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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우리가 읽은 본문은 대괄호 부분으로 해서 각주로 ‘어떤 사본에, 7:53부터 8:11까지 없음’으로 표시해 두고 있습니다. 내용 자체는 음행 중에 잡혀온 여자가 용서를 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끔 하는 말씀이지만 성경 사본 중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사본에는 이 기록이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시해 둔 것입니다. 특히 내용의 흐름상 본문은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데 있어 매끄럽지 않다, 다시 말해 본문의 내용을 빼고 요한복음 7장 52절에서 곧바로 요한복음 8장 12절로 넘어가는 것이 전체 흐름으로 볼 때 매끄럽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7장이 초막절 기간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르치시면서 유대인들과 논쟁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면 그 논쟁의 한 예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7장 19절에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저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분명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달랐습니다. 또한 율법을 통해서도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했지만 정작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그러나 성경이 모든 기록이 주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할 때 바로 교회를 향해 율법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런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국 성취되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요한복음 7장 53절과 요한복음 8장 1절을 보면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초막절 기간, 정확하게는 초막절 중간쯤 되었을 때부터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논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명절 끝날’에도 동일하게 가르치시고 논쟁을 통해 설명하시고 난 뒤 이제 초막절 마지막 날이 다 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요한복음 자체에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보면 아마도 홀로 그곳에서 기도하시면서 쉬셨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마14:23, 눅21:37참조).
그리고 이어지는 2절 내용을 보면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초막절은 끝났지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성전으로 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도 언급한 것처럼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것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마9:36). 이런 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을 때도 동일하게 행하셨는데, 누가복음 21장 37절, 3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그러니까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을 때는 자주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이라는 곳에서 쉬시면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침이라고 되어 있지만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24장 1절에서는 ‘새벽’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누가복음 21장 38절의 말씀처럼 이른 아침을 의미합니다. 동이 틀 때 쯤, 일찍부터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셨던 것이고,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백성들 역시 일찍부터 성전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초막절 중간부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한번만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그렇게 해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7절의 표현처럼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는데, 그것을 명절 내도록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명절이 끝나고도 그 일을 계속하셨다는 것이고, 백성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때 동틀 때부터 나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열심을 가졌다는 것인데, 열심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가? 더러는 그렇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내용 속에서 주의 진리에 합당한 열심만큼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동이 틀 때부터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그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그런 외적 모습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사람을 끌고 오는데,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일단 율법은 간음죄에 대하여 죽일 것을 명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2장 22절에서는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고도 말씀합니다. 남의 아내, 유부녀만이 아니라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약혼한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신명기 22장 24절입니다.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간음하다가 잡힌 자를 죽이는 일은 악을 제하기 위함입니다. 그 악이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런 악을 보면서 그런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런 이해가 있었고, 그런 이해를 가지고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문제는 저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순순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빠뜨리기 위함이라는 데 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방금 레위기 20장 10절, 신명기 22장 22절과 24절을 봤지만 율법 자체는 간음한 자에 대하여 죽일 것을 명하고, 죽이는 방식으로는 돌리 쳐서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사형제도가 돌을 던지는 방식이라고 할 때 지금 저들은 이런 율법을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당신은 어떻게 행하겠느냐고 묻습니다. 평소에도 율법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처럼 여기에 대해서도 가르쳐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참된 뜻을 알고자 묻는 게 아니라,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저들이 생각할 때 이 문제만큼은 예수를 고소하기에 충분한 올무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대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율법대로 행한 것이긴 하지만 평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참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말씀하신 분이 그런 결정을 한다고 할 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듣는다 할 때 결국 자기 스스로가 모순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모세의 율법대로 여자를 돌로 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율법을 어기게 됨으로 고소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백성으로 하여금 불신하게 하든가, 아니면 율법을 위반하게 하기 위해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든 올무에 걸려 넘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소한 조건을 얻기 위함이라고 할 때는 아마도 후자 입장, 다시 말해 예수님의 평소 가르침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고, 참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말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하기 때문에 용서할 것이라고 예상한 듯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백성들 앞에서 선생 노릇하지 못하도록 할 마음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마태복음 15장 8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초막절 기간 동안 유대인과 논쟁하시면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요7:19). 