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재 권공 묘갈명〔四勿齋權公墓碣銘〕
사물재(四勿齋) 권공(權公)의 휘는 흥익(興益)이고 자는 붕래(朋來)이다. 황고(皇考)인퇴곡공(退谷公)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의방(義方)의 가르침이 엄격하고도 올발랐다. 이에 봄과 여름에 뜰에 다섯 개의 평상을 설치해 놓고 그 위에 나누어 있게 하면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공은 그 가운데 셋째로서 특히나 독서를 좋아하여 잠시도 멈추지 않고 소리 내어 음송한 결과집안의 노복들이 그 소리가 귀에 익어 이따금 그 내용을 전송(傳誦)하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정강성(鄭康成)의 집안에 비유하였다.
인조 계유년(1633, 인조11)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기묘년(1639)에 열린 별시(別試)에서 대정(大庭)에서의 대책문(對策文)으로 급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호조, 공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하였다.
기축년(1649)에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도사가 되었고, 이듬해 또 예조에 들어와 좌랑이 되었다.
신묘년(1651, 효종2)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었고, 1년 뒤에 청주 판관(淸州判官)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이때 청렴하고 근실하며 욕심 없이 담박한 태도를 견지하는 한편, 몹시도 간소하게 자신을 단속하여 공무 외의 시간에는 단정히 앉아 독서만 하였는데, 그렇게 겨우 반년 만에 관찰사로부터 말미를 받은 뒤 결국 아무런 미련 없이 고향으로 훌훌 돌아갔다.
공은 초서(草書)를 잘 썼다. 관아에 있을 때 일찍이 붓을 휘둘러 벽의 좌우에 글씨를 남겼는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뒤 청(淸)나라 사람들이 그 글씨를 흠모해 마지않아 벽에 붙어 있던 종이를 떼어 가져가서 병풍의 장식으로 삼고는 보배로 간직하였다고 한다.
을미년(1655) 3월 9일에 졸하니, 춘추는 48세이다.
공은 성품이 따뜻하고 전아하여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오직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에게 우애를 베풀면서 두렵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선조의 가르침을 지켜 나갔다. 젊은 시절부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 남달리 총명하다고 하면서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공의 외면으로 드러난 부분만을 아는 것에 불과하다. 용주(龍洲)조공 경(趙公絅)과 호주(湖洲)채공 유후(蔡公裕後)는 언제나 입을 모아 공을 추천하고 총애하였으나, 당대의 논자들 가운데 공을 시기하던 자가 있어 결국논사(論思)와 풍헌(風憲)의 자리에서 명성을 드날리지 못하고 말았으니, 아아, 이 역시 심한 일이다. 후인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뒤에 보충하면서 “집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관인이 되어서는 청렴하고 근실하였다.[居家孝友 爲官淸勤]” 8자를 가지고 공의 덕을 형용하였으니, 아아, 공론은 바로 여기에 있을 터이다.
처음에는 강릉(江陵)의 제민원(濟民院)에 묻혔다가 뒤에 강릉부의 북쪽에 위치한 장천(長川)의 자좌(子坐)의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고려 태사(太師) 행(幸)의 후예이다. 증조의 휘는 신(愼)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수경(守經)으로, 재주와 덕행으로 조정에서 능침랑(陵寢郞)을 제수하고 주부(主簿)에 올랐다가 관직을 버리고 더 이상 출사하지 않았다. 부친의 휘는 칭(稱)으로 호가 퇴곡(退谷)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선비는 이씨(李氏)로 경기 관찰사 이홍로(李弘老)의 따님이다.
공은 이공 원충(李公元忠)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부녀자로서의 도리가 매우 올발랐는데 62세에 생애를 마치니, 병오년(1666, 현종7) 1월 28일의 일이다. 공의 묘에 부장되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중 첫째는 시일(時一)로 종사(宗事)를 이었고, 둘째는 재일(載一)로 종부(從父)인 진사공(進士公) 흥태(興泰)의 후사가 되었다. 셋째는 균일(均一)이다. 딸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졸한 후에 이조 판서에 증직된 채시상(蔡時祥)에게 출가하였다.
