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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이 진짜야. 모든 길이 옳은 길이야.
선택할 수 없을 땐 가만히 있는 거야.
#1 새로운 현실에 대한 가장 우수한 영화
이런 영화를 왜 이제서야 보게 되었을까요. 정말 강력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영화입니다. 경전 몇 만 줄 읽는 것보다 이 영화를 한 번 보는 게 초월 내지 깨달음의 현실에 대해 감 잡기가 훨씬 좋을 것 같아요. 아, 근 몇 년간은 나오는 영화들이 참 대단하네요. 정말 그런 시대인가 봐요.
제발 봐주세요. 돈이 없으시면 제가 휴대폰 소액결제를 통해서라도 대신 예매해드릴게요. 진심이에요. 부디 봐주세요. 그리고 나눠요. 이게 정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근원적인 동시에 새로운 현실임을 나눠봐요.
하루종일 커피열매 수확으로 지친 엄마에게 영문 모를 잔소리를 듣고 우울해진 브라질의 한 소녀가 기분전환으로 공터에서 놀며 하늘에 띄운 비눗방울이 서풍을 타고 이동하다가 대한민국 상공의 적란운을 자극해 내린 늦가을의 소나기를 피해 작은 커피숍에서 몸을 녹이고 계신 당신이 무료함에 스마트폰을 작동시켜 이 카페에 접속해 이 게시글을 보고 작은 가슴의 울림을 느끼며 가까운 영화관을 찾을 수 있다면, 네, 우리는 그렇게 만나는 거겠죠. 이 영화에서는 바로 그걸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선택의 무게는 몇 그램인가요?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더 행복할 수 있을까?"
한국어판 포스터의 카피문구네요. 바로 이거죠. 우리는, 중요한 한 번의 선택이 그 뒤의 우리의 삶을 모조리 결정짓는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이 무거워져요. 때로는 선택하지 않으려고 도망가거나, 선택을 한없이 지연시키기도 하고요. 사르트르는 이 선택의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죠. "인간에게 자유란 선고된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선택의 자유라는 건 사실 인간에게 그리 기쁜 일만은 아닙니다.
마치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식으로, 앞으로의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기로가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무게로 매순간 우리를 압박해오는 큰 짐이겠죠.
영화에서도 이 선택의 무게는 주인공인 니모 노바디(자레드 레토)에게 그렇게 경험됩니다.
영화는 2092년에 118살이 된 니모의 시점에서 시작되요. 그가 살고 있는 미래는 세포의 무한재생이 가능해 노화로 죽는 일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모는 유일하게 노화로 곧 삶을 마감하게 되는 마지막 인간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난 시절의 그의 기억이 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미스터 노바디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이어집니다.
니모는 최면과 인터뷰 속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나뭇잎이 연결해준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게 된 부모님의 삽화와, 자신이 수영장에서 첫눈에 반했던 안나(다이앤 크루거)라는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게 만들었던 여러 선택들 역시 함께 기억해갑니다.
그 중, 첫 번째 선택은 니모가 9살 때의 일입니다. 영원히 행복할 것만 같았던 부모님이 결국 이혼하게 되면서, 니모는 부모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영화는 아주 즐거워지는데요. 이 첫 분기점을 중심으로 계속 선택들이 가지를 쳐나가며 총 9개의 각기 다른 니모의 삶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크게 보았을 때, 그 다음의 주요한 선택은 니모가 15살 때 발생하는데요. 어머니를 선택해 어머니와 재혼한 새아버지의 딸인 안나와 조우하게 되면서 사랑을 키워가는 이야기가 그의 15살의 한 축에 놓여 있고, 아버지를 선택해 고향에 머물며 앨리스(사라 폴리)와 진(린당 팜)이라는 소녀들 사이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15살의 또 다른 한 축에 놓여 있습니다. 이 각각의 분기점에서 또 자잘한 선택들이 이루어짐으로써, 그 선택마다 니모는 해당 이야기 속의 연인을 못 만나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하는 등, 여러 모험들이 펼쳐집니다.
