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이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2012년 오스만의 대제국이라는 터키여행 이후
졸필로 내가 쓴 기행문이라는 형식의 글이 맘에 들지 않아 초고만을 남긴 채
긴 시간 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일상에 전념하면서 글 쓰는 것을 잊고 살았다.
그냥 멍하니 먼 산만을 바라보는 텅 빈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기라도 하듯이 그냥 그렇게 지냈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 책방을 찾더라도 남들이 쓴 글들을 집중도 하지 않은 채
뒤적뒤적 생각 없는 눈으로 활자를 대충 벽에 풀 붙여 벽지 붙이듯이 겉눈으로 흩으며 지나갔다.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 살았고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약주라도 한잔 있는 날이면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약주가 없으면 없는 대로 일상에 빠지면서 살았다.
여행을 다녀와 시차적응이 안돼서 몹시 피곤하다.
다른 때에는 이렇게 까지 몸이 무겁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영 아닌 것 같다.
비행시간이 열시간을 넘어가는 여행은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보니
이제 내 몸도 늙어가는 것 같아서 서글픈 생각이 갑자기 든다.
서재랄 것도 없지만 그 방 창밖으로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굵게 창으로 부딪치며 떨어진다.
5월 하순의 비치고는 많이 내리는 것 같다.
아침에 TV를 켜니 내가 지난주에 다녀온 보스니아에 백년만에 최악의 홍수가 나서
인명피해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최악의 내전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홍수에 생명을 읽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오늘아침 창문을 활짝 열며 한 번 더 밖의 날씨를 살폈다.
빗소리가 온대지를 삼키듯이 요란하다.
아주 어릴 때 갑자기 비오는 오후 하교길이 생각난다.
다른 아이들은 우산을 가져온 사람들에 의해 한사람 두 사람씩 교정을 벗어나고,
우산을 가져올 사람 없는 어린 나는 하늘만 바라보다 비가 그치를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그치지 않는 비는 더욱 빗방울이 굵어져 운동장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들어간다.
혼자 학교에 남는 것이 싫어서 몸을 잔뜩 오므린채로 물웅덩이를 피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을 나온다.
학교앞 헌책방 추녀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추녀밑에 쌓아놓은 헌책들이 비를 맞으며 젖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 되었을까 책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꼬마야! 어디에 살아?”
갑자기 물어오는 말에 놀라서 뒤돌아서니 머리가 하얀 노인이 온화한 얼굴로 나를 처다보며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구나, 들어와서 책이라도 보며 기다려도 된다.”
나는 수줍음으로 아무말도 못하고, “예, 고맙습니다. 여기서서 있어도 되요. 고맙습니다.” 하고 더 이상 쑥스러워서 비오는 신작로를 얼굴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손으로 닦아내며 옷젓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뛰어서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면 헌책방에 들러 여러 가지 책들을 보았는데, 그때 읽었던 것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어 보았던 기억이 가장 남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오는 하교 길에는 여지없이 그 헌책방에 들러,
비 그치는 것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마음씨 좋은 머리가 하얀 주인장의 묵시적 허락 속에 독서 삼매경에 빠져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은 날이 있었던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책방에서는 헌책의 종이냄새가 나는데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그 냄새가 생각이 나곤 한다.
어릴 적 그렇게 내 나이에 걸맞은 동화를 읽은 것도 아니고 그저 헌책방에 주인에게 버림받고 쌓여진 짐짝처럼 그렇게 분류되지 않은 헌 책속에서 주섬주섬 읽어 내려가다 보니 여러 책들을 보았다.
지금의 대형서점들은 책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어 있고, 독자의 관심사가 있는 편람을 제공하기에 책을 찾기도 편하고 시간이 날 때 약간의 독서도 할 수 있는 편한 곳이 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책을 찾는 사람들의 천국이나 다름없다고 사료되는데, 요즘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기에 서점의 공간능력은 개발자에 따라 그 끝이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서점들이 속속 문을 닫고 있어 한편 안타까운 생각이다.
