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천(休川) 조공(趙公, 조중려)이 인조조(仁祖朝)를 당하여 문학(文學)과 절행(節行)으로 관료 사이에 명성이 있었는데, 도리어 공은 교외(郊外)에 물러나 살면서 논의(論議)와 사진(仕進)에 있어 일찍이 한번도 구차하게 영합한 적이 없었고 마침내 그 재능을 끝까지 써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자들이 더욱 애석하게 여기었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에 공의 손자인 조의징(趙儀徵)이 누차 상(喪)을 당해 거상(居喪)하는 중에 있으면서 선인(先人)의 명(命)으로써 장차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나를 찾아와 비문을 지어달라고 청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공의 휘(諱)는 중려(重呂)이고, 자(字)는 중경(重卿)이며, 휴천(休川)은 그의 호(號)이다. 조씨(趙氏)는 한양(漢陽)의 대족(大族)으로서, 조양기(趙良琪)에 이르러 쌍성 총관(雙城摠管)의 작위(爵位)를 승습(承襲)하였고, 조돈(趙暾)은 용성군(龍城君)인데 이들 부자(父子)가 함께 정토(征討)의 공훈이 있어 사적(事蹟)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조인벽(趙仁璧)은 용원 부원군(龍源府院君)으로 아조(我朝)가 처음 흥기(興起)할 때에 자취를 감춤으로써 자기의 지조(志操)를 이룩하였는데 시호(諡號)는 양렬(襄烈)이다. 조연(趙涓)은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한평 부원군(漢平府院君)으로 시호(諡號)는 양경(良敬)이며 그 종족(宗族)이 더욱 현달하였다. 증조(曾祖)는 조응문(趙應文)으로 장령(掌令)을 지내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는 조영남(趙榮男)으로 벼슬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조간(趙幹)으로 도사(都事)를 지냈다. 선비(先妣)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군수(郡守)를 지낸 심간(沈諫)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 정월 13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이미 총명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구어(句語)를 내면 남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조금 자란 뒤에는 고(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송영구(宋英耈)공과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공에게 글을 배웠는데, 두 공이 그 글을 중하게 여기고 이어 그 절행(節行)에 힘쓰도록 면려하였다. 숭정(崇禎)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연이어 선릉 참봉(宣陵參奉)과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임명되었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승진하였으며 병조(兵曹)로 옮겨 지제교(知製敎)를 겸대하였다. 이로부터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에 출입하였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과 헌납(獻納)을 지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을 지냈고, 옥당(玉堂, 홍문관)에서는 수찬(修撰)을 거쳐 교리(校理)에 이르렀는데 가장 오래 재임하였고 여러 번 임명되었다. 춘방(春坊, 세자 시강원)에서는 다시 필선(弼善)이 되었고, 국자감(國子監, 성균관)에서는 사예(司藝)를 지냈고, 상의원(尙衣院)과 사도시(司
寺) 등 제시(諸寺)에서는 정(正)을 지냈다.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미처 마치기 전에 병이 들어서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 11월 5일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향년은 48세였고,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북쪽에 있는 이계리(伊溪里)의 신방(辛方)을 등진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기개와 도량이 준수하고 단정하였으며 식견(識見)이 매우 뛰어나서, 마음을 보존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개결(介潔)하면서도 관후(寬厚)하게 해내었다. 성품이 더욱 효성스럽고 순수하여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서 마치 어른처럼 복상(服喪)하였으며 뒤에 추향(追享)할 때를 당하여 제수(祭需)를 장만하고 그릇을 씻는 일 등을 친히 자신이 나아가서 살폈고, 제사하는 날에는 반드시 애경(愛敬)과 정성을 다하여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슬퍼하였으며, 비록 몸에 질병이 있을지라도 남을 시켜서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도사공(都事公, 조간(趙幹))을 섬김에 있어 효성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봉양하는 일에 힘썼으며, 상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하기를 예제(禮制)보다 더욱 슬퍼하면서 조[粟]로 쑨 죽만 먹으면서 삼년상을 마쳤고 채소나 간장조차 입에 넣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곡(哭)하고 전(奠)을 올리되 반드시 애통함을 다하여 한참 지난 뒤에야 그만두었다. 때때로 다리가 허약하여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중지하지 않았으며, 친구들이 번갈아 말리자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정해진 명이 있다. 나는 지금 죽더라도 요절한 것이 아니니, 돌아가서 부모를 뵙는다면 또 어찌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이 마침 공의 이웃집에 우거(寓居)하였는데, 매양 경탄(敬歎)하여 말하기를, “3년 동안을 마치 하루처럼 한결같이 슬프게 곡읍(哭泣)하는 것을 나는 조군(趙君)에게서 보았다.”고 하였다. 서모(庶母)를 대우함에 있어 은의(恩義)를 곡진하게 다하였고 여러 아우와 여동생에 대해서까지 우애(友愛)를 빠짐없이 갖추었으며, 일찍 홀몸이 된 이모(姨母)가 있었는데 그를 마치 어머니처럼 섬기어 봉록(俸祿)을 나누어주고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여 드렸다.
일찍이 언로(言路)에서는 남의 미세(微細)한 일을 들추어 지적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조정의 대체(大體)와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에 대해서는 반드시 앞장서서 극력 간쟁하였다. 그 사이에 신득연(申得淵)이 역적(逆賊) 이계(李烓)와 통모(通謀)하여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다스리라고 주청하였고, 또 궁인(宮人)의 저주 옥사(詛呪獄事)를 극언(極言)하여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회부해야 되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잡치(雜治)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말씨가 정대하였다. 또 후사(喉司, 승정원)에서 일처리를 엉성하게 한 잘못을 논핵하자, 물론(物論)이 훌륭하게 여기었다.
