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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량이성(주산면 사산산성) 전투
豆良伊城은 부안에 있다.
전영래 박사는 “고사비성(古沙比城)은 궁색스럽게 5만분의1 지도상에서 찾아낸 김제군 진봉면의 古沙里가 아니라 百濟五房城 중의 하나인 中方古沙夫里城으로 오늘의 고부(古阜)임을 밝혔다. <삼국사기> 지리편에도 '古阜郡 本 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 改名今因之...(고부군은 본래 고사부리군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서(周書)’.‘북사(北史) 등의 백제전에는 국내를 오방(五房)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했는데 당 고종대에 엮어진 ’한원(翰苑)(蕃夷部 百濟)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는 ‘房은 중국의 도독(都督)과 같으니라’하고 다음과 같이 오방을 설명하고 있다.
“國南二百六十里에 古沙城이 있는데 城房百五十里步요 이는 그 中房이라 房은 兵千二百人을 거스리며 國東南百里에 得安城이 있는데 城方은 一里요, 此其東方이라. 國南三百六十里에 卞城이 있는데 城方一百三十步, 此其南方이라, 國西三百五十里에 刀先城이 있는데 城方二百步 此其西也라. 國東北六十里에 熊津城이 있는데 固麻城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은 方이 一里半이요, 此其北方이라‘ 한 것이다.”
북방성이 웅진성이라면 이미 사비성에 천도한 이후의 상태를 적은 것인데 동방 득안성은 지금의 은진이요, 중방고사성은 ‘國南二百六十里’라 한 거리상으로 보아도 지금의 고부가 틀림없다. ‘삼국사기. 지리3편’을 보면 ‘古阜郡 本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改名今因之, 領縣三, 扶寧縣本百濟皆火縣.....喜安縣本百濟欣良買縣 今保安縣 尙質縣本百濟上柒縣’이라 하여 고부군에는 부령. 희안(후에 합쳐서 부안), 상질(후의 흥덕)의 3개현이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본기’에서 ‘삼월오일 지중로’라 한 것도 중로란 말이 어떤 루트를 뜻하는 게 아니고 ‘中房’이란 지방을 달리 적은 표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두량이성은 고부 부근 즉 부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두량이성은 부안군 주산면에 있는 ‘사산’
개암사 뒷산에 있는 주류성(울금바위)에 올라 고부 쪽을 바라보노라면 바로 발아래에 삿갓모양의 산(해발 100여 미터) 하나가 누워 있고, 그 산 너머의 들판은 고부에 이어져 있다. 오늘의 지도에는 삿갓 笠자를 써서 ‘笠山’이라고 표기해 놓았으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산이 도롱이를 닮았다하여 ‘도롱이뫼’라 부르며, 한문으로는 도롱이 사(蓑)자를 써서 ‘蓑山’, 또는 ‘뉘역뫼’라고 부른다. 패망한 백제는 역사를 남기지 못했고, 백제패망 역사는 당, 신라, 일본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니 우리 말 ‘도롱이 뫼’를 한문으로 옮길 때 ‘豆良伊’로 표기할 개연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산 정상에 토루(土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도롱이를 닮아다 하여 도롱이산으로 부르고 도롱이를 한자로 표현하면 豆良伊로 표기할 개연성이 높다는 이유로 사산산성을 두량이성으로 고증하고 있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해하다. 그리고도 모자라 아래에는 전설 까지 첨언하고 있다. 전쟁 당시 3~4월 춘궁기로 말하면서 그 3~4월에 보리짚이 남아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백제군이 주류성의 전방위 진지인 이 천험의 요새를 지키며 시간을 끌자 나당군은 식량이 떨어져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 사산에 이엉을 엮어서 낟가리처럼 쌓아놓고 군량미를 많이 쌓아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남아있다. '뉘역뫼'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한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신라군은 고사비성에 진을 치고 고부천을 중간에 둔 채 7km 떨어진 두량이성을 36일동안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패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설이 또 하나 있다. 주산면 사산리 산돌마을 동쪽을 ‘맷돌리’라고 부른다. 백제군이 이 마을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마을 뒷산에 보리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쌓아 노적가리인 양 위장을 해놓고 산 밑에서는 큰 맷돌을 돌려 이 소리가 멀리 들리게 하여 군량미가 충분하고 병사도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백제군이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신라가 총력전을 편 두량이성 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곤경에 처한 당군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대병을 출병시켜 백제의 근거지를 선점하여 당군의 기세까지 꺾어 백제 영토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김춘추의 전략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러니 660년부터 백제가 완전히 망할 때인 663년까지 부안의 동진강 하구(백산성 포함), 계화도, 대벌리.창북리 연안, 상서 일대, 사산, 배메산 등 부안 일대는 당, 신라, 일본, 백제 4국의 국제 전쟁터였던 것이다.
