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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근대화의 새 여명
1. 6.25전쟁과 삶의 현장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경사스런 날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영광스러운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50여 년의 세뤌 동안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나라를 빼앗아 역사와 풍속을 말살하고 저들의 법과 제도로서 우리의 국민의식을 일본화하였다.
이제는 그러한 글레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생활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광복이 온전한 우리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우리가 광복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희생한 독립열사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민족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바라고 갈망하던 독립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그날의 일은 평생을 두고 절대 잊을 수 없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몇 달 전부터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조심스럽게 돌았다. 많은 사람이 제발 그날이 빨리 오기를 내심 기대하며 소문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러한 기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늘 억압과 긴장이 감도는 하루하루였다.
많은 사람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매일 새로운 소문이 생겨나기를 바랐고 또 실제로 일본이 곧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국제정세에 밝고 발 빠른 일본인들은 하나둘 한국에서의 살림살이를 정리해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우리는 해방이 되면 그동안 일제강점기에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빼앗겼던 본래의 이름을 되찾고 우리글로 편지도 쓰고 무엇보다 이제 막 피어나게 될 이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김제가 고향이지만 외지로 유학을 간 우리들은 김제에 다니러 가던 주말이면 함께 모여 조국의 미래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그 중에도 우리들은 서로가 알고 있는 소문들을 이야기 하며 해방이 되면 무엇을 할까 심각하게 이야기한 적이 많았다.
8월 15일 일본 일왕이 항복을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사람들이 라디오가 있는 곳으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라디오에서는 거짓말같이 일본 일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대동아전쟁 종결의 칙서’를 읽는 일본 일왕의 목소리는 매우 떨렸으며 우리는 숨죽이며 한미디도 놓치지 안호 듣고 있었다.
“짐(일본일왕)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일본을 말함)의 현 상황을 고려하여 비상조치를 취함으로 인해 시국을 수습하고자 한다. 충량한 신민에게 고하노니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시소(미국, 영국, 중국, 소련)4개국에 대하여 공동선언을 수락함을 통고하고자 한다.”
(공공선언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요구한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포츠담 선언’ (1945. 7. 26)이다)
거리는 온통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났다.
언제 준비했는지 태극기를 들고 거릴르 질주하는 사람들과 조국 광복을 알리는 수많은 펼침막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미처 태극기를 준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급하게 일장기를 제각기 개조하거나 일장기를 그대로 들고 나오기도 했다.
모두 하나 되어 부둥켜안고 울고 웃고 수리치며 그동안 받았던 서러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애국선열이 일본이 빼앗아 간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며 외친 만세 소리가 이제 전 국민이 전국에서 동시에 이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뉴스 매체가 빈약했던 그때에 대도시를 벗어난 지방에서는 며칠이 지난 풍문으로 방방곡곡으로 알게 되어 뒤늦게 만세를 외친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2. 서독에서 처음으로 얻은 차관
미국 정부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군사 정권의 앞날은 참으로 암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경제 원조로만 지탱해오던 국가 경제가 원조가 중단됨에 따라서 경제 건설의 꿈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물가는 치솟고 실업자가 길가에 홍수처럼 밀려오면서 사회 불안이 나날이 확산해 가고 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혁명 정부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적 이권 사업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으며 그럴수록 경제 실패의 국민적 원성이 더욱 확산해 가면서 혁명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발상된 것이 서독 정부에 경제 사절단을 파견하여 서독 정부로부터 상업차관을 얻는 것이었다.
미국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일본과의 국교가 열려있지 못한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우리가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선진국은 서독 정부뿐이었다. 그 당시 서독은 라인 강의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국가였으며 세계적 신망이 높은 국가로 동 · 서독 분단된 나라로서 우리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이 일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그 당시 한국에 주재한 서독 대사관의 븅거 대사의 노력은 참으로 우리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도어야 한다.
