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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CHRISTMAS!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어두운 세상에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마음과 뜻을 다해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하늘의 평화와 복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 왕국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왕이 서로 동맹을 맺고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그들에게 보내 남 유다의 정권을 바꾸려는 르신과 베가의 악한 의도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온 세상의 경계를 당신의 뜻대로 정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람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다메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람 왕 르신의 통치 영역을 오직 다메섹으로 제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무지 용납하실 수 없는,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거기다 이 사건이 벌어진 시점은 남 유다의 아하스 왕 2년 곧 B. C. 734년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이 불과 십여 년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실제로 북 이스라엘은 B. C. 722년에 멸망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B. C. 669년부터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Ashurbanipal)이 시행한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많은 이방인들이 이주해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혼혈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윗의 집 곧 남 유다를 결코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사야를 통해 선포하신 내용을 그대로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르신과 베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장 위세를 떨치고 있던 앗수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자신들을 돕겠다고 자청하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도움을 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징조가 있다면 구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징조”(오트 : oth)는 “신호, 깃발, 전조” 등의 뜻으로,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취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니라”(사38:8),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사8:3a)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징조는 때로 이적으로, 때로는 미래 사건들을 충분히 지각(知覺)할 수 있는 상징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불신앙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고 신뢰할 수 있도록 얼마든지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기회를 주시며 앗수르로부터 돌아서라고 촉구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세를 위해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옷 속에 넣었던 그의 손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퍼다 부은 나일강 물이 피가 되게 하셨습니다. 역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기드온을 위해서도 세 번씩이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위하여 징조를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묻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징조를 구해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사7:12)라고 외쳤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6:16b)는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그럴 듯하게 포장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다는 완고함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은 것이 아니라, 믿지 않았습니다. 이미 앗수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사7:13b)라는 책망을 듣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또 쉬운 성경은 “다윗의 자손 아하스여! 잘 들으십시오. 왕은 백성의 참을성을 시험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인내심까지 시험하십니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의 협공을 받은 그는 언제든지 돕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 전투에 나설 병사들을 모았습니다. 군량미를 비축했습니다. 그 몫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그는 괴로움을 당하는 백성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도무지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이번에는 도와주시겠다고 자청하신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당장 믿고 의지할 힘이 될 것 같고, 손을 뻗치기만 하면 도와 줄 수 있을 것 같은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일을 가벼이 여겼을 뿐 아니라,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까지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때에도 다윗의 왕국을 영원히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孕胎)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b)고 선포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외면함으로 위기를 자초한 유다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 그가 믿을 수밖에 없도록 표적을 주시겠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얼마 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유다의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B. C. 732년)과 살만에셀 5세(B. C. 722년)의 침공을 받아 황폐하게 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 역시 소멸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침략 행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거센 파도가 되어 남 유다를 덮쳤습니다. 결국 아하스가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지키려고 했던 다윗의 왕국도 B. C. 586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 유다는 역사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해 주신대로 약 70여 년이 지난 후,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당신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던 인류를 구원하고 참된 평화를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임마누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환난과 시험을 당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당신의 현존과 장차 인간의 몸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함께 함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안자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뱃머리에 앉아 풍경을 즐기던 그의 눈에 사공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사공의 표정은 그지없이 편안해 보였고, 노를 젓는 솜씨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사공에게 “저도 배를 젓는 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공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연습만 하면 곧 배울 수 있고, 잠수를 잘하는 사람은 배를 본 적이 없어도 바로 저을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다시 이유를 묻자 사공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공자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물에 빠지는 것을 겁내지 않기 때문이고, 또 잠수에 능한 사람은 배가 뒤집히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배 젓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배를 잘 저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또 계속해서 “내기를 하는 경우에도 이와 같아서 기왓장 하나를 걸고 내기를 하면 기가 막히게 잘하는 사람이 그보다 조금 더 값진 물건을 걸고 내기를 하면 기가 죽고, 황금을 걸고 내기를 하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사람의 기술은 언제나 같지만 마음을 물건에 빼앗기면 행동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지.”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부터 다른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바른 판단을 할 수도, 행동을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좋아 보이는 육신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더 좋고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놓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환난과 시험을 당하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돕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셨습니까? 아니면 당장 도움을 줄 것 같은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긴 채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외면하셨습니까? 우리의 유일한 도움은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믿고 의지하기로 결정하십시오. 어떤 환경과 상황과 물질적인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당장 좋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좋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할 뿐 아니라, 환난과 시험의 때마다 임마누엘 하심으로 자신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까지도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은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6-7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정사(政事)를 어깨에 매셨습니다. 온 우주를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또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지혜이십니다. 그래서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이십니다. 또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 곧 전능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당신이 다스리시는 나라 안에 평강을 유지하시고, 명령함으로 평강을 지으시는 왕이십니다. 우리의 참된 평안이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굳게 세우시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보존하시는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은 확대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증가할 것이며, 세상에서 더욱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빌2:6-8)고 소개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고 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할 빛이십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낮아진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지극히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냄새나는 짐승의 밥통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높이기 위하여 누구도 원치 않는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충만케 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오셨습니다. 당신에게 속한 것들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통째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두움을 쫓아내셨습니다. 1-2절입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변방에 위치해 있었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주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들보다 훨씬 더 이방적인 색채가 짙었습니다. 거기다 주변 지역은 최근에 자행된 앗수르 군대의 침략으로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정치와 문화와 인종적인 요인들로 인해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두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새날이 밝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4:13),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4: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실 큰 빛이십니다. 참된 빛이십니다. 의의 태양이십니다.