안식일 할례를 행하는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안식일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일, 그것도 몸과 영혼을 자유하게 하는 일이 어떻게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전에는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으로, 심지어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을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했지만, 정작 그의 말씀 앞에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반박할 수 없고 대꾸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은 더욱 예수님에 대한 반감으로 커져갔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들을 듣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아랫사람을 보내어 잡아오라고 명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랫사람들조차 잡아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으면 있을수록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더더욱 예수를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까란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를 잡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물을 때 예수님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6절 하반부를 보시면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묻는 저들에게 “이것이다, 저것이다”란 말씀을 하시지 않고 ,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어서 우리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7절과 8절에 보시면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동안 저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고, 결국 땅에 쓰시던 것을 멈추시고 일어나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리 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 다시금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기를 쓰셨다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실 때 율법은 형을 집행할 때 먼저 증인들이 돌리 치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신명기 17장 7절입니다.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왜 율법은 증인으로 하여금 먼저 돌로 치게 하는가? 증인의 증언을 최대한 신중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거짓된 증언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억울하게 죽는다면 그것은 그의 증언과 그가 먼저 형을 집행한 자로서 그것은 살인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리심으로 너도 그런 형벌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리 치라는 말씀은 이런 율법의 한 면을 분명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을 들어 먼저 치는 자는 여자의 죄를 증언하는 자와 같고, 또 돌에 맞아 죽는 자는 죄인임을 분명히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리 치라고 말씀합니다. 저들의 율법 이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밝히신 것처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다시 말해 실제적인 살인, 실제적인 간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단지 외적으로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실 때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말씀하심으로 양심에 가책을 느껴 성전에서 나갔다고 하시기 때문에 아마도 율법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쓰셨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살인과 관련해서 형제에게 노하는 것은 살인이 아닌가? 형제에 대하여 욕하는 것은 살인이 아닌가? 형제에 대하여 업신여기는 말을 하는 것은 살인이 아닌가?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를 보면서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이 아닌가?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어른으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성전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만 남게 되었는가? 예수님과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 때문에 합당한 권징, 합당한 징계까지 행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8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부터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숨겨진 죄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죄가 드러난다면, 그러나 그것이 공적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어떤 한 개인이 알게 되었다면 알게 된 자가 죄에서 돌이킬 것을 권면하도록 합니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죄를 지적하여 넘어뜨리고 상처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매우 신중을 요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권면에도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두 세 증인과 함께 재차 권면하도록 하라고 명합니다. 이때도 공적 권면보다는 사적인 것이고, 사적이라고 할 때 단지 개인이 아니라 두 세 증인을 함께 가도록 하는 것은 공적 권면 앞에서 혹 죄를 범한 자가 말을 바꾸어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알게 된 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때는 공적 권징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때는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교회 가운데 있지 못하도록 하는 권징까지 시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끝까지 죄를 고집해서는 안 되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이런 권징의 내용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는 그 가운데서도 그 목적은 그들을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구약의 사형에 대하여 말했지만 왜 죽이라고 명하시는가? 너희 중에 있는 악을 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가, 다시 말해 주의 몸 된 교회가 죄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통해 거룩하게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요,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런 심판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게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음행이 고린도교회 안에 일어났을 때 사도 바울은 왜 그를 출교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편지에 써 보냅니다. 그러나 출교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 할 때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출교의 내용 자체는 사탄에게 내주는 것, 앞서 말한 내용으로 하자면 이방인과 세리로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출교의 목적은 그렇게 해서라도 그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한 목적,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다는 것을 외형적으로 있게 함으로, 또 그렇게 끊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함으로 빨리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합당한 권징, 합당한 징계조차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느냐? 저들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율법의 바른 해석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특히 지금 이 여자를 데리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자들로 있는데, 그런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율법을 통해 죄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자가 있다면 먼저 돌리 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누구도 예외 없이 율법 앞에서는 다 죄인이들 드러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인으로 드러난다고 할 때 죄인이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은 죄인이 죄인을 심판합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할 수 없지만 그런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는 형태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죄인은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바로 이 말씀으로 인해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양심에 가책을 받고 성전에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고 나갔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부분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모두가 다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후 여전히 논쟁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의 이런 모습이 굉장히 기이한 역사라는 데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는데,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율법에 따르자면 분명 여자가 범한 간음죄는 죽을만한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고발하던 사람, 그리고 여자를 정죄하던 사람을 다 물리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자신도 여자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본래 율법의 고발과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한 여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고발과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해서 율법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간음죄뿐 아니라 어떠한 죄든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것은 율법의 명령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된 자들은 더욱 하나님의 율법에 매여 그의 뜻을 따르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율법 안에는 도덕법 외에도 의식법, 재판법(시민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의식법의 경우 유아교회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으로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제사법이나 절기 등을 말합니다. 