혁명 정부는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자신이 븅거 대사를 친히 불러 독일 정부로부터 경제 협력을 얻어내는 데 온갖 노력을 집중했다.
한국의 주독 대사로서는 신응균 육군 중장을 예편시켜 현지에 주재시켰고 그 당시 상공부장관인 정래혁 육군 소장을 단장으로 한 최초의 경제사절단을 서독에 파견하였다. 나는 그 당시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구 복무 미필자로 혁명 직후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해 되어 훈련을 받던 중 최고회의 의장의 특명에 의해서 정래혁 상공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배속되어 그 길로 경제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서독에 파견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으로 서독에서 1958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 당시 서독과의 경제 전문가로서 내가 선정된 것이다.
1962년 10월 20일 서독에 파견된 정부 경제 사절단 일행은 이타리아와 스위스 취리히를 거쳐 서독의 뮌헨에 도착했다. 주독 대사 신응균 장군의 영접을 받으며 뮌헨의 호텔에서 밤새도록 앞으로 전대될 사절단의 활동과 전략을 숙의햇다.
과연 어떠한 전략으로 서독에서 차관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 당시 우리가 이미 서울에서부터 조사한바 서독은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 서독 제품의 기계유와 부품 등을 해외 수출을 촉진하기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있음을 알았다. 이른바 해르메츠법으로 칭하는 이 법은 서독에서 구매하는 모든 제품의 수출에 대해 전체 수출가격의 70%에서 80%까지를 국가 신용에 의하여 보증해 주는데 후진국에 대한 특별 지원법이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이 법의 주요골자를 번역해서 사절단 일행에게 설명하였고 어떻게 하면 이 법의 적용을 얻어 낼 수 있음 것인가를 숙의하였다.
이때 우리는 이 법에 따른 특혜를 얻기 위해서는 서독의 민간 기업체의 사전 협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독에서 현금으로 상업차관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서독제품을 후진국에 수출하기 위해서 기계류나 기타 부품 등 생산재 제품을 구매한다는 서독 제조업체와 사전 협조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서독의 유명 제조업체들을 찾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우리 일행은 그 당시 서독에 파견되어 참으로 눈부시게 활약했다.
혁명 정부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각 지방 공장의 시찰에서부터 시작하여 정부 공무원과의 면담을 통해서 우리가 안고 있는 경제적 긴박성을 설명하는ㄷ 온 정력을 다 바쳐 뛰었다. 서독 정부 대표로서는 경제성의 웨스릭 경제차관이 단장이 되고 각 부처의 국장급들이 우리와 연 일주일 동안을 진지하게 토의했다.
‘지멘스, KRUPP, MANNESMAN, POLYSIUS, GHH' 등 유명한 서독 기업들은 차례로 방문하여 사장단과의 진지한 토론을 통하여 장차 한국이 건설하게 될 공장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였고 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처음에는 서독의 기업들이 냉대하는 기색이 농후했으나 우리는 경재 심리를 이용하여 똑같은 기계제품을 생산하는 복수업체를 선정하여 직접 공장을 방문토록 하였으며 그 결과 서독 기업 간에 자사 제품을 수출하려는 경쟁의식을 높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독 정부에 제시할 사업 계획을 서둘러 만들었고 그 안에는 국가적인 기간산업 중시급한 사업으로 6대 산업을 선정하여 사업계획을 작성했다.
그 당시 서독 정부에 제시할 6대 산업은 나주 비료공장건설, 인천 한국 기계공장 확장, 석탄 공장 관산 중장비, 인천제철확장,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 중소기업 기계공장 지원 등 이였으며 이에 드는 차관지급 소요액은 정확히 1억 5천만 마르크(약 4천만 달러)에 달했다. 서독의 기업들은 우리가 제시한 사업 계획의 설명을 듣고 점차로 큰 관심을 나타냈으며 그들도 기업의 입장에서 서독 정부에 설득해 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다행이도 서독 기업인들은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서독 정부에 우리 입장을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만일 그 당시 서독 기업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더라면 과연 서독 정부가 우리에게 정부 보증의 차관을 제공해 줄 수 있었을 것인가. 우리 일행은 일주일간의 공장 시찰을 마치고 드디어 본에 있는 서독 정부의 경제성을 방문하는 마지막 교섭에 들어갔다.
