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신당리에 있는 재실.
[위치]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신당리 427에 위치한다. 각남면사무소 정면의 국도 20호선을 따라 이서 삼거리 방향으로 약 800m 가다 좌회전하여 이실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내에 신당 1리 경로 회관이 있다. 이 신당 1리 경로 회관에서 야산으로 약 300m 정도 가면 길 좌측에 있다.
[변천]
의성 김씨 문중에서 입향조인 김경원(金慶元)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1780년에 건립하였다.
[형태]
재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 담장 사이에는 철문을 설치하여 재사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온돌방 2칸과 대청 1칸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둔 편방형(偏房形)이다. 가구(架構)는 3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현황]
2012년 현재 추원재는 현재 퇴락하여 보존 상태가 불량하며, 주변은 잡풀로 우거져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조선 말까지 대구진 풍각현에 속했던 곳이다. 신당 1리는 1600년 말경 달성 서씨 서대건이 입촌하여 형성된 마을이며, 신당 2리는 1600년말 창녕 성씨 성세린이 입촌하여 세웠지만 이후 의성 김씨 김경원이 정착하여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명칭 유래]
신당리는 곽당과 가마실 그리고 이실을 합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가마실[신당] 마을은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고려 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두야보 부곡(豆也保部曲)으로 알려져 있다. 부곡은 신라 때부터 있었으며, 향(鄕)·소(所)와 함께 군현(郡縣)의 임내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거주민은 군현민에 의해 신분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실[耳谷]은 이길원(梨吉院)이 있었던 자리로 지나는 과객들이 머물던 주막이 위치했던 곳이다. 조선 말까지 풍각현 현동면과 청도군 내서면의 경계 지역이었다. 이실 마을 입구에 엄목정이라고 해서 큰 느티나무 정자와 주막이 있었는데, 도로 확장을 하면서 옛 모습이 모두 없어졌다. 이실은 이길원이 있었고 전해지는 곳으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주막도 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대구군 초동면 지역에 속해 있었던 신당리는 1906년에 청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곡동과 내서면, 이곡동을 병합하여 신당동이라 하고 각남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신당동이 신당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오산(鰲山)[남산]에서 내려온 산등성이가 신당리에서 멈춘다. 신당리는 산을 등지고 앉아서 서북향을 하고 있다. 신당리 서쪽을 흐르는 부곡천이 청도천을 만나면서 신당리를 감싸고 있다.
가마실과 이실은 산곡에 자리 잡고 있으나 곽당은 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들은 대부분 마을 앞에 형성되어 있고 경지 정리는 청도천 앞만 되어 있는 편이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 면적은 2.803299㎡이며, 총 108가구에 221명[남자 92명, 여자 12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족은 각남면 예리리·구곡리, 서쪽은 각남면 녹명리, 남쪽은 각남면 사리, 북쪽은 이서면 가금리·구라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신당 1리와 신당 2리가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곽당과 가마실, 이실 마을이 있다.
인구에 비해 비교적 넓은 농지를 이루고 있다. 국도 20호선 동서로 지나고 지방도 902호선이 북 남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방도를 따라 풍각 순환 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신당 마을 위쪽에는 토기 요지가 남아 있으며 신라와 고려의 토기 조각이 산포해 있다. 신당 마을 농지 정리와 함께 발견된 신당리 고인돌 유적지에서는 간돌검과 화살촉 등 청동기 시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옥황상제가 천리장성을 쌓기 위해서 전국의 돌을 불러 모았는데 어떤 신선이 돌을 몰고 가다가 힘들어서 잠시 쉬는 동안 천리장성이 완성됨에 따라 그대로 주저앉아 이곳에 돌이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