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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을 중심으로 한 옛길
지도에서 가로로 넓게 칠해진 것은 산맥이다. 위쪽이 친링산맥이고, 아래는 메이창산(米倉山)과 따파산(大巴山)인데 이 두 산맥에 둘러싸인 분지가 바로 한중분지이고 그 중심도시가 한중이며 친링산맥 북쪽은 관중분지다. 이 지도에 표시된 길에 대해서 좀 더 집어보면 촉도(蜀道)라고 하는 길은, 시안(西安)에서 한중(漢中)을 거쳐, 광위엔(廣元), 젠거(劍閣), 미엔양(綿陽), 더양(德陽)을 거쳐 청두(成都)로 이어지는 약 650km의 길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지은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구나!"라고 한 촉도난(蜀道難)이 바로 이 길이다. 한중이 그 중심으로 한중에서 서남쪽 청두로 이어지는 길이 지도에서 연두색으로 표시된 금우도(金牛道)다. 이 옛길도 상당히 험한 산을 넘어가야 하지만, 며칠 뒤 젠먼관(劍門關) 과 소화고성, 바이마관(白馬關)을 들러 보기로 한다. 한중에서 친링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모두 험한 계곡을 넘어가야 하는데, 지도에 세 개의 청색 선으로 표시한 곳이 대표적인 옛길이다. 왼쪽에는 한중에서 서북 방향으로 천수 쪽으로 이어지는 백수도(白水道), 중간에 한중에서 보계와 오장원 방향으로 이어지는 포야도(褒斜道), 한중에서 서안으로 곧장 이어지는 자오도(子午道)가 있다. 이 길들 중 제갈량이 마지막에 오장원으로 출병했을 때 통과한 포야도로 간다. 포야도는 오장원의 남쪽에 있는 친링산맥에서 발원하여 한중 방향으로 흘러가는 강 포하(褒河)의 계곡을 따라 만든 길로 계곡이 험해서 통행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다. 포야도의 “야”는 한자로 斜라 쓰는데, 이 한자는 두 가지 뜻과 음이 있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 기울어지다는 뜻을 가진 경사, 사시, 사탑 등에서 읽는 “사”다. 그러나 계곡 이름을 의미할 때에는 "야"로 읽어야 한다. 바로 포하(褒河)라는 강이 흐르는 계곡에 난 길을 지칭할 때에는 포야도로 읽어야 한다. 가끔 포사도로 돼 있는 것들이 있는데 잘못 읽은 것이다. 이 험준한 지형의 포야 계곡을 통과하는 옛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을 위해 출병할 때 이 계곡의 길을 통과했으니, 삼국지기행에서 뺄 수 없는 곳이다.
▶ 미엔양 마초묘에서 석문잔도 가는 길
마초묘를 구경하고 나오니 오후 1시30분이다. 석문잔도를 오늘 돌아보려면 무후사는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마초묘 앞 길 건너에서 면현 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15분 쯤 기다리자 한중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우리 앞에 서더니 어디 가냐고 묻는다. 한중이라 대답하니 타라고 한다.(1人/11元). 그런데, 이 버스는 면현 버스터미널에 들리지도 않고 바로 한중으로 간다. 석문잔도 구경할 시간이 촉박한 나에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적어도 20분 이상은 절약한 것 같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한중시내에서 석문잔도로 가는 큰 삼거리가 보이는 최가구(崔家沟)라는 정류장에서 내려 큰 길을 건너 석문잔도로 가는 시내버스(21路, 1人/2元)로 갈아타고 석문잔도로 향한다. 어제 바오지에서 한중으로 들어올 때도 지났던 길로 한중 시내에서 옛날 포야도를 따라 올라가면 석문잔도를 만나고 계속 가면 어제 우리가 왔던 바오지로 가는 길이다. 석문잔도풍경구 입구에 도착하니 오후 3시20분이다.
