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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애지문학상 문학비평부문 후보작품
----배옥주의 [눈냄새의 기록-이병률의 시세계]
----김지윤의 문을 여는 시, 떠나는 시, 계속되는 시- 황인찬의 시세계
----황치복의 절제의 미학과 구도求道의 시학 ―한이나 시인의 시세계
눈냄새의 기록
-이병률론: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읽기
배옥주
1. 안온한 내공의 언어들
21세기 현대시는 언어의 해방을 꿈꾸는 환상성으로 상상력의 극점을 넘나든다. 일탈의 기교를 통해 익숙한 구조를 해체하는 환상시와 해체시의 경향은 정신의 무한한 확대와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전면에 배치한다. 이때 현대시에서 드러나는 해체나 전위의 형식은 단절과 소통 불능의 현상을 파생시킨다. 난해시를 쓰는 시인들은 이해가 잘 되는 시를 현대시의 인위적인 부산물로 치부하면서 불통의 시를 삶을 위한 거짓말에 대한 공격(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이라고 정의한다(염선옥). 현대시의 한 세계관으로 정립된 해체시나 환상시를 통해 불통의 세계와 소통하려는 작가의 의도적인 전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를 넘어 시단의 흐름에서 파생된 ‘소통불능’과 ‘불편함’은 시에 다가가려는 독자에게 걸림돌로 작용한다.
의식의 개입을 배제한 자동 기술과 지배적 정황으로 치닿는 불편한 시에 주춤할 때쯤 공감의 시로 소통하는 시인 이병률이 등장했다. 시인의 시를 신뢰하는 독자들은 오랜 내공으로 쏟아내는 안온한 언어의 품에 덥석 안겨든다. 그의 시는 변화와 갈등을 포함한 신서정과 리얼리즘을 융합한 개성적인 사유로 발화한다. 심연을 휘젓는 위트로 미학적 예술성을 추구하면서도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시인의 감정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이병률의 시는 대상을 객체로 만들면서 화자를 중심으로 내세우거나 수동적인 관찰자 위치에서 들여다본다. 쉽고 편안한 언어로 형상화하는 감각적 이미지는 시적 정황을 미화하지 않고도 품위를 지켜낸다. 그의 시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확장해나가는 내면 사유의 힘을 만날 수 있다.
지방 문학행사장에서 문청들의 고민에 공감하던 이병률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는 애정을 고백하는 독자들에게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이 넉넉한 쓸쓸함」)고 진심을 쏟아낸 시를 건네준다.
2. 괄호를 채우는 마음자리
유독 눈 냄새에 진심이다. 눈 냄새를 맡고 있으면서도 눈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운 시인, 이병률이다. 눈앞에서도 그리워하는 눈 냄새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시인은 시집 출간을 제안 받고 눈 내리는 곳으로 달려간다. 눈 냄새에 파묻힌 그는 돌아올 날을 훌쩍 넘겨도 개의치 않고 눈 냄새 배인 시에 사람과 사랑을 각인한다.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시인 여행자’ 이병률이 겨울을 유랑하면서 건져 올린 눈 냄새로 가득하다. 이병률! 그를 떠올리면 설원에서 펼쳐지는 사랑영화가 오버랩 된다. 훗카이도 설원에서 ‘히로코’가 죽은 남친 ‘이츠키’에게 ‘오겡끼 데스까’를 외치는 <러브레터>나, 핀란드 설원에서 펼쳐지는 <남과 여> 같은. 겨울시인 이병률이 곁에 두고도 그리워하는 눈 냄새는 어떤 빛깔의 감정일까?
이병률은 삶을 열고 닫는(「의문」) 중심에서 만난 자신을 모두 비워낸다. 자신까지 온전히 버린 세계의 끝에서 삶의 방향을 좇는 슬픔과 고독의 밀도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는 여행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서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타임슬립(Time Slip)처럼 백 년 전이나 천 년 후로 떠난 시간여행에서 벌어온 모험의 시간을 오롯이 시와 사랑의 감각을 깨우는 데 쓴다. 이병률의 일곱 번째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자아와 시인이 이토록 사랑한 적 있었던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유랑이다.
이병률은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좋은 사람들」로 당선된 후 여러 권의 산문집과 시집으로 독자들과 소통해왔다. 시인은 감정의 재료가 소진될 때까지 괄호 안에 머문다. 이병률에게 여행·사랑·바람·눈 냄새는 생의 괄호를 채우는 소중한 목록이다.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부터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까지, 산문집 『끌림』부터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까지 ‘사랑’과 ‘여행’은 이병률 시세계의 중심 화두다. 그의 시편들은 시인의 길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하는 여행자의 시선(『끌림』)으로 펼쳐진다.
시인은 왜 슬픈지 물으면 왜 슬프지 않는지 되묻는다(「해변의 절벽」). 사랑과 가까워지는 일은 바닥없는 슬픔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절박함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랑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쓸모없는 일이다. 시인이 정의하는 사랑의 실존은 ‘누구나 채울 수 있고 비울 수 있는 괄호’이며, ‘가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사랑」)이며, ‘마음이 마음을 흠모하거나 산책하듯 스미는 것’(「사랑은 산책자」)이다.
붙들고 울고 있다
한없이 서로를 껴안고 울고 있다
놓지 않고 있다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붙들고 서서
함께 허물어지려고 붙들고 있다
두 사람 신발 등이 눈물에 젖고 있다
두 사람이 껴안고 서 있는 자리에
열과 공기가 닿은 것처럼
두 사람을 제외한 곳만 눈이 내려 쌓이고 있다
- 「폭설」 전문
위 시는 1행이 1연인 9행 9연의 여백을 강조하는 구조다. 의도적으로 행과 행 사이 거리를 두어 독자가 두 사람의 깊은 사랑에 대해 사유할 공간을 만들어준다. 두 사람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 데서 눈을 맞으며 껴안고 울고 있다. 한없이 우는 모습과 쏟아져 내리는 폭설의 시각 이미지는 그들의 복잡한 심경을 한폭 수채화로 그려낸다.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붙들”고 있는 것이지만, “함께 허물어지려고 붙들”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불륜의 사랑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려는 걸까? 어떻게든 두 사람은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을 붙들려고 애쓰는 이들이다. 서로 껴안고 고스란히 폭설을 받아내는 두 사람 바깥으로 눈이 쌓이고 있다. 폭설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열과 공기”는 포옹을 갈라놓지 못 할 만큼 뜨거운, 사랑은 그런 것이다(「농밀」).
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틀이
자발적으로
윤곽을 잡게 되었습니다
별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당신 눈동자가 흔들린 거라 믿게 되었습니다
- 「농밀」 전문
참견하느라 늦은 사람이 몸을 일으켜 조금 빠르게 걷는다
늦춰 걷던 사람도 속도를 맞추려는지 몸을 조금 서두른다
그래
맞출 수 있다면 이것저것 잇대어서라도 맞춰야지
- 「친구」 부분
나는 누구의 이빨이라면 물려죽어도 괜찮고
누구의 이빨에 씹혀 죽으면 억울할 것 같은지
- 「사랑」 부분
도무지 전부가 마비되고 없다 해도
그리하여 마디마디 접붙일 것이 없기에
다글다글 원하는 것이 없다 해도
- 「사랑」 부분
사랑을 향한 정서는 인간 본연의 감정표현만 다를 뿐 시간이 지나도 힘줄이 맞닿으면 전해지는(「두 사람」) 마력이 있다. 위 시편들은 어떻게든 상대에게 맞춰주려는 속성에 집중한다. 맞춰주는 것은 사려 깊은 배려에서 비롯된다. 「농밀」에서 화자는 당신 눈에 비치는 빛이나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에서 사랑을 확신한다. ‘사랑’이란 마주보는 상대의 눈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이다. ‘당신’과 끈끈하게 결속된 자아의 관계가 농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세상의 여러 틀”이 “자발적으로 윤곽을 잡”고 반듯해진다. 바람에 별이 흔들리면 당신의 눈동자는 흔들릴 수밖에 없고 화자 또한 흔들린다. 이처럼 사랑은 함께 흔들리는 “그런 것”이다.
