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리크 사티(E. Satie, 1866~1925)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은 기이한 혼합체라고 할 수 있다.그는 단순함을 추구했고 즉흥성을 중시했다.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와 중세 선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이를 통해서 그의 음악은 기존의 장·단조 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사티는 모든 음악이 일체의 허식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믿는 작곡가였다.그는 자신의 제자인 다리우스 미요와 함께 1920년에 ‘사람의 주목을 끌지 않고 가구처럼 그저 거기에 있는 음악’을 주창하며 ‘가구의 음악(Musique d’ameublement)’을 작곡했다.이 작품은 본래 연주회 중간의 휴식시간의 배경음악으로서 고안된 것이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건성으로 듣는다는 것을 사티가 알았더라면,자신의 생각이 적중한 것이라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드뷔시와 라벨은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다.이 두 사람은 사티의 음악은 물론이고 그의 이상과 성품에도 열광했다.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티를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활용한 인물은 장 콕토였다.그는 디아길레프 발레단을 위해〈파라드(Parade)〉(1917)의 대본을 썼으며,사티는 여기에 곡을 붙였는데,이 곡이 초연된 파리 공연에서는 일대 스캔들이 야기되기도 했다.이 곡의 총보에는 전동 타자기,경보기,비행기 소리,권총,룰렛 놀이 회전판 등이 지시되어 있는 등 사티는 전위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에드가 바레즈(Edgar Varèse, 1883~1965)가 소음이나 현실음을 가미한 실험(구체음악)을 행하기10년 전에 이미 급진적 입체음악의 실험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이 작품의 무대장치와 의상은 피카소가 담당했고,레오니드 마신의 안무와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지휘에 의해1917년에 파리의 샤트레 좌에서 초연되어‘큐비즘의 발레’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그의〈3곡의 그노시엔(Les trois Gnossiennes)〉(1890)은 피아노 소품 모음집인데, 1889년에 파리에서 개최된‘세계 박람회’의 영향을 받은 첫번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1888년에 작곡된 피아노 곡〈3개의 짐노페디(Les trois Gymnopédis)〉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며,관현악을 위한 극음악으로서 플라톤의〈대화〉를 토대로 작곡된〈소크라테스〉(1918)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표현력으로 악단의 주목을 받았다.또한 사티는 다다이즘의 선구자로서,피카비아(F. Picabia)의 시나리오에 의한 초현실주의적 발레곡〈휴식(Relache)〉을,그리고 피카소 및 마신과 공동으로 만든〈메르쿠리우스(Mercure)〉를 발표하여 세상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 6인조(Groupe des Six또는Les Six)
‘6인조’란 에리크 사티(Eric Satie, 1866~1925)를 음악적·정신적 스승으로 하고루이 뒤레(Louis Durey, 1888~1979),조르주 오리크(Georges Auric, 1899~1983),아르튀르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제르맹 테유페르(Germaine Tailleferre, 1892~ ),프랑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 1899~1963)그리고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1974)의 프랑스의 진보적인 젊은 작곡가로6명으로 구성되는 그룹을 일컫는 용어이다. 프랑스의 저명 문필가인 장 콕토(Jean Cocteaus, 1889~1963)는1918년에〈수탉과 아를르캥〉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들을 소개하면서,이들의 음악적 이상,즉 독일의‘바그너주의’를 거부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드뷔시의‘인상주의’가 지니는 모호성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이들의 공동목표는 인상주의의 모호성이나 상징주의의 암시성에서 벗어나,보다 간명한 선율과 대위법으로의 복귀,구조적 정확함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6인조’라는 명칭은 그후1920년에 음악평론가인 앙리 콜레트(Henri Collet, 1879~1943)가〈코메디아(Comoedia)〉라는 잡지에 러시아의‘5인조’에 빗대어‘6인조’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후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인조는1920년에 각1악장씩 작곡하여 함께 묶은6악장의 조곡을 발표하여 신문의 문화면을 요란하게 장식했다.그러나 곧바로 뒤레의 이탈로 그룹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간다. 1921년에는 나머지5명이 장 콕토와의 공동작업으로 발레곡〈에펠 탑의 신혼부부(Les mariés de la Tour Eiffel)〉를 작곡·발표하기도 하지만,이들마저도 곧바로 미학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그 결속력이 느슨해지며,각기 제 갈 길을 가게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혁명적 정신은 곧 잘 러시아의5인조에 비유되며, 이들이 개척한 음악어법은 드뷔시,라벨 이후의 오늘날 프랑스 음악에 가장 크게 부상하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출처: 서양음악사100장면(2),pp.386~394> ● 6인조의 작곡가별 설명은 위 참조
● 사티(E. Satie)와 펠라당 대종사의 대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