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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의 이중언어 심리패턴>의 줄거리: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언급되는 두 번째 밭인 돌밭은 자갈밭이 아닙니다. 넓게 형성된 석회암층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는 상태의 밭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쁨을 받아들여 싹이 나지만 뿌리를 내릴 수가 없어서 말라 죽게 되는 심리 상태를 비유합니다. 얇게 덮인 흙과 석회암 바위층. 이 두 가지의 지층은 두 개의 언어체계를 가리킵니다.
나의 이중언어 심리 패턴
(누가복음 8:11~15)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의 이중언어 심리 패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의 이중언어 심리 패턴’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두 번째 상태인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의 심리 패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돌밭은 ‘이중언어(bilingual) 심리 패턴’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패턴화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설교 시간이나 방송 시간에만 듣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기억 속에서 늘 들려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은 귀합니다만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신명기 6장 5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곧 추구하라는 의미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추구를 위한 에너지는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추구함은 채워지기 위함이고 채워짐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쉽게 풀어보자면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고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고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시다. 그 하나님을 내가 아버지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자 성경 66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어디에서 누구의 설교를 들으시든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은 온전한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상황과 말씀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삼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 삼각관계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이 실제로 거하시는 장소는 말씀입니다. 소설가의 글 속에 소설가의 정신이 담겨 있듯이, 우리가 기억하는 말씀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네 가지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제시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의 심리 상태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길가에 해당하는 심리 상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설령 길가의 심리 상태일지라도 스스로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영구히 그 상태가 지속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길가와 같은 상태에 있을지라도 옥토로 바뀔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2~23절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본다는 표현이 특이합니다. 말 그대로 바울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심리 상태에 휩싸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보듯이 객관화시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마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단지 “정말 두렵다.”라고 느끼는 것은 두려워하는 심리 상태에 휩쓸려버린 것이고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상태에 있구나.”라고 객관화시키는 것은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정말 기쁘다.”라고 느끼는 것과 “내가 정말로 기뻐하고 있구나.”라고 객관화시키는 것은 다릅니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의 심리 상태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객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 “돈이 없어서 불안하다.”라고 느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돈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구나.”라고 객관화시켜보는 것입니다. 또 승진에 대하여서도 “승진해서 기분 좋다.”라고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승진이라는 것이 이렇게 기쁨이 될 수 있는 일이었구나.”라고 객관화시켜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심리 상태를 감시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제공해주신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을 따라서 우리의 심리 상태가 옥토로 바뀌기를 희망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모든 문제 옆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말씀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면한 문제에 직접 반응하는 심리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에 대해 반응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종교로서의 기독교일 뿐입니다. 말씀이 종교가 아닌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옥토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문제와 말씀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반응할 것이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심리 상태를 감시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돈이 없는 상황에서 “돈이 없어서 불안하다.”고 느끼는 상태와 “내가 돈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구나.”라고 객관화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이 감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어도 절반은 해결이 된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자녀 문제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 심리 상태를 보이고 있구나.”라고 객관화시켜서 감시할 수 있다면 해결책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 비유의 두 번째 상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 세상을 최고로 좋아하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단어 하나하나에서부터 모든 언어들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언어들이 모여서 의미체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나 견고하기에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다는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는 상태가 바로 길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두 번째 바위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동일하게 흙이 얕은 돌밭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돌밭이란 단순히 자갈밭이 아닌 석회암 지층이 바람에 의해서 모래나 흙이 얇게 덮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바위 지형은 해가 뜨면 바위가 열을 받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하여 온도가 높습니다. 따라서 씨가 뿌려지면 싹도 빨리 올라옵니다. 이것을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싹이 빨리 나더라도 흙이 얕기에 뿌리를 깊게 내릴 수가 없고 곧 말라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질학적 특징을 비유로 삼으셔서 두 번째 심리 상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얇은 흙으로 덮인 지층과 그 밑에 두꺼운 석회암 지층으로 나뉘어져 있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가능합니다. 얇은 흙층과 두꺼운 석회암 층은 두 개의 언어체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이중언어(bilingual) 사용자라고 부릅니다. 한편 신앙적 관점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두 개의 언어체계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적 언어체계이며 두 번째는 실제 삶에서의 언어체계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흔히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의미 있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언어체계와 실제 삶의 현장에서의 언어체계가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종교는 복음과는 다릅니다. 