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곡(哭) 석오선생(石吾先生) 영전(靈前)(1948년 9월 20일)
석오(石吾)는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아호(雅號)이다. 그는 호탕불기(豪宕不羈)의 뜻이 있어 구한말에 응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 선(先)은 국가의 휴척(休戚)을 같이 하던 훈구(勳舊)의 후예로 국가 반예(扳裔)를 보고 사도(仕道)에 나아가지 않기로 뜻을 정하고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전덕기(全德基) 등 제씨(諸氏)로 더불어 독립협회를 창시하여 시정을 풍자하다가 시재(時宰)들의 미움을 받아 협회가 해산한 후로는 감리교(監理敎) 상동교회 내에 피신하였다. 그 때에 한국이 치외법권이 없는 고로 미국인의 주택인 교회에 한국순사가 들어오지 못한 고로 교회가 도피성이 되었다. 나는 그때 그 교회에 통근하며 공옥학교(攻玉學校)의 일을 보았다. 그리하여 석오(石吾)와 같이 숙식을 하며 다소 의지가 상통이 되어 그의 소개로 나도 신민회(新民會)에 들게 되어 힘 미치는 대로 그를 도와 일하였다.
석오(石吾)는 그때 윤치호(尹致昊) 씨의 하는 일에 대하여 통매(痛罵)하는 것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윤치호(尹致昊) 씨는 당시 명사(名士)로 구국에 뜻있는 사람 아니냐고 물었더니 나더러 그렇게 믿지 말라고 부탁한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때 다른 동지는 다 옥에 몰아넣고 저 혼자 살짝 피하여 덕원감리(監理)가 되었으니 그 인격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뿐인가 보호조약(保護條約) 때 법무협변(法務協辨)으로 조인(調印)한 자라고 한다.
지금 와서 그의 경력을 상고해 보면 일제 때 너무 변태성을 가졌던 것을 보면 석오(石吾) 선생의 선견지명을 탄복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조선에 있을 수 없어 이회영(李會榮) 씨와 상약(相約)하고 아들 표준(表俊)을 데리고 만주(滿洲)에 들어가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표준(表俊)은 영측(怜側)하여 족히 내부(乃父)의 뜻을 이어 유용한 인재가 될 희망이 있더니 불행히 만주(滿洲)에서 병사(病死)하고 만주(滿洲)에서 범찬처숙(凡餐處宿)하며 사방에 표류하다가 일인(日人)의 세력이 만주(滿洲)에 들어오기 시작하므로 역시 그곳도 있을 수 없어 북경(北京)과 상해(上海) 방면으로 다니며 동지를 규합하여 격렬한 독립운동을 일으켜 상해(上海) 불조계내(佛租界內)에 특히 한인(韓人)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세우고 한인의 희망으로 임시정부 위원장까지 되었었다.
선생의 장점은 조국애로 불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의 성격이 평생에 격인해물지심(隔人害物之心)이 없고 영광이면 남에게 돌리고 치욕이면 자기가 담당하는 그런 미덕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다 낙부(樂付)하고 또 임사(任事)에 탄연(坦然)하여 그리 실수가 없는 대인물이다. 상해(上海)도 있을 수 없어 구강방면(九江方面)으로 피신하여 다니며 동지를 격려하며 우리 정부의 존재를 유지하였고 동지 중 더러는 민족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로 넘어 간 자가 많으므로 선생은 이에 고심하여 만회에 노력하였으며 또 동지들은 다 적수공권이라. 생활이 극도 곤란하여 대의를 생각할 여지가 없을 때 선생은 호조(互助)의 정신을 고취하여 동지들로 하여금 혹은 상업 혹은 취직 각 방면으로 인도하여 끝까지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대동아(大東亞) 전쟁이 발발하여 중원천지(中院天地)가 크게 소요해지고 우리 정부의 존재가 극난함으로 불가불 중경정부(重慶政府)와 같이 항일전선(抗日戰線)에 나서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고 또는 우리 단독으로는 할 수 없는 고로 중경정부(重慶政府)와 같이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문을 중외(中外)에 반포하고 일로의용군(一路義勇軍)을 조직하여 장병을 만들어 중병(中兵)과 같이 항전하여 각처에서 다대(多大)한 전과를 거두었다. 예하면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청산리(靑山裏) 전첩(戰捷)은 세계의 찬양하는 바이며 또 상해사변(上海事變)에 중국 19로군의 승리도 역시 조선인의 공이라고 전하여졌고 홍구공원(公園)의 일황탄일축하식(誕日祝賀式)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투척사건은 세계인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 등이 모두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선생은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주야 불면불휴(不眠不休) 노심초사(勞心焦思)로 동지를 규합하는 것과 원수를 대적하는 일이 그대로 성공의 길을 밟아 나아갔다. 한참 당시에 중원 천지에도 일본놈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어느 때는 피신할 곳까지 곤란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불행히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광동계림(廣東桂林)에서 큰 뜻을 동지들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떳다. 그 유해가 타국에 묻혀 환국(還國)의 희망이 없더니 천행으로 해방이 되어 혁명동지들이 다시 고국에 돌아오게 되고 특히 김구(金九) 선생이 자기 가족의 유해를 고국으로 운반하는 때 선생의 유해도 같이 운반되어 사회장으로 선생의 유해는 삼열사(三烈士)의 묻힌 효창공원(孝昌公園)에 1948년 9월 22일에 안장(安葬)하였다. 나는 그때 강릉(江陵) 객사(客舍)에 있으며 집집(執緝)의 역(役)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두어 줄 눈물과 글을 붙여 보내었다.
