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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대왕의 탄강과 건국
서기40년경변한의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과 임금의제도가 있을 리 없었고 다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등 9간이 백성들을 통솔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백성들은 산과 들에 제각기 집단을 이루고 고기잡이와 농사일로서 식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인구가 늘고 생활 수단과 사회 형태가 발전함에 따라 이들은 나라형태를 갖춘 통치조직이 절실하게 되었고 동시에 그 나라를 다스릴 유능한 임금을 추대하여야 할 역사적 전환점에 이르게 되었다.
서기 42년 첫 세기의 중엽에 해당되는 이 해는 제일먼저 고대왕국을 형성 한 것으로 되어있는 신라의 유리왕 19년이며 백제의 다루왕 15년, 고구려의 대무신왕 25년에 해당한다. 한반도에 차례로 생활 집단이 고대왕국의 성립으로 엉기기 시작하던 무렵, 이 고장에도 그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해 3월 계욕일 (계浴日. 음력 3월 첫 뱀날(뱀날)에 액을 물리치기 위해 목욕을 하고 회음하는 풍습)에 9간과 백성들이 시냇가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임금을 점지해 주십사 하고 신에게 정중한 의식을 거행하던 중 문득 가까운 구릉(丘陵) 구지봉(구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었다. 이들이 구지봉에 올라 위를 쳐다보니 거기에는 오색찬란한 서광이 하늘높이 이어지고 서기가 천지에 뻗치며 자주 빛 밧줄에 분홍빛 보자기에 싸인 금합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았다. 이에 9 간들이 신기하고 놀라움에 가득 차 그 금합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해와 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더욱 신기하게 여긴 9간들은 서로 상의한 끝에 그 금합을 아도간의 집에 모시어 두기로 하고 그날은 모두 헤어졌다. 다음날아침 그들은 다시 아도간의 집에 모여 그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개의 황금알은 여섯 동자로 변해 있었다. 이 동자들은 모두가 용모가 준수하고 거룩하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화생한 동자는 나날이 자라서 10여일 후에는 키가 9척이요, 얼굴은 용안이며 눈썹은 八자로 채색이 돌았고 눈은 중동의 아주 신이(神異)한 용모를 갖춘 현현장부의 기상이 넘쳐흘러 9간들은 놀라고, 한편 기뻐서 엎디어 절을 올리며 이는 반듯이 군왕을 점지하여 주심이라 믿어 그달 보름날이 우리들을 다스릴 즉위식을 갖고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니 이 어른이 바로 가락국시조 김수로대왕(金首露大王)이시다.
성(姓)을 김(金)이라 하신 것은 금알에서 화생하였기 때문이며 어휘(御諱)를 수로라 하신 것은 여섯 알 중에서 제일 먼저 화생한 까닭이다. 이에 시조 대왕께서는 국호(國호)를 대가락(大駕洛)이라 정하시고 그 수도를 김해(金海)로 삼으시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분들도 차례로 영토를 정하여 분봉 (分封)하였으니 아라가야 (阿羅伽倻 * 현 함안지방), 고령가야(古寧伽倻 * 현 함창지방). 대가야(大伽倻*현 함안지방), 성산가야 (星 山伽倻*현 성주지방), 소가야(小伽倻*현 고성지방) 등 5가야였다.
♣ 허왕후 책봉
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우신지 7년째 되는 가락기원 7년(서기48년)7월27일 9간들이 대왕께 조알(朝謁)을 하고 아뢰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시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처녀를 간택하여 왕비로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거니와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하는 것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인즉 경들은 염려 마시오] 그러한 어느 날 대왕께서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작은 배와 말을 끌고 망산도에 가서 망을 보게 하시고 신귀간에게는 승점(승岾)으로 나아가 기다리도록 이르셨다. 때마침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 위에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검붉은 빛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 한척이 있었다. 망산도의 유천간이 곧 횃불로 신호를 올리자 그 배는 미끄러지듯 내달아와 지금의 경남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하였다.
그 일행 중에는 공주 (公主) 한 분과 시종 20 인이 타고 있었다. 신귀간이 승점에서 이 광경을 보고 곧바로 대궐로 달려가 대왕께 아뢰었다. 대왕께 서는 매우 흡족히 여기시고 급히 9간들이 일행을 모시고 대궐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9간들이 일행을 모시고 대궐로 들려하였으나 공주께 서는 엄숙히 말씀하시기를[나와 그대들은 초면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리오] 라고 하시었다. 천간 이 돌아와 공주의 말씀을 아뢰이니 대왕께서도 옳게 여기시고 유사를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십리쯤 되는 산기슭에 만전(만殿 * 장막으로친 임금의 임시거처)을 치고 몸소 영접을 하시게 되었다.
공주께서는 별포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山神)에게 예물로 바쳤다. 공주를 시종해 온 신하와 노비는 20여명이 되었고 또한 공주께서 가져온 화려한 비단과 의상 그리고 금은주옥 패물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공주께서 점차 대왕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대왕께서는 친히 나아가 정중히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드시었다. 시종해온 사람들은 뜰아래에서 대왕을 뵙고 곧 물러갔다.
대왕께서는 유사에게 명하여 시종내외에게는 방 하나씩 주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에게는 한방에 5, 6명씩 들게 하고는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감도는 자리에서 자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비단과 보화까지주고는 군졸들로 하여금 보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대왕과 공주께서는 침전에 드시니 비로써 공주께서는 조용히 말문을 여신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 의 일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皇 天上帝)를 뵈었는데 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이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 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 너는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거라}라고 하셨답니다. 이리하여 저는 배를 타고 증조(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좋은 과일)를 갖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이 복숭아는 3 천 년만에 한 번씩 열린다고 전함)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이렇게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대왕 또한 조용히 응답한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서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오.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 드디어 대왕과 공주는 혼인을 맺고 함께 두 밤을 지낸 후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는 왕후가 타고온 배를 돌려보내며 15명의 뱃사공에게 각각 쌀 10석과 비단 30필을 주어 그 노고를 치하했다. 8월1일 아침의 일이었다. 대왕과 왕후는 그제서야 신하를 좌우에 거느리시고 수레를 타고 본궁으로 돌아와 두 분이 힘을 합하여 정사(政事)를 펴게 됐다
♣ 두왕자에게 허씨로 사성(사성)
가락기원 148년(서기189년) 3월1일 왕후께서 붕어하시니 향년 157세였다. 온 나라 백성들은 그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으며 금관성(金官城) 서북 구지봉 (구旨峰)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능의 이름을 후능 (后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께서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 (主浦村)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께서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바쳤던 그 산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은 두 딸을 낳고 30여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나머지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지 7~8년이 되는데도 자녀를 낳지 못 하였고 오직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지내다 모두 죽으니 그들이 살던 빈관(賓館)은 텅 빈채 아무도 없었다. 대왕께서는 왕후가 붕어 하신 뒤 매양 외로움을 달래며 슬퍼하시다가 왕후가 가신지 10년 후인 가락기원158년(서기199년)3월23일에 붕어하시니 재왕위121년 재태왕위 (在太王位)38년 수(壽) 158년이셨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부모를 여윈 듯, 왕후가 붕어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했다. 대궐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길, 둘레가 3백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수로왕묘(首露王廟)라 하였다.
아드님 거등왕에서 부터 9대 손양왕에 이르기까지 이묘(廟)에 제향을 올렸는데 반드시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풍성하고 청결한 제물을 차려 제 올리는 일을 끊이지 않았다 (현재는 음력 3월 15일 과 9월 15일에 대제를 봉행한다) 고보왕세계(古譜王世系)에 의하면 허왕후(許王后)께서는 10남 2녀를 낳으셨는데 맏아들님은 제2대 임금이 신거등왕이며 차남은 거칠군(居漆君)으로서 3남과 같이 허씨(許氏)로 사성(賜姓) 되었고 나머지 7왕자는 모두 성불(成佛)하여 칠불사(七佛寺)에 병향
(병享)되었다. 장녀 영안공주(永安公主)는 태사(太師) 배열문(裵烈文)에게 하가(下嫁)하였고 둘째 공주는 신라 석태자비가 되었다.
♣ 김해김씨.허 씨.인천이씨는 동본동근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가락국 시조대왕을 시조로 하는 동일혈족이다. 즉 허씨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모계(母系)의 성(姓)을 쫒고 있다는데서 타씨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시조 허왕후(許王后 )께서는 왕자(王子)열 분을 낳으셨는데 시조 대왕께서 태자는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왕자 는 이국에 출가하시어 늘 외로워하시는 시조왕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母后)의 성을 계승케 하였다.
