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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7장 1-29절
결코 빼앗기지 않는 복
에서와 야곱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25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특히 그들이 태어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예정의 교리, 즉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서 9장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에서가 유기자로 있고 야곱이 선택자로 있는 것은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25장에서 그들이 장성하고 난 뒤 장자의 명분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는데, 에서의 경우는 자신의 배고픔으로 인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된 모습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가? 야곱도 자신의 죄성을 드러냅니다. 형이 배고프면 아우로서 형의 배고픔을 채워줘야 합니다. 그것이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장자의 명분을 팔도록 꾀를 냈습니다. 속임수를 써서 빼앗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즉 행위로 보자면 두 사람 다 선택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든 것이 고려가 되지 않은 채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물론 주의해야 할 것은 있습니다.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누구는 선택하기로 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시기 때문에 야곱처럼 속여서 빼앗는 것도 괜찮은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27장 그리고 창세기 28장의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장자의 명분을 산 것과 같은 일이 창세기 27장에서도 벌어집니다. 이삭이 나이가 들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할 때 리브가가 야곱과 함께 에서에게 주고자 하는 축복을 빼앗게 됩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거짓된 방법을 동원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형을 피해 도망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창35:1 참조). 즉 죄를 내놓고 점과 흠을 내놓으면 그것에 따른 결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방향은 선택 받았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괜찮다가 아니라, 선택의 목적인 거룩하고 흠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가 아니라, 선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방향으로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괜찮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 살 수 있겠느냐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롬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냐? 끊임없이 죄를 내놓습니다. 점과 흠을 내놓습니다. 자기의 꾀를 내놓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것처럼 행하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자신이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고 확증하시며 선택하신 바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제 창세기 27장으로 오시면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장자의 명분을 가져온 것과 비슷한 사건을 만나게 되는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는가? 없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1절 이하 4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의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육체적으로 볼 때 쇠약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맏아들인 에서를 불러 축복하려고 하는데, 이때 축복은 단순히 내 자녀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복, 다시 말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그리고 그 복을 이삭에게도 주셨는데, 바로 그 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축복이라면 야곱에게 축복하고 난 뒤 에서가 내게도 복을 달라고 부탁할 때 축복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읽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27장 37절에 보면 한번 축복한 내용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축복을 빌어주는, 복 받기를 소원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이것이 특별한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여기에서 언급된 축도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선택의 은혜를 분명히 밝히는 합법적 허락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조상들에게 그들의 후손에게도 영영토록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셨다. 그들은 임종 때가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자기들의 후손들에게 안전하게 계승시키기 위해 마치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듯이 하여 그 축복을 소유케 하려고 했다. 아브라함도 그와 같이 자기 아들 이삭을 축복하였고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그를 영적 생명의 상속자로 세웠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삭이 역시 동일한 의도를 갖고 있다.” 선택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택자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복,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이삭은 단지 아버지의 신분이라든가 일개 개인이라는 신분보다는 선지자의 신분으로서 자기가 받은 은혜의 상속권을 넘겨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삭의 크나큰 잘못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서와 야곱이 태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25:23). 다시 말해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주신 영원한 복을 큰 자가 아니라 어린 자에게 주고자 하셨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대상에게 축복하고자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삭은 에서에 대하여 더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뜻에 따라 큰 자를 복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장자에 대한 그의 완고한 애착은 일종의 맹목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장애물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칼빈). 육적 눈의 어두움보다 영적 눈의 어두움이 더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이삭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기도하는 자로 있다고 해서, 경건의 훈련을 한다고 해서 그 부패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훈련이 결코 무익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디모데전서 4장 8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경건이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까지 말씀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생에서는 그런 훈련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패성을 다 몰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그 말씀보다 자신의 어리석고 무분별한 세상적 애정에 마음을 두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알지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상관없는 쪽으로 행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방해를 받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이삭은 에서에게 복을 주고자 하지만 결국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복을 주는 것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이삭의 잘못뿐만 아니라 리브가와 야곱의 잘못된 행동도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 가운데서도 자신의 뜻을 펼쳐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5절 이하를 보시면 야곱이 어떻게 해서 축복을 얻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한 마디로 리브가와 야곱의 간교한 술책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그 과정으로서 5절 이하 10절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여러분, 이삭만이 아니라 리브가 역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할 때(창25:28) 리브가의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면 이런 면에서는 분명 이삭보다 더 나은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읽은 내용 속에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야곱에게 주어야 할 축복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거짓된 방법으로 취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리브가는 남편을 속이고자 합니다. 