「친구」에서는 늦은 사람과 앞선 사람이 속도를 맞추려고 애쓴다. 한 발씩 물러서서 무엇이라도 “잇대”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몸을 “서두른”다. 사랑이 서로에게 안식을 가져다주는 일(「바다는 잘 있습니다」)이라면 다 내주고 빈집 같은 존재가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빈 곳을 채우려 스밀 테니까. 같은 표제의 두 시 「사랑」 또한 예측 가능한 감정의 결을 암시한다. 사랑은 “물려죽어도 괜찮”은 이빨과 “전부가 마비되”고 “원하는 것이 없다 해”도 산 하나를 파내거나 쓰다 버리는(「사랑의 출처」) 불가항력의 마음자리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전문
사랑을 감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번 생의 암호를 풀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러고 삽니까
사랑이 후방에라도 있는 겁니까
- 「언젠가는 알게 될 모두의 것」 부분
이병률은 오래 품었지만 끝내 잃어버려야 했던 사랑의 순간들을 기록해나간다. ‘말이 더뎌지는 순간이 마음의 리듬이 시작되는 시간’이라는 시인의 말을 쓸어내리면 타인의 뒷모습에 젖는 촉촉한 눈빛이 만져진다. 표제작인 이 시는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고는 발현될 수 없는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에서는 각 문장이 ‘적’으로 종결된다. 지나간 시간에 의존하는 ‘적’은 오히려 무수한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조롱받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며,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각각의 시행은 화자의 내면 심사가 표출되는 문장들로 포진되어 있다. 그 문장들의 감촉은 놀랄 만큼 물컹하고 유순하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있는가.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있는가.
자아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감정의 결을 새기며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 사랑이 목뼈를 분질러 거대한 슬픔이나 외로움을 남긴다 해도 사랑 없는 생은 막힌 괄호일 뿐. “사랑을 감각하지 않”는 한 “생의 암호”조차 풀지 못한 채 제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열정으로(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사람들은 사랑을 오해”하거나 “구부러뜨리거나 질투”하지만 시인은 “사랑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선언한다. 사랑의 실천은 괄호처럼 비어 있는 공백을 인지하고 감각하는 일이다. 또한 사랑은 개인적인 일이면서 세계적인 일이어서 능동적인 사랑을 시작한 ‘나’를 ‘우리’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때 결합의 경험으로 살아남은 사랑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저장된다(에리히 프롬:Erich Fromm).
3. 유랑의 내면화
여행은 자신의 전생이 어땠는지 찾아나서는 길이다(「비린 생의 노래」). 얼마나 들고 있어야 하는지 몰라 불현듯 가방을 싸는 시인의 행위는 유랑의 내면화를 실천하는 모습이다.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어서 떠난다. 하지만 이병률은 돌아올 곳을 지우고 떠난다. 그는 여행에서 세상 끝의 기울어진 풍경을 앓으며(「세상의 끝」) 떠돌이 삶의 본질을 끌어당기는 존재의 흔적들을 만난다. 지하철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보다 지하철을 타고 달리는 사람의 시간이 더 느리다는 상대성이론처럼, 시인은 여행 안에서 느린 시간을 경영하며 천천히 존재의 안식처를 찾아낸다.
김수영, 유치환, 황동규, 김소연 등의 시인이나 정주영, 이병철, 손흥민 등의 유명인은 여행을 즐긴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유랑의식은 세계를 상대로 변화를 즐기고 정체된 세계를 거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른다섯에 모두를 버리고 타히티로 떠난 고갱의 여행이나, 시학적·철학적 범주로 확장시킨 김수영의 여행은 이병률의 여행과 묘하게 닮았다. 여행이 작가에게 필수적인 조건임을 역설하던(1964.9.23. 조선일보 대담) 김수영이 도피의 방편으로 동경했던 여행을 끌어안았다면, 이병률은 우연한 날 것의 여행을 껴안고 뒹굴다 축적되는 사유를 미학적으로 승화하는 시세계를 펼쳐낸다. 머리로 들어와 마음을 흔드는 철학(강신주)과는 달리, 이병률 공감의 시는 마음으로 들어와 머리까지 흔든다.
기차표가 없었는지 모자에게 자리는 하나뿐이다
듬직한 아들은 얼핏 봐도 아프다
노모가 보온병을 건네고 과자를 건네 보지만
다시 또 삶은 달걀을 건네도 아들은 싫다는 내색을 한다
아들은 육중한 무언가에 상체를 심하게 받친 듯하다
기차가 어느 역에 멈추고
어머니가 앉아 있던 자리에 자리 주인이 와서
이제 어머니는 서 있어야 한다
집에 가는 길이 멀다
<중략>
잠시 자리를 바꾼 아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 같더니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앞 칸에 자리가 많이 비어 있다는 전화였는지
앞 칸으로 무조건 건너오라는 말인지 서둘러 노모가 이동한다
두 사람은 마주 앉거나 나란히 앉았을 것이다
기차는 입원과 간호로 지쳤을 두 사람만을 태운 것 같다
기차는 굽은 철길을 따라서 돌다 돌다 그렇게 인생의 앞 방향을 내다보는 중이다
지독히도 부드러운 길은 멀겠지만 돌다 돌다 더 멀어도 되겠다
- 「기차는 칭다오에서 출발한다」 부분
-공부를 마쳤습니다
한 청년이 기내에 들고 탄 이불 보따리가 너무 큰 걸 보고는 승무원이 제지하자
-제가 하산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자 승무원이 말을 받았다
-하산을 했더라도 큰 짐은 부쳐야 합니다.
-부치고 남은 짐입니다. 더는 부칠 수가 없다고 해서 들고 탄 겁니다.
<중략>
공부를 다 하고도 가져갈 이불과 세간들이 있다 못해 힘을 내어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공부인가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나 큰 공부인가
- 「하산」 부분
여행 경험으로 발현되는 이병률의 시는 허술하고 낮은 삶의 그늘을 연민으로 감싸 안는다. 소소한 감동과 깊은 생각거리를 전해주는 여행시편들을 통해 시인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다. 칭다오에서 출발한 기차에는 아픈 아들을 앉히고 서서 가는 노모가 등장한다. 자리를 찾아 전전긍긍하는 모자의 모습에 동요된 시인은 집으로 돌아가는 모자의 길이 너무 멀다고 느낀다. 하지만 자리를 찾은 아들이 노모와 앉으러 간 그때부터 기차는 “돌다 돌다 더 멀어도 되겠다”고 안도한다. 모자의 심경이 시인의 심경으로 이입되는 순간 모자를 태운 전용 기차가 달려가는 “지독히도 부드러운 길”은 아무리 멀어도 괜찮아진다.
