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진목사/역대일기 (에 6:1-14)
주요내용:십자가 진리론
(요약)
본문은 왕이 역대 일기를 보고 자기의 생명을 구한 모르드개를 왕처럼 높이는 사건이다. 이는 십자가 진리를 깨닫게 되는 영적인 싯점을 예표한다. 이 일이 있으려면 먼저 유다인들이 기도했듯 기도와 아울러 에스더의 첫 잔치와 같이 은사를 통한 신앙적인 감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만의 욕망을 사용하여 모르드개를 높였듯 육신적인 욕망도 적절히 사용하사 영적인 목표를 강력히 추구하게 하신다. 그 결과 하만이 약해지고 죽어지게 되었듯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사 거룩하게 하신다.
(설명)
☆ 역대일기
- 복음의 예표 -
① 과거사 - 이미 이루어진 일
② 생명의 은인 -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③ 첫 잔치의 밤 - 성령 은사의 결과가 나타남
④ 읽히더니 -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
☆ 하만의 속셈
- 신령함에 대한 육신적 속셈 -
① 높아지기 원함
② 왕복
③ 왕이 타는 말
④ 왕관
⑤ 외치게 함
☆ 역전되는 결과
- 육신적 욕망도 절절히 사용하심 -
① 모르드개에게 왕복 입힘
② 모르드개를 가마에 태움
③ 모르드개에게 왕관 씌움
④ 모르드개를 자랑케 됨
(본 문)
1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2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3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4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뜰에 이른지라 5 시신이 고하되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들어오게 하라 하니 6 하만이 들어오거늘 왕이 묻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 하만이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7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8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9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10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11 하만이 왕복과 말을 취하여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되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니라 12 모르드개는 다시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하만은 번뇌하여 머리를 싸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13 자기의 당한 모든 일을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고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 아내 세레스가 가로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족속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저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14 아직 말이 그치지 아니하여서 왕의 내시들이 이르러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의 베푼 잔치에 빨리 나아가니라 (에6:1-14)
(강 해)
이 시간에는 "역대 일기"라는 제목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에스더의 첫 잔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시기 위해서 말씀과 은혜와 은사를 주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와 은사의 이면에 숨겨 있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 배후에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물론 온 유다 민족의 울부짖는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어떤 이유로 하시든지 기도의 광장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오늘은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에 앞서 왕이 역대 일기를 보고 자기 생명을 구한 생명의 은인 모르드개를 왕처럼 높이는 내용입니다. 이제 왕이 본 정신으로 돌아온 것같은 느낌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죄인이 이제 말씀과 은사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앞에 녹아져 가는 단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만 되면 이제 영성에 돛을 다는 격이 됩니다.
1. 주의 은혜를 깨닫는 시점은 언제일까요?
1-3절에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 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이 밤에" 라고 했습니다. 그 밤은 바로 에스더의 첫 잔치가 있었던 밤이요, 한 편으로는 잔치를 마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장대를 높이 세우던 밤입니다. 앞에서 에스더의 첫 잔치를 은사의 잔치를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는데 은사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이 때는 또한 하만이 장대를 높이 세운 때입니다. 즉 한 사람은 유다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한 사람은 유다 민족을 멸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행하던 때입니다. 이 극대 극의 현상이 바로 은사의 때입니다.
즉 은사를 주시는 첫째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의 복음을 믿어 예수 안에서 잘 서도록 하심입니다. 그런데 그 첫 잔치의 날 바로 하만이 장대를 세웠던 것처럼 성도들이 은사를 경험하면 믿음의 증진과 아울러 육신적인 욕망들이 더 날뛰려는 시험이 옵니다. 특히 교만의 시험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특수한 구조를 이해해야 큰 은사를 경험했을 때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왕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대개 폭군들의 특징이 불면증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수에로의 불면증은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하만의 손에서 구하시기 위한 특별한 섭리였습니다(창41:1-8, 시127:2, 잠21:1, 단2:1). 이것을 신령한 의미에서 본다면 말씀과 은사에 감동을 받으면 세상의 도취에 빠지려야 빠질 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왕은 자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잠이 오지 않자 역대 일기를 읽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읽히더니' 라는 용어가 분사로 되어 있어 낭독이 장시간 계속됐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그 일기에 도취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Keil). 그런데 듣다 보니 왕에 대한 역적 모의가 있었고 이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 때가 모의 사건 5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왕은 그 동안 까맣게 잊었던 이 일에 대하여 자기 생명을 구해준 모르드개에게 응분의 존귀와 관작을 베풀었는지 물었습니다. 즉 그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깊히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영적생활은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감화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대속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감화력을 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때부터 하나님을 사모하고 진리 가운데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깨닫게 되면 신앙의 판도는 그 때부터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욕망도 적절히 사용하십니다.
10절에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했습니다.
