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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 김원필(金元弼) - 1. 북한에 오신 선생님 1 내가 선생님을 평양에서 처음 뵈온 것은 1946년 7월이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27세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성진씨가 태어난 지 두 달이 되었으므로 식량을 구하러 어느 시골에 가시던 길에, 이북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늘의 지시에 따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으셔서 1946년 6월 6일에 평양에 오셨고, 내가 7월에 선생님을 만났다. 2 선생님께서는 평양에 있는 성산(聖山)이라는 곳에 오르시어 기도를 하시고 오신 후에 나를 만나셨다. 그 성산은 평양의 많은 신령한 사람들이 올라가 기도를 하는 산이다. 3 그때 선생님께서 집회를 가졌던 곳은 두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그분들은 오래전부터 영적인 은혜의 생활을 하고 부부가 별거생활을 하면서 신앙 길을 찾아 나오던 사람들이었고, 선생님께서 그 집을 찾아서 집회를 주재하시게 되었다. 4 그때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 삼고 일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동방요배를 강요했기 때문에 지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떠나서 가정에서 기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자 가정에서 기도만 하던 사람들이 점차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5 선생님도 성경 책을 얼마나 보셨는지 구약 창세기로부터 신약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줄을 안 친 곳이 없고, 무엇인가 새까맣게 적혀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산이나 가정에서 오랜 해를 거듭하면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영계에서 많은 계시를 받고 있었다. 그 계시의 내용은 지금까지 그들이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6 지금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오신 것으로 목사들이 가르쳤지만, 계시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러 오시지 않은 것으로 가르쳐 주었다. 인간의 죄악의 근본에 대한 것도 다 달랐다. 그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우리 원리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들을 계시로 가르침을 받았다. 7 하늘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풀리는 것 같은데, 목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내용은 그와 다르기 때문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들이 교회에 오랜만에 찾아와서 목사님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잡된 신이 가르쳐 준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8 목사님이 설명을 해주리라 생각하고 간 사람들이 목사님이 전혀 다른 소리를 하니까 마음에 근심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 하늘 앞에 기도를 하면 다시 하늘에서는 목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계시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혼자는 성경으로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인물, 자기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줄 지도자를 찾아 헤매었다. 9 그런 때에 선생님께서 이북에 오시게 되었다. ‘진리와 신령으로써 예배를 보는 이남에서 오신 젊은 선생이 있다.’라고 소문이 퍼졌다. 그런 소문을 듣고 마음이 설레는 가운데 진리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선생님 계신 곳으로 자꾸 모여들게 되었다. 10 특별히 영적 체험을 하고 계시를 받아오던 분들은 봉건사회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자라난 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생명을 각오하고 그것을 극복한 분들이기 때문에 진리를 찾기 위해 가정에서의 핍박 같은 것은 일찍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11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께서 신약 가운데 있는 로마서를 2주일 동안 가르쳐 주셨다. 