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14중대 임철수
▪들어가는 말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여념이 없는 경제인의 주체적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국부(國富)의
증진과 생산력 향상이라는 자기가 예상치 못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라고 하였다. 육사 입교 50주년, 인생 70을 살면서 돌이켜 보건대 나의 인생
여정(旅程)에도 수 많은 사건과 전환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지극히 사소한
사건으로 인하여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순간이 있었다. 분명 국부론(國富論)의
‘보이지 않는 손’과는 차원이 다른 손(hand)이 작용을 한 것 같다.
▪왼쪽 눈가 상처와 치료
초등학교 2학년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시장에 다녀오신 부모님이 사탕 몇 개를
주셨다. 기분이 좋아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뛰어다니다가 어느 돌계단을 오르는
도중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면서 얼굴이 계단 모서리와 부딪쳤다. 눈에 번갯불이
나고 아픈 곳을 만져보니 피가 흘렀다. 손으로 아픈 곳을 누르면서 집으로 향했다.
우선 지혈(止血)을 하고 상처를 보니 왼쪽 눈썹 끝의 피부가 1cm × 3mm 정도의
넓이로 피부가 일어나 마치 혹처럼 보였다. 일단 지혈은 되었으니 안정을 찾았고
7남매 먹여 살리기 바쁜 부모님은 넷째 아들의 얼굴 상처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 해 12월쯤, 당시 농촌에서 남자 아이들은 주로 구슬치기, 비석치기,
자치기, 500년 된 은행나무 오르기 등을 하면서 놀았다. 그 날도 은행나무 아래
놀이터에서 5-6학년 형들의 자치기 놀이가 있었고 나는 또래들과 20여미터 앞, 약간
비켜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게임 도중 한명이 자치기를 공중으로 띄우고 막대기로
힘차게 휘돌렸다. 잠시 후 나는 비명을 질렀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필이면 자치기
막대가 날아와 내 눈을 맞힌 것이다. 피는 났지만 다행히 눈동자는 다치지 않고 봄에
다쳐 혹처럼 붙어있던 눈가 상처를 단 1mm의 좌우상하 편차없이 강타하여 깨끗하게
외과 수술을 한 것이었다. 눈가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참으로 로또 맞을 확률
만큼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으니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이다.
▪육사 입교 신체검사에서 극적인 합격
1971년 12월, 육사 1차 시험 합격자에 대한 신체검사 및 체력측정이 있었다.
신체검사 기준은 신장 162cm 이상, 시력 나안(裸眼) 0.6이상, 그리고 혈압이었다.
신장은 겨우 기준을 넘었고 시력, 혈압은 측정해 보지 않았으나 평소에 지장이
없었으니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시력 측정은 위생병 2명이 하였는데, 먼저
왼쪽 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을 측정하였는데 1.0이 나왔다. 다음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을 하는데 갑자기 잘 보이지 않고 순간 당황하여 눈을 비비며
아무리 보아도 오른쪽 만큼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측정을 하던 위생병이
0.4라고 한다. 그런데 기록하는 위생병이 내 얼굴을 보더니 0.6으로 기록하였다.
그 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느끼지 못하였다. 군생활을 마무리 하면서
되돌아 보니 그 순간이 나를 군인의 길로 인도하였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이었다.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였다고 믿는다.
▪직장 암(癌) 수술
2007년 10월, 1년 먼저 명예전역 후 2008년 10월 예정된 직장예비군연대장 시험을
준비하였지만 낙방하자 계획했던대로 용산 아모레퍼시픽 뒤편 골목에 전세를 구하여
학원을 열었고, 5년 동안 재미있고 보람을 느끼며 3개 학원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60세가 되던 2014년 12월 30일, 여의도 건강검진 센터에서 건강검진을 하였다.