서독 경제성을 방문하여 최초로 만난 사람이 경제성 장관 에르하르트였다. 그는 육중한 체중에 입엔 시가를 물고 우리를 대해 주었으며 매우 쟁정한 인상을 느끼고 우리와 면담하는 동안 거의 말없이 상례적인 인사말만 늘어놓았다. 우리는 그때 인상적으로 서독 정부의 냉정한 입장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 일행의 노력이 첫인상부터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와 약 15분간의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고 일행은 아무런 성과 없이 허전한 마음으로 그의 사무실을 나와야 했다.
대사관에 돌아온 직후 갑자기 서독 경제성에서 연락이 왔다. 양국 정부의 정식회의가 오후 2시에 열린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중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부랴부랴 또다시 경제성 회의실을 찾았다. 서독 경제관들이 자리에 앉아있고 서독 대표는 웨스트릭 경제성 차관이 담당했다. 이 분은 에르하르트 장관과는 달리 매우 고무적인 인상을 느끼게 하는 회의였다.
우리는 사전에 마련된 공장 리스트와 사업계획을 일일이 설명하는데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다행히도 나는 3년간 독일 유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고 중앙대 교수직의 명함을 교환한 이후 서독 관리들로부터 경의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
아마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당시 독일말로 직접 설명했던 것이 그들에게는 더 없는 감동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독일에서는 교수라는 직함이 매우 존경받고 있었으므로 교수인 내가 그들을 만나 설명한 것이 환영받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독 경제성 대표와 3일 동안 회의를 계속했다. 마지막 날 서독대표의 만찬 초청이 있었다. 이날 웨스트릭 차관의 환영사에서 우리가 제출한 사업계획을 서독 정부가 모두 인정하고 1억 5천만 마르크의 서독 차관을 승인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우리 일행은 손에 손을 잡고 서로 부둥켜안고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감격의 순간이었으며 영원히 그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3. 서독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들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서독에 파견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6.16 군사정변 이후 미국 정부는 정권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허약했지만, 장면 내각이 이끌어온 민주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테타를 이끌어온 군사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드디어 경제 원조가 중단되었으며 유일한 희망이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얻어내는 일이 었다.
나는 그 당시 상공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의 신분으로 차관 교섭의 임무를 띠고 세 번이나 독일을 찾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성공한 것이다. 서독 정부는 1962년 10월 상업 차관으로 1억 5천만 마르크를 제공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서독 상업 차관을 얻는 데는 제3국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는 그 당시 세계의 어느 은행에서도 지급보증을 받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여기에서 착상된 구상이 바로 서독에 광부 5천 명과 간호사 2천 명이었다.
당시 서독은 경제 부흥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라 노동력이 심히 부족한 때였다. 이런 때 더구나 지하에서 일하는 광부나 궂은일을 도맡아 일하는 간호사가 크게 부족하였다. 우리들이 노동력을 서독에 파견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년간의 노동력과 그에 따라 얻어지는 노임을 담보로 서독 은행헤서 지급 보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교섭에서 우리는 성공했고 최초의 서독 상업 차관 사업이 이루어졌다.
