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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여행기
1987. 1.16. 12:00 장中正 비행장 착륙(대한항공 635)
14:30 國父(손문) 기념관 참관
16:00 中正(장개석) 기념당 참관
18:00 타이페이시 교육국 주최 만찬회
20:00 彩虹賓館 투숙
1987. 1.17 06:30 아침 식사(彩虹賓館)
07:30 출발
10:00 中興新村省政 자료관 참관
12:00 臺灣省政府 교육청 초대 오찬
13:00 계두로 출발(계두삼림유락구 유람)
18:00 계두 청년활동 중심 만찬회
1987. 1.18 07:00 아침(계두 청년활동 중심)
08:30 출발
11:30 타이난 安平古堡 億載金城 참관
12:00 타이난시 이사회 대변(오찬)
16:30 카오슝 澄淸湖 관람
18:00 카오슝 이사회 만찬
20:00 징청호 청년활동 중심 투숙
1987. 1.19 07:00 징청호 청년활동 중심 아침식사
09:00 불광산 도착
12:00 불광산 대변(오찬)
13:00 간정 국가공원 참관
18:00 병동현 이사회 만찬
20:00 간정 교사회관 야숙
1987. 1.20 07:00 아침식사(간정 청년활동 중심)
07:40 타이페이로 향해 출발
12:00 오찬(타이쭝)
15:30 박물관 참관
18:00 施駐會 상무이사․ 高國際위원 만찬
20:00 彩虹賓館 투숙
1987. 1.21 07:00 彩虹賓館 아침식사
08:30 출발
11:00 대한항공 616 이륙
첫날(1987.1.16)
아침 7시쯤 나는 김포 공항 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외국으로 나간다는 가슴 설렘은 뒤로 미루고, 이 어두운 거리에서 어떻게 공항 가는 차를 알아보고 세우느냐가 다급한 문제였다. 나중 안 일이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7시가 되어도 그렇게 어두웠었다. 첫 번째 차는 놓쳤지만, 두 번째 차는 요행히 탈 수 있었다.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국제공항에 내린 시각은 8시를 조금 넘었다. 8시 반까지 오라고 했으니까 시간이 조금 남았다. 역내에서 필름을 두 통 사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와 같이 스카우트제복을 차린 동료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큰 옷가방을 따로 부쳐놓고 기다리니까 무료했다.
‘젠장, 10시 반 출발할 비행기인데 2시간 앞당겨 오라 하다니!’
툴툴대며 기다리다가 9시 넘어서야 3반으로 편성된 우리 일행은 출국수속을 받기 시작했다. 위험 무기가 없는가, 사람과 짐이 따로따로 검색대에서 검사 받고, 또한 세관에서, 검역관에서 3차례의 수색을 끝낸 우리는 면세점을 향하여 덤벼들었다. 아까 안내원은 30분전에 비행기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야 한다고 했지만, 5분전에 앉아도 된다며 물건 사기에 바빴다. 면세점이라 하지만 대부분 고급품이라 엄두도 못 내고, 조니워커 양주 한 병을 14,000원 주고 샀다. 그리고 긴 통로를 거쳐 기체 내 들어서니 아리따운 스튜어스들이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이한다.
내 자리는 43A 바로 창문가다. 그러나 비 오는 날씨 때문에 구경하기는 틀렸다. 정확히 10:45분 큰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10:53분에 비상하기 시작하였다. 저 아래 집들이 게딱지처럼 작아지더니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이제 외국에 다녀오게 되었다는 자랑스러움 이러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행기에서 바라보이는 것이라고는 수없이 움직이고 있는 검은 연기뿐이다. 기내에선 스튜어스들이 집게로 물수건을 똘똘 말아 먼저 갖다 준 후 술도 주고, 커피도 주더니 마지막으로 점심을 주는데 완전 양식이다. 빵과 카스텔라, 강냉이 삶은 것, 베이컨, 그 다음 치즈, 크림이 조개껍데기 같은 곳에 들어 있고, 소금과 후춧가루, 설탕, 프리마들이 각각 봉지에 들어 있다. 술잔과 커피 잔이 따로 놓여 있는 쟁반이다. 포크와 나이프와 스푼으로 깨끗이 그 요리들을 먹어치웠다.