비행기 에피소드에선 ‘하산’이라는 묵직한 낱말에 움찔하게 된다. 더 이상 짐을 부칠 수 없어 이불보따리를 들고 탄 청년은 승무원에게 “하산을 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청년과 승무원의 실랑이를 보며 시인은 “하산했”다는 청년의 말을 곱씹는다. 공부를 마치고 하산해서 “힘을 내어 갈 곳이 있다는 것”과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하더라”도 하산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공부인지 깨닫는다. 하산할 만큼 들였을 노력과 창창할 미래에 대해 시인은 청년의 무한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병률 시에서 연민은 삶을 개척해나가는 시적 대상을 다독인다. 이런 정서는 시인의 시적 세계관을 추동하는 요인이 된다.
헤어질 때 서로 사진을 찍는 종족이 있다고 생각한 후
다음번에도 또다시 공항에서였다
헤어질 때 힘껏 끌어안았다가 떨어지는 두 사람 몸에서
쩍하고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멀리 떠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호소하듯 소리치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껴안은 것뿐인데
나무 갈라지는 소리보다 더한 소리가 공항 안에 울려 퍼졌다
- 「공항에서」 부분
너는 아주 긴 여행을 할 거라고 했다
이번에 내가 근사한 술을 사도 되느냐고 물었어
시작은 근사하고 그러는 너는 더 근사하고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작고 시시한 이야기를 쌓아간다는 건 참 경이롭지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약속을 한다는 건 더 묘하지
- 「누가 내게 술 한 잔을 사줘도 되느냐고 물었어 」 부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그때가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나짐 히크메트:Nâzım Hikmet, 「진정한 여행」). 바람의 호위를 받으며 140여 개국을 여행한 이병률. 이렇게 떠도는 삶을 즐기는 이병률에게 각별한 사람이 있다. 54세에 독일에서 별세한 허수경은 「혼자 가는 먼집」으로도 잘 알려진 시인이다. 후배시인 이병률을 아끼던 생전의 그녀는 영혼의 일을 자발적으로 즐기는 ‘시인 여행자’에게서 불가해한 풍경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그 이후로도 시인이 운행하는 설국열차는 눈 냄새의 기록을 이어가며 끝없이 달리고 있다.
이병률에게 ‘공항’은 삶과 환경에 대한 그리움이 발현되는 토포필리아(topophilia)다. 복잡다단한 심경들이 섞여 있는 그곳은 시인이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상징적인 장소다. 떠나는 발길을 배웅하기도 하지만 떠나지 못하게 붙잡기도 하고 돌아온 발길을 마중하기도 한다. 공항에서 화자는 멀리 떠난다는 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이 떠나는 사람을 껴안는 소리에서 “나무 갈라지는 소리”보다 더한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한 고통의 소리를 통해 헤어지지 않겠다는 이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낸다.
막연하게 당도한 여행의 현장에서 사람과 시를 선물 받는 것은 축복이다. 모르는 사람끼리 술잔에 담은 마음을 건네고 약속을 하는 것. 그건 ‘모르는’이 ‘아는’으로 바뀌는 근사한 일이다. 그는 여행에서 서투르게나마 자신이 누구인지 들여다보는 혜안과, 휘몰아치는 눈밭에서 타인의 막막한 뒷모습을 읽어내는 천리안까지 얻어온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친해지고 “작고 시시한 이야기를 쌓아”가는 여행 서사는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4. 사유의 여백
이병률은 스무 살에 시를 쓰기 위해 집 하나를 빌렸다(「오래된 집」). 그는 허무는 일도 많았던 어두운 방에서 이토록 사랑한 누군가와 허물어지려고 붙들던(「폭설」) 망설임까지도 폭설처럼 껴안고 뒹굴었다. 시인은 서술어를 쓸 수 없는 시적 잠재성 속에 미지의 사태를 숨겨두었다(이광호). 서술어를 쓰지 않고 말문을 흐려 시적 사유의 여백을 무한대로 확장하겠다는 의도다.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대던 어두운 방(「화양연화」)이나 이름도 모르는 두 사람이 몇 방울 포도물로 번져도 좋을 ‘황금포도 여인숙’에서 사무치는 마음속 혼잣말을 궁글리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의 감정이 포개지는 어두운 방이나 혼잣말은 무한대로 확장되는 여백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여행은 ‘사랑’의 순례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러 개의 안경이다. 이병률이 투명한 안경 너머의 세계에서 시와 사랑과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얼마나 ‘찬란’한가.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감정들을 맛깔나는 시로 요리한다. 시인이 차려낸 한 상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찬란한 바람 한 공기와(「바람의 사생활」) 타인을 향한 심장박동 한 대접 그리고 접시에서 버티는 가시 돋친 시(「경력서」)가 있다. 시인은 벅찬 감정을 쏟아내는 것보다 식탁 위에 가만히 마음을 올려두거나 냄새를 음미하며 사무사思無邪의 지점에 닿는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절대적으로 착해지고 써보지 않은 근육으로 새로운 정서를 구축하는 시인. 이병률의 시는 내밀한 영혼과 숙성된 내면으로 대중과 시인을 아우른다. 눈이 쌓이듯 슬픔이 극에 달할 때 살고 싶어지는 기적처럼, 미혹된 마음에서 분별이 지워져 더 이상 허기를 느끼지 못할 때 젓가락으로 무념무상의 시를 집어 올리는 것이다.
리얼리스트가 시인의 죽고 사는 문제를 정의한다는 네루다(Pablo Neruda)의 말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병률은 이상과 공상에서 한 걸음 물러선 리얼리스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사랑이 끝나면 쓰레기 같은 인간과 사랑을 했다고 화들짝 놀라거나(「과녁」) 직접 만든 계란말이로 힐링푸드의 안식을 전해준다. 쏟는 일과 쏟아져 내리는 일이(「내가 소년의 딱지를 뗀 세상의 첫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자각하는 이병률. 어느 날 이별이 만나자고 내민 손을 잡아주고, 길을 물으면 같은 방향이라며 함께 가자고 할 것 같은 시인. 그와 어깨를 겯고 걸어본다면 심장 구석구석 깨알같이 기록된 눈 냄새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움’과 ‘비움’을 짊어진 시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국의 그릇가게 할머니처럼 한 걸음 뒤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한다. 내향적인 아이슬란드에서, 눈 냄새에 파묻힌 핀란드에서, 독자의 심연에서 그가 써내려가는 사유의 여백에 물들 때까지.
※PS
오래된 그 집 왼쪽에는 바다가 있고 뒤편에는 슬픔이 있다.
머물고 싶은 사람에겐 언제나 비워준다는 포근한 품에 한 번쯤 들러보시기를!
약력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 시 등단
2022년 《애지》 평론 등단
<부경대학교> 문학박사
시집 『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 공간』
평론집 『언어의 가면』
<요산창작지원금> 수혜, <김민부 문학상>, <두레 문학상> 수상
문을 여는 시, 떠나는 시, 계속되는 시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문학동네, 2023)에 대한 소고(小考)
김지윤
1
황인찬 시인의 첫 산문집의 제목은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안온북스, 2022)이었다. 읽는 것은 왜 슬프고, 사랑은 왜 말해야 하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다른 존재의 슬픔을 알게 하며 그럼에도 대상과 단절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고. 그러니 시는 늘 얼마간의 슬픔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단절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다가가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게 결국 사랑의 본질”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떻게든 사랑의 본질을 말하려고 노력한다.
