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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9] 윤동주, <또 다른 고향>
(1)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2)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3)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4)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5)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6)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이 시에서는 “고향”을 말하기만 했지만 뜻하는 바를 “고국”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 (1)에서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면서 시작한 시가 마지막 대목 (6)에서 고향에 가자고 하는 데서 끝났다. 앞의 고향은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고, 뒤의 고양은 이제부터 찾아 가야 할 아직 없는 고향이다. 자세한 분석을 해야 하지만, 하이네의 [실향 18]에서 사용한 용어를 가져와 얻을 결과를 미리 말할 수 있다. 앞의 고향은 “어머니 나라”를, 뒤의 고향은 “아버지 나라”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나라” 체험 공간인 자기 고향에는 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헛된 위안을 삼지 말고 “아버지 나라”는 남에게 빼앗기고 없어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암시적인 방법으로 나타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극악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윤동주는 이 시를 써서 유고로 남겼다.
고향에 가고 다시 가야 한다는 주체는 “나”만이 아니고, “백골”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혼”이기도 하다. (3)에서 그 셋을 나란히 들었다. “백골”은 “나”의 죽은 모습이고, “아름다운 혼”은 “나”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나”는 “백골”이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혼”을 지니기도 하는 이중성을 지녀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간다. 이미 돌아간 고향은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운 곳이라고 (1)에서 말했다. 현실은 암담해 고향을 찾아도 아무 즐거움이 없고 죽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2)에서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서 탈출하는 길이 있다고 암시했다. 풍화작용을 하는 백골을 보고 우는 것이 누구인가 하고 (3)에서 물어 자아 각성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4)에서 말한 개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다. (가) 돌아간 고향에서 개가 짖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나) 개는 어둠을 보고 짓고 어둠을 거부한다. (다) 사람은 받아들이는 어둠을 거부하니 개는 지조가 높다. (라) 지조 높은 개가 현실의 어둠에 안주 하지 못하게 일깨운다. (5)에서 개에게 쫓기는 듯이 말하고, 혈실적인 제약을 피해서 넘어서자고 했다. (6)에서 “아름다운 도 다른 고향”이라고 한 곳은 어둠을 물리치고 광명을 찾는 경지이다.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투쟁해 되찾아 할 해방된 조국이다. (1)의 고향은 실제의 고향이고 현실이며, (6)의 고향은 고향을 넘어선 고국, 되찾아야 할 고국이다.
[작품 20] 센고르, <탕아의 귀가>(Léopold Senghor, “Le retour de l’enfant prodigue”)
(1) Éléphant de Mbissel, par tes oreilles absentes aux yeux, ententent mes Ancêtres ma prière pieuse.
(2)Soyez bénis, mes Pères, soyez bénis!(3)Les marchands et banquiers, seigneurs de l’or et des banlieues où pousse la forêt des cheminées,
-- Ils ont acheté leur nobless et les entailles de leur mère étaient noires.
Les marchands et banquiers m’ont proscrit de la Nation.
Sur l’honneur de mes armes, ils ont graver “Mercenaire.”
(4)Et ils savaient que je ne demandais nulle solde; seulment les dix sous
Pour bercer la fumée mon rêve, et le lait à laver mon amertume bleue.
Aux champs de la défaite si j’ai replanté ma fidélité, c’est que Dieu de sa main de plomb avait frappé la France.
(5)Soyez bénis, mes Pères, soyez bénis!
Vous qui avez permis mépris et moquries, les offences polies,
les allusions discrètes,
Et interdictions et les ségrégations.
Et puis vous avez arraché de ce coeur trop aimant les liens qui
l’unissaient au pouls de monde.
(6)Soyez bénis, qui n’avez pas permis que la haine gravelât ce coeur d’homme.
