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본 에스컬레이터.

벌써 연수를 온 지가 달 반이
지났다. 니혼고깐에서 갈팡질팡하며 첫 주를 보내고 후지쓰우에서 계장에 입문한 후 요코가와 덴기와 니레코에서
나름대로 확인하고 이제 실전에 적응해 봐야 할 차례이다.
토요일 오전에 요코가와 덴기에서
수료식을 마치고 바로 니혼고깐의 이다나까료로 돌아왔다. 한달이 넘어서 돌아온 이다나까료(井田中寮)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마음이었다. 조업, 정비, 기중기팀을
합쳐서 거의 백명에 가까운 포철연수자가 있는 탓이다.
제일 반가워하는 이는 독신료
요짱(寮長)이었다. 그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농담삼아 들려주며 언어 불통으로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전차를 무임승차해서
경찰에서 전화가 오고 가게에 물건을 계속 바꿔 달래서 그럴 수 없다고 전화가 오고 등등 몇 가지 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좀 창피스럽기도 했다. 그만큼 각지에서 모여든 현장 작업원들은 가지
각색이었다.
토요일 저녁 식당에서 만난
동료 연수자들은 반갑다고 서로 인사하면서 절친한 친구들을 만난 듯했다. 연수 중에는 일본사람들과 어렵게
대화를 하다가 말문이 터진 듯 우리말로 답답했던 심정들을 털어놓는 것 같았다. ‘소식도 없이 사라지더니
언제 왔냐? 얼마나 있을거냐’ 등 질문이 많았다. 늘 우리네 목소리가 일본사람보다 커서 신경이 쓰였는데 역시 그랬다. 일본사람들이
멀리 떨어져서 식사를 하고는 그냥 한번 치어다 보고는 지나갔다.
오랜만에 팀장회의에 참석했다. 연수는 매일 팀별로 회의를 해서 그날 보고 들들은 것 정리해서 레포트로 작성하고 매주 말 팀장 회의를 통해
분야가 다르지만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귀국해서 제강공장의 전로운전(Converter operation) 과
조괴제조(Ingot iron making)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팀인 기중기팀, 기계와 전기 정비팀이 함께 하는 모임이었다. 이들은 전부 제강공장
소속 요원들이지만 계장요원은 전 제철소를 담당해야 해서 소속부터 달라도 같은 곳에서 하는 연수생들은 함께 해야 했다.
그들은 벌써 달 반이 넘게
연수를 해서 그런지 제법 현장에 익숙한 것처럼 말했다. 작업장의 위치나 설비이름을 척척 읊어 댔다. 처음은 작업환경이 열악해서 전로 근처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일하다 집에 못 돌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괜히 제철소로 전직했다고들 후회들도 많이 했다고 들 했다. 전로(轉爐)에 용선(溶銑, 용광로에서 철광석을 녹인 쇳물)을 기중기로 들어붓고 부원료를 투입할
때마다 발생하는 분진도 숨이 막히는데 산소로 제련(용선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용도에 따른 강철을 만드는
과정)을 할 때는 쇳물이 사방으로 펑펑 튀어 전로 근처에 접근조차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고들
한다. 사방으로 튀는 불똥 때문에 무겁고 숨이 막혀 답답하지만 안전 복장(석면 덧옷)을 입지 말아라 해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담당자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는데 지금은 자신들도 모르게 적응이 되어 석면복도 작업복처럼 입게 되었고
언제 접근할 수 있는지도 알았다며 한달쯤 지나니 이제는 요령이 좀 생겨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고 작업환경에 적응하느라고 고생한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계장팀도 얼마간 그럴 거라는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포항제철은 최신
설비이므로 여기보다 작업 환경이 좋을 거라며 니혼고깐도 새로 건설한 후쿠야마(福山)제철소는 작업환경이 좋다고들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계장팀은
지금까지 실험실에서 신선 놀음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주부터는 같은 작업장에서 조업팀처럼 상시
석면복장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일할 때는 그래야 한다며 몇 주일쯤 고생을 할 거라고 했다.