그 모든 의식법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폐지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구약 방식의 제사법이나 절기 등을 지키지 않습니다. 재판법의 경우는 이스라엘 국가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도록 한시적으로 주신 법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간음한 여자에 대하여 죽일 것을 명하는 것이 이런 재판법에 속하는데, 이 법은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와 함께 만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7).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의식법이나 재판법의 형식은 분명히 폐하셨지만, 의식법과 재판법에 담긴 정신은 여전히 도덕법 안에 살아 있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의식법은 폐하셨지만 제1-4계명에서 여전히 ‘예배와 경건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가르치십니다. 또한 재판법은 폐하셨지만 제5-10계명에서 여전히 ‘질서와 사랑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가르치십니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그때 이루어지지만(요19:30) 오늘 본문은 그런 교훈을 미리 알리십니다. 무엇을 알리시는가? 구약 이스라엘 국가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도록 한시적으로 주신 그 법은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아온 여자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누구도 율법을 통해 정죄하지 않도록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율법 자체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통해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도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국가마다 사형이 합법적인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도 있는데, 개혁자들은 대부분 국가의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칼의 권세를 주셨고, 그런 칼의 권세는 사형까지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식법과 함께 재판법이 폐지되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정신이 도덕법 안에 그대로 있다고 할 때, 그리고 이 도덕법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고 할 때 국가의 사형제도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6계명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의 경우 한시적으로 사형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가나안 주민들을 진멸하기까지 하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죄에 대한 심판과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가운데 퍼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한시적 조치로 있었습니다. 율법을 완성하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있는 그런 법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목사님(JS)은 요한복음 8장이 이스라엘의 재판법, 시민법을 폐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뚜렷한 본문이라고도 말합니다. 당연히 사형제도도 이런 말씀 앞에서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무엇까지 말할 수 있는가? 최후 심판을 암시하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최후심판의 심판자는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다시금 재림하실 것인데, 이때 재림하시는 이유는 모든 것을 선악 간에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법정의 경우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심판하기 위해 모여서 정죄하지만,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누구도 심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그들도 죄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심판자인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심판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권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심판자입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양심을 따라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왜냐하면 양심 자체가 도덕법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로마서 2장 14절과 15절을 통해 증거 되기도 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양심은 착한 양심(딤전1:19), 깨끗한 양심(딤전3:9)과 상관없이 양심이 화인을 맞아(딤전4:2)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비된 것처럼, 사탄의 노예가 된 것처럼 양심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후심판대 앞에서는, 다시 말해 유일한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양심을 따라 자신의 죄인 됨을 보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죄인 됨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지 못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한편에 있던 사람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한 그런 말씀은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 받지 않는 자가 있는데, 그가 누군가? 예수님 앞에 있는 여자입니다. 율법을 따라서는 그도 정죄를 받아야 하지만 누구도 정죄할 수 없고 예수님조차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대상입니다. 죄가 없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분명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되셔서 정죄 받아야 할 죄인의 죄를 대신하여 지심으로 죄 없다고 선언한 대상입니다. 지금 여자는 어떤 면에서 이 선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만 있지 않습니다. 최후심판대 앞에서는 이 선언과 함께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상태로, 완전성화와 함께 영화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겠지만,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을 향해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더 이상 그 가운데 사는 것은 합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부패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자에게 일어난 일이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의 모든 백성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죄와의 싸움 가운데 자주 넘어지는 자로 있게 됩니다. 주의 말씀처럼 다시는 죄를 범치 않도록 죄와 싸우고 또 싸워야 하지만, 죄와 결별하는 일은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가 정죄를 받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과 3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마지막 때도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성하신 그가 우리의 중보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데,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앞에서 나태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구약에 나오는 도덕법에 대해서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율법폐기론자와 같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으로서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측면에서 주께서 가르친 모든 율법에 대하여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시는 것은 주님이시지만 그리고 그 완성하신 바를 마지막 때 주실 것이지만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주의 뜻으로 율법을 주셨다면 그런 율법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