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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사야가 온다 I
1. 성서를 읽는다는 것
오늘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는 2,000여 년에 걸친 형성 과정을 거친 문서다. 유대인들에게는 <히브리 성서>요, 기독교인에게는 <구약성서>다. 기원후 90년경, 팔레스타인의 해안 도시 얌니아에서 유대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회의를 열어 유대교 경전인 <히브리 성서>에 포함될 문서를 확정했다. 이로써 오늘날의 <구약성서>가 확정되었다.
구약성서는 율법서와 성문서 그리고 예언서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율법서, 즉 모세오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작성된 문서들이라고 볼 수 있다. 모세오경은 <사마리아 오경>의 형태로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유다왕국이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상당히 완성된 문서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 오경>은 <히브리 성서>의 오경과 내용적인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유사하다. 이 차이는 <히브리 성서>의 모세오경이 포로기와 제2 성전기에도 적지 아니 수정 보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모세오경이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된 시기를 기원전 5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고레스 2세)이 기원전 538년 바벨론을 점령한 후, 세계 각국의 포로민들을 모두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키루스 칙령을 반포한다. 그로부터 9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기원전 444년경 율법 학자 에스라가 모세의 법전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으로 보면, 모세오경은 적어도 기원전 444년 이전에 완성된 형태를 갖췄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머지 문서, 즉 성문서와 예언서가 모두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창작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상당 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지만, 대체로 전해 내려오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했다. 서기관들은 유대 공동체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 자료와 단편적인 문서 자료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중동 문명 전체의 전승들을 고려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는 기원전 3,000년경까지 소급되는 인류의 정신성을 야훼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일정한 정도로 종합한 위대한 책이 되었다.
에스라가 귀환한 시기는 이미 포로 생활이 시작된 지 150년 정도 지난 시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에스라는 이민 4세대나 5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권위를 인정받는 율법학자라고 한다. 즉 바벨론으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일정하게 공동체로 존속하면서 조상들의 전승을 모으고 연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모세오경은 이 작업을 통해서 완성되었으며, 구약성서에 포함될 자료들 역시 대부분 이 시기에 수집되고 편집되는 한편 새롭게 작성되었던 것이다. 이 작업은 ‘과거를 기억하기’였으며, 이런 열정이 촉발된 계기는 공동체의 위기, 즉 국가의 몰락과 정신적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라는 트라우마의 경험이었다.
기원전 587년 남쪽 왕국 유다의 멸망은 유대민족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위기였으며, 이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 그들은 이 질문을 끌어안고 자신들에게 전해져 오는 전승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포로로 끌려간 왕실 예언자들과 성전이 존재하지 않아 더 이상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제사장들이 그 작업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율법 학자와 서기관이라는 새로운 사회 지도층으로 재편된다. 이처럼 공동체의 위기는 공동체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민족의 관점에서 국가가 있었던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 과거는 멸망으로 치달은 시간이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전승은 다른 전승들을 모으고 편집하는 기준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문서는 모세오경이다.
이처럼 오래된 문서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왜 읽어야 할까? 단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에 관한 증언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관한 증언이라는 의미가 결코 이 문서들이 신앙인들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에 관한 증언’이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경험과 그것에 관한 사유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삶은 어제의 일상이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지듯 단조로운 것일 수도 있지만, 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어떤 순간은 다른 시간과 구별되는 특별한 것으로 경험된다. 이 특별한 순간은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매우 신성한 체험과 깨달음의 순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순간을 어떻게 경험하느냐는 그가 어떤 인간인가를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우리는 이 순간을 단절의 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인간 또는 인간 공동체는 그 이전의 존재와 이후의 존재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어떤 태도는 주체를 비약, 성숙시키기도 하지만 또 다른 태도는 퇴행시킬 수도 있다. 인간과 인간 공동체의 시간은 이런 계기로 가득 차 있다. 인류가 시간을 날이나 달 그리고 해와 같이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계기들을 의식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우리는 하루가 끝나는 순간 일기를 적거나, 한 해가 새로 시작하는 순간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등 평범한 시간을 특별한 경험의 순간으로 체험하려 한다.
하지만 달력에 표시되는 시간보다 더 분명한 단절의 순간이 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위기, 심지어 파멸의 순간이다. 앞에서 구약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거기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기원전 587년에 유다왕국이 멸망한 순간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한 세계의 몰락이었고, 이 사건은 그 무너진 세계의 일부였던 그곳의 주민들에게는 자기 정체성의 붕괴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존재하던 세계와 그곳의 삶이 무너졌을 때, 그곳의 주민들은 혼란과 공포에 빠졌을 것이다. 더 이상 세계가 확실하지 않고 세계가 확실하지 않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구별하는 기준도 없는 것이다. 좀 더 개인적인 예를 들면 그 느낌이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오던 배우자가 사망한다면 어떨까? 사랑이 넘치는 관계가 아니었어도 상관없다. 나의 세계는 그와 함께 존재했으며, 나라는 존재는 그를 떼어놓고는 정확히 누구라고 말할 수 없었으며, 내가 미래를 상상할 때도 그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내 세계에서 사라졌다. 세계는 그대로 있는데 그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는 그와 함께 하는 세계와 더불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그와 함께 존재하던 나와 더불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그와 함께 했을 나의 미래까지 가지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는 세계에서 갑자기 퇴출되었다. 세계는 더 이상 나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다. 낯선 세계, 어디에 좌표를 두어야 할지 모르는 공간이 내 앞에 펼쳐진다. 이처럼 깊이 의지하던 존재의 상실은 우리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충격과 함께 다가온다. 이것이 대상 상실의 체험, 즉 트라우마적 체험이다.
