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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다가올 시(時/詩)
김지윤
1.
‘내일’은 아름다우면서도 불우한 이름이다. 우리는 다가올 미지의 하루를 내일(來日)이라고 부른다. 명일(明日)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그 단어는 나에게 그리 와 닿지 않는다. ‘밝을 명’자를 쓰고 있어서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긍정적인 희망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내일’은 과연 희망을 품은 단어일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배우 스칼렛 오하라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는 명대사를 남겼고 뮤지컬 <애니>에서 주인공은 유명 넘버인 “Tomorrow”에서 “내일의 태양이 뜨면 너는 그걸 잡으면 돼”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내일의 태양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불확실한 기대를 바탕으로 자라난 확신 없는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삶의 무게에 끔찍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또다시 새롭게 도달해 있는 하루는 짐이거나 족쇄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내일’은 어떠할까. 밤에 쓰는 글은 스스로에게 실제보다 더 과대평가되곤 한다. 간밤엔 걸작을 쓴 것 같이 느껴지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깊은 실망감을 느끼며 삭제해버린 문장들에게 새로운 다음 날의 아침은 밤보다 더 어두운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시작하고 끝내고, 다시 시작하면서 남은 날들을 깎아먹고 살아간다. 지금 나는 이 글의 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고, 수많은 문장들로 채우고 결국 마지막 마침표와 함께 글의 문을 닫을 때까지 천천히 걸어갈 것이다. 긴 것 같기도 하고, 짧은 것 같기도 하지만 문을 닫고 나갈 때는 마치 새벽을 맞은 하나의 날이 긴 밤에 들어서기까지의 여정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루를 끝내면 다시 하루가 오고, 하나의 글을 끝맺으면 다시 백지가 눈앞에 놓여진다. 계속되는 미지의 하루가 아침마다 당도한다는 것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불확실함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확실히 알 수 없는 것들은 두렵다. 우리는 일기예보로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듯 ‘내일’을 미리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일기예보만큼의 정확성을 가진 예측도구가 삶에서는 전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못 봄, 겨우 가을, 여름 아님 가을, 일기예보를 미처, 못 봄 안 봄, 가을 아직, 겨울 아님 가을, 옷을 얇게, 입고 나와 가는, 가을 산에, 오늘 오를, 여름 아님 가을, 쌀쌀, 벌써 혹은 겨우, 11월 가을, 겨울 아님 가을, 윈터 아님 오텀, 부드럽게는 어럼, 얼음 아님 어럼, n은 묵음이야 어럼, 얼음 정돈 아님, 추움 정돈 아님, 썰렁 혹은 쌀쌀, 날씨 쌀쌀 가을, 미국식으론 폴, 낙엽이 폴폴, 눈은 아직 안, 폴폴 아직, 아님 겨울, 겨우겨우 가을, 가을 쉽게 갈, 가을 금방 갈, 가을 떨어질, 가을 사라질, 가을 산에, 오름 높음, 겨우 10분, 오르고 힘듦, 숨참 벅참, 아이 참, 길을 잃음, 겨우 10분, 만에 정신 놓음, 죽은 나무에 앉음, 죽은 사람, 말을 들음, 만에 하나, 설마 하여 얼굴은, 못 봄 안 봄, 길을 잃은 죽은, 사람 아님 귀신, 얼굴 아님 얼음, 얼음 아님 어럼, 귀신은 묵음이야, 들을 수 없음, 볼 수 없음 얼음, 얼음 아님 어럼, 겨우 겨우 가을, 가까스로 일어날, 정신 차려 집에 갈, 아직 겨울 아님 가을, 가을 아직 안 감, 나는 집에 못 감, 겨울 아직 안 옴, 봄 아직 안 옴, 나는 아무것도 못 봄, 안 봄 귀신, 미안 너는 여기, 잘 있어 혹은 잘 지내, 썰렁 혹은 쌀쌀, 옷 따뜻하게 껴, 입고 울지 말고, 너는 여기, 나는 다시 집으로, 다시 절대 못 봄 죽은, 사람 묵음 귀신, 가을 사라질, 다시 못 오를, 산에 가을, 매일매일, 힘에 겨울, 가을 여름, 다시 봄, 아니 절대, 못 봄 다시, 겨울 나는,
-주민현, 「봄, 겨울, 나는」, 파란, 2021 겨울호
