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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동영상 가기 (영상: 황용운)
85주기 난징대학살 제주 추모, “알뜨르에 부는 바람- 무엇을 위한 평화대공원인가?”(관련 공지)가 12월 13일 화요일 오후 3시,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에서 열렸다.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약 50여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85주년 난징대학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관한 이 행사에는 강정마을해군기지반대주민회, 강정친구들, 강정평화네트워크, 개척자들, 대정농민회, 대정여성농민회, 비무장평화의섬제주를만드는사람들, 송악산개발반대대책위원회, 송악산을사랑하는사람들,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 제주제2공항성산읍반대대책위원회, 평화의바다를위한섬들의연대, 한살림쓸데어시공항짓지마랑, AOK(액션원코리아)한국이 함께 주최로 참여했다.
2014년 알뜨르 비행장에서 처음 시작한 난징대학살 희생자 제주 추모식은 1937년 12월 13일 일제의 난징 대학살과 대정 알뜨르에 세워진 일제 해군 항공대 비행장 및 군사시설들이 제주를 군사화하고 학살에 기여했음을 기억한다. 올해에는 특히 현재 대정 알뜨르 비행장 관련, 평화대공원 논의가 우려스런 관 주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주목하며 평화대공원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질문하였다. 추모제는 현재의 제주의 군사화를 돌아보며 제주가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섬이 되는 것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주관/주최측은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알뜨르평화대공원과 관련해 제주의 평화에 대해 질문하는 토론회 등이 논의되고 있음도 알렸다.
식순
15:00 행사 소개 및 묵념: 최성희 (사회자 보조: 이은정)
00:05 바숨 드림팀 공연
00:10 여는 인사: 김정임(송악산을사랑하는사람들)
00:15 함께하는 말: 에밀리 왕, 엄문희, Evyn Lê Espiritu Gandhi (에빈 래 에스피리투 간디), 고봉희(대정농민회)
00:30 국제 연대 메시지 낭독: 류복희(오키나와 연대 메시지)/ 김두생, 대정여성농민회장(일본/캐나다 연대 메시지)
00:40 헌화
00:50 강정평화합창단 공연
00:55 마무리 인사/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전 평화연구소 소장) 16:00 마무리
* 주최 단체들의 후원금과 개인 후원 및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상기 주최 단체들 외 개인 후원 및 도움: 김소영, 김종환, 김준영, 고권일, 동석, 수산, 이광희, 이성준, 이은정, 황용운
* 추모제를 함께 준비한 사람들: 김성우, 김정임, 류복희, 문영란, 박성인, 송강호, 엄문희, 최성희, 카야 뷔레이디, 황현진 (85주년 난징대학살을 기억하는 사람들)
* 뒷풀이: 요망진 밥상 (대정읍 상모리 287, 064-794-3331)
* 마무리 인사를 하시기로 한 조성윤 교수님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오시게 되어 작년 성명서 축약본 낭독으로 대체되었음을 알립니다.
http://www.seogwipo.tv/news/articleView.html?idxno=6603
<함께 하는 말: 에밀리 왕 발언>
전쟁을 끝내자는 마음으로 군사기지 폐지 운동을 하다가 사회구성원 사이의 관계 재설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 IW31에서 활동하게 된 에밀리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전쟁을 끝내자는 마음으로 난징대학살 추모식이 열린 알뜨르비행장에 찾아왔습니다.
전쟁을 끝내자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쟁은 가시화된 전쟁과 비가화된 전쟁을 다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가시화된 전쟁은, 우리와 그들이라고 쉽게 표현되는 서로 타자화된 집단이 서로를 집단적으로 소멸시키는 힘을 행사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이라고 타자화된 집단을 계층화된 질서의 하위계층에 귀속시켜 깎아내리고 소멸이나 비가시화를 시키는 힘을 행사해서 고정시키는 상태, 그런 계층화된 질서가 자리잡은 상태를 나는 휴전이라고 표현해보겠습니다. 휴전이란 것은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 사이에 분리되거나 계급적인 질서가 정리된 상태일 뿐이고 말하자면 전쟁이 비가시화된 것입니다. 비가시화된 전쟁은 더 교묘하게, 은밀하게 때로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사회적 통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일간의 문제로만 주로 알고있던 난징대학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알뜨르에서 날아간 폭격기의 공격도 가혹한 난징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강정에서 군사기지 건설이 강행되었던 2014년입니다.
