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와 귀신의 정체
이튿날 정생의 집에 가 찾아니 없어 연 삼일을 찾았으나 출입하여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여랑의 그림자도 묘연하니, 자각정에 가서 찿고자 한들 신령과 접촉하기 어려우니 속수무책이라, 자나깨나 잊지를 못하고 식음이 점점 줄어들므로, 정사도 내외가 주효를 갖추어 한림을 맞아 환담을 나누며 술을 즐길새, 사도가 말하기를,
“양군이 요즈음 어찌하여 신광과 파리하뇨?”
한림이 대답하되,
“십삼군과 더불어 매일 술을 마셨더니, 아마도 그로 인한 탓인가 하나이다.”
정생이 득달같이 나타나기에 양한림이 흘켜보고서 말을 걸지 아니 하였더니 정생이 먼저 입을 열되,
“형이 근래에 벼슬살이에 골몰하여 심사가 불편한가, 혹은 고향 생각이 간절하여 병이 난 것인가? 어찌하여 그토록 용모가 파리하고 정신이 쓸쓸하오?”
마지 못하여 한림이 대답하기를,
“부평초 같은 사람이 어찌 그렇지 않겠소?”
사또가 이때 말을 꺼내니.
“우리 집 비복들이 말하기를, ‘양군이 어떠한 미인과 더불어 화원에서 어울려 놀더라’ 하니 이 말이 옳은고?”
한림이 얼른 대답하기를,
“화원이 외진 곳이라 혹 오가는 사람은 있으나 그런 일은 없사오니, 필경 말하는 자가 잘못 보았나 봅니다.”
정생이 말하되,
“도량이 넓은 형께서 어찌 여자와 상종함이 부끄럽다는 태도를 취하느뇨? 일전 형의 말이 거칠어 두진인은 물리쳤으나, 형의 기색을 보니 짐작이 가는지라, 소제가 형을 위해 두진인의 구신 쫒는 부적을 형의 머릿속에 감추어도 형이 대취하여 알지 못하기로, 소제가 그 밤에 동산 수림 속에 숨어 엿보았더니, 어떤 여귀가 형의 침방 밖에서 울며 하직하고 곧 사라지더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두진인의 말이 영검하고 소제의 정성이 극진한데 사례치 아니하고 도리어 노여움을 품고 있음은 어찌된 일이요?”
한림이 아무래도 감추기 어려운 줄을 알고, 사도를 향하여 사죄하되,
“소저의 일이 과연 해괴하오니 장인께 자세히 사뢰겠나이다..”
이에 이르러 전후 사실을 낱낱이 들어 아뢰고, 또 여쭙기를,
“십삼 형이 나를 위하는 줄 알겠으나, 그 여랑이 구신이라고 하되 기질이 씩씩하고 마음이 바르고 넓어서 요사스럽지 아니하고 결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요, 소저가 비록 잔망하고 용렬하오나, 그렇다고 귀신에게 홀맇 바 아니거늘 정형이 부적으로써 여랑의 출입을 끊으니 마음에 걸리는 바 없지 않나이다.”
사도가 박장대소하며 이르기를,
“양한림의 운치와 풍채가 옛날의 송옥과 흡사하니 선녀를 부르는 법이 없겠느뇨! 내 양생을 희롱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소시에 우연히 이인을 만나 귀신 부르는 법을 배웠으니, 이제 사위를 위하여 장여랑의 혼령을 불러들여 당장 사죄케하여 사위의 마음을 위로하고자하나, 그대의 생각을 모를 일이니, 의향이 어떠한고?”
한임이 대답하되,
“송옥이 비록 이부인의 혼을 불렀다 하나 그 법이 전해 오지 못한 지 오래되니 소저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겠나이다.”
정생이 말하기를,
“장여랑의 혼을 양형은 한 마디의 수고도 허비하지 아니하고 불렀고, 소제는 이를 또 한 조각 부적으로 쫒아냈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귀신을 어지간히 부릴 수 있을 터인데, 형은 무슨 의심을 두느뇨?”
사도 또한 이르기를,
“믿지 못하겠거든 이를 보라.”
하고는, 드디어 부채를 들어 병풍을 치며 부르되,
“장여랑이 어디 있느뇨?”
