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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초월자 신이 아닌 게 신성모독이다>의 줄거리: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전적으로 참여되어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이 속성에 거리를 유지하며 별도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실제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십자가를 생활화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 세상은 하나님 자녀들이 뛰어 넘어 초월자가 되야 할 기준입니다.
초월자 신이 아닌 게 신성모독이다
(요한복음 10:30~42)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초월자 신이 아닌 게 신성모독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초월자 신이 아닌 게 신성모독이다”
제목은 초월자 신이 아닌 사람으로 머물고 있는 상태가 진정한 신성모독이라는 의미입니다. 초월자는 그야말로 어떤 기준을 초월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흔히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3차원 세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가 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사람이 초월자 즉 신이 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돌로 치고자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으로 행하신 모든 말과 행동들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신성에 늘 참여되어 계시고 아버지의 신성을 일상적으로 써먹고 계신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처하신 것은 신성모독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말뜻은 모르는 무식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 주고 계십니다.
“초월자 신이 아닌 게 신성모독이다”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일상적으로 말하고 행동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에 참여되어 계시면서 신성을 써먹고 계신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신성에 참여하는 삶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성모독은 신성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은 예배당이나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적이고 하찮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을 멀리하여 써먹지 못하고 늘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신성모독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교회는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써먹으므로 초월자들이 된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월자 즉 신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의 핵심적 의미는 초월성입니다. 이 초월성의 기준은 바로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 세계에 대한 초월입니다. 초월이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 등의 속성이 내 것이 되고 내가 써먹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의 신성이 바로 3차원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3차원을 초월하는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신들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고 신성을 써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 3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신성모독입니다.
현재 지구는 신성모독의 경기장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누가 더 신성모독을 하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써먹지 않고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상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입니다. 초월자인 신이 되지 않으면 신성을 모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여하고 써먹으라고 신성을 제공하셨습니다. 이 신성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주로 모독하는 하나님의 신성이 어떤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신성모독이란 하나님께 참여하고 써먹으라고 제공하신 신성을 쓰지도 않고 참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주로 모독되는 하나님의 신성 중 첫 번째는 높으심의 속성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존재도 쫓아 갈 수 없는 높으심입니다. 흔히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표현하는 바와 같습니다. 높음에는 언제나 높음을 상징하거나 드러내는 표식이 붙어 다닙니다. 예를 들어 임금님은 보통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궁궐에서 삽니다. 궁궐은 임금님의 높으심을 상징하는 표시입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미국 대통령의 높음을 상징하는 곳은 백악관입니다. 민주주의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인권이 동등하다는 철학적 사고를 놓고 보자면 사람은 높고 낮음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영향력이나 조직의 힘을 놓고 보자면 지구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 대통령의 높음을 상징하는 장소가 바로 백악관입니다. 꼭 장소가 아니더라도 높음을 나타내는 표식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암행어사가 마패를 소지함으로써 신분의 높음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높으심은 4차원 천국 보좌로 상징됩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신성을 제공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높으심을 제공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는 곧 3차원보다 높이 있는 4차원 안에서도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살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제공받은 높으심의 속성을 써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높아지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본능은 3차원 세계 안에서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3차원을 초월한 높음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4차원 세계의 천국이 아닌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3차원이라는 낮은 등급을 초월해서 4차원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살게 하신 이유입니다. 3차원은 초월의 기준입니다. 3차원 안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고 발전하는 것은 인간의 과제가 아닙니다. 4차원을 향하지 않는다면 올라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높으심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높으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3차원에 갇혀서 성공하고 번영함으로 높아지리라.”고 여기는 삶의 태도야말로 신성모독인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이 계신 높은 자리까지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신성모독입니다. 더 이상 4차원의 높음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3차원으로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높이 계신 하나님께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높음을 좋아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높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으십니까? 그러나 나는 나대로 3차원의 세계에서 나만의 높음을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 신성모독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가 동물원에 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아빠에게 목마를 태워달라고 합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높음을 써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편 아빠를 의지하지 않고 “나도 빨리 키가 커서 아빠처럼 되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기에 오히려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태도는 신성모독이 됩니다.
주로 모독되는 하나님의 신성 중 두 번째는 있으심의 속성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있음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세상의 만물과 만인과 만사는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있음을 언제 어디서나 우선적으로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3차원의 세상에서 있게 된 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하나님보다도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세상 것들을 더 먼저 의식합니다. 이것이 신성모독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장님은 있게 된 존재입니다. 그 사장님을 지금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장님을 심장마비가 걸려 죽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설령 사장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진정한 있음을 느껴야 할 대상은 사장님이 아닌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의 의식은 언제나 있음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의식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의식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식을 주신 이유는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을 의식으로 붙잡게 하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붙잡아야 될 것은 있게 된 것들이 아닌 스스로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앞서 스스로 있음이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속성을 포착하는 용도로 의식을 써먹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있게 된 것들을 포착하는 용도로 의식을 써먹는다면 하나님이 제공하신 있음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내가 있는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있는 이유를 찾아야 있을 수 있습니다.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이에 대해 지난 시간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로 들었습니다.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한 로미오는 자살하였습니다.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 있음의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또 평생 일궈온 기업이 부도를 맞게 되자 자살한 사장님을 예로 들었던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장님에게는 평생 일궈온 기업이 있음의 이유였습니다. 그 기업이 없어지자 있어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기에 자살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될 이유를 찾는 것은 스스로 있지 않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있어야 될 이유를 찾으라고 허락해주신 기능이 바로 의식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에 내가 있는 이유를 외부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내가 있게 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입니다.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이 나를 있게 하셨다는 것만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있게 된 것들로부터 있음의 이유를 찾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있음의 이유로 삼고, 사장님이 기업을 있음의 이유로 삼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일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애인이나 일평생을 바쳐 일군 기업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있음을 느끼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스스로 유일하게 있음이신 하나님을 일상적으로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3차원을 초월해 4차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내가 있는 이유로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은 높으심이었습니다. 우리는 높은 곳을 향하려는 본능은 3차원이 아닌 4차원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높으심의 속성을 써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의 속성을 써먹어서 4차원을 향한 상태로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두 번째 속성은 있으심입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있으신 하나님을 내가 있는 이유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세 번째 속성이 거룩하심입니다. 거룩하심은 끊임없이 사람들로부터 모독되는 대표적인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거룩함이란 좋은 쪽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좋으심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만이 가장 좋으시다는 것이고 유일하게 좋으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좋음을 추구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적 좋음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좋으신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서 좋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돈이 좀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생각입니다.