광부 5백 명 모집에 약 4만여 명이 응시했고 경쟁 8대 1을 넘었다. 당시만 해도 그만큼 일자리 자체가 귀했다. 응시작겨은 고졸이었지만 대졸자가 이력을 속이고 줄지어 응시했다. 서독 파견 한호사도 2천명 모집에 근 2만 명이 몰려들었으니 얼마나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서독 루르 지방으 탄광 막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들은 대부분이 학사 출신이었다. 그들이 받는 보수는 한 달에 4백 마르크(1백 달러)에서 7백 마르크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시간 외 근무를 자청했다. 그러는 틈틈이 독일어를 배우고 첨단 기계를 비롯한 각종 기계와 기술을 익히는데 여념이 없었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 했다. 잡념이 파고들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접념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독일엣 일하는 광부들이 맨 처음 부딪힌 난관은 몸집이 큰 터키인들의 행패였다. 몇 나라에서 온 광부들은 대부분 우범자나 전과자였다. 뚜렷한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주먹이 앞섰다. 웬만한 사람은 다 칼을 지니고 다녔다.
참다못해 학사 광부들은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터키 광부들을 목욕탕 앞뜰에서 흠씬 패주었다. 몇 줄로 진을 친 학사광부들은 맨 앞에서 태권도로 후려치고 다음 줄에서 유도선수가 비틀거리는 자를 냅다 메다꽂았다. 일러나면 다시 권투선수가 달려들어 집중구타를 가했다. 거칠고 사나웠던 터키 광부들을 혼을 내주었다. 그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사람은 칼로 몽둥이도 지닐 수 없었다. 몸집은 크지만 대적할 길이 없었다.
평소 터키 광부들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재미있게 보고만 있었다. 얻어맞은 터키 광부들도 저희 행패가 어지간했는지 아무 군소리가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터키 광부들의 행패는 자취를 감추었다. 역시 작은 고추가 매웠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우리나라 개발연대를 이끌어온 영원한 정신적 씨앗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들 덕분에 한국을 바라보는 서독 국민의 열기는 대단했고 그 후에도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 광부들이나 간호사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이 없었던들 우리는 서독 정부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정말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했다. 특히 간호사들은 서독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환자들의 아픈 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가족처럼 정성껏 간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이 활동으로 모든 독일 국민의 가슴속에 뜨거운 감동을 심고 있었다. 이들이 이국땅에서 뿌린 눈물이 우리 민족사에 그토록 값진 금자탑을 쌓을 줄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천심만심으로 독일 연방 공화국 대통령이 동방의 구석에 있는 가난한 나라 대통령을 국빈으로 서독으로 초청하게 된다. 단군 이래 최초의 한민족의 국가원수가 해외 나들이를 하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서독 광부, 서독 간호사 파견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 보려는 극동 조그마한 나라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이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 발전으 원동력이었다.
말없는 가슴으로 맺은 공감대, 자각과 분발 그것이 위대한 힘을 생겨나게 했다.
나는 그 불이 절대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꺼질 수 가 없기 때문이다.
4. 대통령의 서독 방문
1964년 12월 6일, 겨울 하늘이 맑게 갠 일요일 낮 12시 30분,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함께 흔히 있는 무슨 행사에라도 참석하러 가듯이 청와대 현관을 나섰다. 대통령 승용차 앞에서 기동경찰대의 모터사이클이 ‘여덟 발(八)자’ 대형으로 행렬을 선도하고, 경찰의 오픈지프가 좌우에서 옹위했다. 대통령 차 뒤에는, 수많은 검은 승용차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렁찬 군악대의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공항에 도착한 대통령은 육중한 제트여객기 앞에 마련된 환송대위에 올라섰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땅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서독의 부흥상을 샅샅이 보고 오겠다.” 말로만 전해 듣던 라인 강의 기적은 어떤 것인가. 자신의 눈으로 그 실체를 정확하게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다. 건국 이래 최초로 우리나라 국가 원수가 한 나라의 국빈 자격으로 외국에 나가는 순간이었다.
1시 40분, 독일 정부에서 보내준 루프트한자 649호기에 오른 박 대통령 일행은 현지 시각으로 이틑날 아침 9시 40분,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 등의 영접을 받으며 쾰른 본 공항에 도착했다. ‘아시아의 프ㅗ이센’이 드디어 독일 땅을 밟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 그의 경제 고문 겸 독일 통역관의 자격으로 수행했다.