그 빛은 가장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부터 비취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갈릴리에서 첫 번째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 해변가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본 절에는 비록 “흑암과 고통”이라는 단어가 연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의미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참 빛이 그곳에서부터 비추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흑암이 걷힘과 동시에 슬픔과 재난 등 총체적인 불행이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임박한 어두움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인 그들을 멸망으로까지는 이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에는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태양 빛이 잠시동안만 사라진다 할지라도 우리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빛, 영원한 빛, 유일한 빛 자체이십니다. 모든 빛의 근원이십니다. 어두움과 무지와 무질서와 혼돈과 죽음을 몰아내시는 참 빛이십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이십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백성들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큰 빛이십니다.
어두움 자체였던 우리를 빛이 되게 하시는 참 빛이십니다. 죄와 죽음과 저주로 인해 고통받던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창조하는 빛이십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36:9)라는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한 빛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2009년 한 해를 사는 동안 언제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임마누엘 하셔서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고 의지했습니까? 깊은 죄와 어두움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주저하고 있던 여호수아를 향해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형통한”(짜레아흐 : tsawlay'akh)은 “유익하다, 번영하다, 성공하다” 등의 뜻으로, 요셉이 하는 일들이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좋아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와 함께 하는 어떤 신적인 축복과 가호(加護)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이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특별한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3대 족장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약속을 이루어 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한순간도 빠짐없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주십니다.
형통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환난과 시험을 만났다할지라도, 그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은 무엇인가에 현혹(眩惑)되지 마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요10:10b) 위하여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만 더욱 더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신실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언제나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삶의 모든 문제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3-5절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여기서 “나라”(고이 : go'ee)는 “이교도, 이방인, 나라, 백성” 등의 뜻으로, 본 절에서는 “백성들”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표준 새 번역 개정판이 본 절을 “하나님, 주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라고 번역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 하였도다”(사66:8)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 스가랴 역시 “온 땅이 아라바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슥14:10-11)라고 외쳤습니다. 땅은 자연 법칙에 따라 적당한 시간이 지나야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싹이 나고 꽃이 핍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이삭으로 자라고, 또 시간이 흘러야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세상의 발전 속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완성된 문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70여명이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후손은 불과 430여 년만에 장정만 60만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22:17)는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원하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자연의 원리까지도 초월하실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훼파 되었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시인은 슬픔이 꿈처럼 사라진 그때의 기쁨을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126:1)라고 노래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따르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기쁨이로다! 기쁨이로다! 기쁨이로다! 그때로부터 수많은 근심에서, 영혼의 낙담에서, 비참한 타락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꿈인가? 만일 꿈이라면 계속 잠을 자고 깨지 말아야지.”라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수와 거룩한 즐거움이 증가하는 것은 모두 메시아 시대를 특징짓는 주도적인 현상들입니다. 한편,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다룰 때 사용되는 도구들입니다. 특히 “멍에와 압제자”는 우리로 하여금 애굽에서의 속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애굽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속박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모든 해방 사건은 애굽에서의 구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기드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디안으로부터 구원한 날을 강조한 이유는, 300명이라는 지극히 작은 군사로 많은 대적을 물리친 것만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건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주석가들은 “갑옷”을 “군화”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화와 군복이 불에 태워진다는 것은 전쟁에서의 패배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전쟁 자체의 소멸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수를 하늘의 별과 바닷가 모래알처럼 창성케 하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창성케 하십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땅의 소산을 추수할 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 위험한 전투를 마치고 탈취물을 나눌 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 끊임없이 다가와 유혹하는 죄와 저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전쟁 자체를 소멸시키십니다. 당신 안에 충만한 참된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당신 자체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2009년 한 해 동안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승리와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에게만 마음을 빼앗긴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은 채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주인 곧 왕은 누구입니까?
결론 광염 조도식 목사는 “빼앗긴 마음 성(城)”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장수가 성을 빼앗기면
죽고 싶도록 가혹한 치욕이려니
마음 성(城) 무너져
깊숙이 파고든
당신의 얼 때문에
흰 깃발 펄럭이어야 하는
속박된 심상(心想)
마음을 잃었으니
통곡을 해야 마땅하거늘
속된 연모로
가슴 알이 하는 철부지 작태(作態)
거룩한 영으로
마음을 채워야지
신령한 영으로
신령한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빼앗긴 마음 성 가장자리에
승리의 깃발
희락(喜樂)의 깃발
축복의 깃발이 휘날리게 하소서.
한 목동은 베들레헴에 나신 아기 예수를 뵈러 가기 위해 계란을 준비했습니다. 다른 목동은 빵과 치즈를 준비했습니다. 또 한 목동은 포도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목동은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빈손으로 아기 예수를 뵈러 갔습니다. 선물을 준비한 세 목동은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 그들은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목동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그를 찾던 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람을 막기 위해 쳐놓은 담요를 살짝 젖히고 구유가 있는 곳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로 그곳에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그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내내 그곳에 앉아 아기 예수를 향한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경배하며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라고 끊임없이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매혹 당했다”라는 뜻의 “앙샹떼”였습니다. 그는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미처 선물을 준비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베들레헴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아기 예수께 달려가 경배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009년 성탄 축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마음을 빼앗긴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혹된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육신의 것에 매혹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입니까?
2009년, 무엇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랑하는 백성들 안에 존재했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모든 절망과 갈등과 무기력과 상실감까지도 넉넉히 이기게 하셨습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승리와 평화 등 당신 안에 가득한 모든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참된 속죄도, 용서도, 구원도, 승리도, 평화도, 희망도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훅 불어버리시면 날아가 없어져 버릴 허상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은 예배, 기도, 찬송, 봉사 등은 공허한 몸짓에 불과합니다.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셔들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릴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가득한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