▶ 석문잔도 풍경구 입구(시내버스 종점)
서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옛 모습을 한 방고가(彷古街)란 거리가 1km 이상 펼쳐지는데 풍경구 입구부터 왼쪽 벽에 대규모 조형물이 늘어서 있다.
▶ 삼황오제 등 중국 건국신화 부조
제일 먼저 보이는 조형물이 아마도 삼황오제 등 중국 건국신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물 관리를 잘했다는 우왕도 보인다. 여기는 제법 볼 게 무척 많다. 건국신화와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에 관한 이야기와 조형물이 많다. 한자를 제대로 읽고 해석할 수 있다면 더 자세히 구경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실력이 못 따라가니 그냥 지나치며 눈요기만 한다.
▶ 유방과 한나라 개국공신 부조
한나라 개국공신들도 보인다. 항우 밑에서 평범한 인물로 지내다 유방의 품으로 갈아타며 대장군까지 올랐지만 한나라 개국 후 토사구팽당한 한신도 있고 옆에는 장막 안에 앉아 천 리를 본다는 장자방 장량도 보인다.
▶ 참사기의(斬蛇起義)
한나라 고조 유방이 따르는 사람들과 술에 취해 늪을 지나는데 커다란 백사가 길을 막고 있어 칼로 쳐 죽이고 의병을 모집하여 천하를 얻은 것을 말한다.
▶ 홍문연(유방을 제거하기 위해 항우가 홍문에서 연 연회)
▶ 배장단(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는 예를 올리는 유방)
▶ 환정삼진(還定三秦)
한황 유방이 군대를 이끌고 촉한에서 돌아와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옹(雍), 색(塞), 적(翟) 삼진으로 삼분하여 다스렸는데 한신의 전격작전에 의해 모두 유방의 땅이 되고 후에 항우와의 결전에서 한왕 유반의 후방보급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사기>
이어서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개국하는 과정을 그린 부조가 이어진다.
▶ 한나라를 개국하는 한고조 유방
▶ 한 고조 유방이 그의 고향 패현(沛縣)을 방문하여 노래한다
▶ 평정제려(平定諸呂)
유방이 한신을 죽인 데에서 유래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군사인 범려의 말(사기 : 월왕구천세가)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이 전해져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라는 한국 속담도 만들어졌다. 당시 오를 멸망시킨 월왕 구천은 고생할 때는 함께 고락을 나누지만 자신이 부귀해질 때면 교만해져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구천이 범려 자신을 포함한 공신들을 죽일 것이라 미리 예측한 범려가 문종에게 관직에서 물러나자고 권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과연 그 말이 맞아서 문종은 자결해야 하는 위기에 몰렸지만 그 때 가서 깨달은들 소용 없었다.
한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킨 문제와 경제의 치적을 그린 부조도 보인다.
▶ 문경지치(文京之治)
한나라 5대 황제 문제는 중국 역사상 검소하기로 이름난 황제로 적전을 갈아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한편 각 지방 행정관청에 명하여 농민이 농사지을 시기를 잃지 않도록 계몽-지도하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오곡의 씨앗과 식량을 대여해 주었으며 농지의 조세를 반으로 감하여 주었다. 농민에 대한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면서도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는 검소와 절약을 기본으로 삼아 황제의 옷은 무늬와 장식이 없는 검정색 비단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가장 총애하는 신부인 에게도 절약과 검소함의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실내에서는 무늬가 없는 단색의 천을 사용토록 하고 의복이나 치마의 길이도 땅에 끌리지 않도록 짧게 하였다. 문제는 죽음에 임하여 "나의 장례를 치를 때는 거마와 의장병을 거창하게 벌여 세우지 않도록 하고 장례에 참석하는 사람이 머리에 쓰는 흰 베도 폭이 세치가 넘지 않도록 하며 복상기간도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복상 기간 중에라도 결혼과 제사를 제한하지 말며 술과 고기를 금지시키지 말라. 그리고 자신의 능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산기슭에 만들되 금, 은, 동, 주석이나 옥 따위를 사용하지 말고 모두 와기를 사용하고 그 규모도 적게 하라." 라고 유언하였다. 시안 동북에 있는 그의 능묘인 패릉은 검소를 생활신조로 한 문제다운 간소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제도 문제의 정책을 이어받아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정책을 실시해 경제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 침체되었던 경제가 활성화되어 모든 정부창고에는 식량과 동전이 넘쳐날 정도로 공전의 번영을 이룩하였고 사회질서는 안정되어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이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문경의 치' 라고 부르고 있다.