황인찬의 새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문학동네, 2023)을 읽으며 그간 시인이 줄기차게 말해왔던 것을 되새겨보게 된다.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지나 네 번째 시집을 내는 이 시인이 도달한 자리는 어디일까.
황인찬의 전작 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 「부서져버린」(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이었다.
“부서져버린”이라니. 무엇이 부서졌다는 것인지 비밀로 남기는 이 꾸밈말의 여백은 이 시의 어떤 비유보다 상징적이다. “어떻게 끝내야 할까/ 그런 고민 속에서 이 시는 시작된다” 이 시는 시작부터 끝을 예고하고 있는데, 그러고 나서 바로 ‘문’에 대해 말한다. “문이 열리는 것이 좋을까. 영영 닫혀 있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결말은 어떨까.”
세상의 ‘문’들이 단절을 의미하는 벽에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닫힌 벽에 ‘문’이 생긴다면 어떤 공간은 갑자기 열릴 수 있게 된다. 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어주는 통로다.
어떤 세상이 부서져버린다면, 깨어져 구멍이 생긴다면 그것은 파손이면서 또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다른 세상으로 가려면 이 세상에서 우선 나가야 하는 까닭이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문 뒤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문 뒤의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문이 열린 이후의 세상은 미지의 공간이다. 상상은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지만 ‘목소리’가 되어 구현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맞은편’의 목소리로 다가가기 위해 입이 열리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맞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고,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부서져버린」 중)
시인은 세상의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대화하려고 한다.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만났을 때 그것은 대화가 된다. 그래서 이 시는 “우리 이야기 좀 하자”는 말로 끝난다. 청유형으로 ‘이야기를 하자’라고 했으니 이것은 대화의 문을 여는 말이 된다. 그는 이야기를 원한다.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지만 말이다. 시집으로 묶인 것은 2019년이지만 이 시가 처음 발표되었던 것은 2016년의 일이다. 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인은 수많은 문을 발견하고, ‘맞은편’으로 나가 무수한 대화를 해왔다. 이제 그는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바로 다음 시집이자, 올해 낸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에서 황인찬은 이번에는 이렇게 쓴다.
언젠가 누군가와 남도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 정말 좋았어요 아주 인상적이었어요”라고 했다.
말하게 되는 그 순간에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_「아는 사람은 다 아는」 중
“말하게 되는 순간에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니. 시인에게 말은 여전히 그런 힘을 가진 존재다. ‘아름다움’이 있는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놀라는 순간에도// 그 여름은 뭐였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인화」)는 시인이기에, 그는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몰입하고, 끝없이 그것을 되새겨본다. 아름다움이 처음 생겨나게 한 그 ‘말’은 무엇이었나.
2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자신의 책 『성과 속』에서 고대인들이 제의를 통해 우주창조를 재현하고, 시간의 갱신을 통해 역사를 폐기하고 재생해온 것은 인간이 문명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지키고 역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했다. 인간존재의 완성을 위한 ‘통과의례’의 상징으로 항상 등장하는 것이 ‘문’의 상징이다. “‘문지방’은 안과 밖의 경계선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지대에서 다른 지대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문지방’은 안정과 세속적인 조건들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한다.
문을 연다는 것, 특히 ‘말의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서도 ‘성스러운 시간’을 연다는 의미로 나타난다. ‘말문을 연다’는 표현은 그 어원상 무속적 용어다. ‘말문(言門)’은 무당의 입이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신의 뜻으로 ‘말문이 열리다’는 원래 신의 뜻을 인간이 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Shaman’은 만주어, 퉁구스어 ‘saman’에서 나왔는데 여기서 ‘Sam’은 어(語)를 뜻한다. 우리말에서도 ‘말’의 옛말은 ‘묻’인데 ‘묻’에 ‘앙’을 더하여 ‘무당’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말문을 연다는 것은, 곧 성스러운 시간으로의 진입을 뜻한다. 종교적인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균질적인 것이 아니고, 시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획득한다.
말이 시작되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신비로운 시간으로 그려진다.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이라는 시에서 ‘성’의 시간으로 넘어감에 대해 매혹의 시선을 보내는 시인을 우리는 발견한다. ‘너’는 항상 왼쪽 창가에 있고 그 너머는 빛으로 표상되는 신비스러운 세계다. (“너는 항상 왼쪽 창가/ 그 너머는 빛”)
당신의 시에는 현실이 없군요
현실에는 당신이 없는데요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그냥 흰 빛뿐이지만
그 이상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지만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죽은 사람이나 왼쪽으로 걷는 거라고 누가 소리지르고 있었다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중
현실 속에 신비로운 비현실의 세상이 비집고 들어오고, 환상 속에 또 현실이 난입하는 모순과 균열, 황홀한 불협화음과 같은 것이 황인찬 시에 묘한 정서를 형성한다. 시적화자는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그냥 흰 빛뿐이지만/ 그 이상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지만”, 그리고 “죽은 사람이나 왼쪽으로 걷는 거”라며 왼쪽, 오른쪽 나누어 세상의 규범들을 정하는 현실은 그의 공상을 끝없이 방해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코 현실을 그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현실에는 당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황인찬 시에서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시간이다. 오늘을 살지만, 끝없이 오늘을 떠나려 하는 시인 것이다.
「미래 빌리기」에서 시인은 이렇게 쓴다. “밤 열두시에 화장실에서 칼을 물고 앉아 거울을 보면 미래의 사랑이 보인다”고. 오늘의 ‘나’에는 미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랑은 지옥”이고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기다리는 일은 지난하다. 그러므로 그는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이미 오늘을 떠난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가 “안경을 밟고 버”리는 행위는 현실을 그대로 보는 안경 대신, 다르게 볼 수 있는 자신만의 시선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영혼을 찾는 여행을 떠나”(「당신 영혼의 소실」)려면 현실의 눈은 필요하지 않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런 풍경을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이 심상의 바깥에 놓여 있”고 “미래는 여전히 땅속에 묻혀있”다.(「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불가능성」) 저 깊은 곳에 잠겨 있기는 해도, 우리는 이미 도래해 있는 미래를 밟고 서 있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여기 아직 사람 있어요”라고 외치는 일처럼 막막한 일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정적 속에서도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아직 사람 있어요
중학생 때, 불 꺼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면
오래도록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러나 기다려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노래를 관둬도」 중
기다리는 일은 고독하다. 아무리 “여기 아직 사람 있어요”라고 외쳐도 침묵만 돌아오는 것처럼, 사랑은 종종 응답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묵묵히 계속된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퇴적해안」)에 문득 서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거나 “사람의 마음이 깊어가는 가을”(「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처럼 그렇게 사랑이 익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은 이야기가 된다.
3
황인찬 시 속 시적주체들은 ‘함께’이기를 원한다. 이야기가 대화가 되려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모두 필요한 까닭이다. 우선 목소리가 닿아야 하고, 누군가 대답을 해야 한다.
