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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8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설교
제목: 우리의 비전, 창조 프로젝트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이사야 65: 17~18상)
설교를 위한 묵상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 질문의 답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삶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꿈이 되고 비전이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목적과 바른 방향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설교는 구원받은 우리들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난 주일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결국 그 본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주 수요예배에서 나는 구원받은 우리의 꿈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우리의 꿈은 당연히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꿈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꿈은 이 세상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며 더욱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목적이며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완성을 위한 염원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또는 목표가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것은 구원의 개념과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나는 이를 창조 프로젝트라고 명명한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생명 충만을, 그리고 흑암에 광명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실 때마다 세상은 새롭게 된다. 그런 세상을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한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도피주의적 구원관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구원관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나는 과학적 세계관이 제공하는 세상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그림이 매우 파괴적임을 지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빅뱅에 의한 출발이 그 원인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성경의 세계관은 이와 달리 창조 프로젝트다. 그것은 이 세상을 치료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 활동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고 교회와 공동체를 세우시며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나 꿈은 어서 이 세상을 벗어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날을 사모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성경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판타지를 들려준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꿈꾸고 기대해야 할 우리와 이 세상의 미래상이다. 그런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주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교했는데 그 형상의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꿈을 마음에 새기고 소망하며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의 삶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서 반복되고 강조되는지를 더 면밀하게 살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더욱 명확하게 진단하고 교정하며 인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주일 나는 교회에서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했다:
신앙은 개인의 필요를 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으로 성숙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는 신앙인들을 하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런 예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신천지집단과 같은 이들이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왜곡은 구원에 대한 오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체적으로 담은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창조 프로젝트로 소개했다. 하나님의 창조는 낡은 세상을 치료하고 회복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말했으며,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이 일을 이루신다. 그들은 아담과 아브라함, 이스라엘과 예수님과 교회다. 그들은 스스로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신다. 그런 이유로 감사함으로 우리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살자.
지난 주일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이 어떻게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설교에는 교정과 아울러 비전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행동강령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를 철저하게 준비한다는 말은 결국 여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난 주일 설교안을 다시 읽어보니 설교에 누락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설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다:
1. 이 세상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인간의 타락과 배신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선택하신 방법은 인간의 이주가 아니라 인간의 회복을 통한 이 세상의 회복이다. 이에 대하여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예화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래적 소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당연한 순서다.
2. 하나님이 아담과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를 향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실까? 그것은 표지판의 역할이 아닐까? 톰 라이트의 통찰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래적 소임이 서로 돌보고 세워주며 힘을 모아 가꾸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소중하고 즐거운 일을 하는데 실패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곁에 모델이 되어 주는 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소임이 아닐까!
3. 그렇게 본다면 현재 우리가 전도하기 위하여 애쓰는 일은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의 본래적 소임은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곁에 서서 그들의 길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신 것 아닐까! 전도는 이 위대한 프로젝트 안에 있는 한 부분이다.
4.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강조점은 도피주의적 구원관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는 것과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그림으로 과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할 것인 것 아니면 성경의 창세기 이야기를 배경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둘은 우리와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그림과 전망에 대한 것이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성경의 가르침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이런 설교 목적을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할 것이다:
1. 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2.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3. 이 세대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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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비무장지대는 생태학적으로 볼 때 이상적인 장소라고 한다. 그곳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어떤 섬에 염소 몇 마리를 들여왔는데 그 섬이 결국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세상의 문제는 인간인가, 아니면 방치인가? 인간이 등장하기 전부터 지구는 몇 차례의 대멸종을 경험했다. 사막은 넓어지고 빙하는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과학연구가 발견한 내용이다. 인간이 그 자체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지혜는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관리할 권한과 책임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원인에 인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선 그냥 두면 잘 자라고 번성하게 될 자연을 훼손하고 서로를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탐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번째는 인간이 맡아서 관리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탐심에서 비롯된다.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바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때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은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은 빛을 만드심으로 밝히시고, 질서를 세우심으로 공간을 창출하시며, 그 공간에 생명으로 채우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창조는 흑암과 혼돈과 공허를 광명과 질서와 충만으로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며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며 동시에 낡은 것에서의 창조(creatio ex vetere)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말은 Mark Harris의 책, 창조의 본성(The Nature of Creation)에서 사용된 것으로, 그는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라는 말도 사용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에서의 창조와 계속적인 창조, 그리고 옛것에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계속 새롭게 만들어 가신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를 옛것으로부터의 창조라고 소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이미 혼돈하고 공허한 땅이 있었다. 깊은 물도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창조는 시작된다.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기 시대를 혼돈하고 공허한 땅과 빛을 잃은 하늘의 모습으로 표현했다(렘 4:22~26).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낸다. 첫번째 창조가 공허와 혼돈과 암흑을 바로잡는 것이었으니 두번째 창조도 마땅히 그럴 것이다.
