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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북관대첩의 영웅,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한시(漢詩)편> 고영화(高永和)
우리는 임진왜란의 전쟁 영웅으로 대부분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그 뒤를 이어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등이 있다. 그런데 북관(함경도) 지역을 수복한 북관대첩(北關大捷)의 영웅이자 문무(文武)를 겸비한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現 북한 지방에서 일어난 전투였기에 학교에서 중요한 인물로 배우지 못한 이유도 있었고, 또 다른 임진왜란 영웅들의 활약상은 드라마나 영화에 한 번 이상 방영되었으나 정문부 장군은 그러하지 못한 이유가 한몫을 했다.
○ [문관 출신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그리고 정문부 장군을 대부분 무관(武官)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는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고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했다. 이후 그는 1599년 중시 문과에 장원 급제했던 문신(文臣) 출신이었다.
그가 군사를 지휘한 의병장과 장군이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임란 때 함경도 북병영에서 정6품 문관직 북도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 북평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병영의 유일한 문신 관료인 북도병마평사는 북평사(北評事) 또는 평사(評事)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함경도 북병영 병마절도사 즉, 북병사(北兵事)는 함경도 수군절도사와 경성부사도 겸임하고 있던 중요한 요직이었다. 여기 북병영 병마절도사(북병사)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관리가 북평사(北評事)이다. 북평사는 관할지역 내 군사훈련, 무기점고, 군사시설 점검 순행, 무관 과거시험 주관, 감시어사 겸임, 북방 고을 수령 감시 등, 그 권한이 막중했다. 비록 품계는 낮았으나 북관(함경도)의 수령들이 모두 무관이었기에, 정부에서 특별히 유능한 문관을 파견하여 이를 통제케 했다. 왕조실록에는 북평사가 그보다 품계가 3단계나 높은 고을 수령을 파직시키기도 한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장군이 왜란 때, 함경도 전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고 또 고을 수령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함경도 의병을 조직함] 장군은 1592년 함경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했는데, 그때 함경도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회령부의 아전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경성부의 아전인 작은아버지 국세필(鞠世弼), 명천의 아전 정말수(鄭末守) 등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했다.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이어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彥),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 등 각 진의 수장(守將)·조사(朝士)들과 합세해 의병을 조직하였다.
○ [북관대첩(北關大捷)] 마침내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는 먼저 9월 초에 경성에서 군사를 모아 회령의 국경인(鞠景仁) 등 반란세력을 처단하고, 다시 군사 1천여 명을 정비하여 경성(鏡城), 장평, 임명(臨溟)에서 전공을 세웠고 또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백탑교(白塔郊) 등에서 승첩을 거두었는데 왜군을 총 2천명 이상 참수했고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조명 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고, 이후 함경도에 일본군이 두 번 다시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만들었다.
◉ 전쟁이 끝난 후,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장군은 1599년 장례원판결사·호조참의를 시작으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주로 고위직 지방관직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1624년 전주부윤이 되었고, 다음 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가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이괄이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유추해 볼 때, 북관(함경도) 지역의 주민으로부터 존경받던 농포(農圃)를 함께 엮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1666년 5월>편에 따르면, 인조반정 후 박래장(朴來章)의 옥사에 무함을 받아 대질심문 끝에 해명되어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꼬치꼬치 논의하는 대관(臺官) 박정(朴炡 1596~1632)이 끝내 그를 고신하여, 형틀에서 죽고 말았다. 이른바 시(詩)가 빌미가 되어 죄를 받는 것을 시안(詩案)이라 하는데 정문부가 5년 前 1618년 창원 부사로 있을 때, 스스로 회포를 읊은 영사시(詠史詩)를 엮어 모함하였다. 지금부터 400년 전, 정문부(鄭文孚) 장군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시(詩) 때문에, 모진 매타작과 압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한많은 인생을 하직했다.
