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초등학교
한밭은 대전의 순 우리말 표현 이예요. 한은 우리말 크다, 넓다, 끝이 없다 등의 뜻을 갖고 있지요. 서울에 있는 한강은 큰 강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지요. 새 중에 가장 큰 새 황새, 이것도 크다는 뜻의 한 새에서 온 것 이예요. 밭은 말 그대로 곡식을 심고 가꾸는 밭을 말해요. 그러므로 한밭은 큰 밭, 넓은 밭이란 뜻이지요.
회덕초등학교
회덕(懷德)이라는 말은 ‘덕을 품다.’는 뜻이 들어 있어요. 근데 이 말은 회덕이라는 이지역이 덕을 품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제발 덕을 좀 품어라.’라는 뜻으로 고려 초 왕건이 지어줬다고 해요.
아시다시피 신라 말 어지러운 정국을 틈타 전국의 영웅호걸들의 군웅할거로 막을 연 후삼국시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두 영웅이 있었으니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진훤(견훤), 그 둘이 서로 패권을 차지하게위해 치열하게 다투던 중 진훤이 그의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된 후 가까스로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고 왕건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 이예요.
그런데 후백제가 망하기 전 신검을 중심으로 한 후백제군이 끝까지 저항한 곳이 이곳 대전, 연산 지역이었어요. 대전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연산은 신검의 후백제군이 왕건의 고려군에 맞서 최후의 전투를 벌인 곳 이예요.
대전과 연산지역의 후백제군을 평정한 왕건은 마지막 전투지인 연산에 개태사라는 절을 지어 전투에서 희생된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곳 회덕지역에는 제발 고려에 맞서지만 말고 가슴속에 덕을 품으라는 뜻으로 회덕이라는 지명을 지어주었다고 해요. 그러나 지금은 그 사실은 다 잊어버리고 글자그대로 덕을 품은 곳이라는 뜻의 회덕이라고만 알려져 있지요.
대덕초등학교
대덕(大德)이라는 말은 송시열과 관련이 있는 말 이예요.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000번이나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한 조선후기 대학자로 인데, 그 송시열이 살며 덕을 펼친 곳이라 하여 조선시대 이곳을 대덕군이라 했어요.
그런데 이 송시열에 대한 당시 선비들의 생각은 극과 극으로 갈려요. 서인 특히 노론계열에서는 송시열을 송자라 칭하며 공자나 주자와 같은 반열에 올려 큰 스승으로 모시는 반면, 동인이나 남인 계열에서는 그들이 집에서 기르는 개 이름을 시열이라 할 정도로 아주 혐오했답니다.
지금이야 봄 입춘 즈음하여 붙이는 입춘첩을 건양다경(建陽多慶)과 입춘대길(立春大吉) 구분 없이, 심지어는 한 쪽문에는 건양다경을 한 쪽문에는 입춘대길을 써 붙이지만, 조선시대엔 어림없는 소리, 서인 계열은 송시열의 건양다경을, 영남 남인 계열은 입춘대길을 붙일 정도로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고 해요. 건양다경은 송시열이 입춘을 맞이하여 처음 사용한 입춘첩이고, 입춘대길은 미수 허목이 붙인 입춘첩이라네요. 그래서 서인계열은 같은 서인인 송시열의 입춘첩을, 영남 남인 계열은 같은 남인인 미수 허목의 입춘첩을 붙였답니다.
영남하면 생각나는 것은 우선 양반이라는 말과 함께 그들이 머물던 고택이 생각나지요? 저만 그런가요?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영남은 영조 이후 반역향이 낙인찍혀 대대로 현실 정치에서 철저히 소외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인좌의 난과 관련이 있어요.
영조 때 이인좌는 경종이 영조에 의해 억울하게 독살되었다며 경종의 신원을 명분으로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어요. 이때 대부분의 영남인들이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어요. 이에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후 이에 동조한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들 남인의 본향인 영남을 반역향이라 못 박아 이후 현실정치에서 철저하게 배제 하였어요.
