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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왜 삶을 게임 하는가?>의 줄거리:
우리가 삶을 사는 대신 삶을 게임 하고 있음을 혹시 아십니까? 부부생활 대신 부부 게임을, 부모 자녀 관계 대신 부모 자녀 게임을, 직장인의 삶 대신 직장인 게임을, 친구를 만나도 장사를 해도 단지 게임을 할 뿐입니다. 이런 게임에서 무엇을 얻든지 잃든지, 실제로 내게 남는 건 오직 중독 자체와 허무입니다. 이제 실세계로의 탈출을 시도해봅니다.
왜 삶을 게임 하는가?
(스가랴 14:1~21)
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왜 삶을 게임 하는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왜 삶을 게임 하는가?’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부부생활을 시작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아내가 실존하고 남편이 실존하기에 부부생활이라는 관계 또한 실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스가랴서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합니다. 부부로써 살아가지만 진짜 부부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단지 부부게임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부모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에 자녀가 잘 되면 기뻐하고 자녀가 잘못되면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실은 게임에 불과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이 아니라 직장게임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친구를 사귀지만 실은 친구게임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가 스위치를 끄면 게임 판이 사라지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8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꺼지는 순간 의미는 사라집니다. 부부로써 50년을 함께 해로했을지라도 그것이 게임이었다면 스위치가 꺼지는 순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이 게임이라는 것일까요?
게임은 실제가 아닌 가상세계(virtual world)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관적으로는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가상세계입니다. 중독에 걸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고 좋은 이유는 실감나기 때문입니다. 실감난다는 것은 주관적으로는 느끼지만 객관적으로는 실존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게임은 실감나는 가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마음에는 현실감을 주는 세계입니다. 간단히 말해 현실감이 나는 비현실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또한 그런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부생활을 실제로 여기며 살아가지만 사실은 게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득템”이라는 말을 합니다. 얻을 득(得)에 게임 상의 재화를 뜻하는 아이템을 합친 단어입니다. 즉 게임 내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유익한 재화를 얻었을 때에 하는 말이 득템입니다. 득템이 자주 일어나면 게임을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도 이러한 득템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기쁨이라는 뜻의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기쁨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삼위일체 관계에서만 발생합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가 되시는 영원하신 관계에서 기쁨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살았던 최초의 장소가 기쁨의 동산이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 되어 누리시던 기쁨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에덴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기쁨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가르침을 따라서 인간세상에서 스스로 기쁨거리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게임에서 아이템을 얻어서 기뻐하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임에서 사용되는 아이템은 실제 삶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게임 판에서만 의미를 갖는 데이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부부관계라는 게임 속에서 좋은 배우자를 얻음으로써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기쁨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기쁨입니다. 가상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우자에게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면 그 부부관계는 가상세계 속의 게임이 되어버립니다.
이제 또 부부가 자녀를 낳아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기쁨의 근원으로 삼는 순간 자녀와의 관계는 가상세계 속의 게임이 되어버립니다. 본래 자녀는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없지만 그것을 기쁨이라고 정해놓은 게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삶은 가상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이템으로써 자녀를 추구하는 게임이 되어버립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인간에게 돈은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기쁨으로 추구하게 된 것은 돈을 아이템으로 삼는 가상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야 기쁘다고 약속한 게임 내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게임에서 엄청나게 강한 무기를 얻어서 한 번 휘두르니 적이 100명씩 쓰러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게임 안에서 정해진 약속일뿐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권력 인기 명예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을 줄 것이라 믿고 추구하지만 게임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여당 야당을 나누어 대권이라는 자리를 향해서 노력하고 달려가고 있지만 집단게임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MMORPG라는 말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복잡한 용어의 약자입니다. 게임 속에서 나를 대신하는 캐릭터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싸우고 돕기도 하며 활동을 합니다.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이 대단히 실감납니다. 그러나 그 실감나는 활동은 어디까지나 게임 내에서 이루어질 뿐 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녀가 서울대에 입학하면 부모는 좋아서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래 서울대 입학으로 기쁨을 얻는 세상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은 오직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때에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일류대학에 들어갔다고 기뻐하지만 그것은 게임 안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기 코드를 뽑아서 게임 판 자체가 사라지면 그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삶이 끝나게 될 때에 그렇게 추구해왔던 세상에서의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게임 판에서 승리하면 주관적으로는 기쁨을 느끼지만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듯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허황된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가랴서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가 바로 이러한 게임과 같은 삶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언급됩니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공이 되시는 날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하나님께서 이제 선민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밝히 드러내시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에게 관심을 보낼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 우리 집에 대통령이 오셨다면 다른 어떤 대상에게도 관심을 보낼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홀로라는 말이 반복되며 다른 대상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천하 만민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때입니다. 또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보내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현상을 그대로 일어나게 해주십니다.