문무왕의 "설인귀 답서"에 두량이성 전투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위 전투와 다른 사건이다.)
“익년(현경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많아지고 웅진 강동의 지방을 침략하므로 웅진에 있는 한병 1,000명이 가서 적도를 치다가 도리어 적에게 대패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패배한 이래로 웅진에서의 청병이 밤낮으로 상계(相繼)하였소. 이 때 신라에서는 역병이 돌아 병마를 징발하기 어려웠으나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서 주류성을 공격하였소. 그러나 적은 아군의 과소함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우리는 병마를 크게 잃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 편에 귀속하였소. 복신이 승세를 타고 재차 부성을 에워싸니 이로 인해 웅진과 통하는 길이 차단되어 염시의 절핍을 보게 되었소. 우리는 곧 건아를 뽑아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핍곤을 구하였소. -- 중략 --
이에 이르러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수도인 사비성의 수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립된 유인원 등은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복신은, "대사(大使)들이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는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겠노라."고 조롱하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그러나 눈앞의 성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었다.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복신이 도침을 처형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까지 부흥운동은 복신과 도침의 두 세력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승려 도침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는 승려 출신으로서 사원 세력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미륵사는 2천여명의 승려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 하는데 이 승려들의 집단은 유사시에 군사적 조직으로 바뀔 수 있었다. 도성이 함락되자 도침은 이들 승려들을 주축으로 한 부흥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독자적으로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복신과 연합하였던 것이다.
지휘 체계가 이분화 되어 일사분란한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느끼던 복신이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를 이끌고 주도권을 장악하자 도침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의 모든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갔으나 백제부흥은 끝내 무산되고 만다.
참고문헌:백촌강에서 대야성까지(전영래).
www.puan.pe.kr 허정균의 주류성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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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량이성 진공작전
(위 글을 참고하여 쓰여진 글로 보인다.)
부여복신이 이끄는 백제군의 공격으로 당군이 위기에 처하자 신라왕 김춘추는 당군의 구원 요청에 따라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주력부대가 있는 주류성으로 향했다.
명분은 사비성의 구원에 있었으나 목표는 백제군의 근거지이자 피난 정부의 도읍지인 주류성이었다.
신라군의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2월(661년)에 백제의 남은 적이 사비성을 내공하므로 왕이 아찬 품일을 대당장군에 임하여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등으로 그를 돕게 하고, 문충을 상주장군에,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에, 무훌, 욱천 등을 남천대감, 문품을 서당장군, 의광을 낭당장군에 임하여 가서 사비성을 구원케 하였다.
(※유인궤와 함께 웅진강어귀의 부흥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의 유인원을 구원한다.)
사비성의 유인원을 구하고, 3월 5일에 중로에서 품일이 휘하의 군대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 혹은 伊로도 불림) 남쪽에서 진영할 곳을 살피는데, 성중의 백제인이 신라 진영의 정돈되지 아니함을 보고, 갑자기 나와 불의에 치니, 우리 군사가 놀라서 무너지고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고부)밖에 주둔하였다가 두량윤성을 공격하는데, 한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4월 19일에 부득이 군사를 돌이켜 대당과 서당은 먼저 보내고 하주 군사가 뒤에 떨어져 빈골양(賓骨壤:정읍 태인)에 다다를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서로 싸우다가 패퇴하여 죽은 사람이 비록 적었으나 무기와 군수품을 매우 많이 잃었다.
상주 낭당은 적을 각산(角山:삼천포)에서 만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 2000여명의 목을 베었다. 왕이 대군의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김순, 진흠, 천존, 죽지 등을 보내 군사를 증원 구원하게 했는데, 가시혜진(加尸兮津, 지금 고령의 가야천)에 이르러 군이 퇴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돌아왔다. 왕은 여러 장군의 패적(敗績)을 논하여 차등을 두어 벌을 주었다.
(※ 각산(角山:삼천포)은 삼천포가 아닌 두승산으로 설명하고있는데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각산(角山)의 위치 또한 주류성 위치 고증에 중요한 장소가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각산(角山)을 청양군 정산의 칠갑산, 두량이성을 청양군의 계봉산성으로 고증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인궤는 군사가 적으므로 인원과 합군하여 사졸을 쉬게 하고 고종에게 글월을 올려 신라와 합하여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沙)에 이르렀는데 복신이 요격하여 이를 파하니 흠이 갈령도(葛嶺道:갈재 즉 노령산맥)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왔다.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위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고찰해보기로 하자.