이 시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심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계속 반복되는 쉼표는 우리가 끝없이 분절된 시간 속에서 무수히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맞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계절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오고 가지만, 그 안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변동성을 만든다. 시인이 일기예보를 ‘미처 못 봄 안 봄’이라고 쓰고 있듯, 존재하는 여러 예측의 근거조차도 우리는 놓치고 마는 경우가 많고, 삶에 존재하는 여러 예측 근거들이라는 것들도 일기예보만큼의 정확성을 기대할 수 없기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랑과 죽음, 파탄과 행운 등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사고처럼 닥쳐올 때가 많고, 우리는 그 안에서 닥쳐오는 일들을 겪어낼 뿐이다. “오르고 힘듦, 숨참 벅참, 아이 참, 길을 잃음, 겨우 10분, 만에 정신 놓음”과 같은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언어들은 우리 삶의 흐름과 비슷하다. 이 시에서는 평서문의 대표적 종결 어미인 '-다' 로 끝나는 문장 대신 거의 대부분을 '-ㅁ', '-음'과 같은 어미로 끝내고 있다. 이 무수한 명사형 어미들은 결국 이 수많은 사건과 행동들은 명사로 치환시킨다. 주어와 술어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생략된 말들이 마치 분절된 메모들처럼 쏟아진다. 숨 가쁘게 나열되는 명사들은 우리가 속해 있는 시간이 제대로 갖춘 문장을 허락할 정도의 여유를 주지 않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시간 속에서 내가 마주치는 사람은 “길을 잃은 죽은, 사람 아님 귀신, 얼굴 아님 얼음, 얼음 아님 어럼”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사람 묵음 귀신” 정도로 모호한 존재들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오지 않고, 절대 안 올 것만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일’이라는 시간은 결국 도래한다. 다만 “겨우 겨우” 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가 아닐 뿐이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그저 끝없이 산을 올라가고 내려가고, 또 다시 오르는 일과 비슷하다. 오르막을 겨우 넘으면 하루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그러면 “가까스로 일어날, 정신 차려 집에 갈” 것이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새로 올라갈 산등성이가 눈앞에 놓인다. 새로운 것 같지만 별로 새롭지 않은 내일이고, 익숙한 것 같지만 한없이 낯선 내일이다.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현실보다 훨씬 구성적이고 개연성이 높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플롯이나 기승전결이 없고, 이야기가 되기 위해 소설이 유지하는 내러티브처럼 안정적인 구조가 부재하는 경우가 많다. 삶의 사건들은 합리적 이유 없이 돌연 출몰하곤 하며, 사람의 감정과 행동은 많은 경우 제대로 해명되기 어렵다.
매일 새로 올라가야 하는 산등성이는 때로 벅차고 짐스럽다. “다시 못 오를, 산에 가을, 매일매일, 힘에 겨울” 뿐이다. 불가해한 삶 속에서 ‘오늘’은 끝없이 자취를 감춘다. 사라지고, 사라지고, 또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진다.
2.
세상 속에 던져져 오늘을 견디고 불확실한 내일을 기다리는 일은, 마치 어딘가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소음이 끝없이 들려오는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무언가 엄습해오고 있지만, 내가 멈출 수는 없고, 이유도 알 수 없이 불안을 느껴야만 한다.
시끄러,
너무 시끄럽다
귀를 틀어막게 되는 소리
굴착기가 아스팔트를 뚫는 것 같은데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붉은 라바콘이 줄지어 서 있고
야광 조끼를 입은 사람이 다급히 경광봉을 흔드는데
마스크를 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데
어디서 뭘 부수고 만드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뭘 만들고 부수는지
모르겠다
흙먼지가 날아와 눈을 감긴다
입을 막는다
탁한 비명이 새어 나오고
어디서
저 높은 위에서 아래로 사정없이 떨어진 사람이 있는 것도 같은데
돌아가시오,
태연한 표지판과
유모차를 미는 사람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중략)...