가락국이 신라와 합친 후 김해에 남아있던 허씨는 김해 허씨가 되었으니 그 시조는 허염(許琰)이시다. 또 하양으로 이주한 분은 하양허씨(河陽許氏)가 되고 그 시조는 호장(戶長) 허강안(許康安)이시다. 또한 공암양천(孔岩陽川)으로 이주한 분들은 양천 허씨가 되었으니 시조는 허선문(許宣文)이시다. 그러니까 모든 허씨들은 김해김씨로 부터 갈라졌으며 가락의 왕손 들이다. 선조들께서 가락국의 사적(社적)이 끊긴 뒤 각기 사방으로 분거(分居) 하였다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그 고장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던 것이다. 인천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라진 분적종 (分籍宗)이며 시조는 고려 현종(현宗)때 상서좌복야(尙書左복야)를 역임하신 이허겸(李許謙)이시다.
공(公)의 선세(先世)에 허기(許奇)란 분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셨다가 천자(天子)로부터 이씨로 사성(賜姓)받으셨으며 훗날 이허겸공께서 소송현개국후(소城현開國候)에 봉해지면서 인천 이씨로 관향을 갖게 된 것이다. 소성이란 인천의 옛 지명.
1.김녕군 휘 목경파(경파) : 참판공파, 횡성공파, 안경공파, 석정공파, 호참공파, 참찬공파, 봉상공파, 밀직사공파, 문절공파, 밀직공파, 평장사공파
2.감무공 휘 익경파(사군파) : 생원공파, 도총공파〈►휘 경신파(서강공 휘 계금파),휘 축은공 휘 방려파) 〉,생원공파, 찬성공파, 상서공파, 공간공파
3.판도판서공 휘 관파(삼현파) : 군수공파, 집의공파, 한림공파, 진사공파, 녹사공파, 진의공파
4.부호궁공 휘 거공파 5.우후공 휘 옥진파, 6.승사랑공 휘 지서파 7.부정공 휘 평파 8.판도판서공 휘 첨검파 9.록사공 휘 소파 10.판전공 휘 휘명택파 11.판서공 휘 불비 12.좌정승공 휘 만희파 13.승정공 휘 종정파 14.상서공 휘 홍보파 15.부호군공 휘 천익파 16.판결사공 휘 용만파 17.진사공 휘 건파 18.류수공 휘 운파 19.운은공 휘 대진파 20.율은공 휘 휘손파 21.승지공 휘 간파 22.시중공(문경공)휘 탁파 23.부사공 휘 근파 24.한림공 휘 관파 25.충정공 휘 구파 26.도사공 휘 연파 27.장사군 휘 선파 28.참봉공 휘 인서파 29.도사공 휘 인파 30.대제학공 휘 득하파 31.도총관공 휘 경신파(서강공 휘 계금파) 31-1.도총관공 휘 경신파(축은공 휘 방려파) 32.충경공 휘 대리파 33.사정공 휘 이형파 34.문천공 휘 귀존파 35.충순위공 휘 극제파 36.통종공 휘 창수파 37.판서공 휘 진업파 38.참의공 휘 진시파 39.수성백공 휘 방파 40.학생공 휘 낙서파 41.부호군공 휘 우류파 42.생원공 휘 현중파 43.과주공 휘 우파 44.통사랑공 휘 여구파 45.중낭공 휘 휴파 46.통사랑공 휘 수학파
족보의 종류
1. 족보 또는 보첩(譜牒)
관향을 단위로 한 씨족의 세계와 사적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여러 종류의 보책을 흔히 부르는 말이다.
2. 대동보(大同譜) 또는 대보(大譜)
시조가 같으면서도 본이 갈라져 본을 달리 쓰거나 성을 달리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모든 종파를 총망라하여 편찬한 족보를 말한다.
즉, 본관은 다르지만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통합해서 만든 책이다.
3. 세보(世譜)
두개 파 이상의 종파가 서로 합해서 편찬한 보첩을 말한다.
4. 파보(파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한 계파의 혈연집단만을 중심으로 수록하여 편찬한 보첩을 일컫는다.
5. 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하되,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 존속(尊屬; 자기 윗대)과 비속(卑屬;자기 아랫대)을 망라하여 이름자와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으로 보첩 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이다.
6. 계보(系譜)
가계보, 또는 세계보라고도 하며, 한 가문의 혈통 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이다.
한 씨족 전체가 수록되거나 어느 한 부분만 수록되기도 한다.
7. 가보(家譜) 와 가첩(家牒)
편찬된 형태나 내용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보첩을 말한다.
8.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집성(集成)한 책으로 족보의 사전(辭典)이라 할 만한 책이다.
가야의 시조(수로왕 탄강 설화 :동영상에서 발췌)
1.삼국유사를 보면 인간이 발달해온 변찬사가 입에서 입으로, 혹은 글로서, 책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김해시 낙동강 하구를 살펴보면 강을 끼고 바다에 접해 있어 김해는 여름이면 안개가 자욱합니다.
김해 북쪽 뒷산인 분산. 그중 한 봉우리 위에 오래된 바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바위는 청동기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난방식 고인돌입니다.
햇수로 2,000년이 넘게 김해를 지켜 왔습니다.
고인돌 상석에는 「구지봉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해 사람들은 이 글자의 필체가 한석봉의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설일 뿐 언제, 누가, 새겼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없습니다.
삼국유사에 가락국기에 의하면 구지봉은 가야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고인돌이 지키고 선 분산에 낮은 봉우리 구지봉!
이 근방에서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 이야기가 조용히 시작됩니다.
3.천지가 개벽한 후 지금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이 땅에는 아직 나라가 없었습니다. 단지 마을 촌장인 아홉 간들이 있어 각기 백성을 통솔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임인년 3월 액막이 제삿날이었습니다. 북쪽 구지봉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세히 들으니 흙 한 줌씩을 손에 쥐고서 춤추고 노래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왕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왕을 맞을 수 있다는 말에 들뜬 채 사람들은 기쁘게 춤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아니 내밀면 구워먹으리”
이렇게 부른 노래가 바로 「구지가」였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바다의 왕자인 거북이에게 「머리를 내 놓으라」이렇게 한 것은 “자신들의 왕이 세상에 고개를 들고 간절히 비는 마음이다.” 이렇게 풀이하기도 합니다.
또 “구워먹겠다 고 한 것은 물에 사는 거북이를 불로 위협해서 힘을 내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기를 얼마 후 하늘에서 보랏빛 끈에 매달린 금상자가 내려왔습니다. 그 속엔 태양처럼 둥근 알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랍고 기뻐서 수없이 절을 하다가 다시 금 상자를 싸들고 아홉 간 중의 한 사람인 아도간의 집으로 함께 몰려갔습니다.
김해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김수로의 탄생 이야기를 제 이웃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게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하늘에서 금합이 내려오는 곳이라는 구지봉엔 입구에서부터 많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오래된 곳에서 부터 최근 것에 이르기까지 구지봉을 표시한 표석들을 지나 구지봉의 정상에 오르면 뜻밖의 거창한 석조물을 만나게 됩니다.
70년대에 만들어진 기념 조형물입니다. 화강암으로 매끄럽게 깎아놓은 태양처럼 둥그런 알 여섯 개. 위에 놓인 알이 제일 먼저 태어난 김수로의 알입니다.
그 알들을 담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금으로 된 상자. 그리고 그 주위를 용들이 엉킨 채 감싸고 있습니다.
여러 마리의 용들은 준왕의 알이 담긴 금상자를 지키기 위해 벽을 만들고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용 바깥쪽으로 다시 거북이가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모두 아홉 마리인 돌 거북이들은 알을 받았던 아홉 간들을 상징합니다.
돌 거북이의 표정은 마치 6 가야방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08년 참봉 화상이 구지봉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석비도 눈에 띕니다.
이야기의 상쇠에 이렇듯 기념물이 많이 선 것은 드문 일. 그토록 김수로왕의 탄생 이야기는 김해 사람들을 매혹 시켰습니다.
구지봉에선 오늘도 김수로의 탄생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에 가지고 하늘에다 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내려주십시오.”하고 비니까 하늘에서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고 합니다.
“내가 내려가서 왕이 될 테니까 여러분들이 구지봉에 모여서 땅을 파면서 구지가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땅을 파니까 하늘에서 보라색 줄에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궤짝이 나왔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알이 여섯 개 나왔습니다.