경연(經筵)에 있을 때에는 반복하여 개진(開陳)하면서 인용하고 비유하는 것이 명백하고 합당하였으므로, 당시에 ‘참강관[眞講官]’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일찍이 행대(行臺, 서장관을 말함)로서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는데, 청렴한 태도로 지조를 지키니 역관(譯官)들이 감히 청탁하지 못하였다.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그 당시 북교(北窖)에 구류(拘留)되어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서 가상히 여기어 시(詩)를 지어 서로 증여하였다. 이때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상사(上使)였는데 춘궁(春宮)에 올릴 채장(菜醬)을 친히 맛보니, 공이 그를 비루하게 여기어 총애를 단단하게 굳히려는 의도라고 기롱(譏弄)하였으므로, 김자점이 마음속으로 노하여 기어코 공을 중상(中傷)하려고 공의 흠점을 찾았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자 단지 유장(儒將)에 천거된 것만을 깎아냈다.
공의 외삼촌 중에 높은 공훈을 세워 재상 자리에 오른 자(심기원(沈器遠)임)가 있었는바, 그 위세와 권위가 매우 성하였으나 공은 평소부터 그의 그릇됨을 알고서 그와 왕래를 뜸하게 하면서 그를 규계(規戒) 책망(責望)하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일가(一家) 사람들이 처음에는 자못 의아하게 여기다가 얼마 안 되어 그가 모반죄(謀叛罪)로 주륙(誅戮)당하고 그와 친했던 사람들도 그 앙화에 걸려들었으나 공은 홀로 화망(禍網)을 벗어나 아무 것도 연루된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또 공의 인척[姻黨]에도 훈척 대신(勳戚大臣)이 있었는데 누차 공에게 은근(慇懃)한 뜻을 보내 왔으나 공은 끝까지 한번도 그를 만나지 않았다. 또 우연히 귀인(貴人)으로서 의롭지 않게 초피(貂皮)로 만든 모자를 얻어 쓴 자(이덕인(李德仁)임)를 만났는데 공이 즉시 그 자리에서 모자를 벗기고 배척하였으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얼굴빛이 변하였으니, 그 평생 동안 처신한 것이 또 이와 같았다.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웅혼(雄渾)하고 기세가 있어서 반드시 선진(先秦)과 서경(西京, 전한(前漢)을 말함)의 문풍(文風)을 본보기로 삼았고 고금시(古今詩)의 체재와 격식이 청건(淸健)하여 거의 성당(盛唐)의 기풍(氣風)에 가까웠으며 간혹 한 때에 회자(膾炙)되기도 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계곡(溪谷) 장유(張維)공이 우연히 공과 만나서 시를 수창(酬唱)하고서 자주 칭찬과 장려를 해주었는데, ‘훗날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기로 서로 기약했네.[他日相期我輩人]’라는 구절이 있었다. 또 택당(澤堂) 이식(李植)공도 공의 문학에 더욱 감복하여 일찍이 혼조(昏朝, 광해조를 말함)에 잘못된 사책(史冊)을 공과 함께 바로잡으려고 하면서 “조모(趙某, 조중려)는 재주가 한 시대에 뛰어나서 안목이 천고(千古)를 내려다본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그가 문원(文苑, 예문관)의 거공(鉅公)들에게 칭상(稱賞)을 받은 것이 대부분 이와 비슷하였다.
평소에 집안 살림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생산(生産)의 유무(有無)를 물어보지 않았고 문을 닫아걸고 조용하게 지내면서 금회(襟懷)를 맑게 지니어 항상 물외(物外)의 취향(趣向)이 있었다. 그러나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이 천성(天性)으로부터 나왔고 지론(持論)이 준절(峻截)하고 개결(介潔)하였으며 조리(操履)가 단정하고 확고하였다. 영예로운 벼슬이나 권세 있는 이익에 대해서는 더욱 담박하였다. 공은 비록 교유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신의(信義)로써 마무리를 잘하였으며 벗들의 사생(死生)과 곤액(困厄)에 곡진하게 보살피고 도와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무나 해내기 어려운 일을 공이 해냈다고 하였다. 유고(遺稿) 약간 권(卷)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공은 처음에 함풍 이씨(咸豐李氏) 군수(郡守) 이선철(李先哲)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계취(繼娶)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지사(知事) 신경진(申景珍)의 딸인데, 모두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송받았다. 이씨 부인은 1남을 낳았는데 조종면(趙宗冕)으로 현감(縣監)이고, 신씨 부인은 1남을 낳았는데 조종저(趙宗著)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누차 종반(從班, 시종신(侍從臣)의 반열)을 역임하고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마쳤으며 그 글이 더욱 기이하였다. 현감 조종면은 4남을 낳았는데, 장남 조의한(趙儀漢)은 직장(直長)이고, 그 다음은 조의정(趙儀廷)ㆍ조의헌(趙儀獻)ㆍ조의화(趙儀華)이다. 부사 조종저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조의징(趙儀徵)으로 승지(承旨)인데 곧 나에게 명을 청한 사람이고, 그 다음은 조의봉(趙儀鳳)과 조의상(趙儀祥)이다. 증손과 현손이 남녀 합하여 모두 몇 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대체로 듣건대, 문사(文士)들은 절의(節義)를 세우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는데 하물며 지극한 행실이야 어련하랴? 부모에게 효도하다가 마침내 목숨을 버렸으니,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겠네. 이미 성의가 독실하였고 또 식견이 통달하였으니, 어찌 목숨을 버렸다고 하겠으랴? 웅혼(雄渾)한 문사(文詞)와 청백한 절개를 백에 하나도 써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누구의 병통인가? 저 높다란 비석에 내가 비문을 새기노니, 만세토록 성(盛)하게 전하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조중려 [趙重呂]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