평강이란 절대적으로 좋음을 추구하고 채워져서 만족함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강을 추구하고 채움을 필요로 하는 속성을 넣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속성으로 좋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젖혀둔 채 3차원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면 신성모독입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좋아하고, 줄리엣이 로미오를 좋아하는 것도 신성모독입니다. 사장님이 기업을 좋아하는 것도 신성모독입니다. 좋음을 느끼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신성모독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님이 목회를 좋아하는 것도 신성모독입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전도 왕이 되고 싶다는 욕심에서 전도를 한다면 그것도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은 절대적입니다. 3차원 세계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4차원 세계에 계신 하나님의 절대적 좋음 앞에서 휴지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좋음을 날마다 시시각각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신성모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성모독은 신성에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높으신 분이고 인간은 낮은 자들이기에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낮음에 머물러야 하고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셔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높이 계신 중에 낮은 곳에 있는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능력만을 보내주시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인간은 다른 이들보다 높아짐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높으신 것은 인간에게 자랑하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이름을 두신 이유는 3차원에 있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높으심을 주고 싶은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인간과의 관계에서 높으심의 속성을 가지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있게 하신 이유는 유일하게 있으신 당신의 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가지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영원하신 있음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속성을 제공하신 것입니다. 나 있음의 이유로 삼아야 될 것은 스스로 있으신 하나님이지 있게 된 세상의 것들이 아닙니다. 사장님을 의식하고, 배우자를 의식하고, 형제자매를 의식하고, 자녀와 부모를 의식하고, 경제 상황을 의식하고, 문제를 의식하고, 몸을 의식하면서 나 있음의 이유를 세상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나 있음의 이유를 찾고자 세상을 붙잡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붙잡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로미오에게 줄리엣은 있음의 이유였기에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장님에게 기업은 있음의 이유였기에 부도가 나자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있음을 느끼는 의식으로 3차원의 세상을 붙잡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거룩하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좋음으로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외에 다른 좋음을 찾고자 하는 것이 신성모독입니다.
높으심, 있으심, 거룩하심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수없이 모독되고 있는 하나님의 네 번째 속성은 주체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삼라만상의 유일한 주체이십니다.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시고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모든 인간은 오로지 주체적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을 받아서 사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인간의 주체성의 용도는 스스로 삶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일들에 대해 생각과 뜻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주체성을 우리에게 참여하고 써먹으라고 제공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재정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재정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주체성은 제공되고 있기에 써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정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고 뜻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뜻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서 써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써먹으므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지정의와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38절에서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뜻하고 계획하고 추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이걸 좀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입니다. 내가 해야 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써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 하나님의 있으심, 하나님의 좋으심으로서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주체이심을 완전히 써먹고 계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 신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으로 오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예수님께서는 4차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높으심과 있으심과 좋으심과 주체이심에 대해 100% 완벽하게 참여하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신이심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인간으로만 보아도 초월자이셨습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초월자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3차원을 초월하여 4차원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대표적 네 가지 속성에 참여하고 써먹을 때 3차원을 살면서도 4차원에 근거를 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이러한 초월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4~36절에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시편 82편 6절의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십자가를 통하여 모두가 다 초월자 신이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하나님의 높으심, 있으심, 좋으심, 주체이심과 관계하여 사람들이 3차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3차원에 갇혀있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때 3차원을 뚫고 나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높으심과 있으심과 좋으심과 주체이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3차원을 돌파한 초월자 신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3차원에 묶여있는 육체가 된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3차원과 4차원의 중간에 있습니다. 4차원의 신의 속성에 참여하면 신이 되고, 3차원의 육체에 속성에 참여하면 고깃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고깃덩어리가 되어 3차원에 갇힌 인간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면 높으심과 있으심과 좋으심과 주체이심인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써먹는 신들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써먹는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거룩한 분이라 가까이할 수 없는 분이라고 여기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표적 네 가지 신성을 우리에게 써먹으라고 허락해주셨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써먹는 사람이면서 신이 된 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몸이 어디에 살고 있든지 이러한 자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신들로서 오늘도 삶에 하나님의 신성이 끊임없이 나타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은혜의 계획안으로 들어가게 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이상 마음이 3차원에 갇혀있는 사람인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3차원을 돌파하여 초월하는 사람인 신들로서 여생을 살 수 있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올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남자나 여자라는 의식보다도 앞서 자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