Vous savez que j’ai lié avec les princes proscrits de l’esprit, avec les princes de la formes,
Que j’ai mangé le pain qui donne faim de l’innombrable armée des travailleurs et des sans-travail,
Que j’ai révé d’un monde de soleil dans la fraternité de mes frêres
aux yeux bleus.
(1) 므비셀의 코끼리야, 눈은 없는 너의 귀로 나의 조상님들이 내가 하는 경건한 기도를 는다.
(2)축복 받으소서, 조상님들, 축복 받으소서!
(3)상인들, 은행가들, 황금의 주인이고 굴뚝 숲이 솟은 근교의 주인인 자들-- 그자들이 고귀한 신분을 샀어도 어머니의 뱃속은 시커멓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이 내게서 국가를 박탈했다.
내가 지닌 명예로운 무기에다, 그자들은 “용병”이라고 새겼다.
(4)그리고 그자들은 알고 있다, 나는 더 보수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동전 열
푼만으로
내 꿈의 안개를 흔들어주고, 푸른 멍이 든 고통을 씻을 우유로 삼을 것을. (5)패배하는 전장에서 내가 충성을 바꾼 것은 하느님이 납덩어리 손으로 프랑스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6)축복 받으소서, 조상님들, 축복 받으소서!
당신들은 허용하셨습니다, 멸시와 조롱, 세련된 모욕, 은근한 비꼼,
그리고 금지와 차별을.
그리고 당신들은 사랑이 너무 많은 이 가슴과 세상의 맥박을 이어주는 끈을 끊으셨습니다.
(7)축복 받으소서, 인간의 가슴에 증오의 자갈을 까는 것을 허용하신 분들이시여.
(8)당신들은 알고 계십니다, 정신을 상실한 지배자들, 형식에 매인 지배자들과 내가 연결된 것을.
수많은 실업자와 무직자 군단을 배고프게 하는 빵을 내가 먹은 것을.
내가 푸른 눈을 가진 형제들과 우정을 가지고 해가 비추는 세계를 꿈꾼 것을.
아프리카 세네갈의 시인이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탕아의 귀가>를 제목으로 삼아, 고국으로 돌아가 조상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1) 서두의 “므비셀”은 세네갈의 지명이고,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므비셀의 코끼리”는 왕국을 창건한 통치자를 칭송해서 부르던 말이었으며, 지금 지금 보호종으로 남아 있는 동물이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코끼리 귀로 조상들이 하는 말을 들어달라고 했다. 처음 한 구절에 이런 의미를 누적시켜, 역사, 국토, 동물, 조상과 만나려고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2)에서 조상이 축복받으라고 하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조상이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5)와 (6)에서 말했듯이 조상들은 식민지 통치를 받아들이고 모욕을 허용했으며, 후손인 자기도 불행하게 해서 세상의 맥박과 단절되고, 가슴에 증오의 자갈을 깔도록 했다. 그래도 조상을 원망하지 않고 축복받으라고 했다. 조상과 만나 경배하고 칭송하는 것 자체가 귀향의 요체이다. 김소월의 [실향 4]나 잠의 [실향 10]에서도 고향은 조상과 만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 생각을 이 작품에서 한층 적극적으로 나타냈다. 조상이 모욕당하고 살아온 가련한 분들이어서 더욱 애착을 가졌다.
자기는 떠나 있는 동안 조상과 다른 길을 간 것은 아니다. 조상이 고향에서 당한 박해를 더 심하게 겪은 것이 떠나 있는 동안의 행적이다. 박해자 누구이며, 박해의 내용이 무엇인지 (3)에서 명백하게 말했다. 상인, 은행가, 황금의 주인, 공장 소유가 가해자이다. 그자들도 어머니 뱃속은 시커먼 같은 사람이면서, 고귀하다고 뽐내는 식민지 통치자가 되어 국가를 박탈하고 자기를 용병으로 삼아 무기를 쥐여주었다고 했다.