성전 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스가랴서가 마지막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는 성전의 존재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성전을 완성시키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시면 여호와의 날과 같이 각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관심으로 삼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의미합니다. 매일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관심이 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까지 올라가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내 마음을 올려 보내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아니면 그 길을 따라 내려오시게 됨으로써 하나님만이 관심인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곧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만이 관심이 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여호와의 날에 대해 표현하기를 6~7절에서는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다소 이해하기 힘들지만 엄청난 내용이 담긴 말씀입니다.
광명한 것들은 해와 달과 별들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없으니 낮도 없고 밤도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동안 보이던 세상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보이게 하던 빛과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빛은 반대입니다. 세상을 보게 하는 빛 아래에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보게 하는 빛 아래에서는 세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상의 빛 아래에서 사는 것은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직장인이 회사까지 내팽개치고 게임에 몰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빛이 아닌 세상의 빛 아래에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게임에 몰입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세계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게임으로써의 세상은 보이지 않게 되고, 보이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 기쁨을 얻는 삶의 시작점입니다. 이사야서 40장 8절을 보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의 불변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옹달샘에서 샘이 솟아오르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은 나의 삶 또한 창조해나가십니다.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상과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내 삶이 만들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실제 삶의 모습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마음에는 세상이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졌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 나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게 되고, 창조 때와 같이 하나님의 구상과 생각대로 전개되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살아가는 진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마귀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인간 세상이라는 게임 판에서 아이템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게임 안에서만 통용되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임 판 즉 가상세계란 주관적으로는 실감나지만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 되도록 약속된 가치들은 실제로는 내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이라는 게임 판 안에서만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이 땅의 삶이 가상세계인 이유는 하나님이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뜻과 계획이 표현되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찬송가 288장을 보면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주님과 함께 나도 죽었으며,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나도 함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영화로운 빛이 비치면 내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보일 뿐입니다.
또 2절을 보면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보니까 3절에서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시점입니다. 진짜 세상을 살고 싶다면 게임으로써의 세상이 보이지 않게 되어야만 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빛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정해놓은 아이템에 눈 뜨는 것입니다. 돈, 권력, 건강, 장수, 인기, 형통, 외모와 같은 것들이 세상이 정한 아이템입니다. 이것들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템이 기쁨의 가치를 갖는 세계는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이나 건강 등은 실제로는 결코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아이템들은 가상세계 속에서만 기쁨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게임 안에서 새로운 무기를 얻으면 기분이 좋겠지만 실제 삶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베드로는 하늘나라에서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보게 되자 산 아래의 인간 세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이 상황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오순절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의 마음에서 금과 은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체험을 사도 바울은 또한 같은 심경에서 이제껏 불철주야 노력해서 얻은 삶의 아이템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만 주인공이 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 죽을 때에 마음이 청결해지면서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상태에서 기쁨이 생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나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실제 삶의 특징은 허무가 없고 이 땅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평강이 주어지는 삶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의 세계와 연결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의 영향력은 세상의 가치들을 실감나게 합니다. 대표적으로 돈이 있습니다. 돈이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마귀는 이렇게 우리를 가상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장사에 목숨을 걸고 돈을 벌고자 하지만 게임 판에서 아이템을 득템하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자에게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부부관계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와 계신 상태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배우자를 향해 나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과정에 부부생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배우자에게서 기쁨을 얻으려는 동안에 삶은 게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게임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볼 때에 게임으로써의 세상은 더는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가 이루어지고 질서가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구상을 따라서 창조적인 실제의 삶이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골방에 있든 배우자를 대하든 대문 밖으로 나가든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내가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만이 우리를 강력하게 잡아끄는 가상의 게임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며 실제의 삶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게 해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세상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을 보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과 밀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강물처럼 흘러서 실제의 삶이 발전되고 전개되어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제까지 해오던 게임으로써의 삶은 중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