귓가에 맴도는 소리
집까지 좇아와
보란 듯 창문을 닫는 소리
조금은 음미할 수 있다 아 시끄러, 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는다
하릴없이 가슴 안 쪽을 더듬거리는데
아무 구멍도 잡히지 않는데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는 것은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믿는다
-박소란, 「공사 중」, 현대시, 2021. 12월호
이 시는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모를 소음에 시달리는 듯 불안하고 예측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귀를 틀어막게 되는 소리”는 아무리 귀를 닫으려고 해도 평온을 깨뜨리며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하니 그 마음은 점차 불길함과 불안함에 잠식된다.“붉은 라바콘이 줄지어 서 있고/ 야광 조끼를 입은 사람이 다급히 경광봉을 흔드는데/ 마스크를 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은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어디서 뭘 부수고 만드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뭘 만들고 부수는지”라고 시인은 중얼거린다. 한 존재가 부서지고 만들어지는 큰 사건이 지척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단지 그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고,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시적화자에게 ‘모름’은 무력감을 가져온다.
세상의 비극은 “흙먼지가 날아와 눈을 감긴다/ 입을 막는다/ 탁한 비명이 새어 나오고/ 어디서/ 저 높은 위에서 아래로 사정없이 떨어진 사람이 있는 것도 같은데” 와 같이 불분명하게 인식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유모차를 미는 사람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은 그저 무관심하게 자기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집까지 좇아와/ 보란 듯 창문을 닫는 소리”에 진저리치면서도 시적화자는 이 소리를 완전히 떨쳐버리기보다는 “아 시끄러, 하면서”도 “조금은 음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의 비극은 그에게 “귓가에 맴도는 소리”로 오랜 잔상을 남긴다. 그러나 “하릴없이 가슴 안 쪽을 더듬거리는데/ 아무 구멍도 잡히지 않는”다. 공유되지 않는 비극은 감지될 뿐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다. 파손되는 세상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갖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러한 소리를 듣는 것도 어디까지나 ‘세상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 돌아와 창문을 닫아버리고, 그렇게 불안을 은폐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시에 세상의 비극에 대한 예감도 지워버린다. 더 나아가 불안의 실체를 찾아 대면하고 그것과 맞서는 대신 “모르겠다/ 모르겠다”로 끝내버리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믿는다”는 구절이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시를 쓰는 사람은 창문을 닫지 않는다. 그는 대체 이 소음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답을 알 때까지 그 소리에 골몰한다. 불안은 그가 계속 글을 쓰게 하는 이유가 된다.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는데 나는 어쩌다/ 생계를 잃고 쑥을 뜯고 밤을 줍고 잣을 까고 은행을 모으며/ 밤나무의 밤은 향나무의 향은 어떻게 오는지 궁금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 저주받고 일어날 때 저주받으리라//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갈았다는데 나는 어쩌다/ 생계도 잃고 기꺼이 저주받더라도 생의 고통을 갈고 닦으며 우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지옥 속에 지옥을 사주하고 가난 속에 가난을 저주하는 자들은 누구인지 묻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안현미, 「생계」, 청색종이 . 2021 겨울호.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문을 닫을 것’이 권고된다. 글을 쓰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 생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세상의 비극에 천착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실용적’인 삶의 방식이란 세상보다는 ‘나’에 집중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세상의 비극보다 ‘나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계를 잃고 쑥을 뜯고 밤을 줍고 잣을 까고 은행을 모으”면서도 “밤나무의 밤은 향나무의 향은 어떻게 오는지 궁금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시적화자의 탄식은 저주로 이어진다. 창문을 닫지 않아 소음에 시달리는 일상이라면 저주라 부를 만 하다.