그래도 항쟁을 하지는 못하고 따르기만 했다. (5)에서 하느님이 프랑스 군이 패전하게 할 때에는 충성하지 않았다고 한 데 그쳤다. (4)에서는 보수를 요구하지도 않고 값싼 위안에 만족했다고 했다. (8)에서는 더 큰 잘못을 고백했다. 식민지 통치자와 연결되어, 배고프게 하는 빵을 먹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푸른 눈을 가진 백인 형제들과 유대를 가지고 해가 비추는 세계에서 맞이할 해방을 염원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과오이다.
부끄러운 과거의 잘못된 행적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가 조상을 만나는 탕아의 귀가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돌아온 것은 아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귀가를 염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버지와 만나 감격하는 극적인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 성서에서 가져온 말을 사용한 것도 실제로 귀가하지 않고 생각하는 데 머무르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탕아의 귀가와 비슷한 것이 불경에도 있다. 자기 나라 세네갈 전해지는 아프리카의 전승에서 더욱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찾으면 귀가가 더욱 진전되었을 것이다. “므비셀의 코끼리”를 들먹이기만 한 것으로는 많이 모자란다.
이 작품을 쓴 시인 센고르는 ‘네그리튀드’(négritude)라고 표방하는 이런 시를 프랑스어로 써서 널리 알려졌다. ‘네그리튀드’란 ‘흑인다움’이라는 뜻이다. 흑인다움을 예찬하고 흑인다운 수법을 사용하는 시를 백인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뛰어나게 구사해 지어 프랑스에서 높이 평가되고 우대받은 것은 귀가가 아니다. 그 명성 덕분에 세네갈이 독립할 때 대통령이 되어 프랑스를 계속 우러러보게 했다.
[작품 21] 단크와, <아프리카>(Solomon Dankwa, “Africa”)
(1)Africa, my motherland.
The home of my forefathers,
Who were as ignorant as children.
But were as industrious as wild beavers.
They call themselves Africans.
(2)Africa.
The land of assiduous beings,
Whose skin as coal.
But their masters' as snow.
How good were they at playing that game called slavery
With the then blindfold blacks.
(3) Oh! Mama Africa.
Behold how fantastically majestic
You look on your throne.
Crowned by the sun
Some millennia back.
With your other five associates
exhibiting some kind of curtsy,
When they see you swagger
Though they feel to stagger.
(4)Africa.
The land of honey and milk indeed.
The land of money and silk not in need.
Civilization started in Africa.
Victimization altered in Africa.
Nought sought when it fought not.
Rather taught how it thought.
(5)Africa!
A place of haven.
Yet not heaven.
A place of dainty nature.
Yet not in saintly feature.
There ingenious and gifted Homo Sapiens,
Emanates from nowhere.
Animals and green plants,
Emerging from somewhere.
(6)Where was I at that time?
Where were you at that time?
Mama Africa.
God bless you.
And your people,
God bless Africans!
(1)아프리카, 내 어머니 나라.
조상들이 살아온 고장,
어린아이처럼 몽매하지만
야생 비버처럼 부지런한 그분들이
·스스로 아프리카인이라고 했다.
(2)아프리카.
열심인 분들의 고장,
살색이 석탄 같은데,
주인은 눈처럼 희구나.
노예 노릇을 하면서 좋은 일을 얼마나 했나,
눈을 가리고 있는 검둥이 신세로.
(3) 오! 어머니 아프리카,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
얼마나 놀랍고 당당한가.
햇빛의 왕관을 쓰고,
몇 천 년을 뒤에 두르고,
각기 예의를 갖추고 있는
다섯 동료를 동반자로 삼고,
활보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답보한다고 여기는데.
(4)아프리카.
꿀과 젖이 넘치게 있는 고장,
돈과 옷은 없어도 되는 고장.
문명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했다.
수난이 아프리카에서 변이했다.
싸움을 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다지만,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
(5)아프리카!
하늘에 있는 곳.
아직 하늘은 아니다.
