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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דָּבָר(다바르)은 곧 여호와입니다. 살아 역사합니다.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완벽하게 성취됩니다. 헛되이 보내신 여호와께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구체적인 사건이 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마음에 그려져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사건은 둘이 아닙니다. 따로 구별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장로들은 여호와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기는커녕 오히려 교만했습니다. 늘, 언제나,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사악했습니다. 가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완전히 떠났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꼬리를 흔드는 개 같았습니다.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이들의 편에 빌붙었습니다. 부끄러운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거짓말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선포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방자했습니다. 치졸했습니다. 무능력했습니다. 어떤 자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하루하루 끊어지지 않는 질긴 목숨 때문에 겨우 살아내고 있던 백성들을 학대했습니다.
감언이설로 미혹했습니다. 존재 자체가 끔찍했습니다. 일반 백성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기는커녕 비웃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모독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부패했습니다. 경건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습니다.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흙벽돌이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가 찍혀 넘어지면 송백을 심으리라.”(사9:10)라고 외쳤습니다. 흙벽돌과 뽕나무는 값싼 건축 자재입니다. 서민들의 집이나 초라하고 빈약한 건물을 지을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듬은 돌과 송백은 대단히 고급스러운 건축 자재였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독차지하고 있었던 이들의 거처 또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지을 때 주로 사용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강력한 군대의 공격을 받아서 훼손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 할지라도 문제가 전혀 없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자신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화려하게 재건할 충분한 능력 갖추고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결국 중근동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앗수르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파상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동쪽으로부터는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동맹을 맺었지만 먼저 앗수르의 속국으로 전락한 수리아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서쪽으로부터는 남 왕국 유다와 끝없이 대립하며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던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온 백성들이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그렇기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절망의 한 복판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습니다. 전통적으로 특별 보호 대상이었던 고아와 과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값없이 베풀어주고 계시던 긍휼을 거둬들이셨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자신의 살을 뜯어 먹어야하는 엄청난 굶주림에 직면했습니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힘이 되어주었던 동족간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파멸적인 굶주림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해결될 희망이 아주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성경은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사9:12, 17, 21)라고 선포합니다.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에게는 완전한 파멸만 남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북 왕국 이스라엘은 B. C. 722년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깊었는지 또 얼마나 크고 불가항력적인 진노를 받았었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진노의 주체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진노”는 그다지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와 의지를 가지고 주신다기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자초하는 측면이 대단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다.”(롬1:26a),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롬1:28a)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의 유기” 곧 내버려두셨다는 표현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의 결정적인 순간 두 손 놓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은밀하고 치명적인 유혹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려고 했었던 결정적인 순간 두 손을 놓고 계셨습니다.
시기심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려는 결정적인 순간 두 손 놓고 계셨습니다. 열방 가운데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신 성민 이스라엘이 당신을 버리고 떠나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완전히 매몰되는 등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습관처럼 저지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은 요셉이 채색 옷이 벗겨지고,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지고, 미디안 상인에게 팔릴 때도 그러셨습니다. 유대인이 가장 존경한다는 다윗이 자신에게 목숨을 바쳐서 충성하는 신복의 아내를 불법으로 취하는 범죄를 저지를 때도 그러셨습니다.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는 자신을 죽은 자 취급하며 분깃을 미리 나눠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배은망덕한 둘째아들에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재산을 분배해주는 아버지 역시 결정적인 순간 두 손 놓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결정적인 순간 두 손을 놓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것을 모두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철저히 낮아지셨습니다. 당신을 환영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도움을 구하던 백성의 필요를 빠짐없이 채워주셨습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더러운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성전을 왜곡하고, 성민 이스라엘을 기만하며,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팔아먹는 두렵고 떨리는 죄를 마치 하루 세끼 밥을 먹듯 저지르고 있던 타락한 종교 장사꾼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내어주셨습니다. 중간에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혹독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사랑하는 백성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완벽하게 하나이셨던 아버지 하나님과 최초로 분리되는, 말로는 형용 자체가 불가능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심장이 터져서 물과 피가 분리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무려 세 번씩이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27:46b)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맺힌 절규를 외면하셨습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결정적인 순간임에도 두 손을 놓고 계셨습니다. 무려 육백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할 때도 그러셨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흐르는 304명의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될 때도 그러셨습니다. 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신 놀이이기는 하지만, 159명이나 되는 소중한 이웃이 하늘의 별이 될 때도 그러셨습니다. 악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하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늘의 별이 될 때도 그러셨습니다. 누구보다 열심을 내던 당신의 사람들이 “과연 계시는 것이 맞느냐?”고 묻고 또 묻다 지쳐 믿음을 완전히 내려놓는 순간에도 그러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 두 손을 놓고 계시는 분일까요? 그Mordecai는 자신이 장대에 높이 달려서 참수斬首될 줄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를 죽이기 위한 대적Haman의 음모는 빈틈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의 위기는 또한 성민 이스라엘이 완전히 진멸될 위기였습니다. 바로 그 날, 왕Ahasuerus은 어찌된 일인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신하들에게 역사책을 가져다 읽어보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잠을 청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마침,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던 내시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부분이었습니다. 왕은 그에게 무슨 보상을 해주었는지 물었습니다. 어떤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방인도 존중했던 당시의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또 왕의 수치였습니다. 