2.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시 하나님의 창조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계속 일하시는 이유는 바로잡혀야 할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되며 낡은 것을 새롭게 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그 활동을 완성하시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종말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초대된 사람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님과 교회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창조 프로젝트를 소개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시며 회복하신다. 그것이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해결책을 다른 곳으로의 이주라고 생각한다. 즉, 이 땅은 낡았고 문제가 있으니 이곳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이것이 톰 라이트가 강조하는 내용이다. 구원은 이 세상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하여 부름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이 세상과 함께 새롭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잘 설명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새롭게 관리하고 가꿀 대리인을 만드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흙으로부터 인간을 만드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인간을 새롭게 빚으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이주(移住, Transplantation, Migration)가 아니라 변혁(變革, Transformation)이다. 혹성탈출이라는 영화가 1968년에 나왔는데 그때 이미 서구사회에는 이 지구에 대한 희망을 잃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런데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이라는 문제가 점차 크게 대두되자 영화로 표현된 위기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우리는 지금 지구적 재난 앞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해결책을 이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기 앞에서 스스로 자멸하는 셈이 된다. 도리어 변혁과 새 창조의 약속을 믿는 신앙이라야 이 위기 앞에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할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해 본다. 기독교회는 성경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오해하여 자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악화하는데 가담한 이력이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 근거가 된 노아의 아들들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죽은 후에 들어갈 세상이라고 성경을 오해한 것도 배타적이고 급진적인 종말신앙을 유포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교단은 아직까지도 여성목회자의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오류들은 과학의 발전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하나씩 바로잡혀 가고 있다. 그러나 이주냐 변혁이냐의 문제는 지금 바로잡혀야 할 중대한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3. 이 세대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임무나 역할은 무엇일까?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주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주에 필요한 티켓을 발급받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주할 곳에 대하여 들려주며, 동시에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그다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홍보하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이주가 아니라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방법을 이해한다. 그들은 사람에게 어떤 임무가 주어졌는지를 이해한다. 즉, 돌보고 가꾸고 세워주고 함께 일구는 것이다. 그것이 피조세계를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게 하는 하나님의 복에 동참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가 전한 소식이 바로 이것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이사야 65: 17~18상)
어떤 점에서 지금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의 일이며, 개인이 자기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공동체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것은 기업을 운영하는 일이며, 그것은 가르치는 일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사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일은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를 거스르고 역행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언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위하여 일할 때 그렇게 된다. 그가 부모든 교사든 기업가든 환경운동가든 정치인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일하고 타인과 공동체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피조세계를 어그러지게 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임무는 무엇일까? 그들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할 것을 다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한가지로 가정을 돌보고 기업을 경영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은사와 역량과 임무를 가지고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협력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이며 모든 사람의 일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위대한 프로젝트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우리들도 흔들리고 갈등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우리를 돕는 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을 따르고 공동체 가운데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맡겨 주신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우리의 기쁨과 보람은 바로 거기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 가운데서 늘 자신을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그 빛을 반사하려고 노력하는 등대와 같고, 우리는 인생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도록 길 위에 세워진 표지판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인생길에 동참하여 함께 구도의 길과 창조의 길을 걸어가는 길벗이다. 그리고 우리는 길벗들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우리가 당도할 새로운 세상을 함께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소망하기에 지금 여기에서 그 모습에 미치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최종적인 완성은 될 수 없을지라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는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수고한 일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의 즐거움은 그날에만 있을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꿈꾸고 힘쓰고 애쓰며 수고하는 모든 일에도 기쁨과 보람을 누릴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복 중에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시 128:2)는 복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