○ 농포가 1618년 창원부사 재직 시절, 지은 <영사시(詠史詩)> 4수(四首)는 초회왕(楚懷王)과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에 관한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망국의 위기에 빠졌던 역사적 사실을 인용했다. 농포를 문초하던 사관 둘이서 보고는, 초회왕을 인용한 부분이 이괄의 난에 관련 있다는 죄목을 덮여 씌었다. 이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처럼, 또는 남이장군의 ‘남아이십미평[득]국(男兒二十未平[得]國)’을 고변한 것처럼, 억울한 모함에 빠져, 그렇게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이 영사시(詠史詩)는 인조반정 5년 전에 지은 시다. ① 인조가 즉위하기 5년 전이니, 인조를 비방할 수 없는 시다. 5년 후에 일어날 인조반정을 어찌 미리 알고 비방시를 지었겠는가. ②또한 그 내용이 인조에 딱 들어맞는 것인가도 문제이다. 이 시는 속이고 먹히는 전국시대 중원의 덧없는 역사를 읊은 영사시(詠史詩)다. 또 ③그 내용 중 마지막 부분, <잔약한 손자>라는 부분이 인조를 빗댄 비방의 시라고 몰아 부친 것 같지만, 걸맞지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해칠 목적에 맞춘 말일 뿐이다.
○ [죄목을 덮여 씌운 사적인 이유]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를 해치려는 자는 인조반정 혁명의 주체세력이었던 반정공신 대관(臺官) 박정(朴炡 1596~1632)이었다. 사실 박정(朴炡)은 농포(農圃) 공에 앙갚음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623년 전주부윤 당시 국고에서 빌려 쓴 환곡(還穀)을 갚지 않는 불법 거간꾼이 있어 이를 감금했는데 그를 풀어주라는 인조반정 공신 박정(朴炡)으로부터의 청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박정은 전임 전주부윤이였다. 열흘에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왔다. 부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강직한 농포공이 자기를 한 번 굽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고비였다. 원칙주의자 농포공은 결국 이를 특사(特赦)하지 않고 끝내 환곡을 회수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늘 앙갚음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박정은 대관(臺官)이란 자리를 이용해 농포공에게 괘씸죄로 엮었다. 결국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장군은 비운의 영웅으로서, 고신 끝에 옥사(獄死)했다.
⇨ 다음은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한시(漢詩) 몇 편을 이어 소개하겠다.[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영사시(詠史詩)는 다음 편에 소개하겠다.]
● 다음 ‘庚’ 운의 칠언절구 <도온성(到穩城)>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작품이다. 이 시는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재직 시에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라고 덧붙여 놓았다.(係北評事時作) 저자가 최북단 온성(穩城)의 높은 곳에 올라, 저 멀리 동해 바다를 어렴풋이 바라보며, 국토 수호에 대한 격정적 감정을 표출한 글에서 호기(豪氣)가 느껴진다. 시인은 드넓고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잔 술로 들이키겠다는 호탕한 표현으로 자신의 기개를 드러내었다. 특히 고래(長鯨)를 회쳐 안주로 삼고 횡포한 바다 자체를 한 잔 술로 들이마시겠다고 호언(豪言)하는 구절에서, 그가 왜? 난리 통에 영웅이 되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시어 ‘장경(長鯨)’은 분탕질을 치고 있던 왜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왜적을 토벌하고자 하는 장수로서의 담대한 기개를 드러내었다.
1) 온성(穩城)에 도착해[到穩城]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倚劒登臨萬里城 칼에 의지해 만리성에 올라서서
烹龍炮鳳膾長鯨 용 삶고, 봉 굽고, 고래를 회쳐서
滄溟水作一杯酒 저 큰 바닷물을 한 잔의 술 삼아
倒向將軍胸裡傾 장군을 향해 가슴속에 부어 볼까나.
