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18 15:50
정정지 동인지에 실을 작품입니다.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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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
넘치려하고 있다
장마철 강 하류처럼
잡동사니로 가득 채인 가슴속이 들끓고 있다
전화가 왔다
송화기 속으로 탁류가 흘러간다
쉼 없이 빨려 들어간다
긴 통화가 끝났다
낮아진 수위
수면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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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 만들기
엄마는 밤늦도록
반짇고리에 담긴 색색의 헝겊을
들여다보고 있다
색깔 다른 헝겊들 이어서
한 장의 조각보를
만들 요량이다
이 서랍 저 서랍 굴러다니던
헝겊 조각을 반짇고리에 모았다
이혼하고 사내애 둘 키우던 남자와
사별하고 남매를 기르던 여자가
둥지를 틀고
아빠와 엄마가 되었다
남자의 아이 여자의 아이
머잖아 태어날 그들의 아이
모양도 색깔도 다른 헝겊들
완성된 조각보 펴 들고
환하게 웃을 날이
불면의 강 건너
깊은 골짜기에서 눈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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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그는 벽이었다
쪽문 하나 없는
완강하게 손사래치며
눈 감고 귀 막고
돌아앉아버린 저 철옹성
뚫어보려 애쓰던 말들
튕겨나와 널브러져 쌓이고
두드려보고 힘껏 밀어도 보지만
미동도 않는 까마득한 수직의 벽
담쟁이 덩굴이 여린손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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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음, 그 편안함에 대하여
외출하려고 신발장을 연다
어제 산 구두가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반짝이고 있다
인사를 나눈 지 얼마 안 된 우린
서로를 모른다
발을 힘껏 조여 오는 구두
발이 긴장한다
다른 것을 꺼낸다
주름지고 탄력 잃은 피부
여기저기 마른버짐 같은 상처
눈비 맞고 돌부리 부딪치며
오랜 세월 동행한
그의 품은 부드럽고 넉넉하다
오래된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선다
융화하는 그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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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장이 되다
어릴 때 갑판에서
조개껍데기 갖고 놀던 그가
선장이 되었다
아버지 어깨 너머 익힌 기술로
캄캄한 밤바다
폭풍우 미쳐 날뛰는 파도 거센 날도
항해를 멈출 수 없는
내가 만난 봄 중에 가장 환한 봄이었던 그
이제 항구에서 배를 탄 그를 보낸다
탄탄하지만 조금은 쓸쓸해 뵈는 그의 어깨 위에
간절한 나의 눈빛을 가만히 얹는다
켈트족의 기도문*을 주문처럼 외며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속내를 가진 바다위로
만선의 꿈을 안은 그가 멀어져간다
* 켈트족의 기도문
바람은 언제나 당신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서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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