다른 부분은 당연히 이상이 없을 것으로 믿었으나 위/장 내시경 검사는 지금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떨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의사가 검사를 위해
입안에 의료를 넣자마자 심한 구역질이 나는 반응을 보이니 자꾸 회피하게 되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건강 검진 때마다 내시경을 시도하였지만 의료기구가 입안에 닿는
순간 거부 반응이 나타나 더 이상 진행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만은 더 이상
회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면(睡眠) 내시경 검사를 신청하고 진행하였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종합판정을 받는데 의사가 장내시경 화면을 보면서 설명하는데
어느 순간 깜짝 놀랐다. 동굴 같은 대장(大腸) 벽면에 직경 3cm 되는 종양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별도의 조직검사를 할 것도 없이 악성 종양 흔적이었다.
순간 멍~ 하였다. 암(癌)은 다른 사람한테만 오고 나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암 환자가 되다니..... 의사는 강북삼성병원을 소개하여 주고 즉시
병원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절차에 따라 조직검사를 하고 이튿날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직장암 3기로 판정되었다. 다행히 직장(直腸)에만 퍼져 있었고 전이 1순위
폐, 간(肝)에 전이되기 직전이었다. 2주 후 2015년 1월12일 09시, 동기 기독신우
회원들의 기도를 받고 수술실로 들어갔고 5시간 만에 수술을 마치고 의식을
회복하였다. 직장(直腸)은 대장(큰창자) 맨 끝에 있으며 항문과 연결된 15cm 길이의
장(腸)으로서 수시로 생성되는 대변을 저장하는 댐 역할을 하다가 가득차게 되면
배설하는 곳이다. 장(腸) 수술은 종양을 중심으로 상하 각 10cm 총 20cm를 잘라
내는데 종양의 위치가 항문에서 10cm 이내에 있으면 항문까지 제거함으로써
정상적인 배설을 할 수 없게 되고 몸 밖으로 배설주머니를 차게되는 최악의 상황이
오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 종양 위치가 위에 있어 항문을 살렸다.
수술 후 항암치료(방사선, 약물)를 받고 그 해 10월 후반기 시험까지 준비시키고
건강회복을 위하여 학원운영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5년 동안 1년에 두 번 병원에 가서
7월에는 CT촬영, 12월에는 대장 수면내시경 검사를 하였는데 깨끗하였다.
올해는 수술 8년차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암(癌)투병이라는 위험한 상황을 경험
하였지만 폐와 간에 전이되지 않아 수술과 치료를 단순하게 하였고, 종양위치가
직장(直腸) 윗부분에 있어 항문을 살린 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였다고
믿는다.
▪손자 입양(入養)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사당동 총신대를 나와 현재 군종목사로 복무하고
있다. 큰아들이 결혼 후 이듬 해 3월이 출산 예정이었다. 그런데 8개월째 되는
어느 날 며느리가 갑자기 혈압이 300을 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였다. 즉시
병원에 입원하여 안정 시킨 후 1주일 만에 퇴원하였다. 약 3주 후 9개월이 되었는데
다시 같은 상황이 발생하여 병원에 갔더니 수술해서 아기를 꺼내자고 한다.
다른 방법이 없어 아기를 꺼내보니 체중 1.7kg의 미숙아(未熟兒)였다.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가보니 인큐베이터에 있는데 머리만 멀쩡하고 참으로 보기에
민망하여 충격과 함께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마저 들었다.
3주 후 체중 2kg을 만들어 퇴원하였으나 1년 동안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첫돌을
지나니 정상적인 발육을 하게 되었다. 손자가 4살이 되었을 때 조심스럽게 둘째
아기에 대하여 물었더니 아들, 며느리 모두 대답을 하지 않았고 우리도 큰손자 출산
때 받은 충격과 두려움이 있어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자의 상태를
보니 너무 내성적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도 접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친화력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 부부는 기도하면서 입양을 권유하기로 결정하고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하였다. “ 아이 성격을 보니 너무 내성적이어서 혼자 자라게
되면 인격형성과 사회성에 문제가 있을 것 같으니 입양을 하여 동생을 만들어
주는게 어떻겠니? 산모의 건강상 출산할 수 없지만 다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니 우리가 기르면 우리 자식이 되는 것 아니냐? 우리가 크리스챤 가정이고
목사로서 어렵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한번 실천해 보자“고 하였더니 즉답은 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약 6개월이 지난 후 입양을 하겠다고 하였다.