김수로왕은 왜 김씨일까?
금으로 된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쇠 금자를 써서 김씨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알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많습니다.
혁거세, 동명왕, 김알지. 모든 이야기가 저마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김해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다른 이야기들 보다 김수로왕의 이야기가 가슴 속에 더 깊게 새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밤 꿈속에서 아이들은 알을 깨고 나오는 김수로왕 다섯 형제의 아기들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가던 눈빛이 오늘밤의 꿈을 미리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구지봉에서 금상자를 받아온 지 열흘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지만 상자 속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상자 속의 알들은 모두가 잘 생긴 사내아이로 변했습니다. 상자를 열고 그 속에서 여섯 아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받들었습니다. 그러기를 또 열흘 낮 밤. 아이들은 장성해서 그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습니다. 눈썹은 여덟 가지 색이요, 눈동자는 겹으로 되었고, 키는 구척에, 얼굴은 용을 닮았습니다. 태어난 지 단 열흘 만에 기골이 장대한 어른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중 첫째가 그달 십오일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이 고대하던 왕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그이 이름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수로, 도는 수록이라 했고, 나라 아름을 가야국 또는 가락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섯 가야 중 하나인 가야국이 탄생하고, 시조인 김수로왕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남은 다섯 형제는 돌아가 각각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야의 경계는 동쪽으로 황산강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지리산에 이르렀습니다.
계묘년 몸 정월. 김수로왕은 서울 자리를 잡기 위해 나섰습니다.
남쪽에 신사평을 돌아본 왕은 이 땅이 범상치 않다 생각했습니다.
해서 농한기를 이용해 이곳에 궁월 전각과 무기고, 곡식 창고를 지었고 좋은 날을 받아 새로 지은 대궐에 들어가 정사를 돌봤습니다.
가야국이 터를 잡고 그 위에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곳. 그 중심 터가 지금의 김해입니다.
이어서 형제가 나라의 터를 잡고 5백 여 년의 길지 않은 세월 동안 놀라운 철의 문명을 열었던 곳.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신비로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은 곳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대동여지도만 보더라도 김해평야는 낙동강 하구의 강바닥에 불과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의 지형변화는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습니다.
이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판이 먼 옛날 가야가 터를 잡던 무렵엔 땅이 아닌 바다였습니다.
가야국은 이곳을 중심으로 앞선 철기 문화와 지역적 특성을 활용한 해상 활동을 앞세워 신비로운 문명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지금 많은 빌딩과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이곳에선 찬란하고 신비로웠던 가야 문명의 흔적을 찾기는 힘듭니다.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하고 발전시켰던 것도 지금은 이야기로만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바다로 둘러싸였었다는 당시 지형을 생각하면 교통과 교역에서 유리했던 대신 불리한 점도 많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편리한 해상교통로를 이용해 주변 국가들이 자주 침입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신라의 왕이 되는 석씨의 시조 석탈해의 도전도 빈번한 주변국가의 갈등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구유사는 그런 갈등을 탈해와 김수로왕의 신비로운 변신술 대결 이야기로 풀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웃나라 완화국의 한달왕 부인도 알을 낳았습니다. 그 알 역시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이름을 탈해라고 불렀습니다.
탈해는 보통 사람보다 작은 세 척 키에 머리가 커다란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가야로 왔습니다. 수로왕을 찾아 가야의 궁궐까지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석탈해. 그는 난데없이 “가야왕의 지위를 빼앗으러 왔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로왕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탈해는 변신술로 겨뤄보자고 청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탈해가 독수리로 변하자 수로왕은 매로 변했습니다.
다시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수로왕은 새 매로 변했습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본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새로 변한 자신을 헤치지 않자 수로왕의 높은 덕에 감동한 탈해는 가야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수로왕은 탈해가 가야에 다시 머무르면서 난리를 꾸밀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해서 배 500척을 동원해 뒤를 쫒았습니다. 그 위세에 놀란 탈해는 기림의 땅까지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석탈해와 김수로왕이 대결을 벌인 곳이라 전해지는 인격. 지금은 그 명칭마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김수로왕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부조가 김해 시내에 건립돼 있어지나는 길에 석탈해와 김수로왕의 일화를 새겨볼 수 있을 뿐입니다.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대결 일화에서 학자들은 당시 힘의 서열을 정하는 척도는 철기문명의 수준이었고 따라서 가야가 신라보다 철기문명이 앞서지 않았던 것인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삼구유사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15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김해시의 도심에 위치한 수로왕릉은 고려 문종 때까지는 잘 보존됐지만 조선 초들어 황폐해졌고 이후 세종과 인조 임금이 다시 새롭게 정비했다고 전합니다. 일연의 가락국기의 기록과 비교하면 수로왕릉이 평지의 주위 3백보를 능 옆으로 정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왕릉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수로왕릉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신라 말기 연기와 간이라는 자가 수로왕릉의 재앙을 빼앗고 멋대로 다른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 중 이유 없이 대들보가 무너졌고 그는 무너진 대들보에 깔려 죽었다고 전합니다. 또 한 번은 도적들이 수로왕의 사당에 나타나 금과 옥을 훔쳐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길이 서른 자가 넘는 구렁이가 나타나 도둑들을 쫓았다고 합니다. 묘 앞에 왕릉 비는 세월의 흔적을 안고 산 채 수로왕 왕릉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찬란히 들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수로왕릉 내의 숭전각에는 왕과 왕비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영정의 다실적인 모습에 김수로왕의 숨결이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왕의 모습은 퍽이나 인자해 보이고 조금은 이국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 우측에 나란히 모셔져 있는 왕비 허황후. 어깨 뒤에 물고기 문양과 가락국기의 기록으로 인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배를 타고 이국만리 먼 땅에서 찾아와 수로왕비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헤치는 언제 닿을지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낯선 땅으로 무작정 건너온 허황후. 그녀가 있기에 아직도 많은 배일에 쌓인 가야국의 이야기는 더욱 더 신비함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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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시조(수로왕 탄강 설화)
1.삼국유사를 보면 인간이 발달해온 변찬사가 입에서 입으로, 혹은 글로서, 책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요,
2.김해시 낙동강 하구를 살펴보면 강을 끼고 바다에 접해 있어 김해는 여름이면 안개가 자욱하다 합니다.
김해 북쪽 뒷산인 분산 중에 한 봉우리 위에 오래된 바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바위는 청동기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난방식 고인돌이라고 하는데 햇수로 2,000년이 넘게 김해를 지켜 왔다고 합니다.
고인돌 상석에는 「구지봉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요, 김해 사람들은 이 글자의 필체가 한석봉의 것이라 믿고 있지만 속설일 뿐 언제, 누가, 새겼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없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의하면 구지봉은 가야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 고인돌이 지키고 선 분산에 낮은 봉우리 구지봉이라고 합니다.
이 근방에서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 이야기가 조용히 시작됩니다.
3.천지가 개벽한 후 지금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이 땅에는 아직 나라가 없었고,
단지 마을 촌장인 아홉 간들이 있어 각기 백성을 통솔하며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임인년 3월 액막이 제삿날이었는데, 북쪽 구지봉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자세히 들으니 흙 한 줌씩을 손에 쥐고서 춤추고 노래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왕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왕을 맞을 수 있다는 말에 들뜬 채 사람들은 기쁘게 춤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아니 내밀면 구워먹으리”
이렇게 불렀는데 이 노래가 바로 「구지가」였다고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바다의 왕자인 거북이에게 「머리를 내 놓으라」이렇게 한 것은 “자신들의 왕이 세상에 고개를 들고 간절히 비는 마음이다.” 이렇게 풀이하기도 한다는데요,
또 “구워먹겠다 고 한 것은 물에 사는 거북이를 불로 위협해서 힘을 내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그러기를 얼마 후 하늘에서 보랏빛 끈에 매달린 금 상자가 내려왔는데,
그 속엔 태양처럼 둥근 알 여섯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놀랍고 기뻐서 수없이 절을 하다가 다시 금 상자를 싸들고 아홉 간 중의 한 사람인 아도간의 집으로 함께 몰려갔다고 합니다.
김해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김수로의 탄생 이야기를 제 이웃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는데요,
그래선지 하늘에서 금합이 내려오는 곳이라는 구지봉엔 입구에서부터 많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김해에 다녀오신 분들께서는 보신 분들께서는 보셨겠지만
오래된 곳에서 부터 최근 것에 이르기까지 구지봉을 표시한 표석들을 지나 구지봉의 정상에 오르면 뜻밖의 거창한 석조물을 만나게 됩니다.
