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일보
"누구도 신문을 이용할 수 없다" 장기영의 창간사
동화그룹 계열 일간신문사. 1954년에 창업주인 백상 장기영이 태양신문이라는 신문을 인수하여 지금의 사호로 바꾸었다고 한다.
기득권층에 대한 태도가 조중동의 그것보다는 비판적이지만, 한경오의 그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편. 한마디로 중도 성향의 신문이며 신문사 스스로도 국내 유일의 중도 신문임을 내세운다. 대한민국 언론사들 가운데서 물의를 빚은게 비교적 적었던 편이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도한다.
2000년대 말에 들어 아래의 2013년 한국일보 사태를 비롯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한 중도를 내세울 때보다는 중도 내지 중도진보에 가까워졌다. 일단 중도 성향을 유지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사설이나 칼럼들을 본다면 확실히 보수 언론 매체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진보 언론 매체들보다 강경하지도 않다. 사실 원래부터도 정치부보다는 사회부 쪽이 강한 신문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960년부터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제휴관계를 유지중이다.
노조는 민주노총 언론노조 소속이다.
1970년대 당시에는 동아일보와 함께 부수 1~2위를 다툴만큼 메이져급 신문으로 명성을 떨쳤고, 90년대 중반까지도 조선, 중앙, 동아와 함께 4대 일간지로 명성을 떨쳤지만 1990년대 이후로 조선, 중앙, 동아에게 서서히 밀리자 이를 확장전략으로 메꿀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며 채무가 급속도록 불어난데다가 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바닥을 모르고 추락을 거듭, 현재는 중앙지 가운데서 10위로 하위권에 쳐저있다.
언론계에서는 1993년 故 장강재 회장의 별세 이후 형제들간에 벌어진 경영권 다툼으로 한국일보의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신문산업 무한 경쟁의 최대 패배자 된 한국일보 50년사의 명암) 또 1980년 서울경제신문 폐간에 따른 재정적 부담 역시 이에 일조하였다.
창업주인 백상 장기영이 자매지를 내면서 여기저기 손을 뻗기도 했는데 코리아타임즈, 서울경제신문, 주간여성, 소년한국일보, 서울경제TV, 주간한국, 엘르, 톱모델, 프리미어, 일간스포츠, 스포츠한국, 학생과학 등이 있다. 그 이전까지로 가 본다면 HLKZ-TV를 인수해서 2년 정도 운영했던 일도 있었고 소년한국일보에서 만화출판업을 겸하여 합동출판사와 함께 1982년 결별시까지 독점에서 양대산맥을 이룬 적이 있었다. 소년한국일보를 통해 데뷔하거나 활동한 만화가로는 신영식, 박기정, 엄희자, 길창덕, 김수정, 허영만, 박봉성, 김동화, 이원복, 임웅순 화백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1977년 1월에 미국의 타임-라이프 출판사와의 합작으로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라는 출판사를 세웠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자세한 내용은 타임라이프 문서 참조.
이 중 코리아타임즈와 서울경제신문은 완전히 독립된 별도 법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곳으로 보면 되고 주간한국은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시사주간지였다가 문화주간지로 전환되었다. 스포츠한국은 무가지로 한국일보 신문에 같이 끼어서 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의 신문이라고 봐도 된다. 일간스포츠는 장기영의 장손 장중호가 분리하여 나갔다가 결국 중앙일보에 넘어갔다.
또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다른 신문에 앞서 견습기자 공개채용제도를 실시하여 많은 기자를 양성한 곳으로도 유명하고, 그들 중에는 오인환, 심명보, 권혁승, 조세형, 이원홍, 박현태 등처럼 공직에까지 오른 분도 있어서 '기자 사관학교'로 이름을 날렸다. 최초의 시사주간지 주간한국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간지 붐을 일으킨 시초가 되었다. 1993년부터 활판제작 대신 CTS로 전환한 후 1998년부터 가로쓰기를 실시했다.