얼마든지 창문을 닫고 혼자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데도 창문을 굳이 열어놓고 세상의 아픔을 같이 앓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것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래서 시인은 묻는다. “나는 어쩌다/ 생계도 잃고 기꺼이 저주받더라도 생의 고통을 갈고 닦으며 우는 사람들은 누구”냐고. 그런 것을 끝없이 묻는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지옥 속에 지옥을 사주하고 가난 속에 가난을 저주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왜 스스로 소음의 지옥으로 걸어들어 가고, 가난을 저주하는 자가 되면서도 생계를 잃고, 생계를 잃어버린 이후에도 세상의 비밀과 근원을 궁금해 하는가.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 저주받고 일어날 때 저주받으리라”는 말은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했을 때 받은 파문 선언문의 일부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아 파문되었다. 시인은 규범적 일상으로부터 파문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저주하고 저주받는다. 시를 선택한 대가로 생계를 잃더라도, 치유될 수 없는 고독과 불안을 앓게 되더라도.
3.
물속의 잉어는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물을 벗어날 수 없다. 물 역시 보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이것은 삶에 대한 매우 적실한 통찰이다. 그러나 문학은 늘 경계 너머를 꿈꾼다. 운명에 갇히기보다는 운명을 넘어서려고 한다.
물을 벗어날 수 없고
물은 거침없이 흐르지만
보를 넘어갈 수 없네
물을 벗을 수 없는 잉어의 자유와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의 질주는
악보 안에서 평생을 사는 바이올린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반복을 연습하는 중
잉어는 평화롭고 물은 거침없고
바이올린은 느릿느릿 헤엄치다 격렬히 달려가고
나는 그 반복 속을 걷다가
새로운 해석에 또 실패한다
물을 벗어날 수 없는 잉어가 머릿속으로 헤엄쳐 오고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이 오후의 감정을 파랗게 적시고
악보 밖으로 나온 바이올린이 내 허밍을 연주해도
불가능한 것은 다 생각 안에만 있네
생각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잉어와 물은 음악처럼 흐르고
강이 얼면 흐르는 것에서 음악이 분리되고
멈춰버린 반복은 또 다른 반복으로 흐른다는 내 생각이
비로소 풍경이라는 불가능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때
나는 천변에 살지 않으면서
천변을 벗어날 수 없는 귀신이 되었네
이제 생각은 평화롭고 허밍은 거침없고
바이올린은 같은 곡을 연주하지만
다르게 듣는 귀가 생겼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고 잉어가 헤엄치는 천변을 걷는다
해석이 막 시작되었다
해석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꿔도 좋다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병철, 「허밍은 거침없이」, 애지 2021, 겨울호
시간은 사람을 길들인다. 야생이 아닌 길들여진 존재일수록 더 좁은 영역 속에 머물게 되기 마련이다. 어렸을 때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하다고 생각되었던 미래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폭이 좁아지게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결국 언제부터인가 사람은 삶의 선택지가 매우 단순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길을 잃는 일이 줄어드는 것이 더 현명해져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단지 갈림길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단촐한 일상의 길 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저 반복하며 산다. 심지어 그 단촐한 일상의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반복트랙처럼 왔다 갔다 하며 맴돌기를 선택한다. 그러면 절대로 길을 헤매지 않기 때문이다.
“물을 벗을 수 없는 잉어의 자유와/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의 질주는/ 악보 안에서 평생을 사는 바이올린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반복을 연습하는 중”이다. 이러한 반복 트랙 속의 삶이 어리석거나 허망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성실한 반복”이며, 그러한 반복들이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탱시켜주는 견고한 기둥들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끔 세상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기를 바란다. 또한 그 과정에서 굳건한 일상의 길이 무너지며 또 다른 갈림길이 갈라져 나오기를, 그래서 다른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詩)의 시(時)이다. "물을 벗어날 수 없는 잉어가 머릿속으로 헤엄쳐 오고/ 보를 넘을 수 없는 물이 오후의 감정을 파랗게 적시고/ 악보 밖으로 나온 바이올린이 내 허밍을 연주“하는 그런 시간이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함을 탐색하는 일이고, “불가능한 것은 다 생각 안에만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는 말처럼 불가능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시인이 된다. “잉어와 물은 음악처럼 흐르고/ 강이 얼면 흐르는 것에서 음악이 분리되고/ 멈춰버린 반복은 또 다른 반복으로 흐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풍경이라는 불가능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게 되고 바로 그러한 때에 그는 일상의 문법을 넘어선 시를 만나게 된다. “이제 생각은 평화롭고 허밍은 거침없고/ 바이올린은 같은 곡을 연주하지만/ 다르게 듣는 귀가 생겼다”고 시인은 쓴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고 잉어가 헤엄치는 천변을 걷는” 그에게 ‘천변’은 다른 세상이 열리는 공간이다. 시를 쓰는 이의 운명은 결국 이 천변에 있다.