● 다음 ‘尤’ 운의 칠언율시(七言律) <차강계운(次江界韻)>은 임진왜란 함경도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작품이다. 이 시는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재직 시에 북관 일대를 순행하다가 지은 글이다. 강계는 4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하천이 많이 흐른다고 해서 강계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강변 높은 야산 위에 인풍루와 망미정이 위치하고 있고 도심 중앙의 가장 큰 물줄기가 장자강이다. 이 작품의 첫 시어 ‘높은 누각(高樓)’은 이 두 누각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내용에서 ‘지사(志士)’는 저자 자신을 지칭하며, 오직 나라 생각뿐이라면서 좋은 계책을 구중궁궐에 올릴 방도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2) 강계 운에 차하다[次江界韻]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高樓不盡古今愁 높은 누각은 끝이 없는 고금(古今)의 근심인데
漢虜橫分一水流 중화와 오랑캐의 대군이 한 물줄기를 가로질러 대치했었다.
靑海亭臨風萬里 푸른 바다에 임한 정자에 만 리 바람 불어오고
白頭山戴雪千秋 백두산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눈을 이고 있네.
將軍自倚長城壯 장군은 장성(長城)의 웅장함에 저절로 의지하고
志士猶爲大國憂 지사(志士)는 오로지 나라를 위한 근심뿐일세.
遙望日邊何處是 무릇 어디에 일변(日邊)이 있는지 멀리 바라보노니
九重無路借前籌 구중궁궐에 좋은 계책을 올릴만한 방도가 없구나.
[주1] 일변(日邊) : 원래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가리킨다. 동진(東晉)의 명제(明帝)가 어렸을 적에 부왕인 원제(元帝)에게 장안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임금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두보(杜甫)의 〈남경정백중승(覽鏡呈栢中丞)〉에 “위수는 관내로 흐르고, 종남산은 해 주변에 있네.[渭水流關內, 終南在日邊]라고 하였다.
[주2] 구중(九重) : 문이 겹겹이 이어진 깊은 궁궐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있는 대궐 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3] 차전주(借前籌) : 좋은 계책을 올리다. 지혜를 빌리다. 군주의 밥상 앞의 젓가락을 빌려 계획을 헤아린 다는 뜻으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식사 중에 장량(張良)이 들어와 고조의 젓가락을 빌려 산가지로 삼아 계획을 의논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 다음 ‘魚’ 운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초승달(初月)>은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8세(八歲作)에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 ‘농포집(農圃集)’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여성 시인 황진이(黃眞伊1506~1567)의 <영반월(詠半月)>를 그대로 베낀 작품이다. 2구 첫글자 ‘磨’가 ‘裁’로, 4구 첫글자 ‘愁’가 ‘謾’으로 바뀌어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어린 8세 정문부(鄭文孚 1565~1624)가 황진이(黃眞伊 1506~1567)의 시를 외우고 어른들께 재롱을 피운 모양이다.
3) 초승달[初月] 8세 작(八歲作)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誰斲崑山玉 누가 곤륜산의 옥을 캐내어
磨成織女梳 직녀의 머리빗을 갈아 만들었을까?
牽牛離別後 견우와 이별한 그날 이후로
愁擲碧空虛 시름에 겨워 푸른 하늘에 던진 거라오.
● 다음 ‘庚’ 운의 칠언절구(七言絶句) <도온성 추차이덕재(성길)운(到穩城 追次李德哉 成吉韻)>은 임란 때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가 북평사(北評事) 재직 시에 지은 절구(絶句)라고 적어 놓았다.(係北評事時作) 차운한 이덕재(李德哉)는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92년 때마침 승승장구하며 도착한 온성의 고성(高城)에 올라가, 이덕재와 한잔 술을 나누며 그간 섬 오랑캐, 자라와 고래를 물리친 자부심과, 앞으로 적을 섬멸할 담대한 기개를 드러낸 우국충정의 작품이다.