군사기지 문제를 알게 되면서 무기력해지기만 하던 우리는 역사 속 전쟁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다시보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알뜨르비행장에서 추모식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을 마련하는 일을 통해, 우리 역시 이해관계자로 관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에 연결된 사람(관계자)이 많아지고 다양해지는 것만으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틀을 깰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우리가 관여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과,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타자들과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은 꼭 동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관계를 재설정하려면 우리가 타자와 맺는 관계가 어떻게 계층화되고 범주화되어왔는지에 대해 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전쟁을 끝내려면 이분법적으로 범주화된 집단을 그대로 남겨둔 채, 계층화시키는 제도를 함께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징대학살이 일어났을 때의 제주 역시 “일제”의 지배를 겪고 있었습니다. 계층화된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위계층에 귀속된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바로 죽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꾸려왔던 삶이, 그의 일상이 어느 정도 소멸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태는 식민지배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가시화된 전쟁속에 알뜨르비행장이 건축되었고 그 폭력은 가시화된 전쟁, 참혹한 학살까지 이어져갔습니다.
제주지역 구성원 가운데, 아팠던 몸들이 겪었던 폭력과 난징에서 며칠 사이에 몇십만 명의 몸이 사라진 폭력은 이어져있습니다. 가해자로 규정된 몸이라고 해도, 그가 폭력을 수행하는 마지막 노동에 투입되었을 때, 아마 자기 자신도 계층화된 질서가 자리를 잡고나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시대를 살았던 몸 안에는 가시화되거나 비가시화된 전쟁터가 들어가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비양민으로 규정되었던 몸, 군사기지 건설 저항과정에서 사라져갔던 비국민의 몸, 사라져갔던 국민이지만 비양민으로 추락되었던 몸, 또는 사라져갔던 비인간생명체의 몸이 겪던 폭력들.. 이 자리에 모인 많은 존재들에게 이 폭력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아프게 느껴질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몸이 전쟁터가 된 경험이 일상이 될 때 어떤 느낌인지 우리 역시 그렇게 멀리 있는 이야기로 이해하지는 않는다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엄한 몸으로 살 수 있어야 하지만 계층화된 관계속 에서 각각 범주화되기도 하고, 계층 안 어딘가로 자리를 지정당하기도 하는 몸들입니다.
무기판매와 군사동맹을 통해서, 사실상 돈을 벌기 위해 예멘전쟁에 참전했을 것이 분명한 한국이라는 국민 국가가, 저 먼 전쟁터에서 도망쳐 우리곁에 와있는 비국민인 예멘 난민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이 국가는 난민심사라는 제도로 다시 그들의 몸 안에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말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제 밤까지 3살 미등록 비국민 어린이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 어린이의 보호자들이 일터에서 단속 당했기 때문에, 한명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 있는 구금실에 구금되었고 한명은 단속과정에서 도망쳤습니다. 이 와중에 어린이집에 있는 3살 무국적 어린이가 갑자기 방치당했고, 불법으로 규정된 그 어린이의 몸 역시 전쟁터가 되어버렸습니다. 구금실에서 추방을 대기하는 몸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체류자로 추락한 나의 몸도 역시 전쟁터입니다. 어제 구금실에서 간절하게 나오고 싶었을테지만, 추방될 때까지 이 사회에서 삭제당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할거라고 절망했던 이들의 몸에서 벌어진 것은 어찌보면 비가시화된 학살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제 내가 본 것이 비가시화된 학살이라면, 착취당하기 위해, 죽기 위해 고기가 될 운명을 앞둔 생명들이 경험한 것도 역시 학살이 아닐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국민, 비인간 등 어떤 존재들을 그렇게 집단적으로 밀어내고 배제하고 삭제해도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언제나 끔찍한 폭력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전쟁을 끝내자는 마음으로 학살을 당한 모든 존재들을 떠올리며 애도합니다.