거짓말 자체도 나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라는 신성한 일을 거짓으로 취하고자 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더더욱 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어머니에 대해 야곱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조하게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 되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데,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비록 아버지인 이삭의 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형의 경우 털이 많은 사람이요 자신은 매끈매끈한 사람인지라 혹시라도 만져보게 된다면 속이는 것이 발각될 수 있기 때문에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을 보시면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분명 리브가는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야곱처럼 들킬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것은 죄를 억제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런 마음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저주를 받아도 좋으니 내 말대로 하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혹 들키게 되어 이삭이 저주한다면 그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실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의 말대로 실행하게 됩니다. 14절 이하 17절을 보시면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 앞서 야곱이 근심한 것 때문에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의 옷을 입힐 뿐만 아니라, 털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인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에게 내 주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위해 인간이 개입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죄악 된 모습만 나타날 뿐임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할 때 리브가가 개입하지 않고 야곱이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본래는 야곱이 받아야 할 영적인 복이 에서에게 주어지느냐는 겁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 일을 행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의 말씀을 붙든다고 할 때 가장 정당한 자세는 말씀 안에서 허락된 것으로만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 거짓된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은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거짓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거짓을 동원하기보다는 이삭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잠잠히 지켜봐야 합니다. 인내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고자 하면 거기에는 항상 인간의 죄, 인간의 실수, 인간의 점과 흠이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어머니 리브가가 준비해 준 음식과 복장을 갖추고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야곱의 뻔뻔함, 다시 말해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무감각해져 있는 죄악성을 보게 됩니다. 17절 이하 23절을 보시면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게 될 때 죄에 대하여 무뎌지는 인간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례로써 우리는 누구든지 의무의 고유한 한계를 범하면 곧 무한정한 방종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합당한 것보다 지나친 일을 시도하는 자는 사단에게 문을 개방하는 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들이 있는데 그 선을 넘어가면 방종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무뎌지고, 나아가서는 죄에 대하여 담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당한 것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그럼 합당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뭔가를 취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합당치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다면 이웃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시기, 질투도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처한 모든 것에 대하여서도 불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자족하는 마음, 이것이 말씀 안에 머무르는 합당한 선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은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넘어가 버립니다. 말씀을 폐합니다. 말씀을 흐릿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말씀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거짓을 동원했는데, 그것이 발각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큰 자에게 축복하려고 하십니까? 아마도 리브가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이 드러나기까지는 얼마나 죄악에 대하여 담대한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거짓을 처음 말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러나 두려움도 잠시일 뿐, 죄를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더더욱 죄에 대하여 무뎌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으로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야곱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기까지 합니다. 20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해서 이렇게 속히 잡아 올 수 있느냐고 이삭이 물었을 때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 자체가 거짓인데, 그 거짓에 누구의 이름을 보태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축복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순조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의 거짓으로 인하여 형 에서의 마음이 좋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형을 피해 도망하게 됩니다. 도망하여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창47:9 참조). 죄의 결과입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가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시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교훈 받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순조로워 보여도 거기에 거짓이 동원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방식들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결코 순조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말씀을 상관없는 방식들을 도입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순조롭게 성장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순조롭지 않습니다. 