이병도박사는 '고사비성(古沙比城)'을 김제군 진봉면의 '고사리(古沙里)'라 하였는데 원광대 전영래 교수는 오늘의 고부(古阜) 임을 밝혔다. <삼국사기> 지리편에도 '古阜郡 本 百濟古沙夫里郡 景德王 改名今因之...(고부군은 본래 고사부리군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도 두량이성의 위치에 있다. 신라의 출병은 고립에 빠진 사비성의 당군을 구원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학자들은 부여 근처에서 비슷한 지명을 찾아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두량윤성(또는 두량이성)은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에 그 지명과 함께 남아있다. 주산면 사산리 사산마을 뒤에 해발 100여미터의 산은 도롱이뫼, 사산(蓑山), 또는 뉘역매로도 불린다. 이 산 정상에 토루(土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백제군이 천험의 요새를 지키며 시간을 끌자 나당군은 식량이 떨어져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 사산에 이엉을 엮어서 낟가리처럼 쌓아놓고 군량미를 많이 쌓아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남아있다.
'뉘역매'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한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신라군은 고사비성에 진을 치고 고부천을 중간에 둔 채 7km 떨어진 두량이성을 36일동안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패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설이 또 하나 있다. 주산면 사산리 산돌마을 동쪽을 "맷돌리"라고 부른다.
백제군이 이 마을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마을 뒷산에 보리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쌓아 노적가리인 양 위장을 해놓고 산 밑에서는 큰 맷돌을 돌려 이 소리가 멀리 들리게 하여 군량미가 충분하고 병사도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백제군이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 3~4월의 춘궁기에 보리짚이 남아있었을지 의문이다.)
신라가 총력전을 편 두량이성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곤경에 처한 당군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대병을 출병시켜 백제의 근거지를 선점하여 당군의 기세까지 꺾어 백제 영토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김춘추의 전략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식량 때문으로 보인다. 3, 4월의 춘궁기에 깊숙히 대군을 침투시키는 것은 무모한 작전이었다.
설인귀에 답하는 문무왕의 글에 당시 두량이성 전투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 이 기록은 3월 초에 품일 등이 한달 6일 동안 두량이성의 부흥군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돌아간 사건 이후의 또다른 신라군의 출병이다. 두사건을 분별하여 살펴봐야 하는데 위금암성을 주류성으로 주장하는 주요 글들을 보면 같은 사건으로 오인하고 있다. 아래 기록에도 다른 사건 임을 알 수있다.)
익년(현경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많아지고 웅진 강동의 지방을 침략하므로 웅진에 있는 한병 1,000명이 가서 적도를 치다가 도리어 적에게 대패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패배한 이래로 웅진에서의 청병이 밤낮으로 상계(相繼)하였소. 이 때 신라에서는 역병이 돌아 병마를 징발하기 어려웠으나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서 주류성을 공격하였소. 그러나 적은 아군의 과소함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우리는 병마를 크게 앓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 편에 귀속하였소. 복신이 승세를 타고 재차 부성을 에워싸니 이로 인해 웅진과 통하는 길이 차단되어 염시의 절핍을 보게 되었소. 우리는 곧 건아를 뽑아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핍곤을 구하였소. -- 중략 -- 이에 이르러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수도인 사비성의 수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립된 유인원 등은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복신은, "대사(大使)들이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는지, 마당히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겠노라."고 조롱하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그러나 눈앞의 성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었다.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복신이 도침을 처형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까지 부흥운동은 복신과 도침의 두 세력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승려 도침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는 승려 출신으로서 사원 세력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미륵사는 2천여명의 승려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 하는데 이 승려들의 집단은 유사시에 군사적 조직으로 바뀔 수 있었다. 도성이 함락되자 도침은 이들 승려들을 주축으로 한 부흥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독자적으로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복신과 연합하였던 것이다.
지휘 체계가 이분화 되어 일사분란한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느끼던 복신이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를 이끌고 주도권을 장악하자 도침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의 모든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갔다.
사산리산성(두량이성)은 삿갓모양을 하고 있다. 오늘의 지도에는 입산(笠山)이라고 나온다. 멀리 고부의 두승산이 보인다. 그 사이로 고부천이 흐른다. 앞에 보이는 저수지는 조손새암이 있던 사산저수지이다. 복신굴에서 본 모습이다.
소산리 산성. 울금바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두량이성 바로 오른편에 있다.