이야기를 들려줘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눈 내리는 겨울밤, 쏟아지는 눈을 보며 차가워진 두 손을 마주 잡았을 때,
한쪽 어깨에 머리를 기댄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 때 웃으면서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다 말해줘
빠짐없이 들려줘
(무대에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서 있다 그 사람은 슬픔을 연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제 끝없이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니까
어떤 이야기는 오래도록 반복되어 사실이 되니까
또 어떤 사실은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남겨질 테니까
-「철거비계」 중
황인찬 시에 나오는 ‘이야기’는 “끝없이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어떤 이야기는 오래도록 반복되어 사실이 되”고, “어떤 사실은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사랑이란 정의하기 나름이다.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그래서 시인은 “그걸 사랑이라 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없는 저녁」)라고 말하며, 뭐든 사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들려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한, 세상에 사랑이 생겨날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마음을 ‘이것’이라고 규정해버리는 대신 그는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라고 말한다. 하나의 임시적인 가정(假定)일 뿐, ‘마음’은 규정되지 않았기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의 ‘마음’은 그렇게 계속해서 덧붙여지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된다.
생성형의 이야기라면, 언제든 새롭게 만들어질 여지가 있으므로 마침표를 찍는 일은 자꾸만 지연된다. 아름다운 이야기든, 참담한 이야기든 마찬가지다.
여기서 벗어나면
오래도록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내가 노래를 관둬도」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면/ 오래도록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끝이 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이야기는 언제든 남아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전하고 싶은 듯하다. “여기서 벗어나면”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어둠 속에서 버틴다.
이 시집의 문을 여는 첫 시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은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자/ 학교에서 봐”라는 단 두 줄로 되어 있다. 학교에서 매일 보는 아이들이 끝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는 나눌수록 더 할 말이 많아지고, 다정함과 즐거움이 샘솟는다. 내일 다시 만나 남은 이야기를 이어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루하루 이어져갈 사랑의 가능성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야 수업 다 끝났어’/ 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빛의 용사 전설」)는 시 구절처럼 하루가 끝나도 내일이 다시 시작되듯 이야기는 계속된다. “조명이 꺼지며 공연은 끝나지만 저녁에 다시 공연은 오른다.”(「철거비계」)
“더는 말할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말해줘/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이야기해줘”(「철거비계」)라고 말한 후 시적화자는 상대의 이야기를 다 듣는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고 삶이 다 멈추면/이제 내가 말할 차례가 온다”라면서,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말을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을 위한 되풀이이며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오늘이 ‘부서져버린’ 후에 그는 새로운 미래의 문을 연다. 오늘 안에 ‘내일’은 늘 미리 도달해있다.
황인찬이 말하는 ‘끝’은 늘 정녕 ‘끝’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문을 통과해서 한 세상의 끝에 맞닿아 있는 새로운 시작으로 건너가는 것에 가깝다. “끝이 정녕 끝이 아니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가능성의 문이 남아있어야 한다. 시인은 늘 ‘말문’을 열고자 한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라고.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문은 늘 열려 있을 것이다.
1. 약력(저서명, 대학, 문학상 경력)
약력: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시)과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함. 2012년 시와시학상 수상.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평론집 <요즘비평들> (공저) 등이 있음.
절제의 미학과 구도求道의 시학
―한이나 시인의 시세계
황치복(문학평론가)
구도求道의 일상, 깨달음 향한 도정
1989년 시와 의식의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온 한이나 시인의 시선집이다. 첫 시집인 귀여리 시집부터 최근의 물빛식탁의 대표작들을 간추려 놓아서 시인이 그동안 추구해 온 시세계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시선집의 매력일 것이다. 시편들 또한 이렇게 수작들이 많은 시선집을 살펴보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작품들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동안 시인이 얼마나 한편 한편의 시작품에 공을 들여서 창작에 임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이나 시인의 시적 매력은 절제를 통한 담백한 시적 여백의 구축,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의 정신이라고 생각된다. 담백하고 여유 있는 시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시인은 최대한 언어를 절약하고 있으며, 동양의 수묵화와 같이 농밀한 감정이 탈색된 언어를 통해서 담백한 품격과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의식은 매우 치열해서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 평정의 마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가열한 정신이 요동치고 있다. 시인의 구도를 위한 노력은 일상 생활에서부터 예술적 창작과 향수에 걸쳐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품격과 격조가 작품의 심미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시인의 내면에는 구도를 위한 가열한 시정신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자잘한 일상 또한 다음과 같이 구도를 위한 수행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마음을 몸에 붙이지 못했던 날들 뒤로 가고
꽃으로 꾸며진 경전 길 곡선 따라
믿을 신信 한 자 꼬옥 붙잡고
생각의 생각조차 내려놓고 걷는 학교 가는 길
길섶 풀씨가 익어 터지는 소리를 보다가
둑길에 애기똥풀 노랗게 흔들리는 것을 읽다가
시냇물 흐르는 물길을 내 안에 들이다가
버들치 피라미 붕어와 분탕질 치다가
유희삼매에 빠져
해찰하며 해찰하며 가는 길
늦은 나이 늦은 학생이 천,천,히
무심걸음 떼어놓는, 화엄 발자국
새로 돋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금강 언덕 오르며 온 마음을 내려놓는다
텅 빈 그 속에 움이 트는,
몸이 마음이 있지 않다
―「화엄 발자국」, 전문
학교에 가는 평범한 사건이 구도의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다. “꽃으로 꾸며진” 길을 시적 주체는 “경전 길”로 인식하고 있는데, 학교 길이 경전 길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고,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시적 주체는 이 길을 걸으면서 세상의 이치를 읽거나 받아들이며,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이나 마음을 내려놓는다. 예컨대 이런 식인데, 시적 주체는 “길섶 풀씨가 익어 터지는 소리를 보”기도 하고, “둑길 애기똥풀 노랗게 흔들리는 것을 읽”기도 하며, “시냇물 흐르는 물길을 내 안에 들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풀씨가 터지고, 애기똥풀이 흔들리는 등의 자연 현상이라든가 시냇물이 흐르는 물길 등의 형태는 어떤 이치와 섭리의 상징으로 작동하면서 시적 주체에게 독법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시적 주체는 이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그것을 읽어내려고 하며 “새로 돋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시적 주체는 이를 위해서 “유희삼매에 빠져/ 해찰하며 해찰하며”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니까 학교에 가야 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침잠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시적 주체는 “생각의 생각조차 내려놓고 걷는 학교 가는 길”이라고 명명하기도 하고, “금강 언덕 오르며 온 마음을 내려놓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인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텅 빈 그 속에 움이 트는”이라는 시안詩眼에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을 텅 비운 마음속에 생명의 기운이 움트기를 기원하는 것인데, 일상이 바로 구도를 위한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이 시인의 시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의 재봉틀 작업을 보면서도 “어머니 재봉틀 앞에 경經 읽듯 앉아/ 온 맘 온 힘을 보태 한 땀 한 땀/ 삼베조각보자기 요호청 베개보 무시로 길을 만든다”(「어머니와 재봉틀」)라고 하면서 재통틀에서 ‘경經’을 발견하기도 하고, ‘길’을 읽어내기도 한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시인의 이번 시선집에서 세상을 파악하는 행위를 ‘독서’로 간주하고 그것을 구도의 주요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루의 끝을 짚으며/ 나를 밀어내고 들어앉은 남이 나로 바뀔 때까지/ 무거운 책 속의 다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내 몸의 아픔도 잊고 밀밭 사이로 걷는 독서/ 저 진흙 세상에서 마악 빠져나오려는”(「걷는 독서」)라는 구절이 대표적인 표현인데, 시인에게 독서는 ‘다른 길’을 발견하는 행위이기도 하며 ‘진흙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구도의 과정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기에 그것은 고통의 단련으로 이해된다. “쇳물이 되었다가 뜨겁게 열 가한 칼날이/ 도라지꽃으로 푸른빛을 띨 때/ 때려 펴고 갈아주길 무수히 반복하면/ 고통의 한 가운데/ 녹슬지 않을 금강의 시간들”(「파릉의 취모검」)이라는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구도의 과정은 때리고 펴는 과정의 반복이며 고통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지난한 고행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구도의 과정이 앞에 인용한 시에서도 그렇지만, 자연의 현장에서 발현된다는 점이다.
