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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공경하는 자
본문 <요5:16~23>
지난주에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주신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이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것은 베데스다 연못이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체제를 가장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율법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19장을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주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질문 안에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관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영생, 즉 구원은 신앙 행위의 보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은혜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은혜란 거저 주는 것인데 그들은 일한 댓가로 생각했으니까 말로는 은혜라지만 실제로는 행함에 대한 삯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신앙관이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앙관입니다. 입술로는 오직 믿음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유대인들의 신앙체제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은혜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인간의 상식과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심는 대로 거두는 이 땅의 상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하늘의 상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상식과 복음은 서로 적대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복음에 눈이 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어떻게든 은혜를 받아 보고자 기다리고 있던 38년된 병자를 조건 없이 고쳐주십니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의 신앙체제가 모래 위에 세워져 있음을 폭로하셨던 것입니다. 한 순간에 병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자리를 들고 어린아이같이 뛰어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이 사람을 보고, 안식일 규례에 목숨을 걸고 있던 유대인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일의 배후에 예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안식일 규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논쟁은 예수님이 의도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 그 병자를 고치시고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것은, 안식일 지킴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대로 분노한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시비를 걸면서 자연스럽게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가 놓은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이 논쟁을 통해 유대인들의 믿음의 실상이 폭로되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선포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에 의해서 드러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목격한 것은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이 아닌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받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38년의 질병이라는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이 놀라움을 목격했을 때 어떤 반응이 있어야 마땅합니까? 분명 그 병자를 고치신 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병자가 고침 받은 놀라운 사실은 보이지 않고 다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 즉 누군가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떻게 병이 나았느냐?'라든가 '너를 낫게 한 분이 누구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네가 안식일에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느냐?'라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유대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38년된 병자가 병에서 해방된 은혜는 보지 못하고, 겨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을 가지고 책망하는 그들이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38년된 병자를 통해서 나타난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통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신앙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 안식일은 모든 율법 중에서도 가장 중시하는 핵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곳곳에서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5:9~10절, 16절> 읽고...
그렇다면 주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을 깨뜨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구약성경 곳곳에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모형과 그림자였고, 실제는 참 안식이신 IX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출20:8~10)보면,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도 안식일 준수를 명하시는데요,
-ㅎ님이 6일 동안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째 날 안식하신 것을 대대로 기념해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창1장의 창조 사역은 얼핏 보면 물질세계 창조로 보여 지지만, 실제로는 택한 백성에 대한 구속사를 6일 창조로 빗대서 암시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날을 기념해서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은, 너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잘 깨달아 알고 그 은혜를 감사 찬송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6일-전3, 후3일)
6일창조의 전반부 3일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빛으로 오신 IX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나누어서 각각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로 표현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부 3일은 성령사역입니다. 4째 날은 그 부활의 성령이 임하시는 오순절이고, 5째 날은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과정을 말하고, 6째 날은 그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교회의 탄생을 남자와 여자의 창조로 비유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7째 날은 모든 구원 사역을 마치신 ㅎ님이 성도 안에서 쉼을 누리는 모습을 안식일로 지칭하신 겁니다.
이러한 안식일 목적을 좀 더 구체화 시키신 게 출애굽 사건에 대한 안식일 규례였습니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의 종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니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건져냈다는 말은 죄로부터 건짐 받았다는 말입니다.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니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넌 이제부터 종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뜻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이라는 법속에 가두고자 함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서 쉼을 누리라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난 안식일을 지켰다 안 지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너희는 이제 바로의 종이 아니고 내 아들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즉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식일이라는 날의 의미는 사라지고 어떤 영역 안에서 사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죄(罪) 안이냐? 의(義) 안이냐? 라는 영역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의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은 쉼이고, 예수 밖은 수고와 애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느냐? 은혜 아래 있느냐’입니다. 법 아랜 무조건 정죄이고, 은혜 아랜 무조건 용서입니다. 법은 일이고 은혜는 쉼입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는 주일성수를 강조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신자다운 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주일성수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인지를 모릅니다. 주일이란? 원래 주의 날이란 뜻입니다. 주일이 주님이 부활한 날에서 유래가 되었거든요.