두량이성(사산산성)과 소산리 산성(배메산성)은 주류성의 전초기지인 셈이다.
(※ 사산리산성은 위금암성과 2km의 거리로 도보로 10분이면 갈수있는 낮은 평지의 외톨이 야산에 있다. 이렇게 작고 허약한 산성을 목적물로 삼아 신라의 대군이 출병하였다고 볼 수 없다. 궂이 이곳으로 신라군이 출병하였다면 위금암성(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병한 것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고서의 기록은 두량이성을 공격한 것으로 적고 있다"면 두량이성은 다른 곳에서 찿아야 한다.)
사산저수지에서 본 주류성.
감교리 마을 뒤로 개암골과 묘암골로 가는 좁은 골짜기가 보인다. 산 정상에 울금바위가 솟아 있다.
두량이성과 소산리 산성, 그리고 주류성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움직인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허 정균 - 작은 한반도 변산반도
첫댓글 전해 내려온 전설이 부흥군의 이야기 일까?
3,4월에 보리짚이 있었을까?
사비성의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러 온 신라군의 공격 목표가 부안(주류성?) 이었을까?
갈재가 갈령도 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갈재 넘어 순창, 장수, 남원땅이 부흥군의 수중인데 갈재를 넘어도 위험한 지역 아닌가?
고문서에 기록된 지명들, 각산/삼천포, 고사비성/고부, 빈골양/태인, 가시혜진/고령 등은 어떤 고증을 통하여 공인되었는지......
부흥운동은 동시다발적으로 백제의 전역에서 벌어졌고, 전투기록은 백제의 지리와 지명을 모르는 당과 왜에 의해 전해오던 것을 후대 사가들에 의해 쓰여진 기록이었기에 많은 부분 다르게 내용이 뒤섞였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의 두량이성에 관한 "신라본기, 백제본기" 두 기록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두량이성 전투는 661년 3월 초부터 4월 19일 사이의 사건 이고, 후자의 전투는 유인궤가 웅진성에 고립되자 동쪽방면을 공격하다 패한 이후 신라에게 청병하여 신라군이 출정하였다가 패한 사건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신라 당군은 주류성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신라 당군은 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의 분열이 생기면서 항복한 부흥군에 의해 산악지역 부흥군의 실체(주류성)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군이 부흥군에게 패해 도망간 곳 갈령을 지금의 정읍 칠보~순창의 쌍치 고갯길(갈재)이라 주장하는데~
그시절 그곳에 길이 있었을지 의문이고, 그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많은 군사들이 넘어가기 힘들고, 또한 어렵게 넘어간들 순창 장수 남원 까지 백제 지역이고 또다시 지리산 백두대간을 넘어가야 신라 땅이다.
두량이성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하던 신라군 "상주낭당"은 적을 각산(角山:삼천포)에서 만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 2000여명의 목을 베었다~~~~
각산을 어떻게 삼천포로 고증하였나?
그리고 삼천포는 백제영역도 아니다.
각산은 청양 칠갑산이다.
"빈골량, 갈령도"가 어디인지 다시 고증해야 한다.
두량이성은 백제부흥운동에서 엄청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산성이다. 사비성을 위협하던 부흥군의 전초기지 처럼 나당군을 불안하게 만든 부흥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글에서 설명하는 두량이성은 위금암성과 2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위금암성의 부속 성으로 주장해도 전혀 틀림이 없는 산성이다. 이러한 작은 산성을 신라군이 공격목표로 삼아 전투를 치루고 기록으로 남겼을지 의문이 든다.
위금산성과 2km 거리라면 도보로도 10분 거리, 신라군의 목적물은 당연히 주류성으로 기록되어야 옳다. 그런데 신라군이 두랑이성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하였다면 두량이성은 다른 장소에 있는 산성 이어야 한다.
백제 중방성 고사성(古沙城) 또는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고사비성(古沙比城)으로 비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거야말로 비슷한 지명찿기 아닌가?
위금산성/울금바위에서 본 사산리산성이다.
사산리산성은 위금산성과 아주 가까운 지척에 있고 어쩌면 부속 산성으로 보아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한 작은 산성을 두량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본문 내용은 원문을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에는 고사(古沙)가 아닌 고사(古泗)로 되어있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沙)에 이르렀는데 복신이 요격하여 이를 파하니 흠이 갈령도(葛嶺道:갈재 즉 노령산맥)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왔다.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위 글의 원문이다.
<羅>王<春秋>奉詔, 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 至<古泗>, <福信>邀擊, 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尋而<福信>殺<道琛>
원문 한자는 至<古泗> 로 쓰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