중앙일보와 악연이 좀 있는데 1965년에 중앙일보가 창간될 당시 다른 신문사에서 기자들을 스카우트할때 한국일보는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어 편집국 인원 25명과 업무, 광고 분야 인원 상당수를 잃어서 사주의 경제부총리 입각과 더불어 큰 타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런 기자 빼가기는 21세기 들어와서도 한동안 이어지면서 사세 약화에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어판과 영어판이 있으며, 2002년 한국 ABC협회에의 신고에 따르면 발행 부수는 100만부 이상이다. 뉴욕타임즈나 LA타임즈로부터도 기사를 제공받고 있다.
사주가 도박을 하다가 구속된 사건이 있는데 장재국 전 한국일보 회장이 회장 재직시절이던 1997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큰 돈으로 도박을 하여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2002년에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건이다. 물론 이 신문사의 흑역사(...). 회장이 배임과 횡령 혐의로 구속 되었고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전통있는 신문사답게 이런저런 역사의 소용돌이에도 많이 휘말렸다.
신춘문예를 받는 곳중 하나고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미스코리아 대회의 주관사이기도 하다. 1973년부터 창간 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한산악연맹과 공동으로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계획을 세워 1977년 고상돈의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1969년부터 2016년까지 프로바둑기전 명인전을 주최한 바 있었다.
미주한국일보를 발행하고 있어 미국 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한 신문이다. 미주한국일보와 같은 계열이 LA의 라디오 서울이다.
2012년 6월 17일 20000호가 발행되어 7월 19일 리셉션을 열었다.
경영 실적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창업주 장기영보다는 아들들의 역량이 좀 떨어지는 듯? 결국 이 문제로 사단이 났다. 장재구 회장의 배임의혹이 전면으로 드러난 것. 통신사인 뉴시스를 자회사로 두고 있었으나, 아래의 사태 이후 머니투데이에 매각하였다.
장재국, 장재구 두 아들이 들어선 이후 사내의 분위기가 복잡하다. 자세한 것은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다.
여담이지만 한국 언론 최초로 해외에 파견된 종군기자가 순직한 사건이 벌어진 언론사가 이곳이다. 진먼 포격전이 한창이던 1958년 9월 26일 최병우 기자가 다른 기자들과 함께 조난, 순직당했으며 그의 이름은 진먼에 있는 충렬사에 안치되었다.
1954년 창간 이후 1998년 가로쓰기 전환 전까지는 여류 서예가 이미경이 쓴 제호를 상당 기간 동안 써왔다. 1998년 3월 16일 가로쓰기 실시와 동시에 쓴 제호는 국민대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전승규 교수가 디자인하였으며, 이 제호는 2001년 부분 변경을 거쳐 사용하다 2002년 3월 18일부터 헤드라인 계열 서체로 바꾸어 상당 기간을 쓰다가 2014년 동화기업 인수 이후 이듬해 6월 9일에 정사각형 배열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창립 당시 중학동 사옥은 위 사진과는 달리 허름한 3층 건물이었다. 그러나 1968년 2월 27일에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이 자리에 7월 14일에 착공, 이듬해인 1969년 6월 4일에 위와 같은 지하 3층, 지상 13층짜리 사옥이 세워졌고, 1988년경에는 신관이 세워졌다.
건축학적으로 보면 1969년 6월에 준공한 한국일보 사옥은 건축가 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걸작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철거되어 건축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이후 한진그룹 본사 건물에 세들어 산다고 한다. 그 철거된 부지에 새 건물이 다 지어졌는데 김수근만큼은 못해도 나름 건축에 신경쓴 건물인 듯하다. 그런데 한국일보가 이 건물에 들어갈 권리가 있었는데 포기했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사옥 짓고 있다고...
