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인 '홀리데이'에 도착해보니 다른 멤버들이 변강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변강호는 멤버들을 보고 활짝 웃어보였다. 한번 봐주라는 아양이었다.
삼송 그룹 비서실의 우수영, 다다미디어에서 상품 개발 팀장을 맡고 있는 강승찬,
GL전자 홍보실의 김동우, 그리고 성대근이 변강호를 쳐다보며 히죽 히죽 웃었다.
이달에는 카드 값도 결제 못하게 생겼는데 만약 여자를 못 꼬드기면
최악의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었다.
"강쇠 준비됐지?"
성대근이 변강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변강호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프랑스 향수인 '울트라 바이올렛'도 좀 뿌렸고 저녁엔 약간
초췌한 모습을 여자들이 좋아한다기에 면도는 하지 않았다. 평범한 옷차림에 넥타이만
명품 조지 알마니로 갈아 맨 상태였다. 심플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한 컨셉트,
그러면서도 왠지 어설픈 인상을 주기 위해 흐트러진 머리스타일로 등장했다.
맥주와 안주를 주문하고 멤버들은 며칠 굶주린 하이에나 같은 눈빛으로 적당한 여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출입문을 열고 여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변강호는 침을 꼴깍 꼴깍 삼켰다.
멤버들은 변강호를 떼어 놓고 저희들 끼리 쑥덕거렸다.
세 번째 맥주병을 막 따서 들이키려는 찰나 변강호는 'S라인 에스테틱'에서 근무하는
여자를 보았다.
다시 봐도 분명 그녀였다. 합정역 부근이 집이니 홍대 부근에 나타날 법도 했다.
허벅지까지 올라간 감청색 치마에 망사 스타킹, 얼룩무늬 티셔츠에 자주 빛 가죽점퍼 차림이었다.
그녀의 입장에 멤버들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함께 들어온 친구와 마주앉아 맥주를 시켰다.
"결정했어. 저 여자."
성대근이 가리킨 여자는 다름 아닌 S라인 에스테틱의 그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다른 멤버들도 동의했다. 성대근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보통이 아니겠는데. 과연 우리 강쇠 어른이 잘 하실 수 있을까?"
변강호와 그녀를 번갈아 보던 김동우가 비아냥거렸다.
"우리 강쇠가 고추는 작아도 뻥은 세니까 해볼만 할 걸."
"여자들이 너 따르는 거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소심, 너 혹시 그것도 입으로 하는 거 아니냐?"
멤버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이 자식들이, 이제 나를 호구로 아네.'
지난 여름 멤버들과 함께 온천에 갔다 온 이후로 녀석들은 시간만 나면 변강호를 놀려댔다.
소심. 바로 멤버들이 변강호에게 붙여준 또 다른 별명이었다.
그것은 변강호의 물건이 작고 심심한 장난감이라는 뜻이었다.
특히 가장 큰 사이즈를 자랑하는 성대근은 대놓고 변강호를 약 올렸다.
"네가 만약 모텔까지 골인하면 내가 모텔비 낸다." 성대근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골인한다.'
그러나 막상 멍석을 깔아놓으니 자신이 없었다. 요즘 여자들은 나이트클럽에서의
부킹이 아닌 다음에야 같이 한 자리에 합석하기도 힘들었다.
널린 게 남자라는데. 괜히 섣불리 접근했다간 개망신 당할 수도 있었다.
멤버들의 얼굴에 서린 조소를 보며 변강호는 이빨을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야유의 박수를 보냈다. 불끈 일어섰지만 변강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천 공장을 다녀오며 신정하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해외 펀드, UCC, 블로그,
명품 몰…. 공부하지 않으면 여자 꼬드기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다양한 소재로 공략할 것. 절대 솔직해지지 말 것. 현대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관심을 가질 것. 말발을 무기 삼고 용기를 가질 것. 순발력은 필수! 교과서 같은 말이
변강호의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그러나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이다.
교과서가 통하지 않는 게 바로 이 바닥이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부딪혀 보는 수밖에.'
변강호는 무작정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로 뛰어갔다.
변강호의 손에 다이어리가 들려있었다. 그 짧은 순간 모든 시나리오가 세워졌다.
변강호는 무작정 그녀 곁을 밀고 들어가 앉았다.
"어머, 뭐예요?"
그녀가 놀라 옆으로 물러났다. 변강호는 그녀가 앉은 자리를 다급하게 살폈다.
그녀를 테이블 쪽으로 밀친 후 등 뒤를 살피기도 하고 심지어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고
바닥을 살피기도 했다. 미끈하고 늘씬한 허벅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머머머, 도대체 뭐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늘씬한 다리를 오므리며 기겁을 했다.