순조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참고 있을 뿐이지, 무너뜨리고자 하신다면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식이 아닌데 거기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괜찮다고 여겨서도 안 되고, 괜찮은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처음부터 해 오던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 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니까 괜찮은 것처럼 하지만 무지함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쌓아갈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정할 수 없는 모든 방식은 결코 주 앞에 합당할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교훈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지금 야곱은 에서의 모습으로 변장해 있습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지만 에서의 옷을 입고 에서처럼 털을 붙여서 에서인 양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옷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옷을 입지 않고는 거짓과 술수, 더러움 외에 내 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옷만이 그런 모든 거짓, 술수, 더러움을 가릴 수 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옷을 입은 자만이 거짓과 술수, 더러움을 조금이라도 멀리 할 수 있고 멀리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
실제로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거짓말하는 자로 있습니다. 그 거짓으로 인하여 도망하게 되지만 도망한 곳, 즉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에게 가서도 그렇게 신앙적인 모습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붙드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야곱이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십니다(창32:28).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역사를 펼쳐내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그 죄의 옷을 입고 또 입기보다는,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뎌지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옷을 찾고 그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서야 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모습이 드러난다면 죄를 회개해야 하고, 그것이 성도에게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합당한 옷이 무엇인지를 말씀 안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로까지 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계속해서 24절 이하 29절을 보시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물론 축복하기까지 과연 참으로 자신의 장자인 에서가 맞는지를 확인하려고 하지만 그의 눈을 볼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축복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인간의 죄악 됨이 있습니다. 인간의 거짓과 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죄이지 하나님이 죄를 짓도록 부추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죄조차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삭 입장에서는 큰 실수를 한 것이지만, 그리고 거기에는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이라는 죄악도 결부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은 그대로 실행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이삭의) 태만의 결과로써 발생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장자 에서의 권리를 박탈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그리고 애태워 가면서 이모저모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감각을 무디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은 일면 하나님께서 한 번 공포하신 것은 인간들이 아무리 변경시키려고 노력해 보아도 헛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일면으로는 이런 종류의 징계로써 이삭이 장자에게 대해 품은 맹목적 애착심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삭의 뜻한 바가 있다 할지라도 그 뜻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축복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품었던 뜻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인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만 간약히 살피고 정리하고자 하는데, 27절 중반부터 29절이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복의 내용이 영원한 복, 영적인 복이라기보다는 지상의 복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 본 것처럼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지만 그 땅을 통하여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게 하셨다는 게 핵심입니다. 특히 구약의 경우 지상의 복을 약속함으로 천상의 복을 내다보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부활하는 자들의 처음 열매요 영원하고 썩지 않는 생명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습을 나타내시기까지는 그림자 방식으로 설명했던 것이 구약입니다. 때문에 외적인 복을 약속하는 것처럼, 우리도 외적인 복을 바라봐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29절에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네가 형제들의 주과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왕권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민수기 24장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열국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12장 3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영적인 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동일한 복을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복에서 제외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누가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 약속을 받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고 말씀하심으로 영적인 복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주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선택을 받았느냐? 에서가 아니라 야곱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서만 그렇게 선택 받은 것입니다. 그 뜻을 사람의 뜻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야곱인데, 이삭의 뜻은 에서라고 해서 에서에게 주어질 복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죄악도 괜찮은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리브가가 꾀를 내지 않았으면 에서에게 영원한 복이 돌아갔을까?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비록 거짓이지만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죄악을 기뻐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기로 하셨다면 그 복을 빼앗기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때문에 굳이 거짓이라는 방법을 동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할 때 그 뜻이 실행되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방법 안에서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의 뜻과 방법을 동원할 때가 많습니다. 거기에 죄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죄의 저자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점과 흠, 죄악이 나타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이삭과 같고, 리브가와 같고, 야곱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내세웁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동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점과 흠이요, 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과 흠, 죄 속에서도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한번 선택하셨다면 선택에 걸맞은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바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겁니다. 이 복을 빼앗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