그러는 사이 구름 속이 발개지더니 어느 새 햇살이 비치고, 저쪽 멀리서부터 파란하늘이 나타나더니 흰 구름과 길게 금을 긋기 시작했다. 구름의 운평선이 한참까지 나타나다가 이제는 그 운평선이 울퉁불퉁해지더니 구름 꽃동산을 이룬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가물가물 잔물결이 끝도 없이 이어져 흐르고 있는 바다뿐이 안 보인다.
우리가 가는 타이완은 우리나라와 한 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기내에서 시계를 한 시간 늦추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전자시계라 맞출 줄을 몰라서 그대로 차고 있었다.
기내의 객석은 500석이 넘겠다. 줄마다 창문 양쪽으로 3석씩, 가운데 4석이 있으니 꼭 10석이다. 거기에 60줄 가까이 있으니. 15년 전 국내선 탈 때의 비행기를 비해 보면 엄청나게 컸다. 스튜어스들이 외국인이 있다. 저쪽 가무잡잡하게 생긴 아가씨는 태국 아가씨란다. 비행기 꼬리 부분에 화장실이 양쪽에 2개씩 있으니까 4군데 있고, 객석 중간에 승무원들이 음식을 공급해 주기도 하고, 면세품을 팔기도 한다. 면세품을 쌓아놓은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드디어 저쪽 끝에서부터 섬이 하나 보이더니 구름을 뚫고선 산맥들이 나타났다. 아, 미지의 나라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도착시각은 1시 15분(중국 시간)
입국수속은 간단하게 끝났다. 뱅뱅 돌게 되어 있는 화물운반선에서 내 가방을 찾았다. 이 공항은 크기가 우리 김포 공항보다 컸다. 이름은 중정공항이다.
공항 문을 열고 나섰더니 푹 더운 기운이 솟아오르고, 야자나무들이 보였다. 벽 쪽으로 이곳 스카우트 대원들이 하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우리를 환영한다는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우리가 그 앞에 늘어섰더니 그들은 환호해 주었고, 곧 이어 기념배지 및 조임들을 바꾸었다. 나는 태극마크의 조임만이 있었으므로 그걸 끌러 한 소년의 청에 응해 주었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시시한 배지들을 좀 사 왔어야 했는데.’
우리 대원들은 보리 베기 때의 찌푸덩한 날씨에 얼른 떠나고 싶었다. 두 대의 버스에 나누어 분승했다. 나는 22번이므로 앞차에 올랐다. 차는 00 통운 공사 418-0831이다. 우리 나라 전화번호 같다. 이 관광버스는 우리 나라 버스보다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이 新竹시에 위치한 공항은 타이페이 시까지 40km 정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길거리에 늘어선 건물들은 우중충하니 폐허 같은 기분이 들만큼 치장을 하지 않았다. 여기는 페인트공이 없다는 말인가. 페인트상회를 차리면 한 몫 벌 것도 같았지만, 안내하는 이의 말에 따르니까 중국의 국민성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이해가 되었다.
‘외빈내실’ 얼마나 어울리는 말인가. 겉보기는 우리 보다 못사는 것 같지만, 알속은 꽉 차서 국민소득도 우리 보다 높고, 수출액도 우리 보다 많다. 그래서 의무교육도 중학교까지 한지가 10년이 넘는다. 그런데 어떻게 흉을 볼 것인가.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자. 특히 국제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거리. 외국인이 넘나드는 이 중요한 도로변을 이런 식으로 둘 것 같은가. 다른 곳은 두더라도 우선 이 길목만은 지붕개량을 한다, 담장을 새로 쌓는다, 페인트칠을 한다, 가로수를 심는다. 야단법석을 떨고, 급하면 생나무를 잘라 뿌리 없는 나무를 꽂아놓았다가 귀빈이 통과할 때만 잘 보이게 한다고 우스갯소리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그뿐인가 급하다 보면 도로변 앞쪽에만 칠해 놓았다가 비행기로 온다니까 지붕만 칠했다는 실화는 우리가 얼마나 겉치레에 열을 올리는지 알만하다. 그런 점을 비교해 볼 때 중국인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 자기 분수에 맞게 사치를 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국민들, 그리고 아예 정부에서도 강요하지 않는 그 느긋함이 좋았다.