가을 월정사 전나무의 참빗 바늘잎 숲길
저 육백 살 전나무 고목 등걸
슬픔을 채운 자만이 비울 수 있는
속이 텅 빈 밑동이다
채움에서 비움으로 가는 중이다
비로자나불 봉우리 구름바다에 묻힌
첩첩단풍 속,
걷다보면 자연 경전의 수많은 경구들
바늘나뭇잎
참빗되어 나를 씻는다
―「나를 씻는다」, 전문
구도의 노력은 “씻는” 행위로서의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그것은 또 비움과 통한다. 비움은 또한 “슬픔을 채운 자만이 비울 수 있는”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의 간난신고艱難辛苦에서 오는 슬픔을 모두 겪어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운다는 것은 곧 “돌처럼 딱딱하게 뭉친 슬픔의 응어리 죄다 풀려나와/ 심죽에 흡인되는 한순간을 보셨는지요”(「심죽心竹」)라는 표현처럼 온갖 응어리진 감정의 찌꺼기들이 죄다 풀려나와서 텅 빈다는 것이며, “속내를 앓다가 다 비운 자리에/ 그만큼의 소슬한 바람으로 채운다”(「대꽃」)는 것을 의미한다. 소슬한 바람으로 채워진 내면이란 곧 자유와 해방으로 가득 찬 텅 빈 충만의 공간일 것이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이러한 원리를 자연이 체현하고 있는 모습에서 깨닫는다. “저 육백 살 전나무 고목 등걸/ 슬픔을 채운 자만이 비울 수 있는/ 속이 텅 빈 밑동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또한 “걷다보면 자연 경전의 수 많은 경구들/ 바늘나뭇잎”이라는 표현처럼 자연은 하나의 경전이기도 하며, 세부적 모습들은 그 경구들이기도 한데, 시적 논리에 의하면 ‘바늘나뭇잎’이 하나의 경전이자 경구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참빗이 되어 나를 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씻는다는 것은 세속적 욕망과 티끌을 정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화라는 것이 곧 비우고 채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음을 시상의 전개가 이미 피력하고 있다.
이처럼 한이나 시인의 시편들은 일상과 자연의 세세한 국면들이 함축하고 있는 깨달음의 상징에 주목하고 그것을 읽어내려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게 구도의 과정은 곧 독서의 과정이기도 한 셈이다. 시인에게 인생과 자연이란 오묘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거대한 한 권의 책으로서 그것을 읽어내는 과정이 곧 구도의 과정이기도 하다. 구도 과정은 궁극적으로 “나를 씻는다”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고 정돈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음 작품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능엄경 밖으로 사흘 무단가출해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안
으로, 조용히, 불러 들였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혹사
시킨 말의 상처, 그 뭇매를 맞은 죄 없는 마음을 치료하려,
곰취 잎사귀에 뿌리를 넣어 녹즙을 냈어요 뿌리로 독을 빼
낸, 푸른 물 한 컵, 공복에, 쭈욱 들이켰어요 그리고는 식탁
에 앉아 잠시, 찰나삼매에 빠졌지요 평상심, 그 편안한 느낌
을 금방 알아챘어요 현재의 마음을 바라보는 또하나, 바깥
의 마음을 보았지요 마음을 허방에 빠뜨리고, 껍데기만 거
리를 오고 가면서, 왜 그리, 허둥대고 사방 분주하였던지요
나를 알아차림 후에는, 진정 흔들림 없고 치우침 없는, 고요
가 올까요 이제 마음을 몸에 붙여, 참하게 길들이기로 하겠
어요 몸통이라는 그릇에 담은 본 마음, 있는 그대로 그대를
그리고 나를 보기로 합니다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전문
능엄경이란 불교의 이치와 수행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불교 경전이자 불교 입문 교재인데, 시인은 이를 해석하여 마음을 다스려서 평정에 이르는 방법으로 수용하고 있다. 마음이란 항상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혹사시킨 말의 상처”로 인해서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치료가 필요한데, 시인은 “곰취 잎사귀에 뿌리를 넣어” 만든 “녹즙”을 마시며 “찰나삼매”에 빠지는 과정을 통해 치료의 방법을 찾아낸다. 찰나삼매의 구체적인 내용은 허방 다리에 빠져 허둥대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마음, 즉 “현재의 마음을 바라보는 또하나, 바깥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둥대며 방황하는 자신의 마음에서 잠시 벗어나 그것을 바라보는 바깥의 마음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평정에 도달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인데, 바깥의 마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맹목과 아집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이러한 해방의 과정을 “나를 알아차리”는 자아 각성의 순간으로 이해하며, 그러한 각성은 “진정 흔들림 없고 치우침 없는, 고요”에 도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흔들림이 없고 치우침이 없다는 것은 곧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고, 미혹과 의구심에서 해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깨달음의 과정이란 자아라는 주관의 아집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여(如如)의 경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여여(如如)란 분별심이 끊어져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파악되는 마음 상태, 혹은 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몸통이라는 그릇에 담은 본 마음, 있는 그대로 그대를 그리고 나를 보기로 합니다”라는 구절이 그러한 여여의 깨달음의 경지를 서술하고 있다. 불교적 상상력에 의지하는 시인의 구도의 자세가 이러한 작품에서 한 극점을 이루고 있거니와 시인은 종교적 구도의 자세 뿐만 아니라 예술에 임하는 자세 또한 구도의 그것을 취한다.
2. 예술, 하나의 도에 이르는 길
느릿느릿 붓끝에 먹물 묻혀 사군자를 친다
창호지에 새벽 푸르름이 묻어올 때까지
선을 따라 대를 그리고
마디를 넣고
이파리를 하나 하나 채워가는 딴 세상
먹참선 대나무 그림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는다
마디 마디 나를 느낀다
두루적막 속 먹향기는 멀어질수록 향기롭다
―「먹참선」, 전문
먹물로 사군자 중에서 특히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치고 있는데, 시인은 제목을 통해서 대나무를 그리는 과정을 ‘먹참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의 다른 시편인 「다선일미(茶禪一味)」, 즉 차를 마시는 다도와 불교의 수련 과정인 참선이 하나로서 다르지 않다는 발상을 발휘하여 사군자를 그리는 수묵화의 작업이 깨달음을 위한 참선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붓꽃 춤」이라는 작품에서는 서예의 활동에 대해서 “붓 끝에서 피어나는 묵향”이라고 하거나 “마음절벽에서 써내려 가는 붓글씨”라고 하면서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단순한 쓰기 작업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먹으로 사군자를 치는 행위에 대해서 “선을 따라 대를 그리고/ 마디를 넣고/ 이파리를 하나 하나 채워가는 딴 세상”이라고 하면서 수묵화를 그리는 활동이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는다”라고 하면서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어떤 몰입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마디 마디 나를 느낀다”라는 대목을 보면, 묵으로 그린 대나무의 마디 마디가 단순한 대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림 속의 대나무와 자신이 합일된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는 이 대목은 대나무를 그리는 행위가 곧 자신의 어떤 정신이라든가 혼을 투여하는 과정임을 표상한다. 자신이 대나무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혼의 예술을 표방하는 다른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자.