70년대에 만들어진 기념 조형물로 화강암으로 매끄럽게 깎아놓은 태양처럼 둥그런 알 여섯 개가 있는데 위에 놓인 알이 제일 먼저 태어난 김수로의 알이랍니다.
그 알들을 담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금으로 된 상자. 그리고 그 주위를 용들이 엉킨 채 감싸고 있습니다.
여러 마리의 용들은 준왕의 알이 담긴 금 상자를 지키기 위해 벽을 만들고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용 바깥쪽으로 다시 거북이가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모두 아홉 마리인 돌 거북이들은 알을 받았던 아홉 간들을 상징합니다.
돌 거북이의 표정은 마치 6 가야 방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08년 참봉 화상이 구지봉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석비도 눈에 띕니다.
이야기의 상쇠에 이렇듯 기념물이 많이 선 것은 드문 일. 그토록 김수로왕의 탄생 이야기는 김해 사람들을 매혹 시켰습니다.
구지봉에선 오늘도 김수로의 탄생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모에 가지고 하늘에다 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내려주십시오.”하고 비니까 하늘에서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고 합니다.
“내가 내려가서 왕이 될 테니까 여러분들이 구지봉에 모여서 땅을 파면서 구지가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땅을 파니까 하늘에서 보라색 줄에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궤짝이 나왔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알이 여섯 개 나왔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은 왜 김씨일까?
금으로 된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쇠 금자를 써서 김씨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알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많은데요,
혁거세, 동명왕, 김알지. 모든 이야기가 저마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김해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다른 이야기들 보다 김수로왕의 이야기가 가슴 속에 더 깊게 새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밤 꿈속에서 아이들은 알을 깨고 나오는 김수로왕 다섯 형제의 아기들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가던 눈빛이 오늘밤의 꿈을 미리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구지봉에서 금상자를 받아온 지 열흘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지만 상자 속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상자 속의 알들은 모두가 잘 생긴 사내아이로 변했으며, 상자를 열고 그 속에서 여섯 아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몹시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받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또 열흘 낮 밤.
아이들은 장성해서 그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는데,
눈썹은 여덟 가지 색이요,
눈동자는 겹으로 되었고,
키는 구척에,
얼굴은 용을 닮았었다고 합니다.
태어난 지 단 열흘 만에 기골이 장대한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중 첫째가 그달 십오일에 왕위에 올랐고
드디어 사람들이 고대하던 왕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수로, 또는 수록이라 했고, 나라 아름을 가야국 또는 가락국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섯 가야 중 하나인 가야국이 탄생하고, 시조인 김수로왕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남은 다섯 형제는 돌아가 각각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야의 경계는 동쪽으로 황산강으로 부터 서북쪽으로 지리산에 이르렀고,
계묘년 몸 정월. 김수로왕은 서울 자리를 잡기 위해 나섰는데
남쪽에 신사평을 돌아본 왕은 이 땅이 범상치 않다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해서 농한기를 이용해 이곳에 궁월 전각과 무기고, 곡식 창고를 지었고 좋은 날을 받아 새로 지은 대궐에 들어가 정사를 돌봤다고 합니다.
가야국이 터를 잡고 그 위에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곳. 그 중심 터가 지금의 김해랍니다.
이어서 형제가 나라의 터를 잡고 5백 여 년의 길지 않은 세월 동안 놀라운 철의 문명을 열었던 곳.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신비로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은 곳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대동여지도만 보더라도 김해평야는 낙동강 하구의 강바닥에 불과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의 지형변화는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판이 먼 옛날 가야가 터를 잡던 무렵엔 땅이 아닌 바다였다고 합니다.
가야국은 이곳을 중심으로 앞선 철기 문화와 지역적 특성을 활용한 해상 활동을 앞세워 신비로운 문명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지금 많은 빌딩과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이곳에선 찬란하고 신비로웠던 가야 문명의 흔적을 찾기는 힘듭니다.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하고 발전시켰던 것도 지금은 이야기로만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바다로 둘러싸였었다는 당시 지형을 생각하면 교통과 교역에서 유리했던 대신 불리한 점도 많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편리한 해상교통로를 이용해 주변 국가들이 자주 침입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신라의 왕이 되는 석씨의 시조 석탈해의 도전도 빈번한 주변국가의 갈등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구유사는 그런 갈등을 탈해와 김수로왕의 신비로운 변신술 대결 이야기로 풀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웃나라 완화국의 한달왕 부인도 알을 낳았습니다. 그 알 역시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이름을 탈해라고 불렀습니다.
탈해는 보통 사람보다 작은 세 척 키에 머리가 커다란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가야로 왔습니다. 수로왕을 찾아 가야의 궁궐까지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석탈해. 그는 난데없이 “가야왕의 지위를 빼앗으러 왔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로왕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탈해는 변신술로 겨뤄보자고 청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탈해가 독수리로 변하자 수로왕은 매로 변했습니다.
다시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수로왕은 새 매로 변했습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본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새로 변한 자신을 헤치지 않자 수로왕의 높은 덕에 감동한 탈해는 가야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수로왕은 탈해가 가야에 다시 머무르면서 난리를 꾸밀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해서 배 500척을 동원해 뒤를 쫒았습니다. 그 위세에 놀란 탈해는 기림의 땅까지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석탈해와 김수로왕이 대결을 벌인 곳이라 전해지는 인격. 지금은 그 명칭마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김수로왕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부조가 김해 시내에 건립돼 있어 지나는 길에 석탈해와 김수로왕의 일화를 새겨볼 수 있을 뿐입니다.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대결 일화에서 학자들은 당시 힘의 서열을 정하는 척도는 철기문명의 수준이었고 따라서 가야가 신라보다 철기문명이 앞서지 않았던 것인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삼구유사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15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김해시의 도심에 위치한 수로왕릉은 고려 문종 때까지는 잘 보존됐지만 조선 초들어 황폐해졌고 이후 세종과 인조 임금이 다시 새롭게 정비했다고 전합니다. 일연의 가락국기의 기록과 비교하면 수로왕릉이 평지의 주위 3백보를 능 옆으로 정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왕릉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수로왕릉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신라 말기 연기와 간이라는 자가 수로왕릉의 재앙을 빼앗고 멋대로 다른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 중 이유 없이 대들보가 무너졌고 그는 무너진 대들보에 깔려 죽었다고 전합니다. 또 한 번은 도적들이 수로왕의 사당에 나타나 금과 옥을 훔쳐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길이 서른 자가 넘는 구렁이가 나타나 도둑들을 쫓았다고 합니다. 묘 앞에 왕릉 비는 세월의 흔적을 안고 산 채 수로왕 왕릉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찬란히 들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수로왕릉 내의 숭전각에는 왕과 왕비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영정의 다실적인 모습에 김수로왕의 숨결이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왕의 모습은 퍽이나 인자해 보이고 조금은 이국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 우측에 나란히 모셔져 있는 왕비 허황후. 어깨 뒤에 물고기 문양과 가락국기의 기록으로 인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배를 타고 이국 만리 먼 땅에서 찾아와 수로왕비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헤치는 언제 닿을지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낯선 땅으로 무작정 건너온 허황후. 그녀가 있기에 아직도 많은 배일에 쌓인 가야국의 이야기는 더욱 더 신비함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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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나타난 허황후(수로왕비의 설화 : 동영상에서 발췌)
1.3국유사 2권(가락국기)의 마지막 대목에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2.시조 김수로왕이 왕 위에 오르고 난 후 가야국은 빠르게 나라의 기반을 닦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신년 7월 27일 조회를 마치고 나서였습니다.
부락의 촌장인 아홉 간 들은 왕의 배필을 정하는 문제를 의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은
“왕후를 정하는 것도 하늘에서 명령이 내릴 것이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아홉 간 중의 한 사람인 유천간에게 “좋은 말을 가지고 남쪽 망산도에 가서 기다려보라”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서남쪽 바다에서 배가 한 척 나타나 북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배는 붉은 비단 돛을 달고 붉은 비단 깃발을 펼친 배였습니다.
망산도에서 횃불을 들자 배는 섬으로 다가 왔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 보던 신규관 일행은 대궐로 달려와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왕은 기뻐하면서 “화려하게 꾸민 배로 이들을 맞아 곧 대궐로 모셔들이라” 이렇게 명했습니다.