세상이 너무나 좋아서 초월자나 절대자를 동원하려는 시도가 종교입니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최고라는 비밀을 담고 있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을 왜곡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이 아닌 자신의 종교적 언어체계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자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세상의 가치를 잘 얻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써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창조, 타락, 죄, 구원, 회개, 천국, 지옥, 심판, 부활, 거룩함, 사랑이라는 단어들이 종교적인 언어로만 이해되기에 전혀 복음적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배, 헌금, 봉사, 충성, 직분, 십일조 등에 대해서도 알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모르고 삶에서 언급할 가치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복음과 관련된 언어들이 사용되지도 않고 사용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씀은 종교적인 모임을 갖거나 활동을 할 때나 통하는 언어와 의식이라 여깁니다. 따라서 자신과 같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의 가치를 얻는 데에 집중하는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삶과는 동떨어진 종교의 영역에서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최고로 좋다고 믿는 대상이 따로 존재하기에 하나님의 좋으심을 실제 삶의 현장으로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예배당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종교적 차원에서 사용하던 언어체계는 중지되고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한 언어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복음은 이러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이유로 인하여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고 할지라도 종교적 영역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납득하기에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의미 있는 언어체계 안으로는 하나님을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중언어 사용은 이민을 간 가정의 어린이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학교에서는 기가 막히게 영어를 사용하지만 집에 와서는 한국어만 사용합니다. 언어체계의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의도적으로 영어만 사용하게 가르쳤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부모가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아이들 또한 언어를 구분하여 사용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이중언어 사용이 영적인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2절을 보면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좋은 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종교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3절을 보면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종교의 신으로 받아들였다면 이러한 말씀에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종교의 신이 하는 일이란 실제 삶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극복할 능력을 주고 형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디까지나 마음에서 좋다고 여기는 가치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대로 따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였습니다. 즉 마음이라는 무대 위에서 하나님만이 조명을 받으시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줄리엣이었다면 하나님은 로미오이셨습니다.
당시에 친척들이 살고 아버지의 집이 있는 고향 땅은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향을 떠나라 말씀하셨고, 하나님을 가장 좋게 여겼던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 떠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순한 종교의 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종교화된 기독교에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세상의 안정이라는 조건에 붙인 채로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말씀은 종교의 영역 안에만 머물게 됩니다. 마음에서 좋아하는 대상이 세상의 가치이기에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말씀은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의 언어 속에 가두어놓고 그로부터 이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능력만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만큼 잘살게 되면 그러한 능력조차도 필요로 여기지 않으니 말씀을 더욱 등한시하게 됩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고사상태에 빠지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먹고살 만하게 되자 교인들이 예배당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로 원하던 복지를 얻게 되었으니 굳이 종교의 신으로서의 하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떠나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재산을 생각하고 아내를 생각해서 “하나님 그것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면 돌밭의 심리상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인 사라를 버리는 모습이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모습에서도 이러한 결단은 드러납니다. “그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면 사라나 이삭이 마음의 석회암층을 이루게 된 결과였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최고로 좋으신 분임을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얇은 흙층으로 덮여서 분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의 영역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최고로 좋으신 분이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건강이나 재산은 물론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들보다도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종교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 언어체계와 삶의 언어체계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좋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에서 전파되는 말씀의 내용도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처음 방송을 들으실 때에는 무척 좋아하시다가도 머지않아 떠나는 분들을 자주 접합니다. 종교적 언어의 차원이나 논리적 전개에서 새로운 맛을 느끼면서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종교 차원의 영역에서 벗어나 실제 삶에 적용되어야 함을 깨달으면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복음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약탈하고 부수고 빼앗아가려 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제가 선포하는 말씀은 영적인 강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그대로 갖고 있도록 놔두지를 않고, 종교적 차원에 머물고 싶어 하는 심리 상태를 허물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신기해서 말씀을 듣다가도 말씀의 본색을 느끼시는 분들 중에 떠나시는 분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세상 것들을 허물어버려야 한다는 위협을 느낍니다. 복음은 세상에서 좋아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고 나의 아버지로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은 용납할 수 없는 강도이고 도둑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말씀이 종교적 언어에 머물면서 결코 실제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기뻐하며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언어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접하는 기쁨인 것이지 그 언어가 말하는 대로 실제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눈곱만큼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신선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가지고자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허물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제보다 조금 더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을 들으며 이것이 반복되어 세상에 대한 좋음을 느끼던 석회암층도 어느덧 깨지게 됩니다. 그런데 한 달을 듣고 일 년을 들어도 실제 십자가로 석회암층을 이루고 있는 마음과 세상과의 밀착이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새롭게 갖지 못한 사람들은 똑같은 말만 반복되는 것으로 듣습니다.