▶ 한무제와 그의 신하들
이어서 한무제를 선두로 한무제를 도와 한나라의 최고 번성기를 만든 사마천, 장건, 위청, 곽거병, 동방삭 등의 부조가 나란히 서 있다.
▶ 한무제의 주변 정벌
▶ 한무제의 명을 받아 가곡관을 넘어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장건
▶ 한무제 때 사마천이 사기 집필
한무제의 주요 업적을 새긴 부조가 뒤를 잇고 있다.
▶ 삼국지의 주요 인물 부조
▶ 여포와 유관장 삼형제의 대결
▶ 적벽대전에서 패해 도망치는 조조
▶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돈의 목을 베는 황충
▶ 한중왕에 오르는 유비
▶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는 공명
▶ 가정전투에서 패하여 달아나는 마속
▶ 공명의 공성계에 속아 달아나는 사마의
▶ 음참마속
▶ 고호두교에서 위연의 목을 치는 마대
▶ 제갈량 정군산에 잠이 들고
이어지는 회랑에는 삼국지의 세 영웅 조조, 유비, 손권과 장로 그리고 촉한의 주요 문신과 무장들의 부조와 그들의 활약상을그린 그림이 이곳이 삼국지의 주요 무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 포곡구
매표소에서 입장권(1人/50元)을 사 병사들의 조형물이 문 입구와 문 위를 지키고 있는 포곡구(褒谷口)라 쓴 문 안으로 들어간다.
▶ 옛 역참의 말과 병사 조각상
이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좌측에 말들과 병사들이 일렬로 서 있는 조형물이 있는데 바로 옛 잔도를 달리던 역참의 말과 병사들로 이곳을 통해 군사 정보와 문물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 이 폭포에 앉아 있는 미인은 포사(?)가 아닐까?
그곳을 지나면 포야곡 폭포란 인공폭포가 있는데 그 폭포 안에는 이름 모를 미모의 여인이 주위에서 춤추는 학과 함께 거문고처럼 생긴 악기를 연주하는 조형물이 보인다.
▶ 너무 똑똑해 조조에게 죽음을 당하는 양수
그곳을 지나면 한중(漢中)을 거쳐 간 많은 이들이 이야기들을 석상과 그림으로 상징물로 새겨 놓았다. 漢中開漢業(한중에서 한업이 열리다.) 한중의 가장 큰 존재의 가치는 아마도 한업(漢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 유비가 부흥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황제로 올라선 그 한나라, 그래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漢이란 말로 규정하게 된 그 漢, 이것들을 통틀어 한업(漢業)이라 한 것 같다.
▶ 소담정
정자에 연결된 회랑엔 소담정(笑談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소담이란 말은 삼국지연의에서 연유한 것으로 청나라 초 출간된 삼국지연의에는 제일 앞머리에 본문이 시작되기 전 서사(序詞)가 붙어 있는데 명대의 양신(楊愼)이란 사람이 쓴 임강선(臨江仙)이란 작품이다.