4) 온성에 이르러 이덕재(성길)의 시운에 뒤따라 차하다[到穩城 追次李德哉 成吉韻] 이하 4수는 북평사 재직 때 지은 것이다.(以下四首 係北評事時作)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平臨北極作高城 북쪽 끝에 임한 평원의 높은 산성에서 읊노라니
釣欲連鼇劍斷鯨 연이어 자라를 낚아 올리고 고래를 찔러 죽였네.
容我飮酣靑海渴 내 어찌 푸른 바다가 다 마르도록 얼근히 마셨더냐
爲君談笑白山傾 그대와 담소를 나누노니 백산(白山)이 기울구나.
[주1] 이덕재(李德哉) : 이성길(李成吉 1562~1621)로, 본관은 고성(高城), 자는 덕재(德哉), 호는 창주(滄洲)이다. 1589년(선조2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4년 병조 좌랑에서 면직되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수성도 찰방(輸城道察訪)이 되었다. 북청 판관, 함흥 판관, 여산 군수, 합천 군수,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판결사와 분조(分朝)의 병조 참판에 올랐다. 명나라에는 조존성과 함께 1612년에 다녀왔다.
[주2] 백산(白山) : ①중국의 역사책에 전하는 말갈(靺鞨) 부족의 하나. 또한 ②우리나라 평안도와 함경도에 여러 백산(白山)이 있다. ③또 태백산이나 백두산을 일컫기도 한다.
● 다음 ‘陽’ 운의 칠언율시(七言律) 2수(首) <길주 차객관벽상운(吉州 次客館壁上韻)>은 조선중기 문신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작품이다. 첫 수(首)와 둘째 수(首) 모두 ‘傷’‘岡’‘香’‘狂’‘長’ 자(字)를 압운자로 사용해 운율(韻律)의 리듬감을 살려내었다. 전쟁의 참혹상과 망국적인 당쟁의 부당성을 언급했고 먼 타향에서 떠돌며 관직생활을 하는 저자의 심정을 잘 묘사해 놓았다. 그리운 부모 형제와 고향 생각에 늦가을 바람에 이는 잎사귀 소리 듣기가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글을 읽다보면 그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이나 장군이 아닌, 감수성 풍부한 문신(文臣)이자 시인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정문부는 전란 중이었던 1597년에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역임하고 이어 1611년에 다시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차출되어 부임했던 경험이 있다. 전란 중에도 길주목사·안변부사를 거쳐 남쪽 공주목사에 임용되어 부임했는데 당시 전란의 폐허 속에 처참했던 국토의 상황을 목도하였다. 1599년 장례원판결사·호조참의, 예조참판이 되어 조정에 들어가 근무하다가 이 글을 지었다. 그는 조정 관리들의 당파 싸움에 회의를 느껴, 결국 외직을 청해 지방관으로 돌아갔다.
5) 길주 객관 벽상 운에 차하다[吉州 次客館壁上韻]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歲在龍蛇事可傷 임진년(龍蛇)의 해에 일어난 일이 슬프지 않은가.
南來兵火爍崑岡 남쪽으로 오니 전쟁의 화재로 곤강(崑岡)의 불처럼 빛난다.
池臺蕪沒成陳迹 연못의 누대에는 잡초가 뒤덮어 옛일 되고 말았으니
羅綺銷沈憶舊香 고운 비단은 삭아 없어지고 예전의 향기만 떠오르네.
亂世且爲陶令醉 난세(亂世)에도 도연명(陶淵明)은 매일 취해 살았으니
窮途欲學阮生狂 곤궁한 처지에도 완생(阮生)의 미친 행세를 배우고자 했다.
傍人莫笑吾儒腐 사람들아~ 우리 선비들이 썩었다고 비웃지 마소.
猶帶秋蓮尺許長 오히려 한 자쯤 보이는 연꽃이 빙 둘러 피웠잖소.