시일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는 만통(萬通)이고 그다음은 만건(萬建), 만선(萬選), 만근(萬近)이다. 딸은 승지 정우주(鄭宇柱)에게 출가하였다. 재일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는 만중(萬重)이고 그다음은 만운(萬運), 만상(萬常)이며 딸은 심세유(沈世維)에게 출가하였다. 균일은 3녀를 두었으나 아들은 없어 만선을 아들로 삼았다. 딸 중 첫째는 이제민(李齊閔)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한성(韓渻), 셋째는 박정(朴凈)에게 출가하였다. 채 동추(蔡同樞)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중 첫째는 채명윤(蔡明胤)으로 홍문관 수찬을 지냈고 둘째는 채성윤(蔡成胤)으로 한림을 지내고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관직을 마쳤다. 셋째 채정윤(蔡禎胤)은 진사이고, 넷째 채팽윤(蔡彭胤)은 한림을 지내고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예문관 제학으로 관직을 마쳤다. 다섯째는 채굉윤(蔡宏胤)이다. 딸은 이우홍(李宇洪)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는데, 그중 증손 세구(世矩)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오래 살지 못하여 관직이 전적에 그쳤고, 세규(世䂓)는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지금 나에게 글을 청한 자는 현손인 필교(弼敎)이다.나는 공의 따님의 증손자이다.삼가 생각건대 나의 증조모께서는 훌륭한 덕과 명철한 행실로써 규중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런 분의 가르침이 세 아들들에게 베풀어져 성조(聖朝)의 명신이 되었고, 또 나에게 와서는 외람되게도 국상(國相)의 직임을 맡게 되었으니, 그렇게 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든 것이 공의여경(餘慶)이 미루어 넓혀진 결과이다. 아직도 기억나는바,50년 전 한림의 자격으로 사서(史書)를 포쇄(曝曬)하는 일을 계기 삼아 강릉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그때 공의 산소에 성묘하면서 우리 증조모의 지난날천기(泉淇)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었다. 지금 묘도의 비문을 새기매 감격스럽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유달리 깊으니, 어찌 감히 글솜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이 성명한 조정에 있으면서 / 公在明廷
덕은 두터운데 지위는 미미했더니 / 德厚位細
신명이 경사로써 내린 보답이 / 神報以慶
또한 외손에게 이르렀네/ 亦及外裔
세 개의 관청과 두 개의 고을이 / 三曹二縣
포부를 펼치기에 어찌 족하랴/ 曷足展布
경호가 곁에 있으니 / 鏡湖在傍
높이 솟은 누각 예대로네/ 飛閣如古
고가의 문헌을 / 故家文獻
아 너희 후손들은 / 咨爾曾玄
백세토록 폐기치 말고 / 百世無荒
우리 선조의 어짊을 계승하라 / 繼吾祖賢
[주-D001] 퇴곡공(退谷公):
권흥익(權興益)의 부친인 권칭(權稱)을 가리키며, 퇴곡은 그의 호이다. 번암이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樊巖集 卷53 退谷權公墓碣銘》
[주-D002] 의방(義方)의 가르침: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가르침을 말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아들을 사랑하되 의방으로 가르쳐서 삿된 길로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충간한 말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주-D003] 집안의 …… 비유하였다:
정강성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으로, 강성(康成)은 그의 자이다. 그의 집안 노비들은 모두 글을 읽을 줄 알아, 한 여종은 《시경》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꾸짖는 정현을 향해, 역시 평소 외고 있던 《시경》 한 구절을 가지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文學》
[주-D004] 조공 경(趙公絅):
조경(1586~1669)의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D005] 채공 유후(蔡公裕後):
채유후(1599~1660)로,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주-D006] 논사(論思)와 풍헌(風憲)의 자리:
홍문관과 사헌부의 직임을 가리킨다. 논사는 전한(前漢) 반고(班固)의 〈양도부서(兩都賦序)〉에 “아침과 저녁으로 의논하고 사색하며 날과 달로 충언(忠言)을 올린다.[朝夕論思, 日月獻納.]”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이 근신(近臣)들과 학문에 대해 의논하고 사색하는 것을 가리킨다. 풍헌은 풍교(風敎)와 헌장(憲章)이라는 뜻으로, 백관의 비리를 탄핵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직책을 이른다.
[주-D007] 나는 …… 증손자이다:
권흥익의 딸은 채시상에게 시집갔는데, 채시상은 바로 번암의 증조부이다.
[주-D008] 여경(餘慶):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적선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덕을 많이 쌓은 조상이 후손에게 끼치는 은택을 뜻한다.
[주-D009] 50년 …… 있는데:
번암이 1749년(영조25) 5월 사관(史官)으로서 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로 가 실록을 햇볕에 쬐어 말리는 포쇄의 임무를 수행한 것을 말한다. 《樊巖集 卷2 五月承命灑史五臺……感吟一絶以備翰苑故事》
[주-D010] 천기(泉淇)의 그리움:
친정집에 대한 그리움을 말한다. 천기는 위(衛)나라에 있는 강인 천원(泉源)과 기수(淇水)의 합칭으로, 《시경》 〈위풍(衛風) 죽간(竹竿)〉의 “천원은 왼쪽에 있고 기수는 오른쪽에 있네. 여자가 시집감이여 형제와 부모를 멀리 하였도다.[泉源在左, 淇水在右. 女子有行, 遠兄弟父母.]”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이 시는 다른 나라로 시집간 위나라의 한 여인이 친정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이때 번암이 증조모를 그리워하며 남긴 한시가 《번암집》 권5에 〈보진당은 강릉부의 성 밖에 있는데,……감격스러운 마음을 시에 드러내다[葆眞堂在江陵府城外……感見于詩]〉라는 제명으로 실려 있다.
[주-D011] 신명이 …… 이르렀네:
외손은 이 글의 저자인 번암 자신을 가리키는바, 권흥익이 생전에 덕을 쌓은 결과 외손인 자신에게까지 신명의 보답이 미쳤다는 말이다.
[주-D012] 세 …… 족하랴:
세 개의 관청은 권흥익이 좌랑을 역임했던 예조, 호조, 공조를 가리키고, 두 개의 고을은 권흥익이 1651년(효종2)과 1652년에 각각 현감과 판관으로 있었던 보령과 청주를 가리키는바, 이 정도의 관력으로는 권흥익이 가진 뛰어난 능력과 포부를 펼치기 부족하다는 말이다.
[주-D013] 경호가 …… 예대로네:
권흥익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강릉 경호 부근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 예전에 머물며 지내던 누각이 옛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높이 솟아 있다고 한 것이다. 높이 솟은 누각이란 바로 권흥익의 조부인 죽봉(竹峯) 권수경(權守經)과 부친인 퇴곡 권칭이 별서로 삼았던 환선정(喚仙亭)을 가리킨다. 《樊巖集 卷53 竹峯權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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