주의 날이란? 예수님의 날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곱째 날이란 뜻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 있으면 항상 일곱째 날입니다. 즉 날마다 주일이고 날마다 안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들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중에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날 중에 한 날을 지키는 것은 역사 속에 있는 날을 지키는 것이므로 미완성에 속한 날입니다. 주일은 묵시 속에 속한 날일 때만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만 주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중에서 지키는 특정한 주의 날이 없습니다.
항상 주의 날만 있을 뿐입니다. 월요일도 주일이고, 화요일도 주일이고, 수요일도 주일이고, 목요일도 주일이고, 금요일도 주일이고, 토요일도 주일이고, 일요일도 주일입니다.
왜? 그런가요? 성도는 역사적 존재가 아니고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엡2:6~하늘에..)
즉 역사라는 영역에 속해 있지 않고 묵시라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과 달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4:10절에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탄식)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시간과 공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날이나 시간이나 장소에 매인다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법이 지배하지 않고 은혜가 지배합니다. 성도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가두어지지 않습니다(다만, 우리가 일요일 모임을 갖는 것은 모두가 쉬기 때문에 모여서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더 알아가며 감사 찬송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라는 날을 지켰다는 것과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왜냐하면! 비록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본다면 38년 된 병자는 38년 동안 한 번도 안식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병을 고치는 그 날이 안식일임에도 38년 된 병자는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안식일이라는 날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38년이나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안식하는 것은 병으로부터 해방이 참 자유인 것이지, 안식일이라는 날이 자유를 주는 게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는 모든 죄인들의 모형입니다. 38년 동안 병에 시달렸다는 말은 일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 날에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이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법에 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자기백성들을 법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아래선 항상 무엇인가를 지킬 것을 요구받습니다. 안식일에도 안식일에 지켜야 할 복잡한 규례와 법도가 있습니다(..). 아니 쉬어야 할 사람에게 쉴 수 있는 법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 아닙니까? 진정한 안식이 되려면 자기 마음대로 쉴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프리, 노타치) 하여야 안식이 되는 겁니다.
말로는 안식하라고 하면서 이것해라! 저것해라! 요구한다면 그것은 안식이 아니라 안식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 또 다른 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아래선 진정한 안식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법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법으로 정한 안식일에 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안식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은 표징적인 사건입니다. 안식이란? 이러한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병들고 아프고 죽는 것은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죽음을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구약시대 율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은, 종에서 해방되었음을 기억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 날 안식을 하면서 내가 누구 때문에 안식 할 수가 있게 되었는지를 기억하면서 안식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면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번제와 소제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너희들이 공짜로 나온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지금 안식을 누리는 것은 너희 대신 죽어준 어린 양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장차 죄인을 대신해서 희생당하실 분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에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IX 안에 있는 자가 안식과 평강을 누립니다.
• 17-18절/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하는 예수의 말에 유대인들은 기겁합니다. 이제 안식일 규례를 어겼느냐는 것은 더 이상 이슈가 되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가 신성모독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중한 범죄는 없습니다(여호와 호칭조차 않함. VIPP). 유대인들이 이런 예수를 가만히 둘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그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한 명의 잃은 자를 찾으실 때까지 쉬지 않고 그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 마지막 한 명의 잃은 양이 돌아오는 때가 언제일지는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고 그때 모든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에 속한 믿음의 자녀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11:25-26). 그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이 안식에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고 계시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아들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일은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빌2:6-8절을 보면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분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들다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간다는 내 자신에게 유익되는 일만 생각합니다. 십자가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일 뿐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지 아들다움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추수는 마지막 잃은 양이 찾아질 때까지 계속 되어질 것입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추수를 수행할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이 추수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 있는 자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마25~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의 수고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추수에 참여하기 위해 깨어있어 준비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장사해서 이득을 남기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들이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기에 ‘아들다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기에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아들다움의 생각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19절~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도 분명 개별적 인격체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 원함, 영광을 챙기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과 소원을 바라보고 사셨다는 점입니다. 십자가 사건 뿐 아니라 주님의 삶 전체가 ㅎ님께 100% 동화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요14장에서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책망 하셨지요.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 하나님께서 아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자기가 행하는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창조주 앞에 자신들의 실상과 자신들의 종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매여 일평생 종노릇 하다가 멸망당할 운명들 이지만, 교회는 어둠에서 빛으로 옮긴 자들입니다.
