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0: 15-17
요셉의 형제들이
본문은 모세가 요셉의 형들이 부친 별세로 인하여 요셉을 두려워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과 하나님의 뜻 전체를 모르게 되어 방황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내셔서 친히 만들어 가시고 다듬어 가시면서 쓰시는 사람도 모르게 되어 혼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1. 본문 15절은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이 부친 사망 후에 요셉이 자신들이 그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보복을 취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 성격에 따라서 요셉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들을 대하게 된 것을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심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자기 부친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지금까지 간신히 자기 앙갚음을 보류하면서 자제해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사악한 판단을 통해서 자기마음에 추호도 그런 증오심이나 악의가 없다는 점을 관대한 처우를 통해서 입증해 보여준 사람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이러한 억측은 요셉이 중심에 품은 중용을 통해서 특별한 은총을 보여주셨던 하나님에게도 큰 명예 훼손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죄책을 안고 있는 자기 양심이란, 항상 맹목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이나 그분의 뜻에까지 올려다 보지 못할 경우에 자기 양심의 수준이란 항상 비합리적인 두려움 때문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낮에도 그저 넘어지기만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범한 죄악을 벌써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 양심 속에서 돋아난 가책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는 나머지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자신들을 향한 고문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사죄를 받게 된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기뻐할 자격이 없었던 것은 요셉의 마음은 이미 그들의 불신으로 큰 상처를 받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그처럼 수차에 걸쳐서 불쌍히 여겨준 사람을 아직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옳지 못한 짓입니다.
그들이 오래 전에 자신들이 품었다가 의논한 결과로 드러냈던 사악(邪惡)한 일에 대해서 뉘우쳤다는 점을 우리는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그들이 아직 충분히 정결함을 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음이 그러한 고문과 불안으로 괴롭힘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신 것은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먼저 악한 양심은 그 자체가 고문자라는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을 다시 그들 자신들의 죄책으로 겸손하게 만들려는 뜻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아우의 판단에 혐오스런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은 그들이 무감각한 금수(禽獸)가 아닌 이상 하나님께서 개정하시는 천상(天上) 법정을 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잠28:1) 는 솔로몬 왕이 했던 말은 오늘날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죄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자백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벌 떠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발버둥치며 뻔뻔스럽게 오만한 짓을 일삼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들이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도 도망가게 되는 것은(레26:36) 그들이 육신상으로 안전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안정된 마음보다 더 바람직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 귀한 복을 악인들에게서는 여지없이 박탈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정직성을 연마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자신들의 사악에 대해서 이미 회개한 족장들이 오랜 후에야 이처럼 심하게 깨우침을 받는 것을 보는 우리로서는 아무도 자기 기만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위선(僞善)이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하는 은밀한 채찍을 은밀하게 받지 않으려면 자신을 항상 하나님 면전에 세워두고 하나님 말씀을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중적인 마음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행복한 평화가 우리
의 철두철미하고 정결하게 된 가슴 속에서 그 빛을 발하게 하려면 우리 각자는 꾸준히 자신을 반성해야겠습니다.
이러한 일을 소홀히 하는데 대한 정당한 보상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다가서지 않는 자들이 받는 것과 동일하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유한한 인간의 심판대 앞에 억지로 끌려오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안한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대책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 인간 뿐 아니라 그림자를 보거나 바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겁을 집어먹게 되고 말 것입니다.
2. 본문 16절은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스스로 수치를 느낀 나머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더 믿을만한 평화의 사자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양심에서 스스로 비난을 받고있는 자들에게는 분별력과 이성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야곱이 이 점을 염려했더라면 야곱께서는 왜 자기 말을 그렇게 잘 듣는 자식과 그의 형제들을 화해시키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은 왜 그들 스스로 잘해 낼 수 있는 일에 중개자를 끌어들이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어린애처럼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우리들이 그들의 본을 귀감삼아 쓸데없는 고안을 이용해봤자 아무 유익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의 고약한 죄를 남에게 알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야곱의 자식들은 어디서 자신들의 그런 내용을 털어놓을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러한 수치를 애굽인들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껏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종들 가운데서 몇 명의 증인이 선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모세가 야곱이 애굽으로 떠나 올 때 자기 종들에 대한 점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몇 명의 종들이 그와 함께 왔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몇 가지 점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린 경우 진퇴양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기본 신앙과 또 하나님이 자기 동료 중에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내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에 직접 나아가도 돌출적일 수밖에 없고 중재자를 내어서 대신 보내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3. 본문 17절 전반은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독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자신들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과가 가벼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사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극악성을 먼저 자기들 부친의 권위와 다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아우를 달래는데 있어서 꼬불꼬불한 길을 택하지 않고 직접 나왔더라면 오히려 그들이 했던 고백은 칭찬을 받을만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어서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옳다는 가르침을 신앙의 원천에서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는 만큼 오늘날에도 교회 회원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경우에 우리가 그 죄를 용서하는데 있어서 너무 빳빳하거나 무디어서는 안되겠다는 일반적인 권고를 우리는 여기서 받는 셈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인정을 만인에게 베풀라는 일반적인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개재되는 면에 있어서 우리가 동정심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석보다 더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 한가지 명심할 점은 그 형제들이 야곱의 하나님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이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이 특이한 신앙과 예배를 통해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고 있는 만큼 이것을 통해서 당연히 서로 밀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그들은 이 가족을 입양하신 하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 서 계셔서 화해를 낳는 역할을 다 하신 것으로 믿은 셈이었습니다.
이 형제들이 어느 정도의 깨달음이었을까 하는 것은 성령께서 조명하시고 역사 해 주신 만큼이었을 것인데 아무튼 그들이 전한 말의 형식과 내용에는 대단한 건실함이 엿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어떻든 그들이 그 당시에 구했던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있느니 만큼 오늘날 우리도 이런 내용을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본문 17절 끝 부분은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입니다.
1) 모세의 말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제들이 그가 울 때 같이 있으면서 말을 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확실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운 것은 그가 사자들을 통해서 형제들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들이 쓸데없는 고민과 수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서 그들에게 동정심을 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불러 놓고 요셉은 그 형제들의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면제시켜 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화를 멈춰달라는 그들의 애원을 들을 때 요셉은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들의 슬픔과 불안을 두고 이처럼 한 마음으로 우는 요셉의 모습에서 우리는 훌륭한 동정의 귀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성급한 분노자의 고집이나 증오심을 끝까지 품는 자를 상대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도 우리는 주님께 온유한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온유한 마음의 능력은 과거 요셉시대 못지 않게 오늘날 그리스도의 지체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가지신 선하신 뜻과 그 분의 선하신 뜻대로 역사 하신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시고 부르시며, 교회의 초석을 놓으시듯이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택하여 부르시고 12족장들로서 옛 교회의 초석을 다지시는가? 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한없으신 의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넓으신 은혜와 오래 참으심으로 자기 택하여 부르신 백성들을 자기 교회로 관리하시는 의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어떻게 훈련시키시고 연단하셔서 쓰시는가도 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하염없는 연약성과 부실한 내부 구조도 보입니다.
안될 것 같으면서도 되는 교회의 모습, 되는 것 같으나 역시 그 연약성을 안고 있는 교회의 모습,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의지로만 되어져 가는 지상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감사하게 하십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창조주시요, 구속주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로써 품어주시는 은혜를 감지한다면 본문 말씀이 여러분에게 잘 보여진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