교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던 것”(나라 야스아키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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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만세라에 있는 아쇼카 마애법칙> |
파키스탄 탁실라에 도착한 지 이틀 뒤인 2002년 4월21일. 취재팀은 만세라로 향했다. 아쇼카 마애법칙을 보기 위해서였다. 부처님이 보살일 당시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베어 던진 곳에 세워진 발라 스투파를 지나, 2시간 정도 달렸다. 초록의 나무들을 눈으로 보며 달린 끝에 만세라에 도착했다. 아쇼카 마애법칙은 길 바로 옆에 있었다. 거대한 바위 면을 갈아 만든 편편한 면에 카로슈티 문자로 된 비문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애법칙은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아래·위로 있었는데, 너무나 닳아 비문(碑文)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비문을 보니 만감이 교차됐다. “아쇼카왕이 그렇게 선양한 불교는 어디 가고 비문만 남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나” 등등. 마애법칙이 세워진 지 벌써 2300여 년 전. 비문엔 아쇼카왕의 애불심(愛佛心)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마애법칙은 수많은 시간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바위의 차가운 감촉마저 오히려 정답게 느껴졌다.
이틀 뒤인 지난해 4월23일 폐샤와르 근방의 샤바즈가리로 갔다. 만세라 보다 훨씬 보존상태가 좋은 아쇼카 마애법칙이 그곳에 있었다. 이곳의 마애법칙 역시 카로슈티 문자로 새겨졌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쓰이던 아람문자 계통에 속하는 것이 바로 ‘카로슈티 문자’. 만세라와 샤바즈가리 지역의 마애법칙이 이 문자로 새겨졌다는 것은, 아람어나 그리스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당시 이 지역에 많이 거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호각 안에 있는 마애법칙을 다정한 눈길로 유심히 보았다. 순간 문자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꿈틀거리는 문자들을 보며 이곳에 불교가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파키스탄.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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