<함께 하는 말: Evyn Lê Espiritu Gandhi (에빈 래 에스피리투 간디) 발언>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이름은 에빈 래 에스피리투 간디 Evyn Lê Espiritu Gandhi입니다. 저는 가브리엘리노/ 통바 민족의 전통적인 고향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이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저를 초대해 몇 마디 말을 하게 해준 카야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군사주의의 역사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평화 운동은 연결되어 서로 다른 맥락과 투쟁에 걸쳐 연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 알뜨르 비행장에 모여 1937년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에서 살해되고 강간당한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일본 제국의 한반도 점령, 특히 제주 점령, 그리고 강제 이주와 강제 노동을 겪어야 했던 코리아인들을 인정합니다. 현재 한국 공군이 소유하기 전에 일본제국해군항공대, 후에는 미공군이 사용했던 이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코리아 사람들에 대한 강제노역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주 사람들은 이러한 군사력의 제국적 네트워크를 통해 난징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주 땅에 대한 수탈은 침략과 학살에 이르는 일본의 상하이와 난징 폭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주에서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의 평화를 위한 투쟁 입니다.
저는 초국가적 비무장화 투쟁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다른 군사적, 제국적 연결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저는 동남아 미국 군대 개입으로 이주하게 된 필리핀 이민자들과 베트남 난민들의 딸로 미국에서 이 곳으로 왔습니다. 먼저 1899-1902년의 필리핀-미국 전쟁 이후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고, 그 다음 미국이 1960-70년대 베트남의 탈식민지 내전에 개입했습니다. 한국도 이 투쟁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강압적 요청에 따라 베트콩과 싸우기 위해 325,000명의 군인을 베트남에 파견했습니다. 그 결과 1968년 악명 높은 하미 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죽음과 파괴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서울에 본부를 둔 한베평화재단과 같은 단체들은 베트남에서 한국 전쟁 범죄로 희생된 베트남인들에 대한 배상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이곳 제주의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와 같은 단체들은 4·3제주학살과 베트남 하미 학살을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결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멀지 않은 미국 영토이자 군사 거점이자 차모로족의 고향인 괌도 베트남에 대한 미군의 폭격과 전쟁 후 실향된 베트남 난민의 처리 및 재정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와 할머니는 사이공을 탈출한 후 내가 자란 남부 캘리포니아에 재정착하기 전에 10일 동안 괌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오늘날 괌의 비무장화 활동가들은 오키나와에서 괌으로 파견된 수천 명의 추가 미 해병대의 군사력 증강에 맞서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오키나와의 젠더화된 군사 폭력에 대한 지역 시위는 오키나와를 부분적으로 비무장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미군은 미군을 미국 영토인 괌에 파병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세계의 한 지역에서 비무장화 투쟁이 다른 지역을 희생시키면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군사주의의 역사는 난징, 제주, 일본, 오키나와, 베트남, 한국, 괌에 걸쳐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Good afternoon, everyone! My name is Evyn Lê Espiritu Gandhi, and I visiting here from Los Angeles, on the traditional homelands of the Gabrielino/Tongva peoples. Many thanks to Kaia for inviting me here today to say a few words.
Histories of militarism are connected, and therefore our peace activism must be connected, forging solidarities across different contexts and struggles. We are gathered here today at Alddreu Airfield to pay our respects to all those who were killed and raped in China during the Nanjing Massacre of 1937. In doing so, we acknowledge the Japanese imperial occupation of Korea broadly and Jeju specifically, and the displacement and forced labor of the Korean people to make way for this airfield, which was used by the Imperial Japanese Navy Air Service and later the United States Air Force, before its current ownership by the Korean Air Force. The people of Jeju, therefore, are connected to the people of Nanjing, via these imperial networks of military power. The appropriation of Jeju land made possible the Japanese bombing of Shanghai and Nanjing in the lead up to the invasion and massacre. To resist militarism in Jeju, therefore, is to struggle for peace not only here, but elsewhere.