만만디(漫漫的)! 교통사고도 많지 않고, 다툼도 적다. 늘 천천히 하는 습관은 중국 국민성의 대표라 하겠다. 실속 있는 물건이라도 中華(중화)사상의 자부심에 외국 물건을 배척하고, 천천히 받아들이는 이 나라는 무서운 잠재력이 있는 나라가 아닐까?
시가지가 조금 화려해지더니 큰 강이 흐른다. 이 강이 바로 담수하이다. 이 강을 경계로 타이페이시와 타이페이현으로 나누어진다. 보기는 같은 생활권인데 강으로써 시와 현으로 구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강 건너 북쪽 산중턱에 오색찬란한 10층 넘어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안내자가 송미령 여사가 세운 원산(圓山)대반점이란다. 대반점이라기에 중국음식 청요리 등을 파는 식당의 일종인 줄 알았더니 우리말로 그랜드호텔이란다. 세계에서 7번째로 유명한 호텔로 외국귀빈이 올 때 모신다고 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국내 공항이 따로 있었는데 중정 비행장이 건설하기 전에는 이곳에서 국제공항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한항공만이 유일하게 있는데 이 나라는 4개의 국내항공사가 있다니 이런 면에서는 한결 자유스럽다.
타이페이시 인구는 250만으로 전국 인구의 1/8정도 뿐이 안 되지만, 명실상부의 전 중화민국의 수도다. 지반이 약해서 서울처럼 높은 건물은 없지만 그래도 28층짜리 건물이 있었고, 특유한 것은 오토바이가 어찌나 많은지 오토바이 전용도로가 있었다. 모자는 안 써도 무방한 그런 나라다. 오토바이로 우리나라는 대부분 혼자 타고 다니는데 비해 여기는 가족들이 3명, 4명씩 태우고 다니는 것이 볼만했다.
시가지 중앙에 동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손문이 아니고, 손문을 도와 나라를 세운 건국공로인 ‘우유인’ 이라는 것이다. 그의 필체는 유명해서 알아준다고 한다.
이 나라의 중화사상은 그야말로 유명해서 간판의 글씨는 외래어를 찾아볼 수 없다. 페인트칠은 안한 건물에 붉은색을 좋아하는지 붉은 글씨로 간판들을 써놓아 을씨년스럽고, 가정집은 빗자국이 보이고, 때가 묻고 해서 저 속에 사람이 사는지, 도깨비가 사는지 모를 지경이다.
택시나 버스는 모두 기차(汽車)라고 불렀고, 구분한다면 택시와 승용차는 소형차, 일반버스는 대형기차다. 그리고 택시는 유일하게 지붕 꼭대기 뒷면에 영어로 택시라 썼고, 앞쪽은 출조기차(出祖汽車)라고 쓰여 있다. 또 뒤창에다가 페인트로 번호를 써 놓았고, 승용차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차이가 났다. 그런데 오토바이도 우리말로 해서 기차다. 한자어로 쓰면 機車다. 그래서 막상 기차는 뭐냐고 물었더니 화차란다. 비행기는 비기다.
택시 기본 요금이 24원이다. 우리와의 환율은 25:1로 놓게 볼 때 근사하다. 1불에 35원 정도의 환율이다.
먼저 손문 기념관을 참관했다. 웅장한 규모라든지 커다란 좌상이든지 또한 유물 전시관이든지 모두가 크고 훌륭했다. 손문은 120년 전 인물로 76년 전 신해혁명을 일으킨 분이다.