전갈을 받은 망산도의 유천간은 배에 탄 일행을 공손히 맞아 대궐로 모시려 했습니다.
그러자 공주로 보이는 소녀가 나서서 “처음 본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다.”이렇게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수로왕은 직접 나가 대궐 서남쪽 산기슭에 천막을 치고서 배를 타고 온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수로왕이 소녀를 기다렸다는 산기슭은 지금 김해와 진해를 가르는 진해시 용원동 지역 일대랍니다.
이 지역의 앞 바다가 소녀가 나타났다는 곳이다. 이 바다에 그 옛날 노를 젓는 배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습니다.
공장이 들어서고 방파제가 쌓여지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바다는 물론 인근 지역까지 이 지역의 모습은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습니다.
이 바다의 한 구석에 작은 돌섬이 있습니다.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섬인지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돌섬 한 귀퉁이.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망산도란 비가 서 있습니다.
망산도.
배를 타고 온 소녀가 지루한 항해 끝에 첫발을 내려딛는 가야국의 땅. 그 이야기가 바로 이 섬에 서려 있었습니다. 돌섬 뒤쪽으로 방파제가 들어선 후론 썰물이 되면 거의 바닥을 들어냅니다. 섬이라고 부르기도 이젠 옹색해졌습니다. 파도가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놓은 것이 분명하가 할 것입니다. 주름지고 얼룩진 것 같은 기묘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돌섬. 독특한 바위 모양 때문인지 이국땅에 처음 발을 내듣는 소녀의 설래임이 전해오는 것만 같습니다. 망상도에 올라서면 바로 눈앞에 또 하나 작은 돌섬이 보입니다.
박 섬.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쪽박 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박섬에도 배를 타고 온 소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목선을 타고 왔는지, 뭘 타고 왔는지 몰라도 여기 와서 김수로왕 만나서 갔지요. 어쨌든 전설은 그렇습니다. 이 배를 타고 왔지요.”이곳 사람들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입니다. 타고 온 배가 엎어져 바위섬이 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애초부터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온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가야의 이야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새로 쌓은 방파제 뒤편으로 또 하나 공주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배를 댄 곳을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운 유주각.
구한말인 1908년 나라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방파제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이 마을 모두가 바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를 댓다는 장소에 기념비가 동네 한 가운데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김해 김씨 종손들은 이 사당에서 매년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뭄이든 해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활용하곤 한답니다. 이 마을에서 가야국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꿈 이야기 하나만을 믿고 무작정 낯선 타국을 향해 거친 바다를 건너온 소녀에게도 이야기는 자신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소중한 꿈이었을 것입니다. 연약한 소녀에게 바다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 소중한 꿈.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 봅니다.
붉은 돛을 단 배는 뭍으로 다가와 별포 나름 목에 멈춰섰습니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높은 산까지 오르자 일행은 지친 다리를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 공주로 보이는 소녀는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반듯하게 접어서 조심스럽게 땅 위에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마치 깨지는 물건을 다루는 것 같은 신중한 몸짓이었습니다. 바지를 내려놓은 소녀는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지를 폐백으로 삼아 산신께 바친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소녀가 바지를 바친 이곳을 비단 능, 곡예 현자를 써서 능현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대목을 여성으로써 통과 의레를 의미한다.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폐백을 바친 일행이 점차 임금이 있는 처소로 가까이 오자 왕은 직접 나가 일행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소녀를 장막으로 인도한 왕은 다른 일행들도 편히 쉬게 하도록 명했습니다. 장막에 든 소녀는 자신을 소개하길 “아유타국에 공주 허황옥으로써 본국의 부왕과 황후께서 가락국, 수로임금의 배필이 되라고 보내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왕도 “공주가 멀리서부터 올 것을 짐작하고 신하들이 결혼하라는 청도 듣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현명하고 어진 그대가 왔으니 커다란 행복이요,”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그 두 사람은 왕과 왕후로 맺어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왕과 왕후는 장막 안에서 이틀 밤 하루 낮을 지냈습니다. 이 때 하늘의 달은 유난히 밝았습니다. 해서 후세 사람들은 장막이었던 산을 명월산이라 불렀고, 그 자리에 절을 지은 절을 명월사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마치 가야국 왕과 왕후의 결혼을 축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산속에서 피어난 수로왕과 허황후의 사랑이야기. 그 이야기가 전해지는 명월사가 정확히 어디만큼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부산시 지사동에 위치한 지금의 흥국사가 옛 명월사의 터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은 왕후와 사랑한 장소인 명월사를 크게 중축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루에도 수 백 명의 길손이 명월사를 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명월사는 불에 탓고 지금의 흥국사에서 명월사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법당 안에 놓인 뱀과 부처가 새겨진 사황석.
이 돌이 수로왕 허황후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간혹 있는 정도랍니다. 이렇게 흔적은 희미해졌지만 이야기는 이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생생할수록 그 자체를 찾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까.
하지만 아쉽게도 가야를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할 듯 경내 한 켠에 비가 서 있습니다. 수로왕이 왕후를 맞이한 곳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것을 보면 이 비는 금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과 왕후, 그리고 수행하던 사람들의 행렬은 산을 넘어 궁궐로 돌아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궁궐이 어디쯤일지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김해 시내에 분산 근처가 아니었을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뚜렸한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장소마다 무엇이든 표시를 해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김수로왕의 배필이 되기 위해 허황후가 야유타국에서부터 바다를 건너온 먼 항해길. 허황후의 본국이라는 아유타국은 인도라는 설과, 중국이라는 설, 두 가지 다른 의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허황후가 본국에서 많은 물건을 싣고 왔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지금은 그 물건들이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구지봉과 이어진 둔덕, 허황 구릉의 가까운 곳에 남아있는 것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파사석탑.
허황후가 야유타국에서 건너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돌탑입니다. 파사석은 인도에서만 나는 석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탑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합니다. 배에 균형을 잡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거센 풍랑을 잠재우는 영험한 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둘 다 모두가 그럴 듯합니다. 찬찬히 보면 어떤 때는 자주 빛을 또 어떤 때는 보라 빛을 띠는 수수한 모양의 이 돌탑이 허황후의 이야기로 더 깊숙이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만 같습니다. 가야국의 수로왕이 왕후를 맞으니 이는 하늘에 대하여 땅이 있음과 같았다고 생각들 합니다.
허황후의 내조의 공으로 가야국은 더욱 안정됐습니다. 왕은 아홉 간들의 위풍과 명칭을 모두 존귀한 벼슬의 칭호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림의 직관 규례와 주나라 한나라의 제도를 참고해서 차근차근 옛 제도를 혁신했고, 또 새로운 관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해서 가야국은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평화롭고 안정된 국가로 성장해했답니다.
그해 허황후는 태자 거등공을 낳았습니다. 이후도 아홉 명의 아들을 더 낳으니 가약국의 왕실의 기반은 절로 든든해졌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세월은 흘렀습니다. 기사면 3월1일 허황후는 백오십칠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라 사람들은 땅이 무너질 듯 슬퍼하면서 왕후를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습니다. 왕후가 바다를 건너올 때 함께 온 일행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노비들도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었습니다. 그들이 묵었던 집은 곧 텅 비게 되었습니다. 허황후를 먼저 보낸 수로왕은 슬픔에 잠겨 한없이 슬퍼하다가 10년 후 자신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멀리 아유타국에서 공주의 신분으로 자라다가 배를 타고 낯선 이국땅을 찾아온 신비의 소녀 허황후. 허황후는 구지봉과 이어진 양지 바른 곳에 지금도 잠들어 있습니다.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선지 후손들에 의해 묘역은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돼 있습니다. 가야 사람들이 장사 지낸 능 자체는 별다른 장식 없이 검소해 보입니다. 왕후의 깊은 잠을 지키려는 듯 우뚝 선 비만 눈에 e뜀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확인할 때면 세월의 무게를 딛고선 능에 기대어 자신들의 상상을 마음껏 펼칩니다.
그러면 능에 모든 것들도 지난 얘기를 풀어 놓습니다. 1647년 조선의 인조 임금은 수로왕릉과 이것에 같은 돌로 비룰 세웠다. 죽음으로 갈라진 두 넋을 위로하기 위해였을까요?
둔덕에 자리한 왕후의 능이 말없이 김해시를 내려다보는 듯합니다.
김해 사람들에게 가야국의 이야기는 온전히 꾸며낸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선 부조처럼 가야국의 이야기는 언제나 생활 속에서 자연 속에서 살아 숨 쉬어 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들 삶에 일부이며,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나타난 왕후, 허황후.