복음은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을 더 갖는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말씀이 됩니다. 반면 말씀을 종교적인 언어로만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논리와 언어의 세계에 가두고 세상 좋아하기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복음방송은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도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집사람을 부를 때에 이름을 부릅니다. 제가 82년도에 결혼을 했으니 38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동안 집사람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요? 그런데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식상하거나 질리지 않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집사람이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백만 번 부르면 백만 번 응답이 돌아오니 질리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좋으심을 새롭게 느끼고 하나님을 더 갖게 되었다면 말씀은 지겹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돈 벌기를 원하는 사람이 천만 원쯤 벌었다고 만족해서 그만두지 않습니다. 천만 원을 더 벌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을 갖게 된 사람은 내일 더 많이 갖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십자가 복음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내 마음속에 있는 석회암층을 허물면 하나님을 그만큼 더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벌기를 체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복음은 항상 좋고 새롭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심에 동의합니다.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가질 수 있다는 것에도 공감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른 말씀과 이론과 방식과 패턴을 찾고자 합니다. 동의하고 공감하는데도 왜 다른 이론과 방식이 필요하게 느껴질까요? 마치 이러한 모습은 성지를 탐방하는 순례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순례자의 진정성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까지만 허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방식을 찾는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다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 가두어두고 실제로 마음에서 좋아하는 것은 세상에서 찾고자 한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좋으심을 종교적 영역에 가둔 사람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새로운 설교나 이론과 신학을 찾아다닙니다.
그렇게 돌아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도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며 그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가질 수 있다는 것 외의 다른 복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 언어에 하나님 말씀을 가두어 두고 세상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이론을 필요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 있는데 하나님으로 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하니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랑을 채워 줄 다른 종교적 언어를 찾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종교적 잔재를 없애는 것입니다. 예배당 조직에 길들여져 있고 예배당 중심 문화에 젖어있는 모든 생각과 개념과 습관을 쉬지 말고 허물며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며 예배당 조직은 교회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고 교회라 부르면서 얼마나 큰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도 아직 그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어떠하든지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이 삶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주어졌습니다. 예배당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예배당 조직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목사님들도 스스로를 속이는 이 거짓말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구원과 평강과 축복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비록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가치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예배당이나 예배당 조직이나 목사나 장로나 권사 집사 같은 말들이 복음을 방해한다면 다 허물어버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삶의 현장이 주어졌고, 하늘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과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통하여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다 되었습니다. 이 길을 가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는 호칭일 뿐입니다. 목사가 목사이기 전에 성도여야 하며 장로가 장로이기 전에 성도여야만 합니다.
예배당 조직에 대한 소속감과 의존 그리고 예배당 중심으로 만들어진 종교적 언어체계는 허물어져야만 합니다. 이 의미체계의 잔재를 완전히 허물어버릴 수 없다면 이것들은 석회암 바위층이 되어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말씀의 씨앗을 죽게 하고 열매 맺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예배당이나 예배당 조직에 대한 의존은 여러분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당을 다니고 있었으니 계속해서 다닐 뿐이지 특별히 기대하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실은 그 소속감 자체가 엄청난 의존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는 모태신앙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골수부터 장로교 통합측 사람입니다. 그 신학교를 나왔고 신학교를 바로 세워보겠다고 데모에 앞장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장로교 사람으로서 루터교가 지배적인 독일에 가서도 개혁파 교수에게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소속감으로 따지자면 저야말로 골수 중의 골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장로교를 버립니다. 장로교가 석회암 바위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속감으로부터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주어져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그 사이에 주님의 길이 있으면 여러분께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교제나 교회의 모임은 성도가 되신 뒤에 찾아도 충분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종교적 언어체계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길가의 종교적 색채를 띠는 언어체계를 하나 더 갖게 된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길가의 특징은 세상의 가치를 최고로 좋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적 언어체계가 너무 견고하기에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씀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상태입니다. 한편 돌밭은 종교적 언어를 갖춤으로써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씀을 종교적 언어의 감옥 속에 가둔 상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실제 삶에서 내게 최고로 느껴지는 세상의 가치들을 대체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가치들을 체질적으로 좋아하는 나를 끊임없이 죽여나감으로써 길가와 돌밭에서 옥토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끊임없이 나를 붙잡는 종교적 잔재와 습관과 개념들을 허물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돌밭의 심리 상태를 벗어나게 하여 주시고 옥토의 심리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