다시 또 큰 줄기 속에서는 34살의 니모가 선택을 해나갑니다. 어머니가 새아버지와도 이혼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안나를 19년째 그리워하며 찾아다니는 니모가 존재하고, 앨리스와 결혼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앨리스를 돌보며 살아가는 니모가 또한 존재하며, 진과 결혼해 안정적인 삶을 누리나 늘 권태와 무기력에 시달리는 니모가 존재합니다. 여기에서도 세밀한 잔가지들의 분기가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안나를 결국 못만나는 경우라든가, 앨리스가 결혼 직후 죽는 경우, 진과의 생활에서 도망가기 위해 니모가 미필적 고의로 살해당하는 경우 등의 이야기들이 영화를 복잡하게 만들면서도, 더욱 큰 흥미를 자극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전부 다 118살의 니모가 기억하는 자신의 삶입니다. 한 인간의 기억된 삶입니다. 이렇게 각각 모순되고, 현실적으로 경험하기 불가능한 다차원적인 삶이, 한 인간에게 모두 다 실제적으로 경험된 기억으로 존재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영화에서는 니모의 입을 통해 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이야기들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상호연관적으로, 다차원적인 평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생생한 현실임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가 살아 있는 현실과 죽은 현실, 그녀와 함께하는 현실과 그녀를 잃은 현실, 그 모든 모순된 현실들이 전부 한 인간에게 생생하게 살아진 현실들로서 완벽하게 공존하고 있는 역설이, 곧 이 우주의 구조임을 이 영화에서는 부단히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관객의 의문처럼, 118살의 니모를 인터뷰하던 기자도 이 모순과 역설 앞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니모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그 모든 기억들 중 대체 어떤 게 니모가 정말 살았던 진짜 삶이고, 진짜 기억인지를 묻습니다.
니모는 웃으며 대답합니다.
"이 모든 삶이 진짜야. 이 모든 길이 옳은 길이야."
그 어떤 선택으로 펼쳐진 삶이든 간에, 잘못된 길이 없이 전부 진짜인 삶이고, 하나인 삶이라고 니모는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선택이란 게 무엇인지, 아니 올바른 선택이란 게 무엇인지, 이 영화를 통해 우리들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물어져야 하는 시점일 것입니다.
선택이란 게 대체 뭘까요? 그리고 선택이란 것의 무게는 우리가 알아왔던 것처럼 정녕 그렇게 무겁기만 한 것일까요?
#3 선택하는 자는 곧 사랑하는 자일지어니
니모가 살아온 그 무수한 삶들이 곧 이야기입니다. 바로 인간의 이야기 말이에요. 영화에서는 노인 니모의 시선을 통해 우리의 모든 삶들이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이야기는 마음일 뿐, 우리가 아니에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주체가 아닙니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일 뿐이에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떤 이야기 속에서 경험하도록 제공되는 여러 마음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예속된 등장인물들입니다. 그게 곧 인간이고요. 이야기에 담긴 각종 마음들을 생생하게 경험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에요.
동시에 인간은 이야기 밖의 시선의 힘을 통해, 이야기 안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는 참 묘하고 신비스러운 존재에요. 하나의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진실이에요. 이 영화에서도 반복해서 그 완결된 구조를 보여주고 있어요. 하나의 이야기 내에서는 어떤 짓을 해도 결코 그 이야기가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 삶이 이야기임을 꿰뚫어보는 이야기 밖의 시선이 개입해야, 비로소 이야기가 다른 갈래길로 빠져나갈 수 있어요.
이 영화에서 무수한 선택의 분기점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바로 그 시선의 힘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시선의 주체가 되어주고 있는 인물이 바로 노인 니모에요. 노인 니모의 시선이 과거의 이야기 속에 드러났을 때, 그 이야기의 결말이 알려지고, 과거의 니모는 다른 분기점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러한 시선의 묘사는 더 노골적입니다. 아예 노인 니모가 시각적으로 출현해 과거의 니모에게 눈맞춰줘요. 지금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자각할 수 있도록 과거의 니모, 즉 하나의 이야기 속의 니모를 인도해줘요. 이쯤 되면, 영화 속에서 노인 니모가 '미스터 노바디(Mr. Nobody)'라는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더 유의미해지지 않나요.
바로 이 지점에서, 선택의 개념도 우리가 익히 알아왔던 선택의 개념과 완벽하게 달라집니다.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사르트르의 무거운 책무가 아니라, 니체의 우주적 결단이 아니라, 더 경쾌한 노랫소리를 타고 선택은 우리 앞에 사뿐히 착지합니다.
노인 니모는 얘기합니다.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을 땐,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야."
정확하게 감이 오셨죠. 이건 멈춤에 대한 얘기에요. 모든 애씀과, 모든 의도와, 모든 추구가 멈춘 그 자리, 우리가 피조물로서 가장 겸손해지는 그 자리, 가장 고요한 근원의 그 자리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리고 진짜 선택이란 건, 이것 또는 저것 중의 하나를 우주적 무게를 담아 택일하는 게 아니라, 우선적으로 이 마음에게 무언가를 선택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선택에 대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확인하는 것이죠. 즉, 선택 앞에 우리의 무력을 고백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엎드림의 결과로 열리게 되는 그 영원한 선(禪)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어떤 것이든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선택될 때, 이것은 곧 저것이고, 저것은 곧 이것이거든요. 그 둘은 동일해요. 그래서 선택은 더는 양자택일이 아니게 되어버려요.