쌓여진 헌 책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많이 본 것은 “세계대(大)백과사전”이라는 두껍고 작은 글씨에 글자가 뒤집어진 것도 있고, 한자도 꽤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속에는 나만의 우주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백과사전에 실린 세계지도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너무나 작은 것에 대헤서 어린나이에 우리나라가 최고인줄 알았던 나의 몽환적인 생각은 산산히 부서졌지만 무수한 질문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개기가 되었고,
낡아서 표지가 달아나고 너덜너덜한 볼품없는 그 세계대백과사전은 그 질문과 궁금증을 풀어줄 대답이 가득한 보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지금 나의 작은 가슴을 진취적이고 대담하게 만들어준 물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헌 책방에는 지나간 추억이 쌓이는 개인적인 “일기장”에서부터, 필기로 꽉 들어찬 공책들, 전화번호부, 교과서를 쉽게 풀이한 전과, 각종 문제집, 주석을 붉은색 펜으로 잔뜩 달아놓은 교과서, 그리고 때 지난 주간-월간지, 영문으로 된 이름 모를 각종 책들, 문학 전집류, 역사서적들이 마음씨 고운 주인장의 분류방법에 따라 놓여 있었는데, 분류라 할 것도 없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책방에서 역사와 관련된 서적들을 들추어 보게 되었는데, 현대에 쓰여진 “서양사”와는 조금은 다른 내용들도 있는 것 같아서 내 가 아는 사실들이 어정쩡한 것 같아 두렵기도 하여, 최근 새롭게 출판된 서적을 구입하여 또 한번의 종이냄새를 느껴보도록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번의 발칸삼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여행은 인터넷만 검색하면 줄줄이 쏟아지는 여러 여행자의 기고문들과 대형서점들의 “여행 서적”칸에 톱으로 장식된 여러 가지 발칸관련 여행서적, 그리고 TV에서 방송하는 항공사 광고들로 인해 신비함과 이국의 조금 어색함을 즐기려는 여행자만의 특권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글을 쓰면서 내전의 상흔에 빠져들었던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의 여러 가지 혼람스러움을 내 가치관으로 나름 정리하여 보았고,
1991년부터 2008년까지 7개 나라로 독립되기 까지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알고 가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발칸 3국 여행을 다녀온지가 두주가 훌쩍 넘어가고 있다.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글을 쓰고 싶지는 안았지만 더 이상 시간이 지나가면 망각의 늪 속으로 아름답던 기억이 매장되는 것이 아까워서 펜을 들어 옮겨본다.
누가 봐주는 사람이 없더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곱게 보관하다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보관 상자를 열어보는 것처럼 생각이 날때면 한번씩 펴보리라.
나는 작년에 우연하게 “유승준” 전 문화재청장이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다. 책을 펴낸 그는 1949년 서울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예술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공간”과 “계간 미술” 이라는 아트미디어 기자를 거쳐 1981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미술평론가로 활동하였다. 영남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문화재청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1993년에 출판된 1권 ‘남도답사 일번지’, 1994년에 2권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1997년에 3권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가 출판되었으며, 1998년에 북한 답사를 끝내고 중앙일보에 연재하였던 글을 묶어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권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와 2001년에 하권 ‘금강예찬’이 각각 출판되었다.
그리고 일본 규슈, 아스카와 나라에 이어 일본의 천년 고도 교토을 중심으로 책이 출간된다고 한다.
내가 접한 국내편은 문화유산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풀어 가는데, 문체가 작가 본인의 성격처럼 매끄럽고 이체로운 것이 특징이다.
특히 1993년에 출판된 1권 ‘남도답사 일번지’는 우리나라의 인문 도서 최초로 판매부수 백만 부를 돌파하며 전국적인 문화유산답사 열풍을 몰고 왔으며, 주요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에 60주 연속 오르며 독서계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것으로 극히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나는 책을 접하면서 한없이 빠져들고야 말았는데, 유승준 박사가 역어나가는 이야기처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설은 못하지만 여행의 느긋한 여운을 즐기고 싶고, 내 눈으로 직접보고 현지인을 상대하면서 느낀 이야기들을 그냥 풀어 쓰고 싶어 자유로운 영혼으로 글을 남긴다.
2014년 5월 28일
첫댓글 여행하시기에 제일 적합한 날이 따로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