서독은 한국과 같이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는 것, 우리는 서독과 같이 자립과 번영을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서독의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꼭 잡았다. 순간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이 오갔다. 분단의 아픔이란 게 어떤 것인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통일의 그날가지 경제발전을 위해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그는 심지어 한국에 가서 경제고문을 맡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분단국 독일은 공동운명체와 다름없다며 한국의 어려움을 서독의 어려움으로 알고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 정부로부터 초대를 받고 서독 국민으로부터 이처럼 크게 환대를 받게 된 이면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1963년에서부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석탄 광부들이 현지에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다. 당시 서독 언론들은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거의 매일같이 대서특필로 소개하였다. 이국만리 남의 나라 탄광에 와서 일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헌신적인 모습과 살려고 몸부림치는 한국인의 긍지를 더없이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간호사들은 서독 각 도시에 산재해 있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환자들의 아픈 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자기 가족처럼 정성껏 간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활동은 모든 독일 국민의 가슴속에 따듯한 정을 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우리나라 개발 연대를 이끌어온 영원한 정신적 씨앗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들 덕분에 한국을 바라보는 서독 국민의 열기는 대단하였고, 그 후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추진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 광부들이나 간호사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니 없었던들 우리는 서독 정부로부터 재정원조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5. 기적의 열매, 대통령의 눈물
1964년 12ㅇ월 8일 아침 10시 55분, 서독을 방문하던 박 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탄광지대의 한 공회당에 도착했다. 탄광 막장 현장에서 갓 나온 5백여 명의 광부들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부들의 얼굴과 작업복은 석탄에 묻혀 흙투성이 그대로 였다.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애국가가 울렸다. 음악만 흐르고 가사가 나오지 않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한 소절 한 소절 불러감에 따라 점차 애국가 소리가 커졌다. 마침내 “대한민국 대한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애국가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장면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가 없다. 가슴과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소리도 없이 고이던 눈물, 광부들은 제 나라 대통령을 보자 왈칵 복받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반가움에 앞서 서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해외동포의 환영을 받은 게 아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영광의 주인공을 격려하는 자리도 아니었다.내 나라 젊은이들이 고생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대통령 가슴은 미어질 듯했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광부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그러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끝내는 대통려 자신도 울고 말았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귀브케 서독 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도 모두 다 울었다. 어떤 확실한 공감대가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전해졌다. “열심히 일하자. 그래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자.”연설이 중단되고 밖에 나오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주세요. 우리 두고 어떻게 떠나시렵니까?” 광부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며 목멘 목소리로 대통령에게 매달리고 있었다.밖에 나오니 어느새 수백 명의 광부가 운집하고 있었다. 외치는 만세소리에 파묻힌 일행은 그 자리에서 그 한 시간 동안 떠나지 못했다.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 목이 타도록 외친 광부들의 함성을 뒤에 남기고 떠나온 일행들의 마음엔 눈물이 벅차올랐다.
우리 일행은 간신히 아우토반에 올랐다. 차 속에서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는 대통ㄹ여의 모습을 본 옆자리의 뤼브케 대통령이 말했다.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 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부흥을 이룩합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 그는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통역관인 나는 앞자리에 앉아 칠순의 노대통령이 40대 말의 젊은 대통령에게 격려해준 우정 어린 대화를 통역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눈길을 애써 돌렸다. 석양빛에 어느 공장 굴뚝인가에서 하얀 연기가 하늘 높이 내뿜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서독 광부, 서독 간호사 파견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 보려는 극동 조그만 나라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이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말 없는 합의, 가슴으로 맺은 공감대, 자각과 분발, 그것이 위대한 힘을 생겨나게 했다.
나는 그 불이 절대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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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때 그시절이 그 지도자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번영이 있었겠습니까? 역사를 바로 알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