저 건물이 있던 시절에는 커다란 크기의 한국일보 사기(社旗)가 게양되기도 하였는데 초대형급이라 바람에 날려도 쉽사리 휘날리지 않는 크기였다. 나중에는 사기와 함께 같은 크기의 태극기도 게양하였다. 허나 저 건물이 철거된 후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며 폐기 처분 되었는지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후에 지을 신사옥에 게양할 일도 없을 듯 싶다. 참고로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옆자리에 별관 사옥도 있었는데 이 건물에는 작은 크기의 한국일보 사기가 게양되었다. 현재는 이 건물도 철거되어 없어진 상태.
참고로 이 건물이 철거되고 트윈 트리 건물이 들어선 이후로 그 동안 저 건물에 가려져있던 주한 일본대사관 건물 뒷모습이 경복궁 건너편 길가를 통해서 보여지기도 하였다. 트윈 트리 건물에는 주한 요르단 대사관이 상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9. 사가
작사는 박목월, 작곡은 나운영이 맡았으며, 1969년 9월 10일에 제정되었다.
(1절)찬란한 자유의 새벽을 나는 / 신념의 불사조 한국일보
곧고도 바른 붓끝으로 / 오늘의 역사를 증언하라
아아 생생한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서 / 시민의 눈이 되라 빛이 되라
(2절)세기의 물결을 힘차게 가르는 / 꿋꿋한 길잡이 한국일보
공정한 여론의 횃불을 들어 / 명랑한 사회의 불씨가 되라
아아 밝고도 구김없는 필진을 펴서 / 시민의 벗이 되라 빛이 되라
10. 홈페이지에 대해
본사의 홈페이지 역사는 우여곡절을 지녔다. 1996년 1월 16일에 본사 뉴미디어국이 개설한 '코리아링크(www.korealink.co.kr)'가 그 뿌리였다. 이후 1998년에 'www.hankookilbo.co.kr', 1999년 2월 15일에 'www.hk.co.kr'로 각각 바뀌었다가, 2000년 2월부터 뉴미디어본부가 'hk미디어'로 분사되고 5월부터 사명을 '한국아이닷컴'으로 바꾸면서 도메인도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장재구 전 회장의 지분매각으로 관계가 꼬여서 한국아이닷컴을 운영하는 (주)인터넷한국일보 측이 본사와의 뉴스콘텐츠 공급 계약을 해지하여 본사 측은 2014년 5월 19일부터 한국일보닷컴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해 7월에 본사는 (주)인터넷한국일보를 상대로 '한국일보' 상호를 쓰지 못하도록 가처분 소송을 내 12월 11일부로 서울지법이 한국일보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인터넷한국일보 측은 상호명을 2015년 1월부터 '한국미디어네트워크'로 바꾸어야 했다.
2013년 한국일보 사태
2013년 6월 15일, 사측이 용역업체를 동원해 기자들을 내쫓고 회사 방침에 따를 사람들만 출입을 허용해 복종을 강요함에 따라 직원과 사측이 치열하게 대치했다.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1974년 언론자유투쟁 바람을 타고 한국노총 출판노조 산하로 설립된 바 있었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맞물려 일어난 언론민주화 운동에서 또다시 시작됐다.
한국일보의 논조 특성상 극렬한 노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이 최근 해먹은(....) 200억을 가지고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고 고발하면서부터 회장이 인사에 개입을 했고, 부당인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결국 노조가 반발 할 수 밖에 없었고, 노조는 회사의 인사조치를 거부하면서 신문을 정상적으로 제작해왔다. 그런데 한국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회장이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했다. 결국 일개 군소 지방지나 삼류 인터넷뉴스도 아닌 주제에 실제로 상당수의 내용을 연합뉴스 등 통신사의 기사로 땜질했다. 심지어 사설도 연합뉴스의 연합시론 걸 그대로 실었다(...) 그래서 신문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더군다나 사측의 편집국 폐쇄는 직장폐쇄로서, 엄연히 위법이다. 왜냐면, 직장폐쇄는 노조측이 파업을 할때 이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 가능한것이기 때문. 고용노동부 링크 즉, 기자들이 파업하지도 않았는데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직장 폐쇄한것은 요건부터 성립이 안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노동법상 파업의 성립 요건 자체가 사측에 상당히 유리하다. 그런 파업에 돌입도 하지 않았는데 직장 폐쇄라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회사측에서는 SNS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일보의 트위터와 페이스북계정은 편집국의 일선 기자들이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직장폐쇄사태 이후 SNS에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결국 법원에서 한국일보에 재산보전 처분을 내리면서 장재구 회장은 경영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그와 동시에 한국일보는 보전관리인으로 우리은행 출신 고낙현을 내세워 법정관리를 받게 되면서 한국일보 사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구 편집부와 신 편집부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가 과제가 되었다.