그때가 7월, 더운 여름이었는데 좁은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의 그 젊었을 때(27세)의 정력은 대단했다. 12 그때 선생님께서는 한복을 입고 계셨는데 말씀이 끝나고 그 한복을 벗어서 짜면 물이 나오곤 하였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겨울에 솜이 들어 있는 한복을 입으셨는데 그때도 말씀을 하시고 나면 그 솜옷에서도 물을 짜야 했다. 13 선생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시면 식구들이 볼 일이 있어서 일어서지 않는 한 계속해서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입신하는 사람, 예언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또 그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도 있었다. 14 그리고 때로는 알아보기 위하여 온 사람이 합당치 않은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으면, 영통하는 사람이 눈을 감은 채 아무도 다치지 않게 사람들 틈을 뚫고 가서 그 사람의 등을 탁 친다. 그러면 맞은 사람은 회개를 하면서 또 통곡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식구들은 대부분 불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어깨로 불이 확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또 가슴으로 불이 오면 아주 뜨거우면서도 평화로움을 느낀다. 15 선생님께서 공석에서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지만 사석에서는 절대 말씀을 않으셨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시게 되면 그런 신령 역사가 일어났다. 그렇게 되면 소리가 커지고 그다음에는 몸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16 지난 날에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다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되었기 때문에 뉘우치면서 막 울고, 울고 나면 마음이 기쁘고 좋아서 노래하고 춤추곤 했다. 그래서 예배가 조용하지 않았다. 불의 역사가 일어나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병들이 깨끗하게 나아진다. 17 그리고 선생님께서 성경 말씀을 원리를 중심 삼고 잘 풀어서 해 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의 주위에 몰려왔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계에서 “저분이 오시리라고 약속한 그분이다.”라고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젊은 선생이 이남에서 오셨는데 가서 만나라.” 하는 계시를 받고 선생님을 찾아와 말씀을 듣기도 했다. 18 집회를 하실 때는 선생님께서 직접 찬송, 기도, 말씀, 찬송, 기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주관하셨다. 예배를 끝내시고서도 선생님께서는 식구들이 더 오래 있기를 원하셨고, 또 식구들도 더 있고 싶어했다. 선생님께서는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식구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시는 경우가 있다. 선생님이 식사를 하시다가 남은 것을 어느 식구에게 주었다. 19 그런데 그 식구는 오랫동안 위가 나빠서 고생을 하였는데 선생님께서 주신 그 음식을 먹고서 단번에 나아 버렸다. 그래서 선생님이 진지를 잡수시게 되면 ‘조금 남기셔서 나를 주었으면’ 하고 모두 원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의 밥은 약밥’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교회 음식은 별로 갖춘 것이 없지만 자기 집의 좋은 음식을 제쳐 놓고 다들 교회에 와서 먹기를 원했다. |