본절은 왕이 하만의 제안대로 공신에게 치하하는 내용입니다. 이 때가 하만이 모르드개를 장대에 달 것을 왕에게 재가 받기 위해 온 때입니다. 그 때 왕이 하만에게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그는 그 사람이 나 외에 누가 있겠는가 하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7-9절에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지나친 공명심(功名心) 때문에 자신이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혀주고 또한 그의 존귀케 됨을 백성들에게 선전해 주는 치욕적 상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장차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낮추고 낮추어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시므로 결국은 사단이 자기를 못박는 역전극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사단은 방해했지만 하나님보다 수 아래에 있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일을 돕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 사건은 우리의 속의 세속적인 마음이 끝까지 날뛰지만 결국은 거룩한 영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하고 만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즉 비록 육신적인 욕망에 기인한 것이지만 신령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갈망은 더욱 빠른 영성의 길로 역전되고 맙니다.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목표를 주면서 기도하라고 하면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밤을 지새워 가며 기도합니다. 아직 육신에 속한 수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묵인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훈련을 시키시고 영적인 성장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영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바꾸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도리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것과 육신적인 복을 교차하여 주시고 상도 약속하시는 것도 육신을 입은 인간의 한계를 사용하심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점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또 신령한 목표를 두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육신적인 욕망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존재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초기의 제자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세상적인 영달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름 받았을 때 예수님을 랍비로 아는 정도로 반응했지만 점점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자 그럴수록 예수님 좌 우편에서 한 자리하려는 세상 욕망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욕망이 얼마나 강했으면 예수님의 책망과 교훈을 받고도 또 길에서 크게 다투었겠습니까?
특히 야고보와 요한을 보세요. 그들의 육신적인 욕망은 신앙과 적절히 어우러져 탁월한 믿음을 창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이 경고를 받고서도 다시 그의 어머니까지 대동하여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10:38-41) 하셨습니다. 여기 잔과 세례란 고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들 보세요. 그 중에 요한은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도 도망치지 않고 요18:15-16절을 보면 재판정에까지 그리고 십자가 아래까지 나갔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는 때에 아무리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다고는 하나 이것을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주와 함께 죽기를 아주 소원했다고 해야 할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당시로서는 아무리 보아도 베드로보다 탁월한 믿음이 있다고도 볼 수 없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추측이지만 메시야의 좌 우편에 앉아야겠다는 강한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의 형제 야고보가 사도로서는 맨 먼저 헤롯에 의해서 순교를 당합니다(행12:2). 물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었지만 그의 믿음대로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세상적인 욕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아직은 육체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도 좋지만 육신적인 이득이 있어야 더 용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육신적인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영의 신령한 것을 아름답게 소개한들 크게 흥미를 갖겠습니까? 영적인 득실에 있어서 고난이 더 값질 수 있지만 전적으로 그렇게 아니하시는 것도 인간은 아직 육신에 속하여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사 결국은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는 원동력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 공로를 통해 내가 죽어지고 예수와 함께 하늘 높이 영광스럽게 되어지는 것까지도 알고 보면 육신의 욕망이 작용할 때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욕심, 평안 욕심, 신령한 복 욕심, 하늘의 상급 욕심, 거기다 예수님의 권세를 입고 예수님의 영광도 입고 하나님의 사랑까지 충만하게 받는 것 어느 것 하나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숭고한 목표라고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그것 역시 나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시고 대신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욕망마저도 없다면 아주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가장 겸손한 사람이 되리라! 내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리라! 이런 비교법적인 것은 육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신령한 일에 대단한 흥미를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그 욕망이 강할수록 은혜도 빨리 받고 성화도 빨리 되고 주의 일도 잘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육신적인 욕심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그것들은 다 사라지고 성숙한 것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본 정신의 아하수에로가 나오는 것 같더니 다시 육신적인 욕망의 하만이 등장합니다. 이 사건은 다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심리적인 한 사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감화마저도 비록 신령한 목표이긴 하지만 육신적인 욕망 달성을 위한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3. 비록 육신적 욕망의 발로였으나 신령함에 힘쓴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본문 12-14절에 "모르드개는 다시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하만은 번뇌하여 머리를 싸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당한 모든 일을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고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 아내 세레스가 가로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족속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저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아직 말이 그치지 아니하여서 왕의 내시들이 이르러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의 베푼 잔치에 빨리 나아가니라" 했습니다.
즉 그 결과는 하만 자기만 약해지고 죽어지는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육신적인 욕망일 망정 거룩하게 되어지려는 그 노력이라면 결과를 악에서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한처럼 비록 육신적인 동기일지라도 신령한 욕심을 갖기 바랍니다. 이러한 욕심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심이라도 갖고 열심히 신앙훈련을 받으십시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 배후에는 하나님과 울부짖는 유다 민족의 기도가 있었음을 기억하십시다. 기도 없이는 안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그 사랑에 감동되게 하시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비록 이 숭고한 목적에까지 육신적인 욕망은 개입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될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야고보와 요한처럼 거룩한 영성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령하고 귀한 뜻을 이루는 귀한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