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구상륙(倭寇上陸)
뜻밖에 조정에 왜구 상륙이란 급보가 들어오고 또 남산에 봉화도 연속하여 들어왔다. 선조 24년 임진 4월 13일에 일본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籐淸正) 흑전장정(黑田長政) 등이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날에 동래부에 침입하였다.
부산 첨사 정발(鄭撥)이 적에게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약간의 민병을 모아 성을 지키나 적병이 성을 외어 싸거늘 상현이 문루에 올 싸울 새 싸운 지 반일에 성이 함락되니 상현이 조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동치 않으니 행장이 생금(生擒)코자 하나 상현이 발로 차버리니 행장이 칼을 들어 쳐 죽이다.
상현이 죽음을 각오하고 부채에 글을 쓰되 고성일휘(孤城日彙) 열진고침(列陣高枕) 군신의중(君臣義重) 부자은경(父子恩輕)이라 기록하여 그 아버지께 붙여 드리다.
성이 이에 함락됨에 적이 삼로로 나누어 침입하니 중로는 소서행장이 주장하고 동로는 가등청정이 주장하고 서로는 흑전장정이 주장하여 거침없이 무인지경 같이 들어오니 동 16일에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의 강계가 경성에 도착되었다.
조정이 크게 놀라 이일(李鎰)로 순변사를 삼아 중로로 나아가 상주(尙州)를 지키게 하고 성응길(成應吉) 유극량(劉克良) 변기(邊璣) 신립(申砬) 등으로 하여금 동중서 삼로로 들어오는 적군을 막을 새 유성룡으로 하여금 도체찰사를 삼아 제군을 감독케 하였다.
4월 24일에 행장은 밀양을 침입하여 함락하고 또 상주에 이르러 이일과 싸울 새 이일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이때 신립은 조령을 지키더니 상주에 이일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조령(鳥嶺)을 버리고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 와서 유진하여 이때 행장은 조선의 제일 험한 관방은 조령이라 어이하면 이 조령을 무사히 넘을까 행장은 십분 주의하여 주저하다가 많은 척후병(斥候兵)을 보내어 지세를 살피고 탐지하였다.
뜻밖에 아무 수병 한개 없고 위험이 없는 것을 안 행장을 대군을 거느리고 무난히 태령을 넘어 27일 충주에 이르러 탄금대에서 신립과 싸웠는데 신립은 그때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응전할 새 오도 가도 못하고 군사가 많이 물에 몰사하고 신립도 아장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전사하니 조선의 제일 큰 요색이 함락되고 또 삼로군이 이 지방에 모이기로 되었는데 청정의 일대는 언양(彦陽)을 치고 다름 경주(慶州)를 거쳐 충주에 들어와 행장과 만아고 흑전장정은 김해로 창원으로 성주를 거쳐 경성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4월 28일에 충주에 패보가 경성에 이름에 왕은 임시 어전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는 중 이양원(李陽元)으로 유도대장을 삼고 김명원(金命元)으로 도원수를 삼아 도성을 지키게 하고 왕은 이산해 유성룡 등 백여 인을 거느리고 평양을 향하여 떠나갈 새 일번 제 왕자를 각도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고 또 애통소(哀痛紹)를 내리어 팔도(八道)의 의병을 모집하다.
9일 밤에 왕이 개성에 이르니 밤이 임의 새였으나 군신과 상하(上下)가 다 먹지 못하여 주리었다. 글만 읽던 선배들이 경국의 대책을 모르고 창졸간 이런 일을 당하니 행재에 먹을 양식도 준비치 못하였으니 참 한심한 일이다.
평일에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고 떠들던 인물들이 당파만 지키면 그만일 줄 알던 오괴한 선배들 판탕을 당하여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제 병서한 한자도 읽지 못한 이양원과 김명원이 경성을 지키고 있으니 무슨 힘이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