世界 潮流 浩浩(세계 조류 호호)
蕩蕩 順之 則昌(탕탕 순지 칙창)
逆之 則亡(역지 칙망)
孫文 題 (손문 제)
타이페이의 시내 가로수는 야자나무로 덮혔고, 큰 도로는 인애로, 충효로, 평화로, 신의로로 나누어지고, 또한 중국 본토의 큰 도시 이름을 따서 이를 테면, 북경로, 남경로, 천진로 등으로 써서 사용하는 걸 보니 그 뜻을 알만도 했다.
시내버스 기본요금은 6원인데 공공기차라 불리운다.
무수한 간판들 읽기가 까다롭다.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더니 오른쪽, 왼쪽 자유란다. 간혹 밑에서부터 읽는 것도 있단다. 코카콜라는 중국발음으로 可口可樂(가구가락)이란다. 펩시콜라는 白水可樂.
손문이 중산이라하고, 장개석은 중정이다. 결국 개석은 호이고, 중정이 이름이란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중정으로 잘 통한다.
중정의 기념관은 더 어마어마했다. 장개석을 모셔놓은 본당에 들어섰을 때 마침 하기식이라 그 교대하는 근무병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네킹처럼 서 있는 군인들이 박자에 맞춰서 발과 손을 놀리고, 총을 들고 하는 모습이 퍽 인상 깊었다. 우리 일행은 꽃다발을 바쳤는데 좌상도 어마어마했고, 본당의 규모도 너무 웅장했다. 마침 석양의 햇빛을 받아 대리석 벽돌이 번쩍번쩍 빛났다. 지금 살았으면 101 살이 되는데 75년도 88세로 일기를 마쳤다고 하는데 김일성 부자를 생각할 만큼 너무 우상화하는 것 같았다.
물론 장개석은 세계적인 인물이다.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중국 대륙을 잃고 쫓겨난 인물이다. 그런 그를 저렇게 신처럼 모시다니 모를 일이다. 본당 밑으로는 역시 기념 전시관이 있었다. 대륙활동 시절과 타이완에 와서 활동한 것으로 구분 전시 되어 있었는데 기하공책까지 있었다.
저녁에는 타이페이 시 교육국 주최 만찬회에 참가했는데 뷔페식이었다. 대원들은 비행기에서 조금 먹고, 쫄쫄 굶었기 때문에 이 시간을 몹시 기다렸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접시에다 이름 모를 음식들을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그득 담았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먹히지 않는다. 조금씩 가져다가 먹는 것이 에치켓인데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와 같은 일행이 몇 년 전 40명이 왔는데 주최 측에서 80명 분을 준비해도 그것이 모자라 이웃에서 급히 날라 오느라고 땀을 뺐는데 나중 접시에 담아간 음식을 반도 못 먹고 남겼다는 망신스러운 이야기를 동료가 해 준다.
그 식사 도중에 우리나라 대사 내외분이 와서 이 나라 국민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우리가 민간외교 사절단이니까 행동에 모범을 보여야 된다고 부탁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전원이 버스로 시내에 있는 유명한 용산사란 절과 야시장을 구경하였다. 절의 휘황찬란함은 가히 놀랍다. 이곳은 향을 불에 댕겨 향로에 꽂는 것이 기본 의식이다. 불상은 수염 달린 분도 보였다. 남국이라 한마디로 벅적벅적하다. 하나하나 불상마다 자질구레하게 장식하여 독립관처럼 마련해 놓았다. 뒤에 알고 보니 수염달린 분은 불상이 아니라 관운장이란다. 같은 일행 중 영재 선생님이 시장에 구경 가자고 하는 바람에 절 구경을 더 자세히 보지 못했다.
물건을 살 때는 How mach? 라고 영어로 물으면 뭐라고 답을 하는데 그것도 몰라 연필을 주라고 해서 한자로 통화하고 했다. 그러면 그들은 물건을 포장지에 싸며 ‘아리가도’했다. 나는 단연코 손을 내 저어며 No No! 아리가도, I am Korean! 하면서 앞가슴의 태극기도 모르냐는 듯이 가슴팍을 쳤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감사합니다.’ 하며 웃음 짓는데 그러면 우리는 기분 좋아져 OK 하며 몸을 흔들어대었다.