허황후를 생각하면 나라와 왕실의 기반을 다진 다복한 삶이 떠오릅니다. 동시에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바다를 바라보던 쓸쓸한 삶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삶은 행복과 불행이 함께 하는 것.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된 허황후의 이야기. 이렇게 우리 삶의 이야긱를 전ㄹ해주고 있습니다.
김해김씨 각파 항렬표(行列表)
◆고려사에 신라 유리왕 18년 가락의 아도. 피도. 오도. 유수. 유천. 신천. 오천. 신귀 등 9간이 백성들과 더불어 놀이를 나갔다가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살펴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나이는 열다섯 용모가 빼어나 모두가 예를 맞아 왕을 삼으니 바로 수로왕이고 나라 이름을 가락 이라 하였다는 실화가 실려 있다. 가락11세 세종(김무력) 때부터 크게 번성하였으며, 김해김씨 중조라 할 수 있는 흥무왕 김유신이 그의 손자 일 뿐 아니라, 김무력은 신라조의 각간의 벼슬을 하였으며 무장이었다.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의 딸과 결혼 했을 뿐 아니라 신라의 종성과 인척을 맺고, 가락국을 신라와 합병 소판 대량주 도독 안무 대량주 호군사 장군의 지위에 오른 분이시다.
★김해김씨 대표적 3대파 세계도:(금녕군파. 감무공파. 판도판서공파 라는 명칭은 벼슬 직책을 뜻하며,경파. 사군파. 삼현파 라는 의미는 각파의 별칭을 의미한다.
▶1세(시조 김수로왕)-2세(子.거등왕)-3세(子.마품왕)-4세(子.거질미왕)-5세(子.이시품왕)-6세(子. 좌지왕)-7세(子.취희왕)-8세(子질지왕)-9세(子.겸지왕)-10세(子.구형왕)
※김수로왕과 허황후와 사이에 10남 2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둘째와 셋째는 허황후의 요청에 의해 태인허씨로,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시조 : 12세손인 김유신 장군으로,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10세)의 증손이며, 할아버지(祖父)는 신라의 장손이며 장군인 각간 김무력이고, 아버지(父)는 신라의 제29대 왕인 김춘추의 장인인 김서현으로, 어머니(母)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이다.
※김유신은 자기의 여동생(김서현의 딸)을 김춘추의 아내로 짝지어주고, 자신은 자신의 여동생과 김춘추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생질녀인 결혼함으로써 아내의 외삼촌이면서 아내 아버지가 장인이 된다.
※고로 김유신의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김유신은 아들이요, 외손녀 사위가 된다.
※또한 김유신의 매부인 무열왕 김춘추 입장에서 보면 처남인 김유신은 사위가 되고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김유신이 사위가 됨으로 사돈지간이 된다.
★김유신의 여동생과 무열왕 김춘추 사이에서 태어난 딸 입장에서 보면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외할아버지요, 시아버지가 되고 외산촌인 김유신이 남편이 된다.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2001년종로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西紀2001年辛巳 鍾路譜)항렬(行列)은 金水木火土의 相生之義하여, 定名者 例也라
(1)金寧君諱牧卿派(금녕군휘목경파)(경파)自金寧君二十世로起顯字(금녕군으로부터 20세에 현자)
20세(顯:현)/21세(培:배)/22세(鍾:종)/23세(泰:태//洙:수)/24세(榮:영)/25세(燮:섭//謙:겸)/26세(在:재//載:재)/27세(鎭:진)/28세(浩:호)/29세(根:근)/30세(性:성//炳:병)/ 31세(用:용//坤:곤)/32세(錫:석//鎬:호)/33세(淳:순)/34세(東:동)/35세(煥:환//烈:열) /36세(重:중)/37세(鎔:용//善:선)/38세(洛:낙)/39세(相:상)/40세(炯:형//炳:병)/41세( 基:기//奎:규) ★(경파:京派-영견, 영서, 영정, 영순):고려의 김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한다.(경파)계열-참판공파. 횡성공파. 안경공파. 석성공파. 호참공파. 참찬공파. 봉상공파. 밀직사공파. 문절공파. 밀직공파. 평장사공파
(2)監務公諱益卿派(감무공휘익경파)(사군파)自監務公十7世로起錫字라(감무공으로부터17세에 석자)
17세(錫:석)/18세(泰:태)/19세(相:상)/20세(炫:현)/21세(在:재)/22세(鎬:호)/23세(永:영)/24세(植:식)/25세(炯:형)/26세(奎:규)/27세(鎔:용)/28세(淳:순)/29세(東:동)/30세( 勳:훈)/31세(重:중)/32세(會:회)/33세(源:원)/34세(柱:주)/35세(燦:찬)/36세(基:기) /37세(鍾:종)/38세(涉:섭) ★(사군파:四君派-극조. 완. 여수. 세기):목경의 동생 김익경(益卿)51세손을 중시조로 한다.(사군파)계열-생원공련파. 도총관공파. 생원공록파. 찬성공파. 성서공파. 공간공파
(3)判圖判書公諱管派(판도판서공휘관파)(삼현파)自判書公十六世로起顯字(판도판서공으로부터 16세에 현자)
16세(顯:현)/17세(再:재)/18세(圭:규)/19세(昌:창)/20세(斗:두)/21세(容:용)/22세(坤:곤)/23세(鍾:종)/24세(洙:수//泰:태)/25세(相:상)//東:동)/26세(煥:환//熙:희)/27세(廷:정//在:재)/28세(鎬:호//鎭:진)/29세(永:영//汶:문)/30세(根:근//杓:표)/31세(炳:병//炅:경)/32세(埰:채//基:기)/33세(錫:석//銘:명)/34세(洪:홍//淳:순)/35세(柱:주//桂:계)//36세(烈:열) ★(삼현파:三賢派-극일. 일손. 대유):김관(管)-49세손을 중시조로 한다. (삼현파)계열-군수공파. 집의공파. 한림공파. 진사공파. 녹사공파. 진의공파
(4)副護軍公諱巨公派(부호군공휘거공파)自副護軍公十六世로起洛字(부호군으로부터 16세에 낙자)
16세(洛:낙//泳:영)/17세(相:상//炳:병)/18세(烈:열//燮:섭)/19세(在:재//圭:규)/20세(鉉:현//錫:석)/21세(泰:태//源:원)/22세(植:식//榮영)/23세(顯:현//炯:형)/24세(培:배//採:채)
(5)虞候公諱玉振派(우후공휘옥진파)自虞候公十一世로起相字(우후군으로부터 11세에 상자)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相○ ○煥(환) 圭(규)○ ○錫(석) 泳(영)○ ○根(根) 炳(炳)○ ○基(기) 鎔(용)○ ○泰(태)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柾(정)○ ○熙(희) 在(재)○ ○鎭(진) 河(河)○
(6)承仕郞公諱之瑞派(승사랑공휘지서파)自承仕郞公十八世로起致字(승사랑으로부터 18세에 치자)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致(치)○ ○錫(석) 永(영)○ 秉(병)○ ○煥(환) 在(재)○
(7)副正公諱平派(부정공휘평파)自副正公十九世로起淵字(부정공으로부터 19세에 연자)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泰(태)淵(연) 秉(병)榮(영)○ ○煜(욱)燮(섭) 吉(길)圭(규)○ ○鎔(용)鍾(종) 永(영)泰(태○ ○相(상) 炳(병)○ ○均(균)
(8)版圖判書公諱添劍派(판도판서공휘첨검파):(삼현파)自判書公二十一世로起永字(판서공으로부터 21세에 영자)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永(영)○ ○柱(주) 炳(병)○ ○圭(규) 錫(석)○ ○洙(수) 東(동)○ ○燮(섭) 基(기)○ ○鍾(종)
(9)錄事公諱炤派(록사공휘소파):(삼현파)自錄事公二十世로 起泰字(록사공으로부터 20세에 태자)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泰(태) 相(상)○ ○炫(현)燮(섭) 在(재)基(기)○ ○鎭(진)鎔(용) 永(영) ○植(식) 成(성)○ ○坤(곤) 鎬(호)○
30세 31세 32세
○洙(수) 秉(병)柄(병)○ ○煥(환)