오늘날과 달리 고대 세계에서 신은 매우 구체적으로 경험되는데, 그 이유는 고대세계가 신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화적 세계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세계에서 국가 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다. 전쟁의 승패는 신들의 승패로 이해된다. 유다 왕국의 멸망은 그 땅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삶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던 신의 패배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 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 역시 붕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대 세계에서 한 국가의 몰락은 신의 몰락이었으며, 그 신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공동체의 해체였다. 이렇게 숱한 민족들이 그들의 신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 공동체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강한 나라의 신은 더 위대하며 약한 나라의 신은 잡신이어서 사멸될 수밖에 없다는 강자의 논리,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의문은 강자를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 역시 이런 논리에 동의하면서 야훼를 섬겨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 야훼가 가장 강한 신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야훼를 모시는 성전이 있는 한 어느 누구도 그 도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주장이 왕실을 섬기는 예언자들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런 소리는 백성들의 귀에도 달착지근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기 전에도 이런 주장이 거짓이라고 외치는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도 사랑과 정의가 메마른 땅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너희의 장정은 칼에, 너희의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으리라.” [이사야 3:25~26]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 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7:3~4]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예레미야 9:11]
하지만 권력자들은 이들을 억압했고 백성들은 진실을 듣기 싫어했다. 그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되고 나서야 누가 옳았고 누가 거짓을 말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백성들이 듣기 싫어했던 진실을 전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성전에서 드리는 호사스러운 제사가 아니라 사랑과 공의를 실현하는 백성들의 삶이라고 설파했다. 포로기 공동체가 야훼를 더 위대한 신에게 패배한 잡신으로 여겨 절망하지 않고, 야훼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존재는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이 아니라 그곳 백성들의 삶을 역겨워하신 야훼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한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신 같이 작은 범주에 매인 분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와 같은 보편적인 이념의 실천을 통해서 체험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로 이해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한다. 이 기도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기를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일까? 강대국이 되게 해달라고? 부유한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이런 기도는 특정한 민족과 국가에 매인 잡신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 국가와 민족이 모든 국가와 민족이 사랑과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국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으려면, 나와 우리를 넘어서는 사건,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달라지는 위기를 겪으면서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질문을 하면서 존재를 건 씨름을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잡신의 세계에 살던 나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고대 세계의 문서인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짚어보자. 이미 충분히 말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위기 속에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대화한다. 그들은 절망과 어둠 속에서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상황을 돌파하는 비상한 힘을 얻었는데, 이를 하나님의 구원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세계에서 자신들만 이 고통에서 빠져나가는 현실적인 술책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그런 세계를 극복하는 길만이 유일하고도 참된 길임을 알았다. 그리고 오로지 그 길에 서는 것만이 그들의 삶을 궁극적인 존재와 연결된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는 확신을 얻었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기후 위기를 비롯해 불평등의 극대화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패권의 변화와 지정학적 전쟁의 위기, AI 등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초래하는 급속한 변동에 따른 노동과 문명의 위기, 가짜 뉴스로 대표되는 공론장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위기,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는 팬데믹의 위기 등 복합 위기 속에 있다. 이 위기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근원적이고도 심대한 파국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들 중 몇 가지는 이미 현실로 진행되고 있다. 종말이 이미 여기의 현실로 도착해 있는 것이다. 글로벌 위기가 한반도를 피해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땅에도 역시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를 분열과 붕괴 상태로 몰아가는 12.3 내란 시도와 국민 사이의 극심한 분열은 글로벌 복합 위기의 지역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렬의 내란은 적절하고 올바른 위기 대처 능력을 상실한 지배 기득권 세력이 폭압적인 방식을 통해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파시즘적 시도다.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공동체 대다수를 불행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지배 세력의 태도는 결국 그들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파멸로 결과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2,500~2,600년전을 전후하여 유다왕국의 멸망과 제3 이사야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그렇다.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위하여 타자의 불행과 죽음을 담보로 삼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항상 공동체 전체에 재앙을 불렀다. 게다가 나머지 대다수들이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과 부를 부러워할 때, 다시 말해 잡신 혹은 우상에 머리를 조아릴 때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파멸했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런 세계를 극복하고 참된 삶을 회복하려는 인간들의 존재를 건 씨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서는 이 씨름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그들과 대화하면서 오늘 여기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잡신들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메마름을 넘어 하나님과 연결된 제대로 된 삶, 신성하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한다.
다시 벤야민을 인용하면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指針)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미약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구출함으로써, 과거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호소했던 그 요청을 실현하는 존재가 되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승리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배운다.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로서 과거에 하나님께 호소했던 사람들과 대화한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현존한다는 말이다. 메시아의 능력 안에서 과거로부터 미래의 인류까지 삶과 세계에 경건한 태도를 가지는 모든 진실한 사람들과 사귄다는 말이다. 성서를 읽는 시간은 불멸에 참여하는 시간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