구름무늬 한지에 문장을 다 써도
붉은 낙관 하나
차마 찍지 못한다
저 구부러진 글자들의 살아 숨 쉬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
글자의 살갗 위 혈관이 만져지지 않는다
글자의 뿌리 그 뼛속 사무침도 보이지 않는다
구름무늬 한지의 먹빛 문장
궁서체 한 호흡만큼
울음의 구름장 너머 저편이
어둠보다 깊고 멀다
마음의 바닥에서 울려오는 비명소리
그 번개 낙관을
한밤내 기다렸다
―「번개 낙관」, 전문
잘 알려져 있듯이 낙관(落款)이란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 그린 장소와 날짜 등을 쓰고 도장을 찍는 일을 뜻한다. 그러니까 낙관이란 어떤 작품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한지에 글씨를 써넣고도 차마 낙관을 찍지 못한다. 시인이 글씨를 쓰고도 낙관을 찍지 못하는 행위 속에는 글씨가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것, 즉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글씨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쓴 글씨가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 즉 글씨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의 글씨가 기운생동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강조하는데, “저 구부러진 글자들의 살아 쉼 쉬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라든가 “글자의 살갗 위 혈관이 만져지지 않는다”, 혹은 “글자의 뿌리 그 뼛속 사무침도 보이지 않는다” 등의 표현들이 예술의 절대적 경지에 들지 못한 자신의 작품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에 묘사되어 있는 “마음의 바닥에서 울려오는 비명소리/ 그 번개낙관을/ 한밤내 기다렸다”는 구절은 구도의 정신을 담고 있는 바, 어떤 초월적 경지의 예술적 영감이 자신을 구원할 것을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을 더 읽어보자.
허공 한지에 고백처럼 선 하나 내리그었네
거친 생각이 무심한 듯 허공에
빗발치는 선
수도승처럼 수천수만 번 붓질하면
얻어질 반야의 저 색채요법
저를 비울수록 색이 깊네
내 안의 말을 줄이고
들끓는 색을 지우고
한밤내 긋고 또 긋는 붓질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패랭이꽃 치자꽃 자연을 닮은 묘법의
한 획
나 절필해도 좋으리
―「아득한 묘법」, 전문
서예(書藝)를 통한 묘법의 경지가 펼쳐지고 있다. 작품의 논리에 따르면 선 하나를 내리긋는 것은 단순한 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기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수도승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과 닮아 있으며, 그래서 서예의 궁극적인 목적은 반야, 곧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근본적인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묵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기에 “저를 비울수록 색이 깊네”라든가 “내 안의 말을 줄이고/ 들끓는 색을 지우고/ 한밤내 긋고 또 긋는 붓질”이라는 묘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글씨를 쓰는 행위는 자신을 비우는 수도의 과정이며, 묵언 수행을 통해서 번뇌를 끊는 고행의 과정인 것이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서예의 궁극적 목표는 자연에 귀의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패랭이꽃 치자꽃 자연을 닮은 묘법의/ 한 획”이라는 표현 속에 그러한 경지가 표상되어 있는데, 그토록 자신의 마음을 고백처럼 내리 그었던 붓글씨는 “자연을 닮은 묘법의/ 한 획”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이 자연과 같아지는 것인데, 이는 앞서 말한 여여(如如)의 경지와 다르지 않다. 있는 것을 조금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을 글씨 자체를 통해 체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심, 반야, 자연, 여여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었지요
칠백 년만에
버들잎 관음도 속으로 들어가 마주 서 있었지요
어둠 저편 나를 만나려 고려에서 건너온
관음의 눈빛 쓸쓸함을 보았지요
수없이 각기 다른 색을 포개어
풀어낸, 비단 화폭의 고고함
슬픈 듯 깊고 깊은 고요로 빛났답니다
나의 고단함을 보살핀다는 자비의
버들잎 부처를 보았지요
손가락 끝에서부터 연꽃무늬 옷자락 치마 끝까지
흐르는 선, 차분한 농담의
아름다운 극치
겉으로 한 벌 걸친, 한바탕 꿈속의 짧은
꿈세상을 보았다니요
버들잎 관음도 밖으로 걸어나와 거닐은 국립중앙박물관
떡갈나무의 마음이 꾸며낸 환상 붉은 가을이
다시 꿈속이었다니요
―「버들잎 관음도」, 전문
버들잎 관음, 혹은 양류관음(楊柳觀音)이란 불교에서 병고(病苦)를 덜어주는 관음으로, 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버들잎 관음도는 그러한 관음의 상을 그린 불화인데, 불교 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시인은 이러한 “아름다운 극치”에 도달한 버들잎 관음도에 대해서 “수없이 각기 다른 색을 포개어/ 풀어낸, 비단 화폭의 고고함”이라고 묘사하는가 하면 “슬픈 듯 깊고 깊은 고요로 빛났답니다”라고 하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깊고 깊은 고요로 빛나는 버들잎 관음도를 보면서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장면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애달프고 구슬픈 정동에 휩싸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시인은 “흐르는 선, 차분한 농담의/ 아름다운 극치”라고 하면서 절정의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작품을 찬탄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어떤 절정과 극치에 도달한 예술품은 시인으로 하여금 꿈 속 세상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었지요”라든가 “겉으로 한 번 걸친, 한바탕 꿈속의 짧은/ 꿈세상을 보았다니요”라는 표현들이 바로 그러한 예술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서술하고 있는데, 꿈세상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꿈세상이란 차안에 없는 세상, 곧 피안의 어떤 유토피아적 세상을 암시한다. 예술은 시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없는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데, 그 세상에는 고통과 번뇌가 없는 세상일 것이다. 고통과 질병에서 중생을 구원한다는 버들잎과 물병을 든 관음도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버들잎 관음도 밖으로 걸어나와 거닐은 국립중앙박물관/ 떡갈나무의 마음이 꾸며낸 환상 붉은 가을이/ 다시 꿈속이었다니요”라는 구절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아름다움의 극치에 도달한 위대한 예술작품은 현실을 정화시켜 마치 꿈속 세상인 것처럼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악한 현실 그 자체가 살만한 세상, 혹은 꿈결을 거니는 듯이 아름다운 세상, 온 세상이 울긋불긋 아름답게 단풍으로 물든 그런 세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 번뇌와 고통이 있을 리 없다.