기후 탓인지 낮에는 기운이 없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활기가 넘친다. 그게 야시장의 번창이 그것이다. 순수한 토박이 물건도 많이 나오는 야시장 거리를 우리 일행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구경했다. 통역자의 말대로 깡패나 소매치기가 없는, 뒷주머니에 돈을 안심하고 넣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이 나라란다. 그렇다고 밤늦게까지 다니다가 행패를 당하면 자기는 책임 안 진다고 했다. 사람 사는 곳인 만큼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장담 못하니 일찍 들어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뱀 생간 사 먹을 욕심으로 시장 바닥을 누볐다. 진짜 뱀을 파는 장사들이 선전을 하고 있었다. 생간은 잡고 어쩌고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말려놓은 뱀간을 사라고 귀띔을 한다.
이 나라는 외환관리가 철두철미해서 달러도 통용이 안 된다. 그래서 아까 우리 나라에서 살다간 화교출신이 경영하는 대한 백화점에 들러 200달러를 중국 돈으로 바꾸었기에 주머니 사정은 괜찮았다. 그렇지만 나는 될 수 있는 한 외화 낭비를 없애려는 애국자이기 때문에 통역자 말대로 구경만 하고 다녔다. 우리나라 개 키우듯 원숭이를 키우는 상점들을 구경하며 이국의 밤을 즐기고 다녔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그냥 자기 아까워 쌍쌍이 술집 구경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은 채홍초대소라는 간판을 내건 괜찮은 호텔이다. 나와 한방에 머무르게 된 영재씨와 마산 친구 둘과 넷이서 밤거리로 다시 나갔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한 거리는 이 나라의 오일사정이 좋다는 증거다. 밤의 환락가를 돌아다녔지만 카바레나 가라오케 같은 곳은 겁이 났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이곳 문화도 모르는 판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우리나라 오징어와 같이 생겼는데 길게 생겨 물어 봐도 값이 비싸고, 이 나라 흔한 오리 고기도 비싸다.
선술집 같은 곳에 겨우 말이 통해서 자리 잡고 앉았는데 서울 친구들이 3명 더 와서 7명이 한자리에 앉아 이 나라 사람들이 잘 먹는 소응주의 값이 100원이라 마음에 근사해서 한 병 주문하고, 안주를 물었더니 30원짜리, 40원짜리가 있단다. 우리의 신기해하는 표정과 이상한 말투에 이곳 주인도 안주를 만들며 웃는다. 30원짜리는 750원이라 싸다고 여기고 기다리며 있다가 안주 접시 나온 걸 보고 우리는 실망의 신음을 내뱉었다. 꾀죄죄한 작은 접시에 안주 양도 쬐그맣다. 그리고 밀가루 같은 것을 묻혀 내왔는데 동작 빠른 서울 친구 한 명이 뒤적여 한 입 먹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상 밑에다 도로 뱉는다. 마산 현종씨는 오징어 말린 거라며 먹고, 소응주를 한 컵씩 따라서 잔을 부닥치며 타국의 건투를 빈 것은 좋았는데 마시고는 전부 니키하고 달찍하기도 하고, 솔냄새도 나고, 이상야릇한 맛에 속았다고 야단이다. 나는 그러는 판에 한잔을 야금야금 다 먹고, 한잔 더 주라며 “맛이 참 좋은데.”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깔깔대고 웃더니 중국사람이 되었다고 놀린다. 아무튼 이 소응주 맛은 두고두고 얘깃거리로 남아 맛이 이상하면 “소응주 맛 같냐?” 하고 묻고 했다. 우리 얌전한 팀들은 그 이상 수상한 짓 안하고 뜨거운 물에 목욕하며 노정에 시달린 몸을 침대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