12. 2014년 이후
2014년 2월 24일 삼화제분에 인수될 뻔했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다시 인수 절차가 진행되었고, 9월 18일 동화기업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되었다.
아직 법정관리 상태이긴 하지만, 장재구 회장으로부터 벗어난 이후 신문 발행은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회생절차 직전 구성원들 몰래 인터넷한국일보(현 한국미디어네트워크) 지분 50%를 매각하면서(...) 이쪽과는 남남이 되었고, 한국일보는 결국 온라인부문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자세한 사정은 여기에. 이와 함께 온라인 부문(한국일보닷컴)에 크게 투자하며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예전 한국일보의 명성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온라인 부문에서는 국내 언론사 중 가장 혁신적이고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그 와중에 새 사옥의 첫 삽을 떴다. 기사 2014년 11월 3일 동화기업과 M&A를 체결했으며 2015년 1월 9일 동화기업에 인수되었다. 6월 9일부로 기존의 "▶◀" 로고를 버리고 새 로고를 만들었다.
2015년 6월, 메르스 대란이 한창일 때 삼성서울병원 소속 의사가 뇌사상태라고 오보를 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친 페미니즘 성향이기는 하지만, 메갈리아, 워마드, 트페미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판적인 성향이다. 이 기사에서도 일베와 메갈리아를 혐오 담론이 오가는 커뮤니티로 규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갓건배 관련 이슈에 대해 갓건배의 패륜적인 발언은 언급하지 않고 선량한 피해자인 것처럼 편파 보도를 했던 여타 진보 언론과는 달리 여혐 콘텐츠와 남혐 콘텐츠의 문제점을 모두 자세하게 짚었으며, 이러한 혐오 콘텐츠들이 근절되지 않는 시스템적인 문제점을 짚었다. 또, 한서희에 대해서도 페미니즘을 악용해 마케팅을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박진성 시인에 대한 허위미투를 인정하지 않고 정정보도를 거부하고 있어 비난받고 있다.
2017년 말기 들어 황수현 기자 사건, 남도현 기자 기사 제목 논란 (12월 11일 기사), 김광수 기자 내로남불 기사 논란 등이 터졌고, 특히 김광수 건은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韓中 국방 핫라인 가동도 초읽기라고 좋게 기사를 쓴 김광수 기자가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의 한중 외교를 핫라인? 수화기 안 들면 그만이라고 기사를 썼다. 물론 2017년 기사에서 2015년에 한중 핫라인이 개설됐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결국 박근혜 정부가 사드를 설치했다는 언급은 하는데 기자 본인이 2015년에 한중 핫라인에 기대를 걸었다는 기사를 썼었다는 정도는 언급 해야하지 않을까?
논란이 되자 제목을 한중 핫라인 개설, 갈 길이 멀다.로 고쳤지만 이미 변경 전 제목이 알려지고 아카이브로 박제된 지 오래다. 중도를 지향하는 한국일보 타이틀 치고 너무 적나라해서 일부에서는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얻어 맞은 것에 대한 시위 아니었겠냐고 분석했다. 심지어 2018년 장충기 문자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도 2018년 7월에 장자연 사건 진술조서 전문을 단독 공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