3. 깨달음의 경지, 혹은 해탈의 마음
지금까지 우리는 한이나 시인이 추구한 종교적 구도의 시의식과 예술적 구원의 시의식을 살펴보았다. 시인은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이나 자연의 평범한 현상들이 어떤 깨달음의 메시지를 간직한 상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읽어내려고 하는데, 그러한 독서의 행위가 곧 구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시인은 수묵화라든가 서예와 같은 예술 활동이 단순히 심미적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적 과정이 아니라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절대적 경지, 혹은 아름다움의 극치에 도달하기 위한 고행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종교적 구도와 예술적 구도의 과정을 통해서 시인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
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
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
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
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전문
물론 이 작품이 시인이 추구하던 종교적 구도와 예술적 극치의 어떤 경지를 그린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추구하던 평정의 마음, 혹은 어떠한 고뇌와 번민도 없는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란 곧 그늘의 세계인데, 그것은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람”인 그가 추구하는 세계와 대립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그늘에 상주하는” 존재로서 그늘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그늘에는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이라는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정도의 우울함이 있기도 하고,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라는 구절에서 추출할 수 있는 슬픔의 정서가 스며 있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이 추구하는 그늘이란 “삼십 년 된 목백합 한그루가 창을 가린다”처럼 목백합에 둘러싸여 있는 그늘이기도 하고,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열면 나타나는 “내 안의 다른 길”이자 “비밀의 정원”으로서 시인의 은밀한 소망과 가치가 스며 있는 무의식적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녹색의 장원”, 혹은 “푸른 그늘”이라는 표현처럼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으로 표상되는 그늘이기도 한데, 이러한 묘사들은 그늘이 자연의 어떤 이면으로서의 이치라든가 섭리 같은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그늘은 일본의 탐미주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음예 예찬」이라는 글에서 말한 음예(陰翳)의 개념을 연상시키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라는 개념은 그윽하고 아득한 어둠으로서 예술적 창조력의 원천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음 작품은 좀더 직접적으로 깨달음의 경지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탑은 날지 못하는 새
그는 길고 긴 폭풍우길 번개길에도
외로움을 안쪽으로 가두고 서 있는 그림자
설움도 켜켜이 쌓아 삭힐 줄 아는 질그릇
상처마다 사리를 품고 생멸을 견디는 고요
탑이 되기 위하여
진흙을 밟고 선 연꽃 받침대 위에 나의 영혼을 얹고
일곱 마디뼈를 일으켜 세우는,
탑 뒤로 내 몸 그림자 길게 기울어진다
내일이란, 탑 앞을 흘러가는
저 가벼움의 흰 구름
무한허공을
무심히 떠가는 한 마리
새가 된 나의 탑
―「탑은 나의 새」,전문
“탑은 나의 새”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탑은 시적 화자의 내적 열망을 대변해주는 분신인데, 새로 비유하고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것이 시적 화자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체현하고 있는 대상임을 알 수 있다. 탑은 물론 여러 층이 중첩된 건물이라는 점에서 어떤 가치를 위해서 쌓아온 노력과 고투를 표상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용도라든가 영험한 공간을 뜻하기 위한 목적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적인 가치를 암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설움도 켜켜이 쌓아 삭힐 줄 아는 질그릇”이라든가 “상처마다 사리를 품고 생멸을 견디는 고요”라는 묘사들이 탑이 내포하는 정신적 가치라든가 인품의 격조 같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탑이 되기 위하여/ 진흙을 밟고 선 연꽃 받침대 위에 나의 영혼을 얹고”라든가 “일곱 마디뼈를 일으켜 세우는/ 탑 뒤로 내 몸 그림자 길게 기울어진다” 등의 비유적 표현들은 탑이 표상하는 그러한 정신적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고행과 고투의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완성된 탑의 모습은 ‘흰 구름’이라든가 ‘새’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내일이란, 탑 앞을 흘러가는/ 저 가벼움의 흰 구름”, 그리고 “무한허공을/ 무심히 떠가는 한 마리/ 새가 된 나의 탑” 등의 표현들이 그것들인데, 이러한 표현들은 시적 화자가 완성한 탑이 곧 자유와 해방의 정신적 경지를 상징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작품을 더 읽어보자.
나무의 갈색에서 선의 색깔을 본다
갈색은 절정을 휘돌아 나와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늦가을
불문곡절 혼자 튀어 주목받지 않아도 좋은
나무감정을 추스려 내공을 쌓은 기도
정서를 풍요롭게 만드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짙어지는 찬란
점잖게 늙은 느티나무의
말 없음
벼를 다 베어버린
들판의 텅 빈 충만
공空에 이르는 길,
괜히 쓸쓸하여도
때가 되면 회자정리를 하는 이의 색
비워져 다시 돌아오고자
―「갈. 색.」,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갈색을 보면서 “공空에 이르는 길”이라고 비유하고 있지만, 시인이 주로 주목하는 대상은 공空보다는 색色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다른 곳에서 “이제 나는 어둠 속에 있기를 희망한다”고 고백하면서 “가장 까만 검정색은/ 섭씨 천 이백도/ 슬픔의 불을 태운 자만이 얻는 색경”이라고 하면서 검정색을 예찬하기도 하고, “죽음 같은 통점/ 가장 까만색을 알아버린 사람만이 얻는/ 황홀한 절망, 색의 경전”(「색경色經」)이라고 하면서 검정색이 지닌 역설과 아이러니를 발견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흰색에 대해서는 “하늘과 바다의 파란빛에 들어있는 저 흰빛/ 순결과 공포의 색/ 모든 색의 시작이며 끝인 색/ 죄없이 바다에 수장된 영혼의 그림자”(「너라는 귀신고래」)라고 하면서 오묘하고 신비로우며 어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시에서는 갈색에 대해 주목하면서 “갈색은 절정을 휘돌아 나와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늦가을”이라고 하면서 갈색이 불교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본래면목을 체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진면목(眞面目),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인위적인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것으로 시비가 없고 분별이 없으며 조작이 없고 생멸이 없이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나무의 갈색에서 선의 색깔을 본다”는 구절에서 선이란 곧 선(線)이 아니라 선(禪)으로 읽을 수 있는데, 선에서 추구하는 수행이 바로 이와 같은 자신의 본래면목을 파악하고 자각하는 행위이고, 선의 깨달음이 곧 본래면목의 터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래면목의 구체적인 속성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짙어지는 찬란”, 혹은 “점잖게 늙는 느티나무의/ 말 없음”이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발현하는 것, 혹은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실현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본래면목의 진정한 속성인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미래를 미리 당겨 예측하면서 “이쪽과 저쪽의 경계 오래 바라보며 순종과 초월을 새겨야지”(「나에게 건배」)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때 순종과 초월이 바로 본래면목의 실현을 구체화하는 실천일 것이다. 본래의 본성에 따라 순종하면서 어떠한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이 바로 본래면목의 실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갈색에 대해서 “벼를 다 베어버린/ 들판의 텅 빈 충만/ 공空에 이르는 길”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묘사 역시 있는 그대로의 천지자연이라든가 인생역정이 지닌 본래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진면목일 것이며, 이러한 본래면목을 수용하는 것은 곧 집착과 아집에서 해방되어 ‘텅 빈 충만’의 내면적 풍요에 도달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한이나 시인이 구축한 종교적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의식과 예술적 완성을 위한 구도의 정신이 구축한 해방과 자유의 내면 풍경을 더듬어 보았다. 시인은 일상과 자연에서 깨달음의 상징을 해석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인생과 자연의 본래면목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구도의 정신이 가열하지만, 시인의 시편들은 언어를 최대한 절약하여 여백의 공간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최대한 농밀한 정서를 배제함으로서 담백한 시적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절제와 담백의 시적 공간으로 인해서 시인이 추구한 구도의 정신이 더욱 실감나고 리얼하게 다가오는데, 이러한 시적 공간이 집착과 미련을 떨쳐버린 시정신의 맑은 격조를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애지 2024년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