I want to share some other military and imperial connections, to further highlight the importance of a transnational demilitarization struggle. I come here from the United States as the daughter of Filipino immigrants and Vietnamese refugees, who were displaced by US military intervention in Southeast Asia: first the US colonization of the Philippines following the Philippine-American War of 1899-1902, and then the US intervention into the Vietnam’s civil war of decolonization in the 1960-70s. South Korea is also implicated in this struggle: at the United States’ behest, the Republic of Korea sent 325,000 soldiers to Vietnam to fight against the Viet Cong. Death and destruction resulted, including the infamous Hà My massacre of 1968. Today, organizations such as the Korea-Vietnam Peace Foundation based in Seoul are fighting for reparations for Vietnamese victims of Korean war crimes in Vietnam, and organizations such as the Saint Francis Peace Center here in Jeju are drawing connections between the April 3rd Jeju Massacre and the Hà My Massacre in Vietnam.
But the connections do not end there. Guam, the US territory and military stronghold not far from Jeju, and home of the Chamorro people, also played a key role in the US military bombing of Vietnam, as well as the processing and resettlement of displaced Vietnamese refugees after the war. My mother and grandmother, for example, were processed in Guam for 10 days after fleeing Saigon and before resettling in Southern California, where I grew up. Today, demilitarization activists in Guam are continuing to fight the military buildup of thousands of additional US Marines sent to Guam from Okinawa. Local protests against gendered military violence in Okinawa in the early 2000s were successful in partially demilitarizing Okinawa, but the US military responded by sending those troops to the US territory of Guam. This example teaches us an important lesson: demilitarization struggles in one part of the world cannot come at the expense of another place. As I said in the beginning of my comments, histories of militarism are connected, across Nanjing, Jeju, Japan, Okinawa, Vietnam, Korea, and Guam—and therefore our peace activism must be connected, building solidarities with demilitarization struggles across the region. Thank you.
< 연대 메시지>
(1) 난징대학살 85년, 희생자 추도: 오키나와에서 보내는 연대 메시지
오키나와한국민중연대(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운동을 통해 오키나와와 한국 민중의 연대를 도모하는 모임)
타카하시 토시오
12월 13일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도식에 대해 오키나와에서 연대 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오키나와는 올해, 평화와 인권을 바랬던 '조국 복귀'로부터 50년째라는 중요한 해를 맞았습니다.
1972년 복귀 기념식에서, 당시의 오키나와현지사는 "본토 복귀를 내용면에서 보면, 꼭 저희의 간절한 바람이 모두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또한 엄중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고,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현재도 그대로 오키나와의 현실을 본질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의 지옥에서 1972년까지의 미군 통치, 그리고 '시정권 반환' 이후도 구조적 차별 아래, 오키나와는 자기결정권을 빼앗기고, 또한 유독한 PFAS (과불화화합물) 오염으로 인해 생존권까지 빼앗기고 있습니다.
'1972년 반환'에 앞서, 일본과 미국 간에서 미군기지의 자유로운 사용과 핵무기 반입이 비밀리에 합의되어,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미군에서 일본 정부로 반환되었을 뿐, 오키나와에 자기결정권이 되돌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키나와에게, 과연 '복귀해야 할 조국'이었는가 하고, 새삼 되묻는 복귀 50년째라는 중요한 해였습니다.
동아시아에 군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일본과 미국의 군사 증강에 대하여, 심대한 희생을 동반했던 아시아 침략이라는 역사의 반성 위에 서서, 일본과 미국의 군사 증강에 맞서는 민중의 국제연대를 이어갑시다!
환경! 인권! 평화! 누치두 타카라(오키나와어: 생명이야말로 보물)!
