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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찾아 남도를 가다
1.맛 기행, 멋 기행
여행은 충분한 준비, 좋은 볼거리, 좋은 사람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어우러져야 재미있다. 여기에다 마음을 통째로 앗아가는 잠자리까지 보장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전라도는 좋은 볼거리, 맛있는 음식, 푸근한 인심이 정겨운 곳이다. 그래서인지 같은 남쪽지방인데도 ‘남도기행’하면 으례히 전라도를 떠올린다.
우리학교에는 겨울방학마다 여행하는 모임이 있다. 인원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정해진 내용도 없어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지만 한 해에 한 번씩은 꼭 여행을 한다. 우리는 이번 겨울 전라도를 여행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남도의 맛과 멋을 느껴보자는 것이 취지였다. 주제도 지역에 맞게 ‘남도 맛 기행’으로 하였다. 주제가 정해지자 이번 기행을 가장 기대하는 사람은 최고의 미식가로 인정받는 임 선생이었다. 임 선생은 답사장소가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먹고 싶은 음식들을 주절주절 늘어놨다.
먼저 인터넷과 음식점을 소개하는 책들을 놓고 남도지방의 음식의 명가(名家)를 찾아 나섰다. 나중에는 시립도서관 자료까지 이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변산, 담양, 목포였다. 이 지역은 음식 맛도 독특할 뿐 아니라 이동거리가 짧은 장점이 있어 즐겁게 보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량은 이 선생이 가져온 9인승 스타랙스로 정했다. 이 선생은 짠돌이 막내동서 것을 어렵게 빌렸다며 칭찬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우리는 애써 무시했다.
인원이 모이자 우선 출발부터 하였다. 점심 먹고, 준비물 점검에 들어갈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였다. 송탄I.C로 진입하여 서해대교를 넘는데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학교에서라면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하지만 참기로 했다. 같은 휴게소 음식이라도 전라도 것을 먹자는 생각에서였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겨우겨우 동군산 휴게소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기대였을 뿐, 우리는 이곳에서 휴게소 음식은 전국 공통이라는 사실만 확인하였다.
차는 동진강, 만경강을 건너 만경평야를 지난다. 이곳에 호남벌이다. 김제, 옥구 사람들은 이 벌판을 ‘징게맹게’라고 부른다. 표준말로 번역하면 ‘김제 만경들’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조정래씨가 김제 만경들에 ‘아리랑 문학관’을 건립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우리를 태운 스타랙스는 변산을 지나 곰소로 달린다. 곰소에는 우리의 첫 답사지 내소사와 갈무리 식당이 기다리고 있다.
2.처음부터 소박을 맞다
곰소에 가까이 오자 수 천 마리 까마귀 떼가 군무를 하며 우리를 반긴다. 곰소는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오고 갯고랑이 발달하여 일찍이 해산물과 젓갈이 발달한 곳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곰소만에 들어서니 젓갈냄새가 진동한다. 내소사는 곰소를 조금 지나 모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내소사는 개암사와 함께 변산에서 가장 정갈하고 기품 있는 사찰이다. 입구에 “핵폐기장 반대”라고 적힌 노란 깃발이 우릴 맞이한다. 가게 집 아주머니에게 ‘여기서도 핵폐기장 문제가 심각한가 봐요’라고 말했더니, “말도 말랑께, 그 잡놈의 것들이 왜 들어올라고 지랄인가 모르것어‘라고 대답한다.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가 웃음을 자아냈지만 이 대목에서 웃음은 금물이다. 다음날 핵폐기장 건설 찬반투표가 있다고 하기에 주먹을 불끈 쥐며 ”꼭 이기세요’라고 말했더니 고맙다며 머리 숙여 인사한다.
겨울 내소사는 아름답고 깨끗하다. 절 옆으로 주차장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그 정도는 봐줄 만 했다. 일주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매표소 옆에서 할아버지 당산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 고향에 온 듯한 따스함이 느껴진다. 내소사의 첫 인상은 입구에서부터 1㎞쯤 이어진 삼나무 숲길이 결정한다. 이 숲은 관리도 잘 되었지만 아스팔트를 깔지 않아서 느낌이 상쾌하다. 천왕문에 들어서는데 변산의 영봉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사찰풍경이 눈을 사로잡는다. 아름답고 정갈한 풍경에 눈까지 살짝 내린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은 신의 몫이니 어쩔 수 없다.