天涯遊子足悲傷 하늘 끝에서 떠도는 나그네, 심히 마음이 슬프고 쓰라린데
況乃佳辰陟岵岡 하물며 좋은 날, 언덕에 올라 아버지 계신 곳 바라보네.
不識弟兄何處會 형제들이 어느 곳에서 모여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遙憐茱菊故園香 멀리 있어 가련한 수유나무와 국화는 고향의 향기라네.
偶成歸夢愁仍罷 우연히 돌아가는 꿈을 꾸고 나니 시름 그만 사라지는데
纔得來書喜欲狂 가까스로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니 미치도록 기쁘구나.
送盡邊鴻人未去 변방의 기러기 다 떠나도록 사람들은 아직도 떠나지도 못하는데
可堪庭樹葉聲長 뜰의 나무 잎사귀에 길게 이는 바람 소리를 어찌 견디랴.
[주1] 용사(龍蛇)의 해 : 그해의 간지(干支)에 진(辰)과 사(巳)가 들어간 해로, 예전에는 이런 해에는 흉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용의 해와 뱀의 해. 현인이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임진년 왜란을 말한다. 용사(龍蛇)는 비범한 사람, 현인(賢人)을 비유한다.
[주2] 곤강(崑岡) : 곤강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이나 모조리 타 버린다.”<서경>. 그 유명한 곤강의 옥마저 불타 버린다고 한다.
[주3] 도령(陶令) : 중국의 대시인 도연명(陶淵明). 그는 일찍이 강서성(江西省) 북부에 있는 팽택(彭澤)의 영을 지냈으므로 도령(陶令)이라 부른 것이다.
[주4] 완생(阮生) : 삼국 시대 위(魏)나라 문학가·사상가 완적(阮籍 210~263)이다. 수레를 타고 나갔다가 길이 막히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부패한 정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미친 사람 행세를 했다. 괴짜 시인으로 죽림7현 중에 가장 유명하다. 죽림7현은 3세기에 활동했던 7인의 시인과 철학자들로, 그들은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도피하여 술 마시고 시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주5] 척호(陟岵) : ‘민둥산에 오른다.’는 뜻으로, 타향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함을 이르는 말. ≪시경(詩經)≫ <척호편(陟岵篇)>의 “저 민둥산에 올라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네.”라는 시구(詩句)에서 유래(由來)하였다.
[주6] 수국(茱菊) : 수유나무와 국화. 여기서는 고향을 그리는 정서적인 상징물
● 다음 ‘東’ 운의 칠언율시(七言律) <창원작(昌原作)>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작품이다. 1618년 창원부사 재직 시에 마산 창원 진해, 합포만 일대를 둘러보고 지역의 옛 역사를 떠올리고 창작한 칠언시이다. ‘합포환주(合浦還珠)’란 말처럼 자신이 부임하니 떠나간 구슬도 다시 돌아왔다면서 자찬과 동시에 빼어난 경치를 언급했다. 또한 고려시대 일본정벌을 위해 설치했던 행정동성(行征東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최치원이 친필로 새긴 월영대(月影臺)는 아직도 건재하다. 때마침 어부와 나무꾼의 흥겨운 노래소리 들려오니 나머지는 취한 늙은이, 나의 몫이라며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무리했다.
6) 창원에서 짓다[昌原作]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太白山南智異東 태백산(太白山) 남쪽 지리산(智異山) 동쪽에
還珠勝致似壺蓬 환주(還珠)의 빼어난 경치가 봉래산 같네.
人家籬落千年碧 인가의 무너진 울타리는 천년을 흐르고
官舍門庭百日紅 관사 문 앞에는 백일홍이 붉게 피었구나.
元將候風行省廢 원나라 장수가 기풍을 날리던 행성(行省)은 사라졌고
崔仙翫月古臺空 달을 사랑했던 최치원의 옛 대(月影臺)는 텅 비었네.