2022년 12월 6일
(번역: 동석)
南京大虐殺85年、犠牲者追悼 沖縄からの連帯メッセージ
米軍基地に反対する運動をとおして沖縄と韓国の民衆連帯をめざす会
高 橋 年 男
12月10日のテジョンアルツール飛行場平和大公園事業に関する討論会、および、12月13日の南京大虐殺犠牲者追悼式に対して、沖縄から連帯のメッセージをお送りします。
沖縄は今年、平和と人権を希求した「祖国復帰」から50年の節目を迎えました。1972年の復帰記念式典で、当時の沖縄県知事は、「復帰の内容をみますと、必ずしも私どもの切なる願いがいれられたとは言えません。これからもなお厳しさは続き、新しい困難に直面するかもしれません」と述べました。
この言葉は、現在もそのまま沖縄の現実を本質において捉えています。1945年の沖縄戦の地獄から1972年までの米軍統治、そして「施政権返還」以降も構造的差別の下で、沖縄は自己決定権を奪われ、さらに有毒なPFAS汚染によって生存権まで奪われています。
「1972年返還」に先立って、日米間で米軍基地の自由使用と核兵器の持ち込みが秘密裏に交わされ、施政権が米軍から日本政府に返還されただけで、沖縄に自己決定権が戻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日本」という国は、沖縄にとって、果たして「復帰すべき祖国」であっただろうかと、改めて問い返す50年の節目でありました。
東アジアに軍事的緊張を呼びおこす日米の軍事増強に対して、甚大な犠牲を伴ったアジア侵略の歴史の反省に立ち、日米の軍事増強に立ち向かう民衆の国際連帯を!
環境!人権!平和!生命どぅ宝!
(2) 캐나다 밴쿠버에서 :제주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연대 메시지
올해 12월은 1937년 12월 초부터 1938년 3월 말까지 일본 제국군의 점령 하에 수십만 명의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군인, 민간인이 불법적이고 잔인하게 살해된 난징 대학살 8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여성과 소녀들은 강간당하고, 죽임 당했으며 집들은 약탈당하고, 불에 탔습니다.
85주년은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이며 우리 일본인들은 이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다시는 이러한 잔학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올해는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주류 언론들은 중국을 비난하는 수사만을 늘어놓고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중의 공포를 조장하고 소위 ”대만 비상사태”를 내세우며 류큐 열도와 일본 본토의 군사화에 박차를 가하고, 국가 GDP의 2%를 군사비로 지출하는 실질적인 NATO 회원국이 되기 위해 세금 인상과 전쟁 채권 발행으로 군사비 지출을 2배로 늘리려 합니다.
전쟁 준비와 역사 부정은 밀접하게 관련(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언론, 국민은 일본 기업은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계속 부인하고 있습니다. 내년 2023년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증오범죄 중 하나인 1923년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사건 또한 역사 부정 위험이 증가하고 있는 절대적인 역사(사건)입니다.
얼마전 일본 여배우 마키 요코가 일본 식민지 역사를 접하고 일본인인 것이 부끄럽다고 한 발언이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 였습니다. 일본 정부와 대다수 국민들이 지금처럼 행동하는 한, 유감스럽지만 저도 마키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지금보다는 더 많은 일본인들이 역사를 직시하고 한국과 중국에 사는 이웃 국민들과 전쟁이 아닌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뜨르 비행장을 평화공원으로 만들 것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 계획이 일제의 난징 폭격에 사용된 발사대였던 알뜨르 비행장의 역사를 잘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 일본, 중국,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에 대해 그리고 12월 13일에 제주도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 역사를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라겠습니다. 언젠가 그곳에서 함께하기를 마음 깊이 기원하며, 또 다시 여러분의 추모식에 제가 참여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징대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사랑과 연대를 담아 제주도의 친구들에게
Satoko Oka Norimatsu 乗松聡子(노리마츠 사토코)
평화 철학 센터 대표, 캐나다 밴쿠버
2022 년 11월 29일 (번역: 수산)
A Solidarity Message to my friends in Jeju
This December marks the 85th anniversary of the Nanjing Massacre, in which hundreds of thousands of Chinese POWs, unarmed soldiers, and civilians were unlawfully and brutally massacred, for weeks and months from the beginning of December 1937 till around the end of March 1938 under the occupation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Women and girls were raped, then killed, and houses were looted, and put on fire.