삼나무 숲을 벗어나면서 ‘갈무리 식당’에 전화를 하였다. 이 식당에 대한 정보는 송수권의 “남도의 맛과 멋(1995년)”에서 얻었다. 송수권은 이 책에서 곰소만의 갯벌을 감상하며 싱싱한 회와 주인의 넉넉한 인심을 맛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 갈무리 식당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전화를 받는 주인의 목소리가 불퉁맞다. 내가 ‘책에서 보고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는데도 별 반응이 없더니 ‘오늘 영업 안 해요’라고 말하고는 툭 끊어버렸다. 소박맞고 친정으로 돌아오는 아낙네 심정 같다. 허탈한 마음을 추스리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했더니 이구동성으로 목포로 가자고 한다
3.찜찜한 낙지갈비대하찜
밤 이슥하여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는 항구다’라든가 ‘목포의 눈물’은 들리지 않았지만 코끝에 감기는 느낌이 다른 도시와는 판이하다. 뱃고동 소리에 실려오는 그리움, 폐사지와 같은 삶의 회한, 선창가 선술집 같은 질퍽함, 항구와 관련된 문학과 예술의 향기... 하지만 이것만이 목포의 전부는 아니다. 목포는 멋과 풍류를 아는 여인네와 독특한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목포의 겨울은 벌교, 신안갯벌에서 잡아올린 세발낚지와 흑산도 홍어가 제맛이다. 겨울 낙지는 낙지연포탕, 낙지갈비대하찜, 세발낚지회, 낙지구이 등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지는데 이 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집이 호산회관이다. 낙지가 담백한 단 맛을 내는 음식이라면 홍어는 톡 쏘는 감칠맛과 독특한 향으로 유명하다. 남도 사람들은 홍어 맛을 아는가, 모르는 가를 기준으로 고향사람과 타지 사람을 구분하기도 한다. 홍어는 회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라도 사람들은 찜으로도, 홍애탕으로도 만들어 먹는다. 그 중에서 홍어요리의 대표선수급이라면 홍어삼합이다. 삼합(三合)이란 잘 삭힌 홍어에 돼지고기와 3년 쯤 묵은 김치를 싸서 막걸리에 곁들어 먹는 것인데, 전라도 사람들이 이 음식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 지는 삼합이 나오고 안 나오고를 기준으로 식당과 가문의 수준을 가늠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먼저 홍어회와 삼합을 먹기로 하였다. 이 분야에서 두루 명성을 얻은 집은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 앞 금메달 식당이다. 이 집은 작고 허술해서 요즘사람들 눈에는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진품 흑산도 홍어만을 고집하는데다,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기 때문에 미식가들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임선생은 홍어삼합 이야기가 나오자 군침이 도는지 빨리 전화해보라고 성화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요즘에는 홍어가 잡히지 않아 음식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것을!
금메달 식당을 포기하고 우리는 호산회관으로 가기로 했다. 호산회관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교동 용금옥처럼 좁은 솟을대문을 밀고 들어갔더니 식당 내부가 보였다. 하지만 명성에 비하여 식당은 손님도 많지 않았고 활기도 적었다. 방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세발낚지와 낚지갈비대하찜을 먹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요즘 뻘 낚지가 잡히지 않아 세발낚지는 어렵고 낙지갈비대하찜은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으니 식당에 활기가 적엇던 이유를 알 만 했다. 우리는 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종류대로 다 시켰다. 귀한 곳에 왔으니 이것 저것 맛보자는 임 선생과 김 선생의 주장 때문이었다. 처음 들어온 것은 낙지숯불구이였다. 이 요리는 낙지를 고치에 꿰어 둘둘 말아서 숯불에 담백하게 구워낸 것이었다. 음식이 나오자 처음에는 품위를 지킨다고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구수한 냄새에 못이겨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그 다음으로 연포탕과 함께 주 메뉴인 낙지갈비대하찜이 나왔다. 연포탕은 시원한 맛이 술 안주로 제격이었지만 양이 적은 것이 흠이었고, 낙지갈비대하찜은 맛은 있었지만 항구이기 때문인지 좀 짠게 흠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허겁지겁 먹었지만 뒷 맛이 개운하지 않다.
4.목포는 항구다
저녁을 먹고 앞 선창 부근의 금호비치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관은 인터넷에서 확인한 대로 따뜻하고 깨끗했다. 몸을 씻고 이제는 좀 쉬어볼까 다리를 뻗는데, 임선생이 아까 먹지 못한 홍어회를 먹으러 가자고 조른다. 내가 값이 얼만데 홍어회냐고 펄쩍 뛰었더니 자기가 사겠다고 한다. 우리가 찾은 덕인집은 저렴한 가격으로 홍어회와 찜을 먹을 수 있는 선술집이었다. 조그만 문을 밀고 들어서자 선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이서 두레상을 놓고 간재미 찜에 소주를 마시고 있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며 자리를 잡았다. 조금 있다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러 와서는 “어디서 왔대유?”하고 묻는다.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를 기대했던 우리일행이 깜짝 놀라 쳐다봤더니, ‘서산이 고향유’라며 묻지 않은 말을 한다. 우리는 충청도 아지매의 권유대로 홍어삼합과 간재미찜을 시켰다. 홍어찜은 너무 비싸 비슷한 맛을 내는 간재미로 바꾼 것이다. 홍어삼합과 찜에 막걸리를 곁들여 마시며 우리는 남도의 맛과 멋에 취해갔다. 입맛이 까다로운 이 선생과 회 종류는 입에도 못대는 백 선생도, 홍어회 두 어 점을 우물거리며 희쭉 웃었다.