臨江仙(임강선)
滾滾長江東逝水,浪花淘盡英雄。(곤곤장강동절수, 낭화도진영웅) 장강은 도도히 동으로 흘러가며, 수많은 영웅들을 물거품에 쓸어갔네 是非成敗轉頭空,靑山依舊在,幾度夕陽紅。(시비성패전두공, 청산의구재, 기도석양홍) 시비와 성패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청산은 예와 같이 변함없는데, 붉은 석양은 몇 번이나 저물었던가 白髮漁樵江渚上,慣看秋月春風。(백발어초강저상, 관간추월춘풍) 강가의 백발의 어부와 나무꾼들, 가을 달과 봄 바람을 수없이 보았으리 一壺濁酒喜相逢,古今多少事,都付笑談中。(일대탁주희상봉, 고금다소사, 도부소담중) 탁주 한 병 놓고 기쁘게 만나 고금의 많은 이야기들 웃으며 나누는 이야기에 부쳐보리라 |
이 서사 끝 부분에 나오는 "웃으며 나누는 이야기"로 번역되는 '소담'이란 말을 차용해서 회랑의 이름은 지은 것이다. 이런 멋진 시 한편이 나온 다음에, "이르기를~ 천하는 나눠지면 필히 합쳐지고, 합쳐지면 필이 나눠지니 ...."라는 말로 본문 1회가 시작된다. 서사가 정말 멋지다. 웃으며 나누는 이야기란, 역사를 소설로 풀어간다는 의미로 저 짧은 두 글자에, 이미 역사가 강을 건너 소설의 세계로 넘어간다는 선언인 셈이다.
▶ 조조가 일필휘지로 썻다는 곤설
소담정을 조금 지나면 조조의 흔적 곤설(袞雪)이 나온다. 조조가 이 계곡을 지나면서 계곡의 바위에 부서지는 물방울을 보며 일필휘지로 멋지게 썼다는 조조의 필적으로 석각을 남겼는데, 진품은 한중박물관(고한대)에 있고, 여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곤룡포 곤(衮), 눈 설(雪) 이 두 글자는 조조가 한중 석문(현재 한중 면현의 동북지역)의 잔도(棧道)에 갔을 때, 흰 거품을 날리면 소용돌이치는 물줄기를 보고 시적 감흥을 받아 쓴 것이라고 한다. 소용돌이치며 물거품을 날리는 격류가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는 것과 같다는 의미란다. 물이 세차게 흐른다는 뜻의 곤(滾)은, 조조가 쓴 글자인 곤룡포 곤(袞)자에 삼수(氵) 변을 붙여야 하지만, 강물이 휘돌아 돌에 물을 뿌리니, 원래 있어야 할 삼수(氵) 변은 뿌려지는 강물로 대체하여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안문학의 영수인 조조가 갖고 있는 기개 넘치는 호방한 시인의 풍모를 멋지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시적 감흥으로 위장하여 임금이 입는 옷인 袞 자를 써서 위왕(魏王)으로 오르려는 야심을 표시했다고 하는데 그건 좀 오버해 해석한 것 같다. 그리고 곤룡포 곤(袞)자와 흐를 곤(滾)자는 중국말로 통가자(通假字) 즉 동일한 글자로 간주되는 글자라서, 삼수변이 있다 없다를 가지고 복잡한 해석을 하는 것은 한자에서 종종 하곤 하는 파자(破字)놀이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 조조의 단가행이 새겨진 바위
곤설이라 쓴 바위 동굴 일부엔 조조의 단가행(短歌行)가 새겨져 있다. 조조는 유능한 정치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것만은 아니었다. 문학가로서도 이름을 날렸으니, 그의 명작 <짧은 노래(短歌行)>를 보면 그의 문학이 상당히 호방하고 스케일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을 앞두고 술잔을 달에 비치면서 읊조리는 낭만적이기 까지 한 노래 단행가를 보면 조조는 중원 제패의 야망을 가졌으면서도 여유 있게 자신을 보듬을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다.