只今留與漁樵唱 지금은 어부와 나무꾼의 노래만 남았으니
一半平分屬醉翁 나머지 절반은 취한 늙은이 몫이라네.
[주1] 환주(還珠) : 구슬이 돌아오다. 합포환주(合浦還珠)란 말이 있다. 후한서(後漢書)에 “맹상이 합포태수(合浦太守)가 되었는데, 그 고을은 곡물(穀物)이 생산되지 않고 바다에서 주보(珠寶)가 난다. 전자에 수령들이 이 구슬을 탐내어 사람을 시켜 마구 캐들이게 하니, 구슬이 점차 이웃 고을로 옮겨갔는데, 맹상이 도임하여서는 그 구슬이 다시 돌아왔다 한다. 그래서 잃었던 물건이 다시 돌아온 것을 ‘합포환주’라 부른다.
[주2] 행성(行省) : 고려시대, 원(元)나라에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창원(마산)에 설치하였던 행정동성(行征東省)을 줄여서 이르는 말.
[주3] 최치원의 옛 대(臺) : 명승지의 하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馬山) 해운동(海雲洞)에 있다. 신라시대에 최치원(崔致遠)이 자연석에 친필로 “月影臺”라고 새겨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다음 ‘尤’ 운의 칠언율시 <차촉석루운(次矗石樓韻)>은 임진왜란 함경도 의병장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작품이다. 지금도 이 시는 진주 촉석루에 현판시로 걸려있다. 임진왜란의 전화(戰火)가 팔도를 휩쓸 때 이 촉석루가 가장 처참했는데 강물은 지금도 무심히 흐른다. 폐허를 다시 되살리려 장수와 백성이 함께 애써 힘쓰니, 마침내 기운 솟구친 진주성을 일구어내었다고 한다. 그 장려(壯麗)함 어찌 대단하지 않으랴.
7) 진주 촉석루를 차운함[次矗石樓韻]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龍歲兵焚捲八區 임진년 전화(戰火)가 팔도를 불살라 갈 때
魚殃最慘此城樓 무고한 재앙은 이 성루가 가장 처참하였다.
石非可轉仍成矗 굴릴 수도 없는 돌이 이내 높이 솟아 쌓였는데
江亦何心自在流 강물은 어찌하여 저리도 무심히 흘러가는가.
起廢神將人共力 폐허를 되살리는 일 장수와 백성이 함께 힘쓰니
凌虛天與地同浮 그 기운 하늘을 뻗치고 땅을 솟구쳐 오르네.
須知幕府經營手 이 거대한 일 해내는 막부의 솜씨 대단하지 않은가?
壯麗非徒鎭一州 그 장려함이 이곳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리라.
● 다음 ‘元’ 운의 칠언과체시(七言科體詩) <월명화락우황혼(月明花落又黃昏)>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칠언고시(七言古詩)로 총 28구(句)의 장문의 한시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칠언절구 《궁녀의 원망(宮怨)》 4구에 ‘달 밝고 꽃 지는 중에 또 황혼이네(月明花落又黃昏)’를 주제로 삼아 지은 과체시(科體詩)이다. 과체시는 과거 시험을 보던 여러 가지 문체(文體)를 말한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당(唐)나라 시인 왕유(王維 699~759)가 버려진 한(漢) 성제(成帝)의 후궁 첩여(婕妤)의 입장에서 노래했던, 오언절구 <반첩여(班婕妤) 3수> 시의 내용을 대부분 인용해서 시를 완성했다. 때마다 꽃이 피고 지고, 달도 차고 기우나니 쓸쓸한 궁궐의 섬돌엔 푸른 이끼만 무성하다. 외로운 구중궁궐 속에서 더 이상 임금이 찾지 않는 후궁 첩여(婕妤)가, 쓸쓸히 늙어가며 옛 시절의 추억을 한탄하며 회상하고 있다.
