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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잠재력 무한한 십자가로 일이관지>의 줄거리:
십자가의 잠재력이 늘 과소평가 되고 있습니다. 완벽함은 다른 사람의 눈에야 어떻게 비치든 내 마음에 지금 현재 상황 이외에 다른 상황을 바라지 않는 마음 상태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완벽하게 사는 것을 불완전함 보다 더 쉽게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하나로 모든 상황과 문제를 꿰는, 일이관지( 一以貫之)하면 됩니다.
잠재력 무한한 십자가로 일이관지
(사도행전 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잠재력 무한한 십자가로 일이관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잠재력 무한한 십자가로 일이관지’
일이관지(一以貫之)란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뜻으로써 공자의 논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공자께서 자공이라는 제자에게 “자공아,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모두 알고 기억하는 줄로 아느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자공은 “네, 선생님 그렇습니다. 혹시 아닌가요?”라고 대답했고 공자는 “아니다. 나는 하나로 그 모든 것을 꿸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이관지는 단 하나의 이치로 모든 주제와 관계하게 되는 대상에 대한 이해를 꿰뚫고 나간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공자의 풍성하고 방대한 지식과 사상의 깊음도 단 하나의 이치에 의해서 꿰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저 많이 배우고 익히고 기억함으로써 풍성한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이치를 통해서 인간과 관계된 모든 주제와 영역을 하나로 꿰뚫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이치로 삶을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증자라는 제자는 공자의 이치를 충(忠)과 서(恕)로 이해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공자의 이치를 보다 간단하게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향해 성실을 다할 때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일이관지의 개념입니다. 하나의 이치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꿰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인생의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능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왕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능률이라면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능률은 단 하나의 이치를 가지고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을 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뚫어 나가는 일이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하나의 이치로 삼느냐가 공자나 다른 철학자들과는 다릅니다.
공자의 위대함은 이 개념을 깨달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개념 자체는 다른 성인들이나 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는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이치를 가지고 모든 주제를 꿰뚫었습니다. 꿰뚫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림이 없이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다만 공자나 석가모니의 탁월함은 하나님을 계시받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쥐여주신 하나의 이치를 가지고 일이관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일이관지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이치를 쥐여주셨습니다. 그 이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오직 이 하나의 이치를 가지고 삶에서 만나고 주어지는 모든 문제를 꿰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들과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적용해야 될 이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건입니다. 의식으로 보아야 할 대상은 주어진 문제, 마주하는 상황, 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사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십자가로 날마다의 삶을 꿰어가는 일이관지의 삶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의 의식으로 밝히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것은 모든 일에 우선되어야 합니다. 돈 문제 앞에서, 건강문제 앞에서, 가족문제 앞에서, 직장문제 앞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재산이 많든 적든, 사회적 위치가 높든 낮든, 성별이나 나이도 관계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바라봄으로써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의 문제들을 꿰뚫는 일이관지의 삶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일이관지의 삶은 공자나 석가모니 같은 위대한 성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일이관지의 삶을 너끈히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바라보는 것을 삶에서 이어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 것임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도 삶에서 두 가지 이상의 원리를 매일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 원리가 한 가지일지라도 행위로 하는 것이라면 지속성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삶에 적용되는 이치는 오직 한 가지이어야 하며 반드시 행위의 차원이 아닌 의식의 단계에 기반을 두어야만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의식이 밝히 보는 것으로 일이관지의 삶은 완성됩니다. 이를 통하여 예상 못 하는 사건과 사고와 변수로 가득한 삶의 모든 순간들을 꿰뚫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관지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영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이관지의 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으로 십자가를 바라봄은 언제 어디서나 우선되고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건강이 좋든 안 좋든,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집안이 좋든 나쁘든, 돈이 있든 없든, 결혼을 했든 이혼을 했든, 소송에 걸려있든, 죄를 지어 감옥에 가 있든 상관없습니다.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십자가라는 단 하나의 이치로 모든 상황을 꿰뚫는 일이관지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공자도 석가모니도 도달할 수 없었던 진리의 최종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는 특별했습니다. 사울이 회심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그룹으로 영입되는 과정을 인도했던 자가 바나바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1차 전도여행을 통해 드러났듯이 같은 믿음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문제로도 결별이 불가능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이들이 결별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결별의 이유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마가라 하는 요한과 관계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이기도 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은 1차 전도여행에서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중도하차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행 중에 지나왔던 구브로 섬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지중해를 건너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1차 전도여행을 마무리 지은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에 대해 논의할 때에 마가 요한을 동행시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과 동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동행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누구 한 명이 참을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참았다면 싫어도 동행했을 것이고, 바나바가 참았다면 아쉽더라도 동행을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별이라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뒤로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바나바가 잘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의 행적을 조명하는 일에 집중하였는데 더 이상 바나바가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결별의 장면을 어떠한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도 바울도 맞고 바나바도 맞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의 입장이 모두 옳기 때문에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의 원인은 마가 요한이었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마가 요한의 어떤 점이 결별의 원인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주석들을 보아도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에 대한 선교 보고를 할 때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베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고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장로가 나서서 중재하여 매듭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고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 두 사건이 바로 연결되고 있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바울이 마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11절을 보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마가가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이로부터 바울이 마가를 인격적으로 싫어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바울은 마가를 비롯한 