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김경호목사
한 스승이 큰 고통을 당해 괴로워하는 제자를 보고 사발에 물을 떠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소금을 한 줌 쥐어서 풀어 마셔보라고 했습니다. “맛이 어떠냐?”하고 묻자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짜다고 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그를 큰 호수로 데려왔습니다. 제자의 손에 소금을 한줌을 듬뿍 쥐어서 풀어서 마셔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호수물을 마신 후, “전혀 짜지 않습니다. 시원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때 스승은 제자에게 “인생의 고통은 소금의 짠맛과 같이 그것을 담는 그릇의 크기에 달렸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조금 다른 관점이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폭도 그 그릇의 크기에 달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넓고 넓은 바다’에 비유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어머니에게는 단지 사랑스런 아들일 뿐입니다. 교육적으로 짐짓 나무랄지 몰라도, 어버이로서의 마음은 더욱 애틋할 것입니다.
안병무 선생이 80이 다 되신 연세에 “나는 아기가 낳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의외의 소리에 당황하였습니다만 “아기를 나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몸에 고통과 생명을 잉태하는 아픔과 피흘림이 없는 사람이, 어찌 생명을 알고, 인간을 알며, 사람의 가지를 논할 수 있겠는가?”고 진지하게 반문하셨습니다.
카드빚 800만원 때문에 이틀에 다섯 명을 살해한 범인을 인터뷰하는데 말이 가관입니다. 거침없이 “어제 세명 죽이고 오늘 두명 죽였어요.”라고 합니다.
외신에 세 살 짜리 어린아이가 “살인협박죄로 경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연인즉 “버스를 타고 가다 운전 기사의 목에 장난감 권총을 들이대고 “총으로 쏴 버릴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경찰에 잡혀갔는데 이미 여러 군데 유아원에 같은 행위로 쫒겨난 전과(?)가 있다나요. 이 아이는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고 합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한 미군의 증언은 자기는 컴퓨터 게임을 즐겼고 마치 그 게임을 할 때와 같이 전혀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전쟁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게임과 실전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는데 딱 한가지가 다른 점은 게임에서는 총을 맞은 병사가 또 일어나서 다음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하는데 실전에서는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믿기 어려웠다고 증언했습니다.
전쟁에서 똑 바로 상대를 보고 정조준하기 위해, 또는 기업의 효율성, 작업의 능률성을 위해, 개개인의 사정은 볼 것 없이 효과적으로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기필코 필요한 것이 “비인간화”의 작업입니다. 기계가 인간을 대치하면서부터 전자상의 사이버 공간이 현실을 대치하면서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비인간화에는 몇 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구체적 인간을 관념으로 만들어 냅니다.
“저건 테러리스트다. 저건 빨갱이다. 저건 유태인이다” 그들을 나하고는 다른 어떤 부류로 만들어 격리하고 분리시킵니다.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격리시키는 다양한 관념들을 우리는 이념이나 신앙이니 하는 이름으로 떠받듭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죄악과 다름이 아닙니다.
그 다음 추상화된 인간은 한 부류로 획일화됩니다.
유니폼을 입히고, 머리를 깎게 한다거나, 일정한 표식을 달게 한다거나-이렇게 되면 인간은 이제 한낮 소모품이 되고, 숫자로 파악되고 번호로 불리워 집니다.
인간이 숫자로 파악되고 불리워 지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물음을 우리는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인생입니까? 얼마나 다양한 특성을 가진 존재이고,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하나, 둘 하고 숫자로 세어지는 순간 그 모든 개성, 다양성은 사라지고 단지 머릿수로 획일화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은 숫자로 세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큰 우주이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게릴라 콘서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연애인이 갑자기 자신을 홍보해서 사람을 얼마나 모으나를 보는 것입니다. 눈가리고 숨죽이고 있다가 눈 뜨고 나면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기에 눈물을 흘리는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니까 울지 왜 그것이 감동스러운가? 잘 이해되질 않습니다. 현장에서는 감동이 될 지는 몰라도 TV를 보는 사람으로는 왜 감동적인 일인가 모르겠습니다. 첫째는 숫자의 볼륨감이 느껴지지 않고, 둘째는 숫자가 갑자기 많이 모이는 것이 왜 감동스러운 일인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무조건 많고 큰 것을 선호하는 잘못된 가지관을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군생활을 공군 장교로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절기가 되면 장병들 사격훈련을 시켰는데, 제가 사격을 곧 잘합니다. 사격은 굉장한 폭음과 화약냄새에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잘하는데 제가 그런데는 좀 요동이 없는 편입니다. 부대를 대표한 사격선수로도 나가고, 사격선수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습니다. 부대 장병들이 전부 제게 사격방법을 교육받았는데 저는 그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잘 가르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사격의 표적이라는 것이 젖병 모양의 그림인데 병모양은 사람의 몸통을 위에 꼭지 모양으로 나온 부분은 사람의 머리통을 상징하는 단순화된 그림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리 시대에 전쟁이 나지 않은 것이 여러 가지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제게 사격술을 배운 사람들이 모두 예비군도 훨씬 지난 나이지만 만약 전쟁이라도 났더라면 그 사람들이 제게 배운 기술로 표적 대신 사람을 쏘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지금도 구조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정밀하게 표적에 사람을 밀어 넣는 방법이 교육되고 일등사수로 칭찬 받는 모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살인적이고 폭력적인 남성문화, 힘의 문화는 이제는 마땅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당면한 이 비인간화를 뚫고 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 어버이의 눈물입니다. 고통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피흘리며 그를 출산하고, 눈물로 그를 키워내는 부모의 사랑이야말로 한 인간의 값어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공을 들여야 되는가를 체험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거룩한 사랑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니는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깍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끓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能)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으로 이주한 나오미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모진 인생 살이에 이방인 며느리들에게, 각자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옛날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은 곧 바로생산력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아들이 죽었더라도 이미 시집온 며느리이니 시어머니 옆에 묶어 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젊은데 어찌 혼자 살겠는가를 걱정합니다. 그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나오미 자신도 고향인 유대로 갈 테니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이 며느리들을 “내 딸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는 며느리를 자기 친 딸 처럼 생각하는 인자한 어머니였습니다. 한 며느리 오르바는 가고 룻은 남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대답합니다.
“나더러, 어머니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달게 받겠습니다.”(룻기 1, 16-17)
모압 여인인 룻은 야훼 하나님이 누군지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란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고 설명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의 따듯한 마음을 보아 그가 믿는 하나님도 받아들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어머니를 보아 바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론이나 교리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만큼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배우는 것은 “우리 부모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가?”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신앙의 모습대로 배울 뿐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세드신 분들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오랜 신앙생활이 몸에 배서, 그의 생활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모습,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계신 모습”들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교회에 많지 않으신 어른들을 주일 날 뵈면 먼저 나서서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작은 태도에서부터 나아가서는 그분들의 깊은 신앙을 잘 배우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