(10)判典公諱明澤派(판전공휘명택파)自判典公諱十六世로起鎭字(판전공으로부터 16세에 진자)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鎭(진)章(장)○ ○周㈜柱㈜ 致(치)炳(병)○ ○祚(조) 鍾(종)○ ○泰(태) 相(상)○ ○烈(열) 圭(규)○ ○鎔(용)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海(해)○ ○植(식) 炳(병)○ ○埈(준) 鉉(현)○ ○洛(낙) 榮(영)○ ○煥(환) 在(재)○ ○銖(수)
(11)判書公諱不比派(판서공휘불비파)自判書公二十世로起洙字(판서공으로부터 20세에 수자)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洙(수) 秉(병)○ ○燮(섭) 圭(규)○ ○鎭(진) 浩(호)○ ○榮(영) 炯(형)○ ○載(재) 鎬(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洪(홍) 權(권)○ ○熙(희) 柱(주)○ ○錫(석) 泰(태)○ ○植(식) 炳(병)○
(12)左政丞公諱萬希派(좌정승공만희파)自左政丞公十九世로起顯字(좌정승공으로부터 19세에 현자)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顯(현)熙(희)○ ○培(배) 鎭(진)鍾(종)○ ○澤(택)海(해) 根(근)柱(주)○ ○炫(현)勳(훈) 在(재)圭(규)○ ○鎬(호)銓(전) 淳(순)潤(윤)○ ○杓(표)模(모)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炯(형)炅(경)○ ○均(균)根(근) 錫(석)鏞(용)○ ○瀅(형)淡(담) 柱(주)東(동)○ ○烈(열)煥(환) 恒(항)坪(평)○ ○鐸(탁) 洪(홍)漢(한)○ ○彬(빈)
39세 40세
燕(연)燦(찬)○ ○堅(견)孝(효)
(13)崇政公諱宗貞派(숭정공휘종정파)自崇政公十一世로起律字(숭정공으로부터 11세에 율자)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律(률) 基(기)○ ○鎬(호) 永(영)○ ○柱(주)
(14)尙書公諱洪寶派(상서공휘홍보파)自尙書工二十世로起秉字(상서공으로부터 20세에 병자)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秉(병)○ ○熙(희) 奎(奎)○ ○鉉(현) 源(원)○ ○模(모) 炫(현)○ ○基(기) 錫(석)○ ○湜(식)
30세 31세
相(상)○ ○燁(엽)
(15)副護軍公諱天翼派(부호군공휘천익파)自副護軍公十二世로起賢字(부호군으로부터12세에 현자)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賢(현) 榮(영) 載(재)○ 圭(규)○ ○銖(수) 泓(홍)○ ○柱(주)林(림) 煥(환)炳(병)○ ○採(채)基(기) 鍊(연)錫(석)○ ○淳(순)河(하)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東(동)相(상)○ ○燮(섭)熙(희) 均(균)在(재)○ ○鎭(진)鎔(용) 浩(호)泰(태)○ ○模(모)根(근) 永(영)灝(호)○ ○培(배)坤(곤) 鎬(호)鉉(현)○ ○洙(수)洛(낙)
(16)判決事公諱用萬派(판결사공휘용만파)自判決事公十五世起鍊字(판결사공으로부터 15세에 련자)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鍊(련) 淙(종)○ ○植(식)模(모) 炳(병)煌(황)○ ○基(기)珉(민) 鎬(호)錫(석)○ ○洙(수)浩(호) ○相(상)槿(근) 熙(희)○烈(열) ○圭(규)埈(준)
25세 26세
○鎭(진)鎔(용) 濟(제)淳(순)○
(17)進士公諱虔派(진사공휘건파)自進士公十二世로起基字(진사공으로부터 12세에 기자)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基(기)○ ○鉉(현) 濟(제)○ ○柱㈜植(식) 煥(환)○ ○坤(곤)均(균) 鎭(진) 鍾(종)○ ○洛(낙) 秉(병)○ ○炯(형)
(18)留守公諱藝派(류수공휘예파)自留守公十五世로起在字(유수공으로부터 15세에 재자)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在(재)○ 廷(정)○ ○昊(호) 종(鍾)○ ○洙(수) 相(상)○ ○炅(경) 圭(규)○ ○銀(은)
(19)雲隱公諱大震派(운은공휘대진파)自雲隱公十二世로起澤字(운은공으로부터 12세에 택자)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澤(택) 炳(병)○ ○換(환)烈(열) 圭(규)○ ○鍾(종) 永(영)○ ○杓(표) 熙(희)○ ○海(해) 東(동)○
22세 23세
○燮(섭)炫(현) 在(재)○
(20)栗隱公諱遜派(율은공휘손파)自栗隱公十八世로起柄字(율은공으로부터 18세에 병자)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柄(병)相(상) 斗(두)○ ○時(시)基(기) 鍾(종)善(선)○ ○淳(순)浩(호) 根(근)榮(영)○ ○燮(섭)煥(환) 圭(규)載(재)○ ○鉉(현)德(덕) 洛(낙)永(영)○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東(동)植(식) 勳(훈)熙(희)○ ○堯(요)培(배) 鎭(진)鍵(건)○ ○大(대)洙(수) 柱(주)樂(락)○ ○煥(환) 用(용)均(균)○ ○錫(석)欽(흠) 漢(한)泰(태)○
38세 39세 40세 41세
○模(모)杰(걸) 煜(욱)烈(열)○ ○坤(곤)聖(성) 鍍(도)承(승)○
(21)承旨公諱侃派(승지공휘간파)自承旨公十八世로起植字(승지공으로부터 18세에 식자)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植(식) 顯(현)○ ○培(배) 鍾(종)○ ○洙(수) 榮(영)○ ○燮(섭) 在(재)○ ○錫(석) 浩(호)○
28세 29세 30세
○秉(병) 炯(형)○ ○圭(규)
(22)侍中公(文敬公)諱琢派[시중공(문경공)휘탁파]自文敬公二十世로起寬字(문경공으로부터 20세에 관자)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寬(관) 永(영)○ ○模(모) 熙(희)○ ○載(재) 鏞(용)○ ○泰(태) 來(래)○ ○燮(섭) 奎(규)○
30세 31세 32세
○鍊(련) 洪(홍)○ ○杓(표)
(23)府使公諱瑾派(부사공휘근파)自府使公十七世로起鎰字(부사공으로부터 17세에 일자)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鎰(일) ○洙(수)澤(택) 相(상)東(동)○ ○燮(섭)炯(형) 奎(규)均(균)○ ○鍾(종) 洛(낙)○ ○相(상) 烈(열)○ ○載(재)
27세
鉉(현)○
(24)翰林公諱王寬派(한림공휘관파):판도판서공휘관파:삼현파)自翰林公十六世로起基字(한림공으로부터 1六세에 기자)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基(기) 錫(석)○ ○浩(호)洙(수) 柄(병)秉(병)○ ○煥(환)默(묵) 枉(왕)圭(규)○ ○鉉(현)鎰(일) 洪(홍)淳(순)○ ○植(식)權(권) 炯(형)燦(찬)○
26세
○喆(철)
(25)忠貞公諱球派(충정공휘구파)自忠貞公二十世로起梓字(충정공으로부터 20세에 재자)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4세
梓(재)○ ○炫(현) 性(성)○ ○錫(석) 浩(호)○ ○柱(주)
(26)都事公諱璉派(도사공휘연파)自都事公十八世로起胄字(도사공으로부터 18세에 주자)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胄(주)○ ○載(재) 相(상)○ 俊(준)○ 喜(희)○ 錫(석)○ ○洙(수) ○根(근) ○烈(열) 在(재)○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鐘(종)○ ○沅(원) ○模(모) ○炫(현) 培(배)○ ○鎭(진) 淳(순)○ 榮(영)○ ○熙(희) ○坤(곤)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鎬(호) 泰(태)○ ○植(식) ○煥(환) 泳(영)○ 동(東)○ ○炅(경) ○奎(규)
(27)長沙君諱璇派(장사군휘선파)自長沙君十六世로起煥字(장사군으로부터 16세에 환자)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煥(환) 致(치)○ ○鍾(종) 泳(영)○ ○植(식) 炳(병)○ ○圭(규)奎(규) 銀(은)釪(우)○ ○沅(원)洙(수) 榕(용)○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勳(훈) 埈(준)○ ○鎭(진) 泂(형)○ ○彬(빈) 然(연)○
(28)參奉公諱麟瑞派(참봉공휘인서파)自參奉公十五世로起應字(참봉공으로부터 15세에 응자)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應(응) 鍾(종)○ ○洙(수) 柄(병)○ ○煥(환) 圭(규)○ ○錫(석) 永(영)○ ○秉(병) 燦(찬)○