고개를 든 변강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운 듯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변강호의 행동에 놀란 두 여자가 진정하는 듯했다.
"혹시 이 자리에서 설문지 못 보셨습니까?"
여자들이 반격하기 전에 빠르게 공격해야한다. 여지를 남겨선 안 된다.
"설문지요?"
그녀가 되물었다.
"한 열장 정도 되는 설문진데 분명 이 자리에 두고 간 거 같은데."
변강호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여자들은 변강호의 출현을 탓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걸 잃어버리면 회사에서 잘릴 판인데, 정말 못 보셨습니까?"
"무슨 설문지인지 모르지만 우린 정말 못 봤어요."
변강호는 문득 생각난 듯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여자들에게 내밀었다.
여자들이 뚱한 표정으로 변강호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렇다면 설문을 다시 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잊어버린 건 잊어버린 거고, 오늘 이 설문지 못 가져가면 저 정말 잘립니다."
"저희들 시간 없는데…."
"설문만 끝내주시면 술, 남자, 클럽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일단 그녀 곁에 앉는데 성공했지만 다른 건 되는 대로 지껄였다.
호색한 멤버들을 염두에 둔 발상이었다.
"칫, 정말이세요?"
"그럼, 제가 뭐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한테 거짓말 하겠습니까?
그런데 혹시 강남 'S라인 에스테틱'에서 근무하시지 않나요?"
변강호의 시나리오대로 여자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치였다.
변강호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 3주일쯤 전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 발을 밟으신 적이 있는데….
미인에게 발을 밟혔는데 제가 그 일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어머! 바로 그…."
그녀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반쯤은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형식적이지만 변강호는 대일 전자의 밥통과 청소기에 대해 전반적으로 질문을 하고
성실히 받아 적었다. 이름과 연락처도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장금련. 친구는 김미정이었다. 장금련은 김미정 곁에 앉아 속닥거렸다.
짐작해보니 두 여자는 술 한 잔 걸치고 클럽에 갈 폼이었다.
"정말로 술, 남자, 클럽 다 책임지시는 거죠?"
"물론입죠. 설문에 답해준 보답으로 그 정도는 해야죠."
남자들은 대기업에 근무하는 놈들로 상납하죠. 마침 친구 놈들하고 근방에서
약속이 되어 있는데 전화하면 곧바로 달려올 겁니다."
장금련과 김미정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깔깔거렸다.
멀리서 쳐다보던 멤버에게 변강호가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였다.
변강호는 성대근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며 능청을 떨었다.
이제 장금련을 모텔까지 데리고 가는 일만 남았다. 그래야 성대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성대근을 비롯한 멤버들도 선수답게 10분 남짓 지난 후 변강호가 앉아 있는 자리를 찾아왔다.
삼송그룹이나 다다미디어 GL전자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알아주는 대기업이었다.
변강호가 근무하는 대일그룹이 그나마 처지는 축이었다.
어쨌든 장금련과 김미정 역시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변강호가 장금련을 꼬드겼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다른 남자에게 한 눈 팔지 않고 마지막에는 변강호와 남아야 호색한 클럽에서
인정하는 꼬드김이 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여자들을 사이에 두고 남자 셋이 시중을 들었다.
"여긴 물수건 같은 건 없나 봐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변강호는 주방으로 달려가 물수건을 다발로 만들어왔다.
친절과 봉사는 바람둥이의 기본이다. 공략해야할 여자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딸기를 넣으면 더 맛있는데."
안주를 보고 장금련이 그 말을 하면 변강호는 어느새 딸기를 준비해왔다.
일행은 클럽으로 자리를 옮겼다. 클럽으로 들어서자 요즘 유행하는 '텔미'가 흘러나왔다.
장금련과 김미정이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덩달아 변강호와 멤버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텔미 댄스는 춰 본 적이 없는 변강호지만 어설프게라도 장금련의 춤을 신나게 따라 추었다.
장금련이 몸을 흔들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렸고 치마가 펄럭거려 허벅지가 아찔하게 드러났다.
변강호는 그녀 주변을 맴돌며 허리나 엉덩이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싫지 않은 눈치였다.
술자리가 끝났을 때 장금련은 몸을 반쯤 변강호에게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짝 없는 세 사람이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남은 건 성대근과 변강호 그리고 두 여자였다.
화장실에 같이 선 성대근에게 변강호가 호기롭게 물었다.
"모텔은 잡아 놨겠지?"
그 와중에도 성대근은 변강호의 물건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