金元弼 - 証言 1. 北緯から来られた先生 私が平壌で、初めて先生にお会いしたのは一九四六年七月です。先生はそのとき二七歳でした。 聖進様(文鮮明師の長男)が生まれて二ヵ月が過ぎ、先生は食物を得るために田舎に行かれたのですが、その途中で「北韓に行ってみ言を伝えなさい」という神の指示を受け、すぐその場からそれに従って困難に耐えながら三八度線を越えて、一九四六年六月六日に平壌に来られたのです。そして1ヵ月後、先生は平壌にある聖山という山に登られた後に、私と会ったのです。聖山は平壌の多くの心霊的な人たちが登り、祈りを捧げる山なのです。 そのとき先生が集会を開いた所は、二組の夫婦が住んでいる家でした。その方たちは、以前から霊的恵みの多い生活をしながら信仰の道を求めて来た人たちでした。先生はそういう家を探していたのです。 そのとき、韓国は第二次世界大戦を中心として、日本人がキリスト教信者たちに東方要拝を強制したので、大部分の人たちは戦争が終わるまで教会を離れて、家庭で祈りの生活をしていました。 先生も聖書をどれくらい読まれたことでしょうか。旧約の創世記から新約の黙示録に至るまで、線が引かれていないところがないくらい、黒く書かれてありました。 多くの人たちは山や家庭で長い年月をかけて繰り返し祈っているうちに、霊界から多くの啓示を受けました。その啓示の内容は、今まで彼らが教会の牧師から教えられた内容とは全く異なるものでした。今までのイエス様の十字架は、人間を救援するための十字架で、イエス様は十字架で亡くなるために来られたと、牧師たちに教えられたのですが、啓示ではイエス様が十字架で亡くなるために来られたのではない、と教わったのです。 また、人間の罪悪の根本に対することもみな異なっていました。そしてその人たちは、私たちの原理の内容を部分的に啓示で教わったのです。神様が直接教えてくださるのであればすっきりするのですが、啓示と牧師の内容とでは丸っきり反対なので、どうしてよいか分から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牧師にもう一度尋ねてみても、牧師たちはひたすら「それは誤ったことです。それは神様が教えてくださったのではなく、雑霊が教えてくれたのですから注意しなさい」と言うのでした。 それで家に帰って再び神様の前に祈ると、神様は「牧師たちが誤っている」というのです。彼らは一人では聖書の解釈ができないために、新しい指導者を捜し求め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そのようなときに先生が北韓に来られたのです。 「真理と心霊で礼拝する南韓から来られた若い先生がいる」という噂は、たちまちめうちに広がりました。そして多くの人たちが先生のところに集まるようになりました。特に多くの霊的体験と啓示を受けて来た方たちは、封建社会の厳しい環境の中で育った夫人たちでしたし、生命をかけて真理を追究するために、家庭からの迫害などは既に卒業した人たちでした。 私が先生に初めてお会いしたとき、先生は新約聖書のローマ書を二週間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ときは七月で暑い夏でしたが、狭い教会に多くの人たちがいっぱい集まって、み言を聞いていました。先生の若いときの情熱はすこぶるばかりで、講義が終わった後などは、韓国服は汗で絞るほど水が出たりしました。夏だからというわけではなく、冬でも綿入りの韓国服から汗が絞るほど出ました。 先生はみ言を語り始めると、食口(食事を同じくする兄弟姉妹の意味)が用事があって立ち上がらない限り、いつまでも語り続けられるのです。また、先生がお話しされるときには、入神する人、予言する人、異言をする人、その異言を通訳する人もいました。そしてときには、スパイに来た人が異なる心をもって座ると、霊通した人が目を閉じたまま、だれにも気づかれないように、人の間を通って行ってその人の背中を打つのです。そうするとその人は悔い改めながら慟哭するのです。そのような雰囲気の中で、食口の大部分は火を受けるようになり、ある人は肩から火が入って来るのを感じ、また胸から火が入って来るのを感じたりして、熱いながらも平和を感じたりしたのです。 先生は公席でたくさんお話をしてくださいますが、私席においては絶対にみ言を語らないのです。そして先生がみ言を語るようになると、心霊の役事が起こるのでした。そうなると声が大きくなり、その次には体がじっとしていられないのです。過去には神の心情を知らなかった人が、神の心情を体恤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悔い改めながら泣き、泣いた後は心からうれしく、喜んで歌ったり踊ったりするので、礼拝は大騒ぎとなるのです。 大の役事が起こることによって、長い間患っていた難病がきれいに治るのです。そして先生が聖書のみ言を原理を中心として解いてあげるので、多くの人たちが先生の回りに集まりました。ある人は霊界から「あの方こそ再び来られると約束された方だ」と教えられ、またある人は「若い先生が南韓から来られたが、行って会いなさい」という啓示を受け、先生を訪ねて来てみ言を聞いたりしました。集会をされるときは、先生自ら賛美歌、祈祷、み言、賛美歌、祈祷と最初から最後まで主管されました。 礼拝が終わっても先生は食口たちがすぐ帰ることを願われず、また食口たちもやはりいつまでもいたいと思いました。したがって礼拝後は食口たちと一緒に食事をされるときもありました。ある食口は長い間胃が悪く苦労をしていたのですが、先生がご自分の残りをその食口に与えたので、その食べ物を食べたところ、すぐに治ってしまったこともありました。それで皆、先生が食事をされるときはいつも、「少し残して私にくだされば……」と願うようになったのです。そのため、そのときから教会の食事は、「薬ご飯」と言わ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教会の食事は特別なものはないのですが、自分たちの家のよい食事よりも、皆教会に来て食べることを願ったのです。 金元弼(キムウォンピル)師 略歴 1928.9 平壌で出生 1946.3 平壌師範学校卒業 1946.7 統一教会に入教 弘益大学西洋絵画科受業 1962.2 全国巡回師室長 1972.9 本部教会教会長 1972.12 英・米国家庭教会責任者 1963 韓国・統一教会初代理事長 1991~94 日本・全国祝福家庭総連合会総会長 2010年4月7日(陽暦)に逝去(享年81歳)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김원필 선생님 이분 살아계신가요?
아마도 돌아가셨겠네요 혹시 몇년생인지 아시나요?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