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논쟁이 교회사에서 몇 차례의 논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루터(M. Luther)와 에라스무스(D. Erasmus) 사이의 논쟁에서였다. 루터는 천성적으로 투쟁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면, 에라스무스는 성격상 어떤 것에도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루터는 격정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다면, 에라스무스는 타협적이고 세계주의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세상에 긴장과 흥분을 선사했지만, 에라스무스는 세상의 평온과 평화를 원했다. 에라스무스는 조용한 어조로 교회의 부패상을 조롱하고 풍자했다면, 루터는 그것을 거리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문제에 대한 인식은 같았지만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은 너무 달랐다. 그 점에서 에라스무스는 신중했고, 루터는 선동적이었다.
물론 롤랜드 베인턴(Roland Bainton)은 루터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만큼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에라스무스도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만큼 “부드러웠던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루터의 무절제함이 언어에 국한된 것이었고, 에라스무스는 “퉁명스럽지도, 격렬하지도, 상스럽지도” 않았지만, 매우 “신랄”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에라스무스의 거침 없는 풍자적 비판은 가톨릭 측에서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의 「우신예찬」(Praise Folly)이 “축제의 가면 아래에서 숨겨진 그 시대에서 가장 위험한 책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은혜와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주장을 반대하여 1524년 「자유의지론」(On the Freedom of the Will)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인간의 의지가 전혀 무능하다는 루터의 견해를 비성경적이라고 반박하고,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었을 뿐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루터의 견해를 ‘운명론’(fatalism) 내지는 ‘도덕폐기론’(antinomianism)이라고 공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루터는 1년 뒤 「노예의지론」(On the Bondage of the Will)을 써서 이에 대응했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비교하면 [표11]과 같다.
[표11]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비교
| 에라스무스 | 루터 |
대표저서 | 「자유의지」(1524) | 「노예의지」(1525) |
주장 내용 |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었을 뿐,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루터의 견해는 운명론(fatalism) 내지는 도덕폐기론(antinomianism)이다. | 인간은 전적으로 의지의 무능력이 있을 뿐이다. 인간 의지는 예속되어 있다. 마치 짐승의 뜻과 관계없이 그 등에 올라탄 사람이 짐승을 인도하듯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나 사탄의 의지에 예속되어 있다. |
자유의지 정의 | 자유의지는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협동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의지의 능력이다. | 자유의지란 말은 신적인 용어요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신성모독적인 발상이다. |
자유의지와 구원의 관계 |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지만, 선행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협동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없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1차적 요소이고, 인간의 의지는 2차적 요소다. | 구원을 위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다. 성경의 명령과 교훈은 인간의 능력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
공통점 |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선행요건이다. |
에라스무스의 논점은 인간의지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무능력하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이 은혜가 있어야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는 루터도 기본적으로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주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문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응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역할, 즉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는 실수가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이나 그밖에 다른 피조물에게는 자유로운 선택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필연적으로 일어날 뿐이다. 이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인간에게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그것이 인간의 나약하고 훼손된 의지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요구하시고 계시며 인간은 그에 응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다. 루터에 따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노예의지”는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지는 어딘가에 예속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에게 예속되든지, 아니면 사탄에게 예속된다.
에라스무스의 관점은 하나님이나 사탄보다 인간에게 집중되어있다. 기본적으로 그는 인문주의의 아들이었다. 그에게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수용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가 인간의 선천적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본 점에서는 펠라기우스의 사상과 확연히 다르다. 반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 부분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도 거리를 두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 점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닮았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중도적 입장을 견지한 셈이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397-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