기중기팀은 2개월 연수라 돌아갈 날이 다 되었다며 이것 저것 기념품과 가족선물을 주섬주섬 사 모우는 데 독신료 주변가게에는
별물건이 없다며 이번 일요일날 기중기팀을 위해 함께 쇼핑을 가자고 했다. 경우에 따라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는 해외를 다녀오면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선물을 하는게 관례였다. 선물이래야 돈이 그렇게 여유가 없으니 어머니나 아내에게는 양산, 자식에게는 한국에 없었던 미니카, 여유가 좀 있으면 움직이는 장난감, 개인적으로 출국할 때 준비를 해온 동료들은 워커 맨이나 전기밥솥도 사겠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대형 쇼핑몰이 없어서
일반가계나 백화점 중 좀 싸게 파는 데를 찾아가야 했다. 요짱에게 기념품을 좀 사려고 하는데 살 만한
곳을 부탁드렸더니 대뜸 미쓰꼬시 가와사끼 점을 가리키며 대중적인 매장이라며 특히 활인코너나 복도에 비치한 판매대 제품은 최신형은 아니지만 한두
해 지난제품이라 싸게 판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 첫 출근할
때처럼 떼를 지어서 전차를 타고 가와사끼 역에 내렸다. 요짱이 그려준 지도대로 찾아가니 미스꼬씨(三越)백화점이 보였다. 한국에서도
가본적이 없지만 일본에서 백화점을 처음 와 보는 것이다. 지난번 연수때도 백화점에 갈 일이 없어 간
적이 없었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니 요란했다. 사람들도
많지만 상품들이 휘황찬란했다. 입구에서 만일 헤어지면 몇 시까지 이자리로 모이기로 하는 등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어, 계단이 움직인다’고 했다. 돌아보니 계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영어책에서나 보던 에스컬레이터였다. 나도 처음 보았다. 신기했다. 힘들여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어 편리할 것 같았다. 에스컬레이트는 지하에서부터 맨 위 층까지 연결되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보다 상품매장을 볼 수 있어서 편한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하니 못 찾았을 때 일본인에게 어떻게 물어야 하냐고 해서 일본사람에게
외국인이라고 말하고 일본말로 에스컬레이터는 뭐라고 부르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얏바리(역시) 에스컬레이터네’ 하면서
외국어를 쓴다고 했다. 헤어지면 만나는 자리를 1층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정하고 그들이 타는 대로 그저 타고 올라가서 우선 활인코너를 찾아갔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의류종류가
대부분이고 신발류, 모자 등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별로이 없었다. 기념품이
될 만한 액세서리나 양산. 전기제품은 제대로 사려면 역시 그 코너에 가야 했었다. 처음 양산매점을 먼저 찾아갔다. 그러나 제품에 따라 가격차가 심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판매인은 좋은 제품일수록 비싸다는 것이다. 요짱의
말 대로 유행이 한차례 지나간 물건들은 찾았더니 복도에 진열된 판매대를 가리키며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판매대에
있는 물건은 가격이 생각보다 쌌다. 우리들뿐 아니고 일본 사람들도 양산을 펴보며 무늬를 보고들 골랐다.
다음은 장난감 코너로 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니 자동차였다. 낱개로 포장된 것 보다 자동차
세트를 사서 나누는 것이 싸다고 하면서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세트 중에서 자기들끼리 나누기도 했다. 장난감
코너에도 가판대는 있었지만 주로 움직이는 세트 장난감들이었다. 꼬마인형이 그네를 타다가 기차위에 떨어져서
다시 기차를 타고 터널과 야자수 공원 등이 있는 레일을 몇 바퀴 지그재그로 돌다가 언덕위에서 다시 그네를 타는 제품이 인기를 끌어 아들가진 사람들이
구입했다. 한국에서 연수비 외로 돈을 준비해온 사람들은 조금 비싸도 진열상품을 구입했다.
다음은 전기제품 코너, 단연 워크맨이 압권이었다. 5년전에는 라디오와 테프만 재생되었는데
그 사이 쏘니 제품은 녹음기능이 추가된 게 있었다. 중저가용품의 아이와(Aiwha)제품은 단연 인기였다. 음질은 모르지만 소니와 똑 같은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격은 거의 60-70%선이었다. 몇
사람은 동네가게보다 비싸다고 했지만 2주후면 떠나야 하는 기중기팀은 몇 사람이 선뜻 구입했다.
커피포트도 꽤 인기였다. 연수자들이 달걀을 삶아 먹는데 아주 편하다고들 했다.
당시 커피 포트래야 물을 끓여서
분말 커피를 타서 마셔야 하지만 연수생들은 커피보다 온수를 마실 수 있어 연수 중에 요긴한 물건이라 나도 덩달아 갖고 다니기 편한 소형제품을 샀다.
다음은 액세서리점, 눈에 보이기는 모두가 보석같이 보였지만 종류가 다양했다. 주로 별로
가격도 비싸지 않은 게 다양해서 눈에 좋게 보이는게 많았다. 모두들 가족 선물로 머리핀이나 브로치(Brooch)등을 구매했다.
그 다음은 각자 헤어져서 자기가
필요한 선물을 사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사이 나도 이리 저리 다니다가 고우(제사 향)를 발견했다. 일본에서는
다다미방의 습기 때문에 냄새 제거용으로 향을 많이 피우지만 한국에서는 제사용으로 딱 좋았다. 당시 한국은
향나무를 쪼개어 태웠으나 불편했다. 5년전에 도시바 미에 독신료에 있을 때 일본인이 내방에 피우라며
선물을 한적이 있었다. 남은 것을 귀국 시 가져와서 제사 때 마다 잘 쓰고 있어 또 구입했다. 그후 지금까지도 그 향을 계속 구입해서 사용한다.
이래저래 이다나가료에서 바로
귀국하는 연수생들은 어머니와 부인용과 자식들의 선물을 구입했지만 계장팀은 앞으로 연수를 몇 곳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아직 선물을 사기는 좀
빠른 것 같았다.
에스컬레이터 1층에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연수생들이 떼를 지어 우리말로 떠들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무엇 하냐니까 시간이 남아서 재미있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맨 위 층까지 몇 번째 오르내린다고 했다. 신기해서 그러는 것은 이해되지만 일본사람들에게 좀 창피한 것 같아 소리만 떠들지 말고 조용히 타라고만 했다.
모이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몇
명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데스크에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외국에서 처음 백화점을 왔는데 몇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방송을 부탁드렸다. ‘소우데스까? 에스컬레이터와
미나미가니모 아리마수’요 모시꾸와 소꼬데 맛데이루노와 아리마셍가? (그러세요’ 에스컬레이터는 남측에도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는게 아니겠어요?)하며
안내를 했다. 그곳에 가보니 찾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오지 않나 하고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다가 다른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간 것이지만 모두가 처음 와본 곳이라 서로 바라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스마트 폰 하나로 찾았겠지만 1972년초의
우리의 현실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