따라서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실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과 천국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허락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복을 아는 자들은 삶의 어떠한 현실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입니다.
•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20절 끝에 보면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라고 말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일보다 더 큰 일이란 죽은 자들이 생명을 얻는 일을 말합니다. 물론 질병에 걸린 자에겐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육에 속한 것이고 육신의 생명과 함께 사라져버릴 한시적 기쁨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육신이 아닌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고, 이렇게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을 복음으로 불러 하나님과 영원한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기쁨을 아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작 자신들의 현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린 양의 피로 주어진 생명의 복을 알지 못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자 그들을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로 이끄셨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죄악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가 그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마음만 먹으시면 우리 모두 갑부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요케 되면 ㅎ님을 떠날 수 있기에 적절히 안배하십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자신의 택한 자녀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누가 이 하나님의 일을 아는 자일까요?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 자신이 죄 아래서 죽은 자라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자신의 죄를 보며 두려움에 떠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죄의 종되어 매순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실상을 보고 있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죄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행함을 신앙으로 여기는 자들은 자신이 태생적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매일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이지요. 온갖 열심과 정성을 다해 율법을 지켜 ㅎ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려다보니 안식과 평강이 없는 삶의 연속일 뿐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행함이 마일리지로 쌓여갈수록 자기 자랑이 많아지고, 반면에 자기보다 못한 자들에게는 비난과 무시와 조롱을 쏟아 냅니다. 이처럼 마음엔 평화가 없고 대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귀적 속성만이 커져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래 예수 믿었다는 사람들의 마음은 비수처럼 차갑고 냉혈한이 되는 사례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주님은 마12장에서 신랄하게 지적을 하십니다.
<마12:43-45절>을 보면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은혜, 복음)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라고 말합니다.
- 주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요약하신 말씀입니다. 청소되고 수리된 집이란 율법 위에 세워진 이스라엘을 비유합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하나님의 의라는 반석의 터 위에 집을 세웠어야 하는데, 율법을 행하는 자기 의라는 모래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는 말은 율법의 의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귀의 종으로 전락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의 앞에서 인간의 의는 설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신자들은 의를 행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결같이 신자들에게 착하게 살 것을 외치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한 예배를 촉구하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말하며 십자가를 말하고 있지만 인간의 의를 부추기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그러한 목사들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생명을 얻었다면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생명을 얻은 자만이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 22-23절/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아들을 공경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의, 내 공로는 모두 배설물 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켜 행하겠다고 열심을 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공경하는 자만이 자신을 공경하는 자들로 인정하십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자란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영원한 속죄의 의미를 알고, 자신의 모든 행위를 내려놓고 아들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ㅎ님 아버지를 믿는 자입니다.
이런 면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현대 교회는 겉으로 보면 아들을 공경하는 자들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아들을 모독하는 자들이고 아들의 십자가를 헛것으로 만들어 놓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결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부어주셔서 복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말은 아들을 심판의 기준으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아들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 모든 인류는 자신의 행위를 따른 자들과 믿음을 따른 자들로 구별될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말하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로, 아들의 행위를 내세운 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그 날 “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 염소입니다. “주일을 잘 지켰습니다”. “온전한 십일조 드렸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내 삶 전부를 드렸습니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 염소입니다.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듣게 될 말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 뿐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 하나입니다.
아들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올 말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긍휼을 아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 아들을 공경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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