The 85th anniversary is another significant landmark and we Japanese must take this history to heart, and renew our pledge never to allow such atrocities to happen again. This year also marks the 50th anniversary of the normalization of China-Japan diplomatic relations in 1972. In Japan, however, there is ever-increasing China-bashing rhetoric across the government’s narratives and the mainstream media.
The Japanese government, taking advantage of the fear-mongering among the public arising from the war in Ukraine and the rhetoric over the so-called “Taiwan Emergency,” accelerates the militarization of the Ryukyu Island Chain and the mainland of Japan, and plans to double its military spending by increasing taxes and issuing war bonds, to be a de-facto NATO member contributing 2% of the nation’s GDP to the military.
The war preparation and history denial go hand in hand. The Japanese government, the media, and the public by large refuse to accept the Korean Supreme Court’s ruling that Japanese corporations must pay reparations to the victims of forced labour, and continue to deny their responsibility for the wartime military sex slavery. Next year, 2023, will mark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massacre of thousands of Koreans in the aftermath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of 1923, one of the worst hate crimes of human history. This is another undebatable history which is under an increasing threat of public denial.
The other day, Japanese actress Maki Yoko’s comment that she was ashamed to be Japanese when she learned about her country’s colonial history, came under fire among Japanese netizens. Unfortunately, I feel the same way as Maki did, as long as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majority of the public act the way they do now. At the same time, I feel we need to do more to mobilize and activate the not many but not few Japanese who squarely face history and build friendship, not war, with Korean and Chinese neighbours,
I heard that there is a plan to turn Alddreu into a peace park. I am hoping that the project will facilitate the preservation of the history of Alddreu Airfield, that it was Imperial Japan’s launchpad in their air attacks against Nanjing. I hope more people in Korea, Japan, China, and the world, will know this history and particularly the fact that people of Jeju-do gather on December 13 to remember the history. I so wish to be there in person and one day I will. Thank you for allowing me to be part of your memorial again.
In memory of the victims of the Nanjing Massacre, and with love and solidarity with friends of Jeju-do,
Satoko Oka Norimatsu 乗松聡子(노리마츠 사토코)
Director, Peace Philosophy Centre
Vancouver, BC, Canada
Written on November 29, 2022
2022年12月6日
<사진첩>
(아래 사진: 김종환)
(아래 사진: 들소)
(아래 사진: 박성인)
(강정, 도정, 대정에 걸린 현수막들)