이들을 할례파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유대인 중에 유대종교의 전통인 할례나 모세의 율법을 특별히 중시하여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마가 요한 또한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이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을 강요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은 이 전통을 지키는 일을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향이 마가가 1차 전도여행에서 중도하차한 이유이자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을 동행시키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오직 예수님 믿는 것을 구원의 기준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가 요한은 당시의 시점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을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여겼고 예수님 또한 유대인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 2000년 선민 역사의 전통이 무시되는 것에 대해 갈등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본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이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또한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가 요한은 구원에 있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보면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이 계획되는 단계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종교의 전통이란 종교적 영역을 넘어서 삶 전반을 지배하는 이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들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것을 벗어버리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할례를 비롯한 유대종교의 전통들은 바리새인의 예처럼 외식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본래 그 정신은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에 대한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할례를 비롯한 유대교의 전통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킬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더라도 유대인들의 전통과 성전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할례파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 예수님에 더해 종교적 요소가 보태져야 삶 전반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종교의 입장입니다. 종교는 신과의 관계에서 내가 주도권을 쥐려는 시도입니다. 종교인들은 신을 설득하는 로비스트가 되고자 합니다. 로비스트가 하는 일은 이루고 싶은 목적을 위해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본래 그럴 수 없으나 종교가 되어버린 유대종교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 하에서 만들어진 유대종교의 유산을 십자가 복음에 보태려고 하는 상태는 아직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지 못한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문제에서 사람 쪽에 주도권을 남겨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사건에서 바울에게 책임을 묻는 입장에서는 관대성의 결여를 지목합니다.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냉철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사도 바울에 대한 과소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구원을 받고 이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요소는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끼어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는 것은 종교적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을 바라볼 때는 그 약속에 담겨 있는 것들이 풀려나오게 됩니다. 바울은 그 약속에서 풀려나오는 것들의 잠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당시의 시점에서는 십자가의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잠재력을 본래의 크기에 가깝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굳이 본래의 크기에 가깝게 이해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담겨 있는 잠재력의 크기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잠재력은 엄청나고 대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단 하나의 이치를 삶에 적용해야만 합니다. 의식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 때는 이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배당에 와서 설교를 듣거나 고난주간 때에나 기억해야 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살 때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삶을 복지로 살아가기 위하여 노력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나의 노력을 보태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목적하는 삶을 위해서는 열심히 뛰어야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심지어 예배당에 와서도 십자가에 집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형식적으로 예배 시간을 채우고 갈 뿐이고, 요직을 담당한 분들도 예배당 조직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에 열중하였습니다.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가 요한을 막았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마가 요한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의식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십자가의 잠재력에 대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가 요한을 이방인의 선교 현장에 동행시킨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는 하나의 이치를 삶에 적용하는 것 이외의 다른 요소가 전파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식의 가르침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마가 요한의 전도여행 참여를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상을 공유하던 바나바는 왜 마가 요한을 참여시키고 싶어 했던 것일까요? 바나바 또한 십자가의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잠재력을 경험해 나감에 있어서 시간과 단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이 십자가의 잠재력에 대해 바울이나 바나바만큼은 경험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전도여행에 동행하는 동안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 또한 마가 요한이 십자가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체험해야 한다는 인식은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 선교를 위한 현장에 동행할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마가 요한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외에 다른 요소들을 첨가시킬 여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할례를 비롯한 유대종교의 전통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이해는 복음 전파에 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이 앞으로 도달할 가능성을 본 것이고, 사도 바울은 적어도 이방 선교 현장에서는 십자가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했는지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어떤 문제를 갖고 계시든 어떤 상황에 처해 계시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일이관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평생을 다 바쳐도 십자가의 약속에 담겨 있는 잠재력을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십자가의 잠재력은 언제나 본래 크기보다 과소평가되고는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이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하나의 이치가 우리의 삶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건강문제가 생겼더라도 내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 의식 속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더라도 자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 문제가 생겼어도 의식으로 바라볼 대상은 돈 문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결혼 문제가 생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 하나만 보는 것이 일이관지가 됩니다. 십자가의 약속에 담긴 잠재력은 무궁무진합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잠재력과 땅에서 벌어지는 십자가의 잠재력을 본래의 크기만큼 경험하고 죽을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잠재력은 아무리 경험하더라도 다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예배당에서만 붙잡고 삶의 문제에서는 놓아버린다면 일이관지의 삶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건강문제에 필요한 이치, 가족 문제에 필요한 이치, 돈 문제에 필요한 이치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외의 이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이관지해야 될 단 하나의 이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사건입니다. 모든 문제들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이치로 삶을 꿰뚫는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는 공자님도 몰랐던 진정한 의미의 일이관지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 어찌나 큰지 벌거벗고 길거리에 나가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입니다. 십자가의 잠재력이 너무나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잠재력을 너무나 과소평가하며 살았습니다. 평생을 십자가 하나만으로 살아도 그 잠재력을 다 경험할 수 없음을 알았사오니, 십자가 하나의 이치로 삶의 모든 문제를 꿰는 일이관지의 주인공들이 되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