短歌行 曹操 對酒當歌 人生幾何 (대주당가 인생기하) 술을 마주하고 노래 부른다. 인생살이 얼마더냐? 譬如朝露 去日苦多 (비여조로 거일고다) 아침이슬 같으리니, 지난날의 많은 고통. 慨當以慷 憂思難忘 (개당이강 우사난망) 슬퍼하며 탄식해도, 근심 잊기 어렵구나. 何以解憂 唯有杜康 (하이해우 유유두강) 어떻게 근심을 풀을까? 오직 술(두강주)뿐일세. (중략) |
▶ 한고조 유방과 한신(우), 소하(좌) 상
커다란 석상이 보이는데 한중에 쫒겨 와 절치부심 힘을 길러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워 황제에 오른 漢高祖 유방의 석상이다. 석상의 우측엔 한신, 좌측엔 소하가 유방을 보좌해 서 있다. 한고조 유방은 세금을 경감하고 대외적으로 전쟁을 삼가는 등등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 인구도 증가하고 생산성도 향상돼 한나라는 내부적으로 강성해진다. 병력차출도 용이하고, 국가재정도 견실해진다.
▶ 한무제와 곽거병(우), 장건(좌)
그 옆에는 선친 경제의 열 번째 자식으로 모친 효경 황후의 화려하고 현란한 활약 덕분에 우여곡절을 끝내고 황제에 올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한 무제의 석상도 있는데 좌측에는 위청이, 우측에는 곽거병이 보좌하고 있다. 유방이 그렇게 나라를 세우고, 안으로 튼튼하게 해서 물려준 것을 제대로 이어받아 대외적으로 강대하게 뻗어나간 한무제다. 가운데가 한무제, 왼쪽은 위청, 오른쪽은 곽거병. 한무제는, 북쪽으로는 흉노에게 사실상 처음으로 이겼고, 서쪽으로는 서역 각국과 제휴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한사군을 설치하고 남쪽으로 베트남 지역으로 확장한다. 나라를 부하게 만드는 것과 나라를 강대하게 만드는 것은 약간 다르지만, 부강해지지 않고는 강대해질 수 없다. 단기적으로 강할 수는 있지만, 강하다고 해서 부유해지지는 않는다.
▶ 북벌을 떠나는 제갈량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주 역동적으로 만든 제갈량의 북벌 당시 모습을 담은 석상이다. 학우선을 들고 마차를 탄 제갈량이 수많은 장졸들을 거느리고 앞장 서 마치 “공격 앞으로!”라 명령하는 듯한 석상이다. 육출기산이라 해 6번이나 북벌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하고 오장원의 별이 되어 정군산에 묻힌 제갈량도 이곳을 통해 북벌에 나섰으니 의미있는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석상을 받치고 있는 아래쪽에는 군사북벌(挥師北伐)이라는 명패에 "촉한 건흥 5년 227년 승상 제갈량은 후주 유선에 출사표를 올리고 위를 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한중의 면양(지금의 면현)에 군사를 주둔하고 북벌을 계획한 지 어언 8년, 육출기산하며 건흥 12년 234년 봄, 제갈량은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선봉으로 삼아 포야곡으로 출발해 오장원에 주둔해 위의 사마의와 위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라고 써 있다.
▶ 도원결의 상
▶ 형주자사 유장
▶ 한중태수 장로
▶ 마대
▶ 강유
▶ 사마의
▶ 조운(자룡)
▶ 황충
그 외에도 삼국지에서 나온 도원결의를 하는 유관장 삼형제, 유장, 장합, 장로, 마대, 강유, 마초, 사마의, 조운, 황충 등의 석상 내지 동상도 보인다.
▶ 역대 왕조를 연 황제들
또한 진시황, 주원장 등 중국의 역대 각 왕조를 연 황제들의 동상도 만들어 놓았다.
▶ 근세의 중국 지도자 상
그런데 이 유적지에 마오쩌뚱, 덩샤오핑, 손중산 등의 동상은 왜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