자연이 거룩한 곳.
아직 거룩하지는 않다.
영리하고 재주 많은 호모 사피엔스
다른 데서 온 것은 아니다.
동물이나 푸른 식물들도
어디선가 나타나고.
(6)나는 그 때 어디 있었나?
당신은 그 때 어디 있었나?
어머니 아프리카여,
신이 당신을 축복한다,
당신의 백성도,
신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축복한다.
가나 시인이 지은 이 시에서 센고르 [실향 20]의 고민을 해결했다. 자기 나라의 범위를 넘어서서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귀향을 완결했다. 어디로 떠났던 것은 아니다. (1)에서 “motherland”(어머니 나라)이고, “The home of my forefathers”(조상들의 고장)이라고 한 아프리카에 있었다. 고향을 아버지나 어머니의 고장이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상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 김소월의 [실향 5], 잠의 [실향 10], 센고르의 [실향 20]과 같다. 그런데 돌아가기 위해 이동을 하지는 않고 생각을 바꾸어 아프리카의 가치를 발견하고 예찬하는 것을 정신적 귀향으로 삼았다. 자기 고장이나 자기 나라를 특별히 내세우지 않고 아프리카 전체가 고향이라고 해서 정신적 귀향을 확대하고 심화했다. 위축된 심정을 나타내는 구김살을 걷어내고 당당하기만 한 발언을 자랑스럽게 했다.
(2)에서 노예 노릇을 하던 수난을 회고한 것은 [실향 20]과 같다. (3)에서는 아프리카가 수난 이전 몇 천 년의 역사를 이어받아 이제 당당한 모습을 하고 활보하는 것을 다 른 여러 대륙에서 보고 있다고 했다. (4)에서는 아프리카의 특징을 자랑했다. 아프리카는 자
연의 혜택을 풍부하게 누려 인공의 조작이 필요하지 않고, 문명이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난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방법을 가르쳐주는 곳이라고 하는 요지의 발언을 적절한 표현을 갖추어 나타냈다. (5)에서는 아프리카의 이상이 아직 실현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6)에서 “그 때 어디 있었나?”라고 한 “그 때”는 뜻하는 바가 모호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으나, 자기와 어머니 아프리카가 헤어져 있던 시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헤어져 있던 시기가 끝나고 이제는 만나는 것을 축복하자고 했다.
이 시를 자기 말이 아닌 영어로 쓴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통어는 없어 영어를 사용해야 널리 알려질 수 있다. 영어를 아프리카말인 듯이 사용하려고 했다. 비슷한 어구를 이것저것 이으면서 시상을 전개는 것이 아프리카의 어법이라고 생각된다. 번역하기 아주 어려워 근사치라도 찾으려고 애썼다. (3)에서 짝을 이룬 “swagger/ stagger”는 “활보 /답보”라고 옮겼다. (4)에서 “The land of honey and milk indeed/ The land of money and silk not in need”라도 한 것은 줄 전체가 절묘한 대구이다. “꿀과 젖이 넘치게 있는 고장/ 돈과 옷은 없어도 되는 고장”이라고 해서 가까스로 다가갔다. “Nought sought when it fought not/ Rather taught how it thought”라고 한 것도 절묘한 언어 구사이다. “싸움을 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다지만/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고 해서 근처까지는 가려고 했다.
아프리카 특유의 수법을 활용해 표현을 응축했어도, 이 작품에서 하는 말은 시답지 않고 산문에 가까워졌다. 실향을 귀향으로 해결한다고 결론을 내려, 고향에서 고국으로, 고국에서 대륙으로 확대한 그리움의 대상을 찾아 즐거움을 누린다고 자랑했다.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실향의 슬픔이나 고통은 없어지고 귀향해 맞이하는 장래를 낙관했다. 이런 말은 동의할 수는 있어도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귀향시가 되면서 실향시는 의의가 없어진다. 완결되면 사명이 끝나 무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