8) 달 밝고 꽃 지는 중에 또 황혼이네[月明花落又黃昏] 14세 때 승보 장원(十四歲 陞補壯元) 작품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1578년 作.
簾垂金屋燕舞罷 주렴 드리운 훌륭한 집에 제비의 춤이 멈추고
日落紗窓初掩門 해가 지는 비단 창에 대문이 굳게 잠기었네.
佳人眉斂薄暮愁 저물녘 수심에 가인(佳人)이 눈썹을 찡그리고
獨倚雕欄含淚痕 홀로 난간에 기대어 젖은 눈물 참는구나.
思君不忍見明月 그대 그리워 밝은 달을 차마 볼 수 없는데
落花何更飄黃昏 어찌 황혼에 꽃이 나부끼며 떨어지나?
花辭故條似妾身 가지에서 꽃이 지니 마치 나의 몸과 같고
月有盈虧同主恩 달이 차고 이지러짐도 다 조물주의 은혜라네.
圓光一虧幾時盈 한번 이지러진 둥근 달빛이 언제 다시 차려나?
落紅辭條難可援 가지에서 꽃이 떨어짐은 매달려 있기 어렵기 때문.
離心觸物結長想 마음이 떠나니 대하는 사물마다 긴 시름에 잠기는데
脈脈暗銷相思魂 애처롭게 사모하는 마음도 남몰래 사라지네.
窓前久斷鳳輦來 창 앞엔 오랫동안 끊어진 길에 임금의 가마가 돌아오는데
玉階寥落靑苔繁 쓸쓸한 궁궐의 섬돌엔 푸른 이끼 무성하네.
今宵還對昨夜月 오늘 밤에는 어젯밤에 뜬 달을 다시 마주 보노니
去年花發今年園 지난해 피웠던 꽃이 올해 정원에 또 피웠네.
花開無限月明多 꽃이 무한히 피어나니 달도 너무 밝은데
幾度孤房悲隻䲮 몇 년째 외로운 방에서 독수공방의 슬픔 견디랴.
銀甁誰引斷繩後 은병(銀甁)을 누가 넘겨줘 끊어진 노끈을 잇겠냐마는
晝燭恨殺殘生存 주촉(晝燭)에 쇠잔한 인생 살다가 원한을 품고 죽겠지.
前庭歌吹後庭舞 집 앞의 뜰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니 집 뒤의 뜰에서 춤추는데
別有何人隨至尊 어떤 특별한 사람이 지존(至尊, 임금)을 모셨다하네.
看花趁月樂未央 꽃을 보며 달을 쫓아가니 즐거움이 그치질 않는데
深院誰知孤妾冤 깊숙한 집안에 외로운 첩의 원통함을 누가 알랴.
那堪門外度金輿 어찌 감당하랴. 대문밖에 임금의 수레가 지나가는 걸,
悵望空自臨高軒 창망해라. 높은 처마의 큰 집도 공허하기 짝이 없음을.
瑤琴彈罷夜又深 옥 거문고 연주를 그치자니 밤은 또 깊어져
落月依依花不言 지는 달이 아쉬운데도 꽃은 말이 없구나.
[주1] 봉련(鳳輦) : 꼭대기에 황금의 봉황(鳳凰)을 장식한, 임금이 타는 가마.
[주2] 요락(寥落) : 몰락하여 적막함, 곧 실의(失意)의 슬픔에 빠짐. 쓸쓸하다.
[주3] 은병(銀甁) : 고려 숙중(肅宗) 때부터 유형되던 화폐의 한 가지. 영영 버림받는 신세를 뜻한다. 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비유하기도 한다.
[주4] 주촉(晝燭) : 한낮의 촛불은 켜놓아도 그 불빛이 희미하여 쓸모가 없는바, 모부인이 남편을 잃고 실의하여 의미 없이 살아갔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5] 고헌(高軒) : 높은 처마, 크고 널찍한 집. 높은 수레(고귀한 신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