왕은 최대한 빨리 보상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신하를 찾았습니다. 마침, 그를 죽이려는 대적이 상당히 이른 시간 왕궁 바깥뜰에 나와 있었습니다. 대적 역시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밤, 왕과 대적은 서로 다른 이유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왕은 그를 높이 세워놓은 장대에 달아 올리려는 자신의 계획을 보고하고 또 허락을 받기 위해서 들어오고 있었던 대적을 발견했습니다. 대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존귀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에6:6a)라고 물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존귀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습니다. 대적이 어떤 편견이나 사심을 갖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상을 베풀어 보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의 질문을 받은 대적은 자신 밖에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자신이 받아야 마땅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속으로는 쾌재快哉를 불렀습니다.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자만이었습니다. 왕처럼 되고 싶어졌습니다. “왕께서 입는 왕복과 왕께서 타는 말과 머리에 쓰는 왕관을 가져다가...왕의 신하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 원하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외치게 하소서”(에6:8-9)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적은 설레는 마음으로 왕의 명령이 선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대적의 대답을 들은 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그에게 행하되 대적이 말한 내용을 조금도 빼놓지 말고 모두 다 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대적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 왕을 찾았다가 오히려 가장 높이게 되었습니다. 대적의 착각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상황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완전한 역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위기에 빠져 있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두 손 놓고 지켜보고만 계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우연 같은 사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일일이 모두 다 엮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냥 지나치는 사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해 주신 저와 여러분과 관련된 일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저와 여러분이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두 손을 놓고 계시는 것 같은, 그렇지 않아도 힘겹게 붙들고 있는 작은 믿음마저도 사정없이 흔들어놓는 무수히 많은 상황들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결국에는 모든 일들이 하나같이 더할 나위 없는 선으로 결론날 것이라며 조금만 더 믿음으로 기다려보자고 쏟아놓았던 말들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은 힘겨운 상황들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도 모르게 울컥울컥 분노와 울분이 치솟아 오르고, 꾹꾹 눌러놓았던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b)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은 당연히 무조건 사랑하시고, 악인은 당연히 무조건 미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철석같이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대단히 도전적인 개념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와 불의 한 자를 따로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똑같이 해를 비춰주십니다.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사랑해 주십니다. 물론, 의인과 악인 모두를 다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자기희생이라는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 날에는, 반드시 의인과 악인에게 누구나 다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는 차별적인 결과가 각각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 편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이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지도 없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복음이 핵심이다.”의 저자인 그Donald A. Carson는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의 반열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의 연장선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여는 40가지 질문40 Questions About Interpreting the Bible”의 저자인 그Robert L. Plummer의 주장에 따르면,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입니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입니다. 사람들은 감히 생각할 수 없고 혹 생각한다 할지라도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아니 아무리 몸부림쳐도 실천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행동 양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매사에 사사롭지 않으십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를 덜 사랑하지도 않으십니다. 누구도 특별히 대우해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잔혹하다,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때로는 하나님은 없다는 업신여김을 받을 정도로 무심無心하십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근본 목적 곧 온 세상을 이끌어가는 당신의 경영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자유와 사랑이 역동적으로 살아 역사하는 세계였습니다. 만물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미래를 열어가는 유기적인 세계였습니다. 특히, 창조주이신 당신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소통이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와 경영에 참여하는 세계였습니다.
인간을 자유와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당신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가진 존재 곧 육신과 정신을 뛰어넘는 존재로 지으신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온 건물은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갑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가게 됩니다.”(엡2:21-22)라는 증거대로, 하나의 객체에 불과한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라 오직 당신의 집인 세계, 당신의 몸인 세계, 당신의 나라인 세계, 자유와 사랑이 역동하는 열린 세계를 창조하기 원하십니다.
인간의 자유와 선택과 행위가 최대한 존중되어야합니다. 최대한 보장되어야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개입하지 말아야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조종하려는 마음은 눈곱만큼이라도 갖지 말아야합니다. 사사건건 간섭하려는 마음 자체를 갖지 말아야합니다. 지극히 작은 시도조차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두 손을 놓고 있다는 오해와 불신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내버려 두어야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 있지만 그냥 묵묵히 지켜보기만 해야 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지극히 짧은 순간이라도 당신의 뜻이나 의지를 투사投射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창세전 계획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서로 주고 받아야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완전히 깨져버립니다. 인간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배하시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세계는 요원遙遠해 집니다. 아니 아예 기대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에게는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으로서는 표현할 마땅한 단어조차 찾기 어려운 하나님의 인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끙끙 앓는 하나님의 인내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도가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약속을 지키는 데 더딘 분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오래 참으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벧후3:8-9)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죄 된 존재인지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런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놀라운 자유와 사랑을 누리고 있는지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마음에 결단하기만하면 언제든지 받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가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두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히려 수시로 당신을 떠나서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당신이 꿈꾸고 있는 세계를 구현할 동역자로 세워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면서도, 끙끙 앓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인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파멸로 몰아붙이는 죄로부터 스스로 돌아서는 복된 삶, 어떤 방해나 제한도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유와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 믿음으로 반응하는 누구에게나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꿈꾸는 자유와 사랑이 역동하는 나라 완성을 위하여 스스로 기꺼이 동참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