*상단추기 - 선생은 같이 예배는 하여도 세례 받기를 원치 않았다. 선생은 말하기를 나는 죄가 많고 지금 선(善)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는 교인되기 어렵다. 그는 애국지상주의자(愛國地上主義者)이다.
* 한시(漢詩) - 애산 김진호 지음
<한시> 곡(哭) 석오선생(石吾先生) 만사(輓詞)
韓末與義士 대한제국 말기의 의사들은
殞身不惜死 목숨 아끼지 않고 죽었네.
介際如公淸 그때에 공처럼 청렴한 분
有誰能屈指 손꼽을 이가 누가 있겠소?
有榮必讓人 영광은 남에게 양보를 하고
有辱必歸已 치욕은 자기에게 돌렸다오.
拯民爲本業 백성 건짐이 본업이 되었고
救國爲大義 나라를 구함이 큰 뜻이었소.
此外有何求 이외에 무슨 구함 있었나요?
一切度外視 일체를 버리고 도외시했네.
靈辱遍內外 신령함과 욕됨 안팎 널렸고
四方有杞梓 사방에 인재들도 많았었네.
尙洞地下室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우리
深深論大事 깊고 깊은 큰일을 논했네.
冒死傾肝肺 죽음을 무릅쓰고 충성하고
忘生其沸洄 생명을 잊은 피가 끓었네.
內有無形念 형언할 수 없는 속생각 있고
幹部新民是 신민회 간부를 맡았었네.
敎育有靑學 청년학원에 교육도 했으나
接道有每低 종교에는 매번 낮추었네.
此地是骨幹 이곳이 중심바탕이 되었고
日讎攷毒笑 일본 원수엔 독 웃음 지었네.
入滿非本意 만주 간 건 본 뜻 아니나
置身實無地 몸 둘 곳이 정말 없었네.
友堂踏其後 이회영이 그의 뒤를 밟았고
雩南涵其題 이승만이 그 주제를 받았네.
全牧亦已世 전덕기 목사도 세상 떠나고
間內無同志 그 동안에는 동지가 없었네.
馬死黃金盡 말 죽고 돈도 다 떨어지고
處處被風起 곳곳에 이는 풍파를 입었네.
石吾何處在 석오는 어느 곳에 있는가?
飄零邱海視 산과 바다 떠돌며 보시라.
死生不同國 그때와 지금 나라 다른데
遺恨彌于禩 제사에 남은 한이 가득하오.
獨立宣言日 독립을 선포하던 날
萬姓總歡喜 만백성 다 환희가 넘쳤소.
我獨權胸哭 우린 독립 가슴에 울었는데
以見不在此 여기에 안 계셔 보지 못했소.
追憶遭遇共 함께 만났던 추억에는
險山又險水 산도 험하고 물도 위험했소.
朝鮮之解放 조선이 해방한 사실 이젠
無非見所碣 나타내지 않는 비석 없다오.
痛哭輓
友人 金鎭浩 在江陵旅舍
통곡하며 만사를 씀
친구 김진호 강릉 여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