즉, 선택은 이것과 저것, 둘 중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된 그 제3의 길 위에 있습니다. 시선이 바로 우리에게 지금 대체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잖아요. 그래서 선택은 시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쩌면 시선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엄밀하게 얘기해 우리에게 선택이란 자유는 없을지도 몰라요. 그저 어떤 이야기 속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인력만 있을 뿐이고요. 선택은 사실 창조거든요. 시선을 통한 새로운 현실의 창조. 이 창조의 주체는 지금의 보편적인 현실 속에서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지인 것 같습니다. 뭐 여튼요.
모든 이야기는, 맞아요, 동양적인 표현으로 옮기자면 다 꿈입니다. 너무나도 생생하지만, 확인하고 나면 실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시선의 힘 속에서 다 변화되고 새로 쓰여 구원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 속에 있는 우리의 삶이 전부 다 구원될 수 있는 거예요.
니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의심하며, 당신은 과연 존재하는 사람이 맞냐고 묻는 기자에게 니모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실은 자네도, 나도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그저 9살짜리 아이의 꿈이야. 그 어떤 것도 차마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의 꿈."
니모의 가장 최초의 선택, 즉 '아버지를 선택해야 하나, 어머니를 선택해야 하나?'라는, 9살짜리 아이에게 이미 과부하로 이렇게나 무겁게 걸린 그 선택의 순간이 이 무수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던 거예요. 이야기들이 계속 가지를 쳐가며 그 무거움과, 좌절과, 패배의 순간을 거듭 쌓아갔던 거예요.
노인 니모의 시선 속에서 9살의 니모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해합니다. 지금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 이 이야기들의 결말이 무엇인지, 아주 명료하게 자각합니다. 이 순간 9살의 니모는 이야기 밖으로 나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안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택일하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정확하게 이야기 밖에서 선택합니다.
니모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숲으로 달려가 부모님을 맺어주는 연이 되었던 나뭇잎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을 하늘로 띄워 보냅니다.
그 순간, 니모의 모든 과거가 변화하고, 모든 현재가 변화하며, 모든 미래가 변화합니다. 니모의 모든 세계가 구원됩니다. 끝없이 전개되어 나갔던 모든 이야기가 한순간 구원됩니다. 모든 삶이 전부 다 정당한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9살의 니모는 굳건한 결합 위에 있는 부모님과 함께하고, 15살의 니모는 안나와, 또 앨리스와 함께하며, 34살의 니모는 안나를 다시 찾고, 건강한 앨리스를 다시 찾으며, 진과의 생활을 다시 찾습니다. 그리고 118살의 니모는 이렇게 외치며, 가득 담은 미소 속에서 숨을 거둡니다.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야!"
아, 근데 금방 또 숨을 돌이키며 부활해요. 이 영화는 끝까지 보여주려고 작정한 것 같아요.
그 고요한 영원의 자리에서의 선택이란, 바로 선택이라는 이야기 자체의 무효화입니다. 문제의 해답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문제 자체를 무효화시켜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거기에는 니모의 삶과 죽음이라는 선택의 문제도 이미 무효화됩니다. 샤르댕이 오메가포인트라고 불렀죠. 우주가 근원으로 수렴하는 그 시간이 가속되는 가운데, 118살의 니모는 홋홋홋 웃으며 한바탕 춤사위를 벌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려요.
이처럼 진짜 선택은 우리의 모든 삶을 구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대긍정의 응답, 그게 곧 사랑이죠. 그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고, 모두가 구원되는 진짜 선택이란 결국 사랑 안에서만 가능해요.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우리의 세계에 드러났을 때, 그 선택의 주체는 사랑의 주체가 아닌 그 어떤 다른 주체도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진정으로 선택하는 자는, 곧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럼 이 얘기를 또 물음으로 옮겨가야죠.
우리가 어떤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늘 우리를 선택하는 주체는 대체 어떤 주체일까요?
그 주체도 노인 니모처럼 우리를 선택하며 늘 덩실덩실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까요?
답을 위한 것이 아닌 물음의 회답은 늘 노래밖에 없겠죠. 늘 선택해주세요. 그 어떤 선로 위에서라도.
Goo Goo Dolls - Come To Me
Come to me, my sweetest friend
나에게 와요, 내 최고의 친구
Can you feel my heart again
다시 내 가슴을 느낄 수 있나요?
I'll take you back where you belong
당신이 속해있는 곳으로 데려다줄게요
And this will be your favorite song
이 목소리는 당신이 아끼는 노래가 될 거에요
Come to me, with secrets bare
나에게 와요, 있는 그대로의 비밀들과 함께
I'll love you more so don't be scared
당신을 더욱 사랑할테니, 두려워마요
When we're old and near the end
우리의 시간이 끝나갈 때
We'll go home and start again
우리는 함께 집에 돌아갈 거고, 또 다시 시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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