다음의 시 또한 정해진 것들, 변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거스르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는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일은 영어 시험인데 시험 범위를 몰라서 교무실에 찾아갔다. 선생님이 구석에 숨어있다. 벌벌 떨면서, 우리의 질문을 두려워하면서. 우리는 영어선생님에게 시험 범위를 묻는다. 영어 선생님은 잘 모르겠다고,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래그래. 우리는 시험 범위를 모르는 선생님을 이해한다. 우리는 교실로 돌아와 말한다. 얘들아, 내일은 영어 시험이고 시험 범위는 선생님도 모른대. 이제부터 우리에게는 즐거운 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너무 많은 것을 해야 해서 잉여로운 우리는 파티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 사실이 오래오래 우리의 마음에 들었으면. 선생님이 들어오고, 우리는 알면서 묻고, 선생님은 난감하고, 학생들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고, 제어할 수 없이 나타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깊은 곳에 보관된, 먼 훗날 보도블록을 걷다가 철퍼덕 넘어졌을 때 떠오르는 시험 범위를 우리가 만들고 있다. 내일이 온다. 교사가 시험지를 나눠준다. 시험지와 조건 없는 대화를 시작한다.
-문보영, 「아무도 알아선 안된다」, 문학과사회, 2021 겨울호.
시험 범위는 매우 강력한 규범이다. 시험문제는 시험 범위를 넘어 설 수 없고, 학생들은 시험 기간 내내 그 범위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쉽고 단순한 규범일 수도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시는 ‘시험 범위 모름’에 대해 말한다. 이 시에서 시험 범위를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선생님조차도 모른다.
이런 시험이 어디 있어? 라고 묻고 싶다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사실 나이가 들고 나서 돌아보면 정해진 범위가 있는 학창시절 학교의 시험이 가장 간명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인생에 있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수많은 일들은 범위도 없거니와 시험 시간을 미리 예고해주는 경우조차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 알 뿐이다. 언제든 시험이 시작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 또 다른 시험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는 불안과 공포일 수 있지만, 시인은 시험 범위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즐겁다고 말한다. 이것은 즐거운 시간이며, “앞으로 너무 많은 것을 해야 해서 잉여로운 우리는 파티다”라고. 대비할 수도 없고, 미리 공부할 범위가 주어지는 학습지도 교과서도 없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라고 명랑하게 물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막막함이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다. “제어할 수 없이 나타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깊은 곳에 보관된, 먼 훗날 보도블록을 걷다가 철퍼덕 넘어졌을 때 떠오르는 시험 범위”를 우리가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시험 범위’의 고정관념은 깨어진다. 문학은 불확실성 속에서 반복적 일상을 깰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각자의 절실함으로 ‘범위’를 넘어서고 초과하며 새로운 윤곽을 만들어간다. 위 이병철의 시에서처럼 “멈춰버린 반복은 또 다른 반복으로 흐른다.” 범위는 새로운 범위로 대체된다. 범위를 없앨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최소한 계속 새로운 범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올 시간은 축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다가오는 시(詩)’는 명랑하게 춤추며 축복과 저주를 넘나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김지윤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시인 등단.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평론가 등단. 시집 수인반점왕선생으로 2012년 시와시학상 수상. <요즘비평포럼>을 공동 기획, 진행하고 있으며 요즘비평들(자음과모음, 2021)을 함께 썼다. 현재 숙명여대 연구교수 재직 중. 계간 청색종이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