첫댓글 전쟁학살 추모유적지 국가공원화에 반대합니다. 난개발뿐만아니라 원래 추모정신이 훼손됩니다. 망월도 구묘역이 국가묘역이 아니었지만 극우세력의 집권기 민중운동 희생자들이 묻히는 민주화묘역으로 역할을 한 것이 5.18특별법이 통과되어 국립묘역으로 승격한 이후보다 더 민중에게 친근하였습니다. 방문객은 별로 안되었지만 노동운동가나 지하운동가들이 극우 파시즘에 맞서서 죽은 망자와 소회를 나누고 의문사 산재사망사 하는 동지들의 유해와 안식처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어서 우리 가슴에 영원한 성지였습니다. 망월묘지의 국립묘지화도 이럴진대 전쟁학살 추모유적지의 공원화는 원래의 뜻을 꺾어버리고 전시행정의 표본이 될 수 있으며 비조직 근로자로부터 지지를 얻기가 힘듭니다. 또한 전남에서 일제시대 비행장 후보지에 알뜨르처럼 콘크리트 격납고가 밭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이를 기화호 공항입지를 연구하고 발굴하더니만 10여만에 목포공항을 옮기겠다고 무안 황토고구마밭 한밭에 있는 격납고 건물로 방송광고에 10여년 동안 보여주면서 일제가 남기고간 비행장 유적지라며 언론에서 친일이데올로기로 공영광고식으로 도배를 하더니만 목포공항은 폐부지로 놔두고 무안국제공항을 짓고 농지를 침범하여 공항지구를 만들었습
니다. 결론은 코로나시기 적자국제공항이 되었고 농촌에서 부족한 일손에 손을 보태겠다고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불러들이는 인력수입공항으로 변질되었고 광주광역시가 민주화의 도시에 힘입어 산업화 도시로 발전하자 도시확장에 따른 군공항의 필요성이 격감하여 송정리 공항이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되자 군공항만을 떼어내서 무안국제공항에 이전시키겠다는 말도 안되는 농촌파괴 계획에 따라 무안국제공항을 노동력수입공항과 군공항의 기능을 복합화하면서 무안이라는 농촌이 사라지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무안산 황토양파가 지명도가 떨어지고 무안군민이 자연소멸되는 싯점에서 농촌공동체 부양계획을 세우지 않고 무안을 어떻게 인근 항구도시 목포처럼 공업화 산업화해서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더 확장할까 궁리를 하고 개발족들이 난개발을 넘어 지역토호로 천년왕국을 만들기 위해 군부대 후보지를 확장 눈독을 들이고 있으며 전라남도 서부권은 군사공항이외에도 비행기관련 전투기 부품공장까지 게획하고 있어 한국의 농업중심도읍지가 제국주의 군수공장으로 변하고 있어 현재의 민중운동이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민운도이 대응책을 만들 수 있는 정도로 조직화가 안되었고 노동자운동이 미발전 상태에서 군사화는 안
됩니다.. 태평양전쟁시기 유물은 추모의 목적으로라도 공원화는 국가의 포로가 되는 개발주의 토건제국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기에 망월동 구묘역처럼 정기적인 시민추모 모임을 개회하는 장소로 여기고 그 외형을 보존하고 설사 농촌으로 둘러싸여 있더라도 학문적인 작업이외의 예산투하나 과잉 공원화는 그 정신과 맞지 않기에 원형유지가 최선이고 이것이 노동운동에게 어필할 수 있는 최고의 추모유적지 보존방안입니다. 평화공원이란 말그대로 당시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체험하는 유적지 답사활동을 도와주는 것이기에 이 유적지의 발생과 당시의 상황을 안내하고 관련 사망자를 찾아내고 그 유족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생계를 이어갈 방도를 찾아주는 등으로 사회운동의 주된 대상으로 자리매김해야지 평화공원이나 국립추모공원은 잘 맞지 않으면 제주 4.3유적과 백인묘지? 등은 그것이 허허벌판에 있더라도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변함이 없으며 농촌사회주의 문제와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단지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 지역을 넘고 전국으로 확대되고 이웃 일본 중국 들의 피해자와 그 후손들이 찾아올 수 있는 역사콘텐츠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추모하는 청소년세대와 청년세대가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못된 세력들이 접근하여 유적지만 훼손하지 않고 그 유적지의 존재를 조례등으로 영역을 보호하고 있기만 하면 추모는 평화공원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쟁!! (참고로 무안 망운면 태평양전쟁 비행장 격납고 유적지는 망운 국제공항이 생겨나면서 영원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버려서 더이상 전라남도에서 반제국주의 유적지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평화공원화는 학살반대 전쟁반대 세력에게 트로이의 목마이거나 야생동물 덫입니다. 평화공원화 반대합니다)전쟁반대 생태환경 등의 시민운동은 소속된 후원자들의 직업과 대상이 다를뿐 농민운동과 동일합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전쟁반대 평화쟁취 태평양전쟁 유적지 원형보존 그리고 농촌주민들의 문화유산화입니다. 농민과 농사가 평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