25세 26세
○培(배) 鏞(용)○
(29)都事公諱璘派(도사공휘인파)自都事公十九世로起中字(도사공으로부터 19세에 중자)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中(중)○ ○鎬(호) 淳(순)○ ○根(근) 忠(충)○ ○坤(곤) 鎭(진)○ ○泰(태) 東(동)○ ○煥(환)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圭(규)○ ○善(선) 洪(홍)○ ○榮(영) 熙(희)○ ○基(기)
(30)大提學公諱得河派(대제학공휘득하파)自大提學公十六世로起斗字(대제학공으로부터 16세에 두자)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斗(두) ○煥(환) 圭(규)○ 鎭(진)○ 永(영)○ ○東(동)根(근) 熙(희)炳(병)○ ○基(기)均(균) 錫(석)○ ○洙(수)
(31)-1)都摠管公派諱敬臣派(도총관공휘경신파):監務公諱益卿派(감무공휘익경파)(사군파)自都摠管公十九世로起奎字(도총관으로부터 19세에 규자), 西岡公諱係錦派(서강공휘계금파)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奎(규)○ ○壽(수) 鍾(종)○ ○永(영)求(구) 秉(병)○ ○熙(희)勳(훈) 在(재)○ ○鎭(진) 泰(태)○ ○柱㈜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炯(형)○ ○基(기) 鎔(용)○ ○淳(순) 榮(영)○ ○輝(휘) 遠(원)○ ○鉉(현) 澈(철)○ ○彩(채)
39세 40세
煥(환)○ ○圭(규)
(31)-2)都摠管公派諱敬臣派(도총관공휘경신파):監務公諱益卿派(감무공휘익경파)(사군파)自都摠管公二十一世로起履字(도총관으로부터 21세에 이자), 築隱公諱方礪派(축은공휘 방려파)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履(이)○ ○燮(섭) 堯(요)○ ○鍊(련) 漢(한)○ ○錫(석)洙(수) 海(해)東(동)○ ○烈(열) 垣(원)○ ○會(회)鎬(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泰(태)○ ○柱(주) 榮(영)○ ○輝(휘) 遠(원)○ ○鉉(현) 澈(철)○ ○彩(채) 煥(환)○ ○圭(규)
(32)忠景公諱大理派(충경공휘대리파)自忠景十六世로起相字(충경공으로부터 16세에 상자)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相(상)○ ○煥(환) 致(치)○ ○鍾(종) 源(원)○ ○休(휴) 炳(병)○ ○圭(규) 鎔(용)○ ○浩(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東(동)○ ○燮(섭) 在(재)○ ○鎭(진) 永(영)○ ○根(근) 熙(희)○ ○培(배)
(33)司正公諱利亨派(사정공휘이형파)(註首露王부터起世하였음. 75世起在字)
75세 76세 77세 78세 79세 80세 81세 82세 83세 84세
在(재)○ ○鍾(종) 泰(태)○ ○根(근) 炳(병)○ ○圭(규) 錫(석)○ ○湜(식) 東(동)○ ○烈(열)
85세 86세 87세 88세 89세 90세
孝(효)○ ○鎭(진) 泳(영)○ ○樂(낙) 南(남)○ ○基(기)
(34)文川公諱貴存派(문천공휘귀존파)自文川公十四世로起淵字(문천공으로부터 14세에 연자)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淵(연)鍊(련) 泰(태)○ ○根(근)榮(영) 熙(희)○ ○圭(규) 鎭(진)○ ○浩(호) 東(동)○ ○烈(열) 在(재)○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鍾(종) 洙(수)○ ○根(근) 炳(병)○ ○基(기) 賢(현)○
(35)忠順衛公諱克悌派(충순위공휘극제파)自忠順衛公九世로起在字(충순위공으로부터 9세에 재자)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在(재)○ ○鎭(진) 永(영)○ ○植(식) 炯(형)○ ○圭(규) 鎔(용)○ ○淳(순) 東(동)○ ○煥(환)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用(용)○ ○鎬(호) 泰(태)○ ○根(근) 炫(현)○ ○均(균) 련(鍊)○ ○洙(수) 柄(병)○ ○烈(열)
(36)通政公諱昌壽派(통정공휘창수파)自通政公十四世로起鍾字(통정공으로부터 14세에 종자)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鍾(종)○ ○泰(태) 榮(영)○ ○燮(섭) 在(재)○ ○鎭(진) 浩(호)○ ○根(근) 性(성)○ ○用(용)
(37)判書公諱盡業派(판서공휘진업파)自判書公八世로起濟字(판서공으로부터 8세에 제자)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濟(제)○ ○植(식) 顯(현)○ ○培(배) 鍾(종)○ ○泰(태) 榮(영)○ ○燮(섭) 在(재)○ ○鎭(진)
18세 19세
浩(호)○ ○根(근)
(38)參議公諱盡始派(참의공휘진시파)自參議公九世로起植字(참의공으로부터 9세에 식자)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植(식) 顯(현)○ ○培(배) 鍾(종)○ ○泰(태) 榮(영)○ ○燮(섭) 在(재)○ ○鎭(진) 浩(호)○
19세 20세 21세
○根(근) 性(성)○ ○用(용)
(39)隋城伯公諱昉派(수성백공휘방파)自隋城伯公十九世로起植字(수성백공으로부터 19세에 식자)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植(식) 顯(현)○ ○培(배) 鍾(종)○ ○泰(태) 榮(영)○ ○燮(섭) 在(재)○ ○鎭(진)錫(석) 浩(호)永(영)○
29세 30세
○根(근)東(동) 炯(형)○
(40)學生公諱洛瑞派(학생공휘낙서파)自學生公七世로起元字(학생공으로부터 7세에 원자)
7세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元(원) 土+眞(진)○ ○鈺(옥) 水+憂(우)○ ○柱㈜ 炳(병)○ ○均(균) 金+靑(청)○ ○洽(흡) 東(동)○
17세
○日+火(경)
(41)副護軍公諱宇榴派(부호군공휘우류파)自副護軍公六世로起植字(부호군으로부터 6세에 식자)
6세 7세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植(식) 顯(현)○ ○培(배) 鍾(종)○ ○泰(태) 榮(영)○ ○謙(겸) 在(재)○ ○鎭(진) 浩(호)○
16세 17세
○根(근) 炳(병)○
(42)生員公諱鉉重派(생원공휘현중파)自生員公十五世로起培字(생원공으로부터 15세에 배자)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培(배) 鍾(종)○ ○泰(태) 榮(영)○ ○燮(섭) 載(재)○ ○鎭(진) 浩(호)○
(43)果州公諱宇派(과주공휘우파)自中祖諱鶴十一世로起榮字(중조휘학으로부터 11세에 영자)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榮(영) 炳(병)○ ○圭(규) 鍾(종)○ ○泰(태) 東(동)○ ○熙(희) 基(기)○ ○錫(석) 永(영)○
21세 22세 23세 24세
○根(근) 炅(경)○ ○培(배) 鎭(진)○
(44)通仕郞公諱汝龜派(통사랑공휘여구파)自通仕郞公十三世로起植字(통사랑으로부터 13세에 식자)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植(식) 顯(현)○ ○培(배) 鍾(종)○ ○泰(태) 榮(영)○ ○燮(섭) 在(재)○ ○鎭(진) 浩(호)○
23세 24세
○根(근) 益(익)○
(45)中郎將公諱휴派(중낭장공휘휴파)自監務公二十七世로起鏞字(감무공으로부터 27세에 용자), 中郎將公 諱휴계 항렬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鏞(용)○ 泳(영)○ 東(동)○ ○烈(열) 圭(규)○ ○鉉(현) 泰(태)○ ○根(근) 炳(병)○ ○均(균)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鍾(종)○ ○浩(호) 榮(영)○ ○煥(환) 廷(정)○ ○錫(석) 河(하)○ ○模(모) 炅(경)○ ○培(배)
47세
鎭(진)○
(46)通仕郞公諱守학派(통사랑공휘수학파)自通仕郞公八世로起植字(통사랑으로부터 8세에 식자)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植(식) 顯(현)○ ○培(배) 鍾(종)○ ○泰(태) 榮(영)○ ○燮(섭) 在(재)○ ○鎭(진) 浩(호)○
18세 19세
○根(근) 炳(병)○
관혼상제 전통풍습[족보 가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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