고마웠다. 아무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입양하기를 원해도 양육 당사자들의 결심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홀트복지회에 입양 신청을 하였고 여러 절차를 \
거친 후 2012년 5월에 25개월 되는 남자 아이를 입양(入養)하였다.
입양 후 6개월간 적응기간을 거쳐 호적에 올렸는데 원래 이름을 버리고 큰손자와의
형제 관계임을 나타내고자 이름 가운데를 돌림 자(字)로 하여 새로 지었다. 지금은
입양기관에서 입양 사실을 숨기지 말고 어려서부터 알려 주어 충격을 완화시켜
주라고 하기 때문에 어린이 집 시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주고 있으며 본인도 알고 있지만 아무런 부작용없이 같은 부모에서 태어난
형제처럼 잘 지내고 있다. 우리 가정에 아기 천사 둘째 손자를 보내 주신 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었다.
▪맺음 말
내 고향은 충남 연기군 남면, 지금의 세종시인데 초등학교 1학년쯤 우리 동네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갈 곳없던 시골아이들 대부분 사탕주고 노래 가르쳐주고
이야기 들려주는 교회에 다녔다. 점점 성장하면서 교회에서 멀어졌지만 어쩐지
나는 교회생활이 재미있었고 거의 빠지지 않고 다녔다. 생도 시절에는 놀기
바빠서 열정이 식었지만 대대장 할 때까지 그래도 기회만 되면 예배 참석을
하였으며, 1990년 계룡대 근무하면서부터 담배도 끊고 새벽기도하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게되었다. 그 이후 내 생활의 중심은 부대, 집, 교회 세군데로 집중
되었다. 그리고, 군생활을 마치고 예비군지휘관 학원 운영과 직장암 투병 등을
거치면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성경을 읽으면서 소중한
결론을 얻게 되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잠언 16장 9절) |
앞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보통사람이 생각할 때는 “우연 또는 운(運)이 좋아서”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나는 인생 70의 여정(旅程)
에서 중요한 순간에 작용한 ‘보이지 않는 손’은 운(運)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라고 확신한다. 즉,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군생활과 전역 후의 생활 가운데
수 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언제나 지켜주셨으며, 장로로서
교회활동과 군선교 사역 중에 밝은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동기생 모두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하며
기념문집 작업에 수고하시는 동기회장님과 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임철수 동기의
깊은 영성속에서 살아온 모습과 현재의 삶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Invisible Hand, 임철수동기의 귀한 신앙간증문이군요,
후반기의 남은 삶 동안도 보이지않는 그분의 크신은혜와 평강 안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
In His love/grace
제주에서, 신 동 택
늦게 읽고 늦게 댓글을 씁니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임철수 장로님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직장암 판정을 받았을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지 짐작이 가네요. 모임이 있을 때 자주 화장실에 갈때 임장로님을 위해서 기도를 하기도 했고. 요즘은 더 건강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임장로님을 인도하여 주시고 입양한 손자도 아무 티없이 잘 크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임장로를 이끌어 온 '보이지 않는 손'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깊은 신앙심에 존경을 표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 기본에 사랑과 은혜, 믿음과 소망이 있음을 글에서 느낍니다.
제목도 잘 잡았어요. 글의 전개도 훌륭합니다.
아드님도 군종목회자로 더 큰 뜻을 펼치기를 기도하며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는 모든 분들이
주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감히 말할수 없는 아름다운 삶을 누리시는 철수, 철수, 임철수 동기에게서 하나님의 크고도 넓고도 깊은 사랑을 봅니다. Way maker, miracle worker, and promise keeper 이신 하나님이 친구와 항상 함께하시네요!