그러자 남인들은 현실 정치에서 소외됨을 만회하기 위해 문중이라는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요. 그래서 철저히 문중 중심으로 서원도 만들고 학문, 예법 등을 가르쳤어요. 혼인도 철저하게 그들 남인 중심으로 혼맥(婚脈)을 이어 나갔고, 나름 양반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갔어요. 또한 그들이 사는 집의 대문도 솟을 대문으로 높이고 위엄 있게 짓기 시작했지요. 그래 우린 현실 정치에서 멀어졌어도 우리끼리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그래서 영남의 고택들은 서울이나 충청, 전라도의 한옥보다 더 권위적이고 위압적으로 보이는 게 그래서 그래요.
또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택 대부분이 영남에 있는데 이것은 영남 양반들이 많이 짓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6.25전쟁 그리고 개발과 관련이 있어요.
우선 6.25전쟁으로 인해 충청과 경기 지역에 남아있던 고택들이 거의 파괴되었어요. 북한군이 남침하여 내려 왔을 때 점령지에서 그래도 쓸 만 한 집은 예전 양반 고택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인민군 사령부를 대부분 시골 고택에 두었지요. 그걸 미군이 그냥 뒀겠어요. 날마다 비행기로 인민군 사령부를 폭격해댔지요. 그러니 고택이 남아났겠어요? 대부분 이때 파괴 되었지요. 그러나 영남 지역은 우리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막아서는 바람에 영남에 있는 고택들은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영남지역엔 지금까지 많은 고택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경기 충청의 고택들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스러져 갔어요. 제가 어릴 때 살던 집도 꽤나 큰 고택이었는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빈집으로 있던 것을 개발업자가 사가지고는 모두 부수고 그 자리에 빌라를 지었더라고요. 예전엔 우리 충청에도 꽤 많은 고택이 있었는데 이제는 겨우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어요.
영남, 호남, 영동, 영서, 호서는 어디?
영남, 호남, 영동, 영서, 호서 등등 우리가 요즘 흔히 쓰는 말입니다. 특히 날씨 예보에서는 매일 영남지방 날씨는 어떻고, 호남지방 날씨는...... 그렇다면 여기서 영남, 호남은 어디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아마 대게 영남은 경상도 지방을, 호남은 전라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인 것쯤은 눈치로라도 알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경상도 지방을 왜 영남이라 하고, 전라도 지방을 왜 호남이라 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경상도 지역에서 서울을 가려면 높디높은 소백산맥을 넘어야 해요. 그런데 이 소백산맥에는 계립령, 죽령, 이화령, 추풍령 등 몇 개의 고개가 있어요. 바로 이 고개 남쪽 지역이란 뜻에서 영남(嶺南)지방이라 한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영남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보러 갈 때 절대 죽령이나 추풍령은 넘어 가지 않았대요. 그것은 죽령을 넘어 과거보러 가면 쭉쭉(竹竹)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과거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대신 이화령과 문경세제를 넘어 과거 보거 갔답니다. 이화령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왕이 하사하는 어사화가 바로 이화관(李花冠)이거든요. 이화는 배꽃이 아니라 살구꽃 이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화를 배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 이예요. 배꽃을 나타내는 이화는 梨花 이렇게 써요. 그런데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는 성씨가 오얏 이씨 잖아요. 오얏 이씨는 李 이렇게 써요. 그러니 조선 왕가에서 왕가를 상징하는 꽃을 배꽃이 아닌 살구꽃을 쓰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러니 이화령을 넘으면 이화관을 받는 다는 믿음? 그리고 문경세제는 말 그대로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 과거에 합격했다는 경사스런 소리를 들으려 문경세제를 넘어 과거 보거 갔답니다.
그럼 영동과 영서도 고개? 맞아요. 영동과 영서도 고개 동쪽과 고개 서쪽을 뜻해요 근데 여기서 말하는 영동과 영서는 소백산맥에 있는 이화령이나 문경세제가 아닌 다른 고개예요.
이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고개는 대관령이예요. 경기 지역에서 동해안으로 가려면 넘어야하는 고개, 지금이야 터널이 뚫리고 고속도로가 열려서 쉽게 넘나들지만 예전엔 정말 험하디 험한 고개였어요. 그 대관령 동쪽이 영동(嶺東), 서쪽이 영서(嶺西)지역이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