다음날 아침, 연신 하품을 해대며 아침밥을 먹으러 나섰다. 항구여서인지 거리에는 일찍 문을 연 식당들이 제법 많았다. 우리는 일찌감치 사전답사를 마친 임 선생을 따라 복국집에 들어섰다. 자리를 잡으면서 아주머니에게 무슨 복을 쓰냐고 물었더니 목포산 참복만 쓴다고 하였다. 복국은 3인분만 시켰는데도 평택에서 먹는 5인분과 맛먹는다. 음식맛도 시원하고 칼칼해서 입맛에 생기를 돋운다.
아침을 먹은 뒤 선창가 구경에 나섰다. 항구의 선창가는 어디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한참동안 겨울잠을 자는 배들을 바라보다가 해산물을 파는 노점들을 기웃거렸다. 노점에서는 잡어들과 낙지를 주로 팔고 있었다. 홍어삼합과 낙지요리는 먹었지만 목포의 명물 세발낙지를 먹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기에 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1만원에 7마리를 준다고 했다. 우리는 이게 왠 떡이냐며 얼른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세발낙지 맛이 명성에 비해 형편없다.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세발낙지 맞아요?’하고 물었더니, 이건 그물낙지이고 뻘낙지는 2마리에 1만원이라고 답한다. 그런줄 알았으면 비싸더라도 뻘낙지를 먹는 건데, 잘 먹고도 속은 기분에 입맛을 다셨다.
5.남도의 진미 한정식
목포를 떠나며 운주사를 갈까, 담양 소쇄원을 갈까 망설이다가 담양으로 길을 잡았다. 가는 도중 광주 망월동 묘역을 잠시 참배하고는 곧장 소쇄원을 찾았다. 소쇄원은 담양에서도 무등산 북동쪽 계곡에 자리잡은 조선 전기의 정원이다. 이 계곡은 옛부터 산수가 수려해서 누정(樓亭)이 많고 시인 묵객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누정으로 이름난 곳은 식영정, 송강정, 면앙정, 명옥헌 원림, 취가정, 소쇄원이며, 이곳에서 시를 짖고 노래한 인물만도 정철, 송순, 김인후, 양산보 등 이루 헤아일 수 없다. 특히 창평이 고향인 송강 정철은 당쟁으로 낙향하였을 때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사미인곡 등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
소쇄원은 겨울을 이용하여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조선 중기 소쇄공 양산보(梁山甫)가 꾸밀 때만 해도 제월당(霽月堂), 광풍각 (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등10 여 개에 달했던 전각이, 이제는 제월당, 광풍각, 애월당 등 몇 개 남지 않았지만 그것마져 쇄락하여 자주 보수해야만 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작년 이른 봄 광주의 김 선생님과 답사왔을 때 종손으로부터 차를 얻어마시며 담소를 나눴던 제월당에서 잠시 상념에 젖다가 대숲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나는 이곳에 오면 대숲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맑고 시원한 소쇄원 대숲에 들어서면 댓잎이 부딪쳐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바람에 대나무가 흔들려 웅웅거리는 소리가 장중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연상케 한다.
촉박한 시간을 달래며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담양으로 향했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은 죽물시장으로 유명하여 최근에 ‘죽물박물관“이 건립된 곳이다. 그래서 음식도 대나무와 관련된 죽순나물이나 죽순강회 등이 올라오는 한정식이 발달하였다. 음식을 소개하는 책에서는 이 분야에서 군청부근의 큰나무집이 최고라고 하였지만 폐업했는지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물어물어 찾은 곳이 ‘전통식당’이다. 이 집은 소쇄원에서 담양방면으로 가는 길 중간 쯤에 있는데, 전에 TV에 소개된 적도 있는 유명한 곳이다. 작은 다리를 넘어 식당 마당에 들어서니 기단이 없는 삼층짜리 작은 탑과 장승이 우릴 반긴다. 내부는 일반 가정집과 별반 다름이 없었는데, 우리가 안내된 곳은 안방 쯤에 해당되었다. 방안에는 그림만 두 어 점 걸려 있을 뿐 밥상도, 문갑도 없어 썰렁한 느낌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밥상이 들어왔다. 밥상은 아주머니 두 분이 양쪽에서 들고 들어왔는데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가짓 수만도 47종류나 되었고, 1평은 됨직한 큰 상에 반찬이 겹으로 쌓여 있었다. 더구나 전라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젓갈은 무려 7가지나 되었는데, 그 종류만도 귀하디 귀한 해삼내장젓, 황석어젓, 밴댕이젓, 성게 알젓, 창란젓 등 시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미식가 임 선생은 해삼내장젓을 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에 먹고 싶어서 동대문에 사러갔다가 하도 비싸서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우리가 잘 먹지 않자 아예 자기 앞으로 종지를 당겨 놓고는 밥을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돌아오는 길에 대전 부근에서 눈을 만났다. 고속도로에서 만나는 눈은 공포의 대상이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다행히 눈이 쌓이지 않아 무사히 올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각자 짐을 챙기는데 이 선생이 '내년에는 어디 갈 꺼야?'하고 물었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년이 오기나 한데!' (2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