말을 마치자 홀연히 한 여인이 병풍 뒤로부터 나와 웃음을 머금고 온전한 몸으로 부인 뒤로 천연히 서기에 한림이 눈을 들어보니 분명한 장여랑인지라, 심신이 황홀하여 사도와 정십삼ㄹ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기를,
“이것이 진실로 사람이뇨, 귀신이뇨? 그렇지 아니하면 꿈이뇨, 생시뇨?”
사도와 부인은 슬며시 웃고, 정생은 허리를 잡고 웃으니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하였으며, 좌우의 시비들도 허리를 펴지 못하는지라, 사도가 말하되,
“이제야 사위를 위하여 그 경위를 말하리라. 이 아이는 신선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바로 내집에 있는 춘운이라는 아이로, 근래에 양한림이 화원별당에 홀로 있으므로 심히 적막하겠기에 내 이여자를 사위에게 보내어 객기의 무료함을 위로케 하였더니, 젊은 것들이 중간에서 속임수로 희롱하여 괴롭혔으니 어찌 우습지 않겠는고?”
정생이 바햐흐로 웃음을 그치고 이르기를,
“미인을 두 번이나 만난 것이 다 소제의 중매한 힘거늘, 그 은혜는 감사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수같이 여기니 형은 아마도 배은망덕한 사람인가 보오.”
또한 정생이 웃음을 참지 못하니 한림도 따라 웃으며 이르기를,
“장인이 보내시는 것을 중간에서 정형이 조롱했는데 무슨 은덕을 베풀었다하오?”
정생이 이에 대답하여 덧붙이되,
“조롱한 책망은 소제가 달갑게 듣겠지만, 그 계책을 꾸며 지시한 사람이 따로 있으니, 이 어찌 소제의 죄라 하리오?”
한림이 정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정형이 꾸미지 않았으면 뉘가 능히 이런 장난을 하였으리오?”
이에 정생이 대답하되,
“성인의 말씀에 너에게서 나간 자는 너에게로 돌아온다 하였으니, 형은 다시 생각해보오? 남자는 여자로 변하였거든, 하물며 속인이 신선도 되고 신선이 귀신도 됨이 어찌 그다지 괴이쩍다 하리오?”
이에 이르러 한림이 크게 깨다고 웃으며 사도를 향하여 여쭙되,
“옳소이다! 일찍이 소저에게 죄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소저가 필시 이를 잊지 아니함이로소이다.”
사도와 부인은 웃을 따름이요, 대답은 아니 하더라, 한림이 춘을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춘랑아 네 실로 영민하고 영리하도다! 그러나 사람을 섬기고자 하면서 먼저 그 삶을 속임이 부녀자의 도리라 하겠느뇨?”
춘운이 꿇어앉아 대답하되,
“첩은 다만 장군의 영만 들었을 뿐, 천자의 조서를 듣지 못하였나이다.”
한림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양왕은 무산의 선녀를 만났을 때, 아침에 구름이 되고 저녁에 비가 됨을 분별치 못했다 하더니, 이제 나는 춘랑이 신선도 되고 귀신도 됨을 분별 못하였는데 참사람이 참사람이 어찌 구름과 비로 더불어 의논하리오? 생각컨대 천변만화의 술법이 이로 말미암아 얻어지라라. 내 들으니 강한 장수에 약한 군사 없다 하는데 그의 비장이 이와 같으니, 그 대장은 천히 보지 아니하여도 족히 지략이 많음을 알겠도다!”
좌중이 한바탕 다 웃고 다시 주효를 내어와 종일토록 취할새, 춘운이 또한 새사람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가 밤이 이슥하여 촛불을 잡고 한림을 모셔 화원이 이르니, 한림이 취흥을 이기지 못하여 춘운의 손을 잡고 희롱하되,
“너는 참말로 선녀냐? 귀신이냐 내 선녀도 사랑하고 귀신도 사랑 하였거늘, 하물며 참 미인을 사랑치 못할소냐! 그러나 너로 하여금 신선도 되게 하고 귀신도 되게 한 사람이 월궁에 항아가 될꼬, 남악에 진인이 될꼬?”
춘운이 교태를 머금고 대답하되,
“천한 이 몸이 외람한 일을 저질러 기망한 죄가 많사오니, 엎드려 상공의 용서를 비나이다.”
한림이 이르기를,
“네 변화를 일으켜 귀신이 될 때도 꺼리지 않았거